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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12.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다음에, 너희가 이 산 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출3:11,12)
11 But Moses said to God, “I am nobody. How can I go to the king and bring the Israelites out of Egypt?”
12 God answered, “I will be with you, and when you bring the people out of Egypt, you will worship me on this mountain. That will be the proof that I have sent you.”
모세는 40년 전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 때 그는 왕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애굽 군인을 한주먹에 눕혀버렸습니다.
그는 그 때 죽음을 각오하고 제 민족을 구하려는 비젼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일로 애굽을 떠나 미디안으로 도망갔습니다.
그가 그의 동포를 위해서 한 것은 한 명의 애굽 군인을 죽인 것입니다.
그는 미디안 땅에서 80 노인이 되었습니다.
여느 날처럼 그는 지팡이를 의지하며 산에 올랐습니다.
시내산 언덕 너머로 구름이 흘렀습니다.
양들은 언덕에서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이글거리며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러 갔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곧바로
11. 제가 무엇이라고,
11 I am nobody.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모세는 “내가 누구입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런데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도 혹시 그 불붙은 떨기나무를 보신 적이 없습니까?
지팡이를 의지하며 산 위를 올라서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나는 누구냐고 반문하신 적이 없습니까?
이 어두움의 세상은 바로 그 사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모세처럼 극적인 사람이 또 어디에 있을까?
모세가 태어날 즈음입니다.
바로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내아이를 낳으면 죽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세상에 나와서 숨 몇 번 쉬어보고 제 아버지의 손에 죽을 처지였습니다.
물론 아무리 절대왕의 명령이라 해도 그 법을 순전히 따를 부모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칼 들고 감시하는 독재자의 눈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 아기는 10 개월 동안 어머니의 피와 살이었다가 어머니의 생명과 맞바꾸려는 산고를 치르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3개월이 되어갈 즈음에 그 핏덩이를 위해 아버지는 갈대 바구니를 만들었습니다.
이 갈대 상자는 물 따라 흘러갈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수없이 부르며 그 상자를 홍해로 띄워 보냈습니다.
대답이 없으신 하나님!
자신의 핏덩이가 젖을 찾아 울다가 태양빛에 말라 미라가 되든지 물고기 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갓난아기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를 구원한 사람은 바로의 딸이었습니다.
이 공주는 이 어린아이에게 향한 연민의 정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왕궁에서 유모를 채용했습니다.
모세의 진짜 엄마가 제 자식을 젖먹이는 유모가 된 것입니다.
그 수고비를 받으면서.......
하지만 이유식이 시작되자 모세의 어머니는 더 이상 모세를 안아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는 궁중에서 해고 되었습니다.
모세는 공주를 제 어머니로 부르면서 자라났습니다.
원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공주는 모세에게 너는 홍해에서 주워 온 아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는 왕궁의 왕자였지만 그 안에는 노예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습니다.
모세에게는 생명이 죽음의 징조였으며 사랑이 원수였습니다.
그의 갈등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잠 못 이루던 밤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주먹을 휘둘러 애굽 군인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그의 갈등은 사라졌지만 그는 수배자가 되었고 미디안으로 도망했습니다.
그 때가 40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의 이 무모한 선택을 대단히 가치 있게 평가했습니다.
23. 모세가 태어났을 때에, 믿음으로 그 부모는, 석 달 동안 아기를 숨겼습니다. 그들은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습니다.
25. 오히려 그는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26.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장차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27. 믿음으로 그는,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견디어 냈습니다.(히11:23-27)
이런 평가는 그가 민족과 하나님을 위해 그의 세상 생명을 담보로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그는 만사형통의 반대 현실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는 왕자에서 범죄자가 되어 도망 다녔습니다.
