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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집(遜齋集) 박광일(朴光一)생년1655년(효종 6)몰년1723년(경종 3)자사원(士元)호손재(遜齋)본관순천(順天)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의 문인. 권상하(權尙夏) 등과 교유
遜齋先生文集卷之八 / 墓誌 / 贈兵曹參判李公墓誌銘 *李容濟 (1565~1597)
李容濟 | 1565 | 1597 | 全義 | 汝優 | 後凋堂 |
公諱容濟字汝優。姓李氏。全義人。高麗太師三重大匡翊贊二等功臣棹之後。匡靖大夫大提學號藝齋諡文義公彦冲之九世孫而三重大匡全城君思義。於公爲七世祖也。曾祖文習讀諱永祥。祖通禮院左通禮啓功郞諱壽宗。考贈戶曹參議成均進士諱曇。妣梁氏副正澄之女。公生於嘉靖乙丑。天資純美。早通書史。披歷諸家。覽輒成誦。厚積薄發。期以立揚矣。自進士公卽世之後。絶念於名途。於葩山之北。結茅堂三數間。扁以後凋。倘佯於蒼松翠竹之間。以慈訓僶勉赴試而累見屈。乃曰得失有數。不當關念。而但未副萱堂之望。人子之心。不得不慨然。悅親何間於文武。遂投筆萬曆辛卯登武科。時年二十七。除宣傳官兼備邊郞。以巡邊事。往來耽羅。除司憲府監察。又遷軍器寺副正。俄出宰興德縣。興是弊縣。民無安土之意。公下車以來。束吏以嚴。撫民以寬。邑人賴以蘇息。丁酉之亂。本道兵使李福男與一隊天兵。留鎭龍城。以遏賊勢。自錦山,晉陽陷敗之後。義士名將殆無存者。援兵不至。賊勢日急。主將謂天將曰。今日之事。無可奈何。道內守宰中惟興德縣監李某才兼文武。緩急可恃也。雖以所職方爲水戰備。然當此危急之際。非此人無可與計事者。可令趁速上來。於是一邊馳啓於朝。一邊傳令於興城。公深感主將辭意之懇懇。顧謂左右曰。吾於今日。已决一死。治艦水戰。是我死所。而今龍城朝暮且陷。事急矣。一死何擇於水陸。卽以上舍柳賢男爲留鎭官。卽馳赴龍城。謂其長子廷楗曰。汝勿以父死戰塲傷毁。善護汝母及稚弟。避兵圖生。以全門戶可也。廷楗年才十一。挽衣號泣。不忍拜訣。公復慰喩之曰。賊亡則吾當不死。父子相見。豈無日耶。公卽日倍道直抵龍城。主將見而握手。相與圖議禦寇之策。幕中羣僚倚以爲重。時天兵之能於釖術者。乘月出沒。潛入賊營。殺傷甚衆。賊窺
其出入之門。翌日夜半。潛伏要候。引去稍遠。乃使一枝兵長驅入城。有若奔霆走雷。勢不可遏。公與所帶通引吸唱。置釖於坐側。擬决一死。軍官金城特公之里人也。疾入帳中呼公曰。事已至此。徒死無益。願公姑避凶鋒。以圖後功。公笑曰見賊而退。無勇也。不死於國。非忠也。吾棄此城何歸。汝速出避。幸而不死。以吾今日之事。歸告於吾家。仍以一小絶贈之。成特於蒼黃奔避之中。遺失其小紙。口傳首句曰。男兒殉國志。三尺玉龍知。其下句則不能傳。城陷日。乃八月十六日也。公與主將抆血相視而同死焉。享年三十有三。夫人羅氏携諸子避兵於黃海之白川地。聞龍城之陷。日夜號哭。幾不能自全矣。平亂後卽到龍城。尋公之屍。則戰骨如山。不可識別。終未收遺骸。招魂而歸。以城陷日爲忌日。夫人主簿羅士揚之女。生四男。長廷楗府尹。次廷樑。次廷楯將仕郞。次廷棟。孫男煥,㷽長房出。爕仲房出。再承季房出。內外曾玄甚衆。仁廟朝以子廷楗貴贈兵曹參判。公豪爽俊邁。志氣激勵。忠臣義士之肝膽。夫何殉國壯節。見漏於記實之籍。而獨未蒙褒忠奬節之恩典歟。如都揔府都事鄭敏得以閑散居在咸平地。亦於當時聞龍城之急。冒亂赴鬪而死。其所帶軍官鄭大男每言公一死已定。苟活非我志之言。輒流涕云云。以遐鄕文獻之不足。而泯沒其忠節。鄕人至今寃之。興城之先生案懸錄昭昭。興人擧皆稱嗟。以至于今。而至於聞官。請其啓聞于朝。則有其實而終不可掩有如是夫。又於興衙後竪一石。詳記公戰亡實蹟。而縣之老吏以古有而今無爲言。然人口豐碑。不止於數尺之崇。則石之有無。又何論焉。噫。久闕褒典。固無少損於公。而其在激勸之道。不能無歉。世之尙節慕義之君子。亦豈無慨然於斯者耶。公之玄孫慶蒔袖其行蹟一通來示余。請爲文以誌其墓。辭不獲。遂考諸家藏而叙之。納之幽堂而銘之曰。湖南一域。正氣所聚。惟高霽峯。曁倡義使。壯節貞忠。秋天烈日。餘外殉國。指不勝屈。普施褒典。乃爵乃享。公獨如何。有聲無響。公何憾焉。瞑目泉壤。
손재집 제8권 / 묘지(墓誌) / 증 병조 참판 이공 묘지명〔贈兵曹參判李公墓誌銘〕
