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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실존적 성찰
주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자각하고 인간 실존의 구조와 문제성을 밝히려는 철학을 흔히 실존 철학이라고 한다. 즉 현실적 존재로서의 본래적 자기 곧 주체적 존재로서의 실존의식을 탐구하는 일이다.
실존적 성찰을 형상화한 작품들을 보겠다.
⑴
간밤에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문이
꼭두서니빛 새벽하늘에 온통 가득했습니다
그 가을 시 한 구절을 꿈길 끝에 만났습니다
산다는 것은 이렇듯 그저 덤덤한 물맛
쓸쓸히 언젠가는 바람으로 돌아가리니
그러나 그 누군가가 두고 떠난 이 아침에……
이것은 너무나도 막막한 울음입니다
불가사의의 볕살, 숲을 더듬어 내려올 때
아득한 산자락 멀리 스러져간 생애입니다
-「가을 안개」전문
⑵
1
슬쩍
곁눈질로 본
그대 겨드랑이 터럭 몇 올
이 아침 맑은 허공 긴장시키고 있나니,
살 맞아 일순 꼬꾸라지는
먼 들짐승 울음처럼
2
송진 묻은 넥타이를 목에 맨 적 있는가
어느 날 빽빽한 솔숲
허망히도 헤매던 날
봄 아침 또아리 트는 밭두렁께에 서 본 일 있는가
3
먼발치선
휴지 조각처럼
나부끼며
떨어져 뵈던
그 아침 비둘기 떼
붉은 발목은 젖어
일진의 바람도 잠시
먼 환각에
붙들려 있다
-「아침 반감」전문
⑶
바람이 분다
실존이
흔들린다
금가루가 된
햇살
한 움큼이
그의 눈
멀게 한 것은 불과
몇 해 전의
일이다
-「불멸」전문
(5)
곧장 내비칠 듯 내비치지 않는 것이
묘한 느낌으로 벼랑 끝을 달리나니,
그 깊은 골짜기는 아직 너의 것이 아니다
내비칠 듯 내비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찾아들 길 바이없는 숲으로 우거져서
미칠 듯 미치게 하는 실루엣과 같은 것
말의 묘미를 좇아 일생을 달려온 이여
숨 막히는 길 앞에 곧장 기막힐지라도
끝까지 파고들지니, 꽃문 열어젖히기까지
-「시스루」전문
⑴은‘가을 안개’에서 의외의 발상으로 ‘간밤에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문’을 읽는다. 이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판단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이미지 축조이기도 하다. 그 ‘소문’이 ‘꼭두서니 빛 새벽하늘에 온통 가득’한 것을 바라보면서 전이되어 ‘그 가을 시 한 구절’을 ‘꿈길 끝에 만났’음을 진술한다. 이러한 참신한 발상의 육화를 통해 시조의 새로운 길을 열고자 하는 열망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실존에 대한 뼈아픈 자각의 산물이기도 하다.
⑵는‘슬쩍/ 곁눈질로 본/ 그대 겨드랑이 터럭 몇 올’이라는 무척 육감적인 표현을 통해 ‘이 아침 맑은 허공 긴장’되고 있는 정황을 제시해 보인다. 이를 두고 박기섭은 ‘미의식이 매우 날카롭게 빛난다.’라고 보았다. 신선한 아침 이미지에 반하는 이와 같은 분위기는 도발적이다. 그 상황이 ‘살 맞아 일순 꼬꾸라지는/ 먼 들짐승 울음처럼’이라는 이질적인 이미지를 동원하여 맑고 청순한 아침의 이미지를 다른 방향으로 직조해 보인다. 이 역시 새로운 시조를 향한 모색이기도 하면서 기존의 생각을 뛰어넘는 현대인들의 복잡다단한 아침의 정황을 묘파하고 있다.
둘째 수‘송진 묻은 넥타이를 목에 맨 적 있는가’라는 물음 끝에 ‘어느 날 빽빽한 솔숲/ 허망히도 헤매던 날// 봄 아침 또아리 트는 밭두렁께에 서 본 일’이 있는지를 묻는다. 또아리 틀고 있는 뱀을 본 것으로 보인다. 아침에 솔숲을 헤매는 사람이라면 정상이 아니다. 그런 이에게 소름 끼치는 봄날의 뱀은 삶에 대한 의지를 되살리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셋째 수는 ‘먼발치선/ 휴지 조각처럼/ 나부끼며/ 떨어져 ’보이던 것이 곧 ‘붉은 발목’ 젖은 ‘비둘기 떼’임을 알게 된 것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환각의 순간을 맞는 느낌을 육화하고 있다.「아침 반감」은 그의 첫 번째 시조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제목만으로도 세계와 삶에 대한 남다른 자각정신을 엿볼 수 있다.