그는 그 선택으로 인해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그의 백성을 구하겠다던 푸른 꿈은 이 나그네의 삶에서 40년 내내 푹푹 썩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형태조차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40 세의 힘찬 근육은 사라지고 이제 지팡이를 의지하는 80세 노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뜬금없이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40년 전의 그 꿈 이야기를 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40세의 청년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는 지금 벽에 똥칠하고 있을 나이입니다.”
그는 미디안 땅에서 40년 동안 자신의 한계를 냉정하게 확인했던 것입니다.
확신컨대 그는 40년 전에 큰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주먹 한 방으로 애굽 군인을 쓰러뜨리고는 그 일을 대단한 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감히 바로에게 가서”
절대왕 바로는 누구인가?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이 바로를 경험했습니다.
그의 말 한 마디가 떨어지자 이스라엘의 모든 가장이 갈대상자를 만들었습니다.
그것들이 홍해를 둥둥 떠다녔습니다.
집집마다 신음처럼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 바로의 말 한 마디에 모세는 애굽의 공주를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 바로 때문에 수배자가 되어 40년을 먼 땅에서 도망 다녔습니다.
절대자 바로 한 사람으로 인해서 그의 인생의 색깔이 결정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세를 보고 바로 앞에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80 노인 그 앞에 바로의 성문이 열릴까?
그 성문 앞에서 모세를 제대로 알아본 문지기가 창을 들어 모세를 그대로 찔러 죽일 수 있습니다.
바로 왕에게 무엇을 요구한다는 말인가!
바로가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노예들을 호락호락 보내줄 리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40세의 모세는 밤을 지세우면서 고민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 보장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인가?
왕의 보좌냐 죽음이냐?
그는 애급 군인의 군화발에서 그의 동족을 구해냈습니다.
그는 그 일로 동족들에게 박수를 받을 줄 알았습니다.
다음 날에는 우리끼리는 서로 싸우지 말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그 동족의 입에서 “애굽 군인을 죽였던 그 주먹으로 이제는 나를 죽일 참이냐!”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모세는 그 소리에 미디안으로 도망쳤던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보다 그의 동족을 더 무서워했습니다.
1. 그러나 모세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저의 말을 듣지 않고 '주께서는 너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 하면 어찌합니까?"(출4:1)
그의 백성들은 흙벽돌을 만들며 애굽 군인들에게 400년 동안 회초리질 당했습니다.
저녁마다 등짝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면서 바로의 실재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바로에게는 회초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창도 있고 칼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다는데 이 독재자의 폭력이 난무하는가!
또 의심하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이 늙은 모세가 그 하나님의 붙들림을 받은 것이 맞느냐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보기에 이 늙은 모세는 하나님께서 붙드실 바로 그 사람이 아닐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40세의 청년보다는 80세의 늙은이를 그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2.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12 God answered, “I will be with you,”
이 말씀을 외우시기 바랍니다.
12.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12 “I will be with you,”
모세조차 그랬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말씀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예를 들자면 이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미친 파도 때문에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자신이 이 미친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미친 바다에서는 내가 빠져 죽을 존재라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자신은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그의 귀에 “오라”는 주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는 물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미친 바다 위에서 전혀 다른 나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돛대를 붙들고 밀려오는 파도를 저항했던 내가 물 위를 걷는 나를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지팡이에 의지하면서 산에 오른 80세의 노인은 미친 바다 위를 걷는 자신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에게 전했을 때 바로는 대놓고 하나님을 비웃었습니다.
1. 그 뒤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하셨습니다."
2. 그러나 바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주가 누구인데, 나더러 그의 말을 듣고서, 이스라엘을 보내라는 것이냐? 나는 주를 알지도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도 않겠다."(출5:1,2)
모세가 바로에게 “내 백성을 내보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더니 바로는 그 말을 일하기 싫어서 하는 수작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벽돌 만들 재료도 챙겨주지 않았습니다.
짚마저 챙긴 다음에 벽돌을 이전처럼 만들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그들의 일이 2배로 힘들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루에 10대 맞던 매를 20대씩 맞게 된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로 바로의 힘이 드러나는 듯 보였습니다.