공의 휘는 용제(容濟)이고, 자는 여우(汝優)이며, 성은 이씨(李氏)로,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고려(高麗) 태사(太師) 삼중대광(三重大匡) 익찬(翊贊) 2등 공신 도(棹)의 후손이며, 광정대부(匡靖大夫) 대제학으로 호는 예재(藝齋), 시호 문의공(文義公)인 언충(彦冲)의 9세손이고, 삼중대광(三重大匡) 전성군(全城君) 사의(思義)는 공의 7대조이다. 증조는 승문원 습독관(承文院習讀官) 휘 영상(永祥)이다. 조부는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 계공랑 휘 수종(壽宗)이다. 아버지는 증 호조 참의 성균관 진사 휘 담(曇)이다. 어머니는 양씨(梁氏)로, 부정(副正) 양징(梁澄)의 딸이다.
공은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을축년(1565, 명종20)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일찍 경서와 사서에 통달하였고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하였다. 책을 보면 바로 외웠고 두텁게 축적하고 조금만 드러내어 입신양명을 기대하였다.
진사공이 세상을 뜬 뒤 벼슬길에 마음을 끊고, 파산(葩山) 북쪽에 띠집 두세 칸을 엮고 ‘후조(後凋)’라고 편액을 건 뒤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 사이를 소요하였다. 어머니 말씀에 따라 마지못해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누차 실패하자, “급제 여부는 운수에 달렸으니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 다만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으니, 자식 된 마음에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데 문과든 무과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문과 준비를 그만두고 만력(萬曆) 신묘년(1591, 선조2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27세였는데, 선전관 겸 비변사낭청(備邊司郞廳)에 제수되어 변방을 순시하기 위하여 탐라를 왕래하였다.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가 또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으로 옮겼고, 얼마 후 흥덕 현감(興德縣監)으로 나갔다. 흥덕은 피폐한 고을로, 백성들은 사는 곳을 편안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다. 공이 부임한 이래 아전을 엄하게 단속하고 백성들을 관대하게 위무하니, 고을 사람들이 그에 힘입어 소생하였다.
정유재란 때, 전라도 병사 이복남(李福男)이 한 무리의 명나라 군대와 용성(龍城 남원의 옛 이름)에 머물러 진을 치고 적세(敵勢)를 막았다. 금산(錦山)과 진양(晉陽)에서 패배하여 함락된 뒤, 의사(義士)와 명장이 거의 살아남지 못한 상황에서 구원병은 도착하지 않고 적세는 날로 위급하였다. 주장(主將)이 명나라 장수에게 “오늘 일은 어쩔 도리가 없다. 도내 수령 중에 오직 흥덕 현감 이모(李某)가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하였으니, 위태로운 상황에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직무상 지금 수전(水戰)에 대비하고 있다지만, 지금처럼 위급할 때에는 이 사람이 아니면 함께 일을 도모할 사람이 없으니, 속히 올라오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한편으로는 조정에 급히 장계를 올리고 한편으로는 흥성(興城)에 명령을 전하였다.
