최충은 고려 문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다.
호는 문헌이다.
984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최충은
스무 살이 넘도록 학문 연구에 힘썼다.
선비들이 최충에게 물어 보았다.
"자네는 왜 과거를 보지 않나?"
"나는 과거에 합격하려고 공부하지 않았소.
학자가 되어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오."
최충은 벼슬에 마음에 없었다.
☆☆☆
아버지 최촌이 어느 날 최충을 불러 놓고 말했다.
"반드시 벼슬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네 실력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라도 과거를 한 번쯤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느냐?"
비로소 최충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22살 때 문과를 보아 장원급제하였다.
물론, 최충은 장원을 하였어도 벼슬길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두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이 있은 뒤에야 최충은 지금까지의 고집을 꺾고 벼슬길에 나갔다.
현종은 최충에게 국사 수천관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겼다.
최충은 최항, 황주량 등과 역사를 꾸몄다.
그러나 실록 편찬은 거란의 3차 침입으로 중단되었다가,
강감찬이 귀주 대첩을 거둔 뒤에 다시 시작되었다.
실록 편찬 사업은 무려 19년이나 걸려서
최충의 나이 49살 때인1032년 (덕종 1년)에야 완성을 보았다.
이것이 바로 <7대 실록>으로 모두 36권이다.
벼슬이 자꾸 높아졌던 최충은 50살 때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최충은 무엇보다도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덕종에게 북쪽 변방에 성을 쌓으라고 하였다.
덕종은 유소로 하여금 북쪽 변방에 성을 쌓으라고 명했다.
유소는 압록강 어귀의 의주 지방에서부터 성을 쌓아 나갔다.
이것이 고려 시대에 이루어진 '천리장성'의 시작이었다.
천리장성은 1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또한, 최충은 벼슬아치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준칙을 마련했다.
최충은 한(漢)나라의 유향이 지은 <설원>에서 '6정 6사'를 간추렸다.
6정은 6종류의 착한 벼슬아치이고, 6사는 6종류의 악한 벼슬아치다.
그것을 살펴보면,
☞ 6정 : 1. 인격이 뛰어난 자 2. 마음이 어진 자 3. 충성스러운 자
4. 슬기로운 자 5. 마음이 곧은 자 6. 성격이 강한 자
6사 : 1. 마음이 비뚤어진 자 2. 무능한 자 3. 아부하는 자
4. 고자질하는 자 4. 간사한 자 6. 반역하는 자
최충은 '6조의 영'(법을 어긴 벼슬아치들을 처벌하기 위해 만듬)도 정했다.
☞ 그 여섯 가지란
1. 권력을 믿고 날뛰는 자 2. 무고한 백성을 괴롭히는 자
3. 상과 벌을 정당하게 행하지 않는 자 4.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자
5. 자식들의 출세를 청탁하는 자 6. 나라의 재물을 축내거나 훔치는 자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 잡은 최충은 그 공으로 형부 상서, 중추사가 되었다.
또, 정종 때에는 과거를 맡아보는 고시관인 '지공거'가 되어 직접 올바른 관리를 뽑는 일에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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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은 또 실록 편찬에 손대어 <현종 실록>을 펴냈다.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은 최충을 오늘날 국무총리격인 '문하시중'에 앉혔다.
문종은 유학을 장려하였으므로 학문이 발달하였다.
최충은 국경 지방이 어수선해지자,
도병마사라는 직책도 겸하여 나라 안의 정치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부터 나라 안을 보호하는 책임까지 맡았다.
☆☆☆
나이 72살이 된 최충은 너무 늙어서 벼슬을 내놓았다.
최충의 집은 개경 송악산 아래 자하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최충은 사랑방에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가르쳤다.
이 소문을 들은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최충 선생께 글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참된 사람이 되고, 과거에 급제하여 훌륭한 관리가 될 수 있다!"
이제 최충의 사랑방만으로는 젊은이들을 가르칠 수가 없었다.
최충은 자기 재산을 털어서 새 학당을 지어 여러 개의 방을 만들었다.
이 학당에는 9개의 재(교실)가 있었는데,
낙성재·대중재·성명재·경업재·조도재·솔성재·진덕재·대화재·대빙재가 그것이다.
9재의 가르침은 각각 과목이 달랐다.
9재 학당에 입학하면, 맨 처음에는 낙성재에서 예, 악, 사, 어, 서, 수의 육예를 닦았다.
그 다음 차례로 각 재에서 배워 나가다가 마지막으로 대빙재에서 끝나게 된다.
과거에 합격하고도 아직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선비들이 9재 학당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여기에서 배운 학생들을 가리켜 '최공도' 또는 '최충도'라 하여 매우 우러렀다.
9재 학당의 교육 목적은 인격을 다듬고 덕망을 쌓는 데 두었다.
과거 시험 준비는 그 다음이었다.
이 9재 학당이 우리 나라 최초의 사립 학교다.
최충의 9재 학당을 본뜬 학당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
그 중, 개경에서 손꼽히는 학당은 9재 학당을 비롯하여 11개나 되었는데,
이것을 통틀어 '12공도'라 불렀다.
최충에 이어 학교를 세운 사람들은 모두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덕망 높은 유학자들이었다.
12공도로써 고려의 학문은 크게 꽃피웠다.
<고려사>에는 이런 글귀가 실려 있다.
최충은 가히 공자(孔子)와 견줄 만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