⑶에서 ‘바람이 분다/ 실존이/ 흔들린다’라는 대목은 폴 발레리의 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외부적 영향에 의해 실존이라는 내부가 요동치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금가루가 된/ 햇살/ 한 움큼’은 상징적이고 난해하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눈’이 멀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불과/ 몇 해 전의/ 일’이라고 한다. 제목이「불멸」인데 이러한 시적 정황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랑의 불멸, 존재의 불멸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형식면에서 중장을 ‘금가루가 /된 / 햇살/ 한 움큼이’라고 네 음보로 끊을 수 있다. 이때 둘째 마디가 한 글자이다. 이것은 분명 파격이다. 의도된 것은 아니라고 보이나 파격을 감수한 것으로 보인다.
(4)에서‘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이라는 ‘따오기’ 노래의 애절한 구절처럼 눈앞에 번히 보이면서도 다가갈수록 더 아득해지는 고뇌의 문고리를 잡아 마침내 말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세상을 환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최도선은 첫 연에서 독자는 에로스적인 충동으로 호기심이 발동하여 시를 읽다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드러내지 않고도 보이는 시로 아름다운 시의 본체에 다다르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간파했다.
⑴
나는 마른 헝겊조각, 더없이 낡고 해진
길 한 모퉁이에 버려져 발끝에 더러 채이다가
어느 날 그 누군가의 손에 불현듯 쥐어졌네
그는 나의 쓸모를 묵묵히 헤아린 끝에
사랑은 젖어드는 일, 속속들이 젖는 일이라며
서늘한 한 두레박 물을 가만 끼얹어 주었네
마른 내 몸에 내 푸석푸석한 얼굴에
문득 생기가 돌아 촉촉이 젖는 하늘
비로소 나는 그로 말미암아 겨운 목숨이었네
-「남루의 시」전문
⑴을 두고 구모룡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읽은 적이 있다. 이 시를 시조의 존재양식에 대한 한 은유로 읽고자 한다며 현대시조 쓰기는 낡은 형식에 생기를 더하는 일이다. 마른 헝겊조각이 물과 만나 다른 사물을 정화하는 걸레가 되듯이 현대시조는 새롭게 태어나는 기획 속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운 목숨’을 지녔다고 보았다. 즉「남루의 시」를 시조를 쓰는 과정으로 살핀 것이다.
다음과 같은 장경렬의 논의는 주목을 요한다.
이정환은 경우에 따라서는 섬세할 뿐만 아니라 따뜻한 눈길을 던져 그 사물들을 새로운 의미에 휩싸이도록 하기도 한다. 예컨대 나라는 대상을 ‘길 한 모퉁이에 버려져 발끝에 더러 채이다가/ 어느 날 그 누군가의 손에 불현 듯 쥐어’진 ‘더없이 낡고 해진 마른 헝겊조각’에 비유하고 있는 남루의 시를 보자. 이 시의 나는 무엇보다도 시를 지시하는 것으로 읽히는데, 그렇다면 ‘나의 쓸모를 묵묵히 헤아린 끝에/ 사랑은 젖어드는 일, 속속들이 젖는 일이라며/ 서늘한 한 두레박 물을 가만 끼얹어 주’는 그 누군가는 누구인가. ‘더없이 낡고 해진 마른 헝겊조각과 같이 보잘것없는 대상에 따뜻하고 섬세한 눈길을 주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면 어찌 그와 같은 비유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장경렬도 이 작품을 두고 화자인 ‘나’가 시를 지시하는 것으로 읽고 있다. 이지엽은 이 작품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정자아를‘마른 헝겊조각’에 비유하며,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마른 헝겊조각’이라는 한 번의 비유가 나왔을 뿐이지만 ‘낡고 해진 길 한 모퉁이’, ‘발끝에 더러 채이다가’, ‘사랑은 젖어드는 일, 속속들이 젖는 일→ 서늘한 한 두레박 물’, ‘내 푸석푸석한 얼굴’→‘문득 생기가 돌아’→‘겨운 목숨’으로 이어지는 묘사에서 확장되는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우리의 낡고 해진 생도 그런 의미에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슬픔의 생이 촉촉하게 읽히는 것은 확장 은유를 통한 서정의 울림에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랑을 주제로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객관화하는 눈이 슬기로워 시를 한 차원 높였다.’는 평가와 같은 선상에서 읽을 수 있다.