공이 주장의 말뜻이 간절한 데 깊이 감동하여 좌우를 돌아보며 “내가 오늘 이미 한번 죽기로 결심하였으니, 전함을 수리하여 수전을 치르는 것이 내가 죽을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용성이 조만간 장차 함락되게 생겨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한번 죽는데 어찌 육지와 바다를 가리겠는가.”라고 하였다. 곧장 상사(上舍) 유현남(柳賢男)을 유진관(留鎭官)으로 삼고 곧장 용성으로 달려갔다.
장남 정건(廷楗)에게 “너는 아비가 전쟁터에서 죽었다고 상심하지 말고, 네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잘 보호하여 병란을 피해 살아남아 가문을 보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건은 나이가 겨우 11세였는데 옷자락을 붙들고 울며 차마 결별하지 못하였다. 공이 다시 타이르기를 “적군이 패망하면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니, 어찌 부자가 만날 날이 없겠느냐.”라고 하였다.
공은 즉시 길을 곱절로 달려 곧장 용성에 닿았다. 주장이 보고 손을 잡고 서로 왜적을 막을 대책을 강구하였는데, 진중의 막료들이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다. 당시 명나라 군사 중 칼솜씨가 뛰어난 자들이 밤을 틈타 출몰하면서 적진에 몰래 들어가 매우 많은 적을 죽였다. 왜적은 그들이 출입하는 문을 엿보고 있다가 다음 날 밤중에 잠복하여 기다리다가 꽤 멀리 군대를 이끌고 가자 이윽고 일군의 군사를 몰아 성으로 침입하게 하였는데 천둥과 번개가 치달리는 듯하여 막을 수 없는 형세였다.
공은 데리고 다니는 통인(通引 수령 심부름하는 아전), 급창(吸唱 지방 관아의 하인)과 함께 자리 옆에 칼을 놓고 결사 항전할 생각이었다. 군관 김성특(金城特)은 공과 같은 마을 사람이었는데, 급히 장막으로 들어와 공을 부르면서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헛되이 죽는 것은 무익합니다. 공께서는 일단 흉적의 예봉을 피했다가 훗날 공로를 기약하십시오.”라고 했다.
공이 웃으면서 “적을 보고 후퇴하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고, 나라를 위해 죽지 않는 것은 충성이 아니다. 내가 이 성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너는 빨리 나가 피하고, 다행히 죽지 않거든 오늘 나의 일을 우리 집에 가서 알려 달라.”라고 했다. 이어 짧은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었으나 김성특이 창황히 도망치는 중에 그 종이쪽지를 잃어버려 첫 구만 입으로 전해 주었는데,
남아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뜻 / 男兒殉國志
삼 척의 옥룡이 알리라 / 三尺玉龍知
라고 하였고, 그 아래 구는 전하지 못하였다.
성이 함락되던 날은 바로 8월 16일이었다. 공은 주장과 함께 피를 뿌리며 마주 보고 죽었다. 향년 33세였다. 부인 나씨(羅氏)는 자식들을 데리고 황해도 배천(白川) 땅으로 병란을 피했다가, 용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통곡하여 거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왜란이 평정된 뒤 곧장 용성에 도착하여 공의 시신을 찾았으나, 전사자의 유골이 산처럼 쌓여 있어 식별할 수가 없어서 결국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고 초혼(招魂)한 뒤 돌아와 성이 함락되던 날을 기일(忌日)로 삼았다.
부인은 주부(主簿) 나사양(羅士揚)의 딸로, 아들 넷을 낳았다. 장남은 정건으로, 부윤(府尹)이다. 차남은 정량(廷樑)이고, 다음은 정순으로 장사랑(將仕郞 문관 종9품 관품)이며, 다음은 정동(廷棟)이다. 손자가 있는데, 환(煥)과 선(㷽)은 장방(長房 장남) 소생이고, 섭(爕)은 중방(仲房) 소생이며, 재승(再承)은 계방(季房) 소생이다. 내외 증손과 현손이 매우 많다.