이렇게 되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바로가 문제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문제였습니다.
21.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께서 당신들을 내려다 보시고, 벌을 내리시면 좋겠소. 당신들 때문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있소. 당신들은 그들의 손에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칼을 쥐어 준 셈이오."(출5:21)
그들의 반박은 논리적이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서 바로에게 간 후 우리가 짚조차 챙겨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께 벌 받을 짓을 한 것이 현실로 입증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면 현실 보장이 틀림없다는 신학을 가졌습니다.
그 신학으로 모세를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현실이 하나님 나라를 분별하는 척도였습니다.
그런데 모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22. 이 말을 듣고서, 모세는 주께 돌아와서 호소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주께서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괴로움을 겪게 하십니까? 정말, 왜 저를 이 곳에 보내셨습니까?
23. 제가 바로에게 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뒤로는, 그가 이 백성을 더욱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주의 백성을 구하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계십니다."(출5:22,23)
그들은 모조리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 이름의 현실 보장인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두 그랬습니다.
이 일이 열 번 반복된 후에 신앙이란 현실 보장이 아니라 하나님 임재의 보장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2.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12 “I will be with you,”
하지만 이 변화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나님게서는 열 번을 하나님 계시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 말씀대로 현실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그 열 번의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그들이 홍해 앞에 섰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몰려오고 앞에는 홍해가 막힌 현실을 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똑같은 말을 다시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9. 마침내, 바로의 모든 병거와 기마와 그의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여,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 비하히롯 근처 바알스본 맞은쪽 바닷가에 이르렀다.
10. 바로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개를 들고 보니,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크게 두려워하며, 주께 부르짖었다.
11.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말하였다.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이냐?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느냐?
12. 이집트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더냐?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느냐?"(출14:9-12)
그들은 또다시 하나님께서 계시니 홍해의 현실이 문제가 되지 않음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더니 바다 바닥에 길이 열렸습니다.
12.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12 “I will be with you,”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 함께 하심으로 일어난 일들입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
누구나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과 함께 하는 현실이 없으면 신앙의 그 시작조차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바로 그 사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모세를 미디안으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40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게 하셨습니다.
13. 그 때에 너희가 이 민족에게서 저 민족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나라 백성에게로, 떠돌아다녔다.
14. 그러나 그 때에 그는, 아무도 너희를 억압하지 못하게 하셨고, 너희를 두고 왕들에게 경고하시기를
15. "내가 기름 부어 세운 사람에게 손을 대지 말며, 나의 예언자들을 해치지 말아라" 하셨다.(시105:13-15)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선택 받은 사람을 이 민족 저 민족으로 떠돌아다니게 하셨습니다.
그 사람 중에 모세를 미디안에 40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 떠돌이 생활 중에 하나님은 그를 철저히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모세에게 한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로의 땅을 떠나는 것을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내 백성을 내놓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면 바로는 회초리 대신에 칼과 창을 들고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 위험한 일 앞에서 누구라도 먼저 징표부터 보고 첫발을 내디디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징표는 무엇인가?
12. 너희가 이 산 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
12 you will worship me on this mountain. That will be the proof that I have sent you.”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그 징표를 본 다음에 발을 내디디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하나님의 길을 떠나고 봐야 합니다.
그 가던 길에 징표를 보게 될 것입니다.
칼 들고 쫓아오는 바로의 군대 때문에 생명을 걸고 홍해를 건넌 다음에 한참을 가야합니다.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그 호렙산에 이를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징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궁극적인 징표는 우리의 목표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징표 없이 믿음으로 길을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면에서 우리가 걷는 길은 세상이 택할 수 없는 길입니다.
세상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앞에 실은 두들길 돌다리가 없습니다.
시퍼런 바다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가다 보니 하나님의 길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악한 세대는 징표부터 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세상이 가질 수 없는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