⑴
마른 풀잎에도 슬픔이 비치던 날
염소 울음에 쫓겨 먼 둑길은 지워지고
감나무 가지 사이로 문득 흔들리는 이승
-「어느 날 저녁의 시」전문
⑵
갠 날 저물 무렵
찌를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속눈썹살 아려온다
봇물에
피라미 떼들
제 등빛을 퉁기고
물 위에 누워 보렴
맨살의 곳곳마다
무덤 속 그 적막이
쓰다듬어 주려니
밤 깊어
쳐다본 하늘
그믐달도 빛나리
두고 갈 그만치는
두고 가고, 떠날 것은
물소리로 길을 잃고
덧없음을 노래하다
웬만큼
물이끼도 앉은
조약돌이 놓친 상류
-「냇가에 앉아서」전문
⑴은 ‘시인의 인식 속에서 미적인 의미로 구현된 이 정서는 다시 ‘먼 둑길, 흔들리는 이승’으로 확대되면서 저무는 날의 덧없는 막막함을 풀어 앉히게 된다.’라고 박기섭은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중장 ‘염소 울음에 쫓겨 먼 둑길은 지워지고’라는 가구가 이 단시조의 뼈대 구실을 하고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⑵는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심사평에서 박재삼은 당선작「냇가에 앉아서」를 두고‘세 수가 모두 종장이 빛이 났다. 뛰어난 솜씨를 높이 산다. 이렇게 새로운 발견이 말의 적당한 반죽을 통하여 생명이 있는 것이 되게 한 능력은 가상해서 모자람이 없다. 그의 진솔이 한 사람의 시조시인으로 서기에 충분하다고 믿는다.’라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당선 소감에서‘우리나라 사람이면 모두가 가슴 속에 시조의 운율을 지니고 있다. 우리 조상들의 숨결로 자라난 우리들의 호흡이 구속 속에서 오히려 자유를 찾고 잘 살아나기 때문이다. 앞으로 시조가 우리 생활 속에서 되살아나도록 보다 많은 사람이 시조를 쓰고 또 읽어야겠다.’라고 밝히고 있다.
박기섭은「냇가에 앉아서」에서 ‘피라미 떼들/ 제 등빛을 퉁기고’, ‘웬만큼/ 물이끼도 앉은/ 조약돌이 놓친 상류’등에서 거둔 언어의 뛰어난 탄력성과 함께 동양적 서정에 대한 관심이 잘 발현되고 있다고 본다. 새로움에 대한 간파라고 생각한다.
서숙희는 위에서 예를 든 장을 살펴보고 각 수가 감각적이고 세련되었다고 했다.
⑴
1
칼끝
닿을 때마다
찢어지는 먼 데 하늘
체액처럼 괴는 끈적한 과즙 향기
둥글게
갇히어 떨던
바람 소리 시리다
2
상한 부위를 곧장 파내어 버리듯
모질지 않으면
영영 도려내지 못할
안으로
도사린 상처
불 밝혀 다스리듯
3
칼끝 닿을 때마다
묻어나는 바람소리
저물 녘 못물 위로
산그늘 사위어 들 듯
둥글게
깎이는 허공
붉게 흩어지고 있다
-「과수밭에서」전문
⑵
미쳐서야 비로소
맞닥뜨리는 첼로의 숲
미쳐서야 비로소
하늘에 닿는 선율
오늘은 함께 미쳐서
이렇듯 불타고 있느니
노래가 끝난 어귀
다시 시작되는 노래
미치고 미치다가 끝내
미쳐 버리지 못한
한 사람 목숨의 길에
불타는 저 첼로의 숲
-「단풍숲」전문
⑶
녹슬거나 검붉게 삭아 내리고 있거나
굳이 거부하지 않는 깊숙한 눈빛으로
우듬지
지나는 바람
이젠 올려다보겠다
옹골차던 한 시절에 매일 일이 못되어
하늘 휘젓던 날에 연연해할 일도 못되어
발 앞에
굴러온 가랑잎
가만 내려다보겠다
-「만추에」전문
⑷
잠시라도 아무것도 보이고 싶지 않아 골짜기로 불러들인 안개는 자우룩하여 그동안 더 많은 잎들을 떨어뜨리게 하고 있다
볕 나면 여지없이 다 드러나고 말 테지만 가을 산은 이따금 이런 아침을 마련한다, 안으로 아픔을 삭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수척함에 대하여」전문
⑴은 사물들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과일―하늘―바람―산그늘―허공’이 모두 무심히 떨어져 있는 사물들이 아니라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원인―결과’도 되고 ‘안―밖’도 되며 동시적 현존을 구성하는 ‘동전의 양면’이 되기도 한다. 물론 과일 속에 담긴 하늘과 바람과 허공의 흔적은 모두 사물 자체의 기억이기도 하다.