인조 때 아들 정건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에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공은 호걸의 기상과 준수한 인물로, 지기(志氣)는 충신과 의사들의 간담을 격동시켰는데, 어찌 순국한 장렬한 절개가 사실을 기록한 문서에 누락되어 충신을 상 주고 절개를 장려하는 은전을 홀로 여태 입지 못하였는가. 도총부 도사 정민득(鄭敏得)은 산직(散職)으로 함평에 살고 있다가, 또한 당시 용성의 위급함을 듣고 전란을 무릅쓰고 달려가 싸우다가 죽었다. 데리고 간 군관 정대남(鄭大男)은 “한번 죽기로 이미 마음을 정하였고, 구차하게 사는 것은 내 뜻이 아니다.”라고 했던 공의 말을 매번 말하면서, 그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외진 고을에 문헌(文獻)이 부족하여 그 충절이 사라지고 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원통해하고 있다.
흥성의 선생안(先生案)에 기록으로 올라 있는 것이 밝고 분명하여 흥덕 사람들이 모두 지금까지 칭찬하고 있고, 심지어 관청에 알리고 조정에 계문(啓聞)하기를 청하였으니, 그 사실이 엄연히 있으므로 이처럼 끝내 덮을 수 없다. 또 흥덕 관아 뒤에 비석 하나를 세워 공이 전쟁에서 사망한 실제 행적을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흥덕현의 늙은 아전들이 예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말로 전하는 칭송이 수 척 비석의 존숭에 그치지 않으니, 비석이 있고 없고를 또 어찌 따지겠는가.
아, 오래도록 포상하는 은전에 빠진 것은 진실로 공에게 아무런 손해도 없지만, 격려하고 권장하는 도리에서는 부족함이 없을 수 없다. 절개를 숭상하고 의리를 사모하는 세상의 군자라면 또 어찌 이런 현실에 대해 개탄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공의 현손 경시(慶蒔)가 공의 행적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묘지(墓誌)로 쓸 글을 청하였는데, 사양할 수 없어서 결국 집안에 보관하던 기록을 살펴보고 글을 써서 무덤에 넣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호남 한 지역은 / 湖南一域
정기가 모인 곳 / 正氣所聚
고제봉과 함께 / 惟高霽峯
창의사가 계시니 / 曁倡義使
장한 절개 바른 충심 / 壯節貞忠
가을 하늘 타는 태양이로다 / 秋天烈日
그 밖에 순국한 분 / 餘外殉國
이루 셀 수 없나니 / 指不勝屈
널리 포상하는 은전으로 / 普施褒典
작위 내리고 제사 지냈도다 / 乃爵乃享
공 홀로 어찌하여 / 公獨如何
명성은 있는데 메아리가 없었는가 / 有聲無響
공이 어찌 유감스러워 하리 / 公何憾焉
황천에서 편히 눈 감고 계시리라 / 瞑目泉壤
[주-D001] 후조(後凋) : 난세에 지조를 지키며 산다는 뜻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에 시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하였다.[주-D002] 옥룡 : 칼의 별칭이다. 이용제가 차고 다닌 칼이다.[주-D003] 인조 …… 때문에 : 이용제의 아들 이정건이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지냈다. 《국역 인조실록 17년 1월 26일》[주-D004] 문헌(文獻) : 문은 기록 자료를 말하고, 헌은 전해 줄 인물을 말한다. 《논어》 〈팔일(八佾)〉에 공자가 “하나라 예를 내가 말할 수는 있지만 기나라에서 증거 자료를 찾기가 어렵고, 은나라 예를 내가 말할 수는 있지만 송나라에서 증거 자료를 찾기가 어렵다. 이는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문헌만 충분하다면 내가 실증할 수가 있다.[夏禮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라고 했다. 문헌에 대해서 주희(朱熹)는 “문은 전적을 가리키고, 헌은 현인을 가리킨다.[文, 典籍也; 獻, 賢也.]”라고 풀었다.[주-D005]
창의사 :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을 말한다. 김덕령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수(景樹)이다.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의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1596년(선조29)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킨 뒤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 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체포되었다. 정탁(鄭琢)ㆍ김응남(金應南) 등이 그의 무고를 힘써 변명했으나 20일 동안에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30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국역 선조실록 29년 8월 4일, 8일, 23일》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황교은 오항녕 유영봉 (공역) |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