과도와 과일과의 관계에서 자연의 비의가 그려지고 있다. ‘칼끝/ 닿을 때마다/ 찢어지는 먼 데 하늘’이라는 대목이 그것을 잘 드러낸다. ‘체액처럼 괴는 끈적끈적한 과즙 향기’와 더불어 ‘둥글게/ 갇히어 떨던/ 바람 소리’가 시린 것을 노래한다. 둘째 수에 와서 의미가 깊어진다. ‘상한 부위를 곧장 파내어 버리듯/ 모질지 않으면/ 영영 도려내지 못할/ 안으로/ 도사린 상처/ 불 밝혀 다스리듯’이라는 명징한 비유에서 보듯 한 자아의 고통스러운 내면이 그려지고 있다. 아픔을 다스리고 추스르는 길을 읽는다.
광물적 이미지인‘칼끝’이‘닿을 때마다/ 묻어나는 바람소리’를 느끼는 시의 화자의 감각의 촉수가 눈길을 끈다. 또다시 시선은 자연으로 향한다. 즉 ‘저물 녘 못물 위로/ 산그늘 사위어 들 듯’이 ‘둥글게/ 깎이는 허공/ 붉게 흩어지고 있’는 것을 목도한다. 결구의 감각적인 표현이 이 시편을 살리고 있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관계정립 혹은 상생의 이법을 존재론적인 시각으로 육화한 작품이「과수밭에서」이다. 그런 점에서 앞에 인용한 유성호의 논의는「과수밭에서」의 미학적 성취를 잘 분석하고 있다.
윤금초는 (1)의 작품을 두고 ‘선경후정의 원리’를 잘 적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선경 후정의 원리는 초·중장은 눈에 포착된 가시적 이미지를, 종장은 마음속에 포착된 심상풍경을 토로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이미지와 담론의 시학’을 펼쳐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⑵는 첼로의 몸통이 단풍나무로 제작된 것에 착안한 작품이다. ‘미쳐서야 비로소/ 맞닥뜨리는 첼로의 숲’에서 보듯 미치지 않고서는 그 선율이 하늘에 닿을 수 없다고 노래한다. ‘함께 미쳐서/ 이렇듯 불타고 있’다는 진술은 여러 대의 첼로 연주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노래가 끝난 어귀/ 다시 시작되는 노래’라는 대목에서는 치열한 현존의식, 불굴의 천착의지가 읽힌다. 그리하여 ‘미치고 미치다가 끝내/ 미쳐 버리지 못한’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 사람의 목숨의 길목에서 첼로의 숲은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다.「단풍숲」에서 실존의 극치를 본다.
⑶은 첫 수에서 상승 이미지를 제시하고 둘째 수에서 하강 이미지를 동원하여 상승과 하강의 접점을 노래한다. ‘녹슬거나 검붉게 삭아 내리고 있거나/ 굳이 거부하지 않는 깊숙한 눈빛’으로 ‘우듬지/ 지나는 바람’을 올려다보겠다고 한다. 다음으로 ‘옹골차던 한 시절에 매일 일이 못되어/ 하늘 휘젓던 날에 연연해할 일도 못되어’서 이젠 ‘발 앞에/ 굴러온 가랑잎/ 가만 내려다보겠다’는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그것이 만추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4)를 두고 엄원태는 다음과 같이 읽고 있다.
가을 산은, 인생으로 치자면 오십대 후반을 지나고 있는 중인 게 아닐까 한다. 자우룩하게 마음의 안개를 불러들이게 되는 게,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향하고 있는 이 시기의 심사가 아닐까. 물론 그 심사가 ‘더 많은 잎들을 떨어뜨리게 하’는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 산은 ‘이따금 이런 아침을 마련’한다. 노년을 향해 가는 우리도, 저 가을 산처럼 ‘안으로 아픔을 삭이는 시간’을 통하여, 나이 듦과 늙어감에 대한 이슥한 성찰로 비로소 ‘큰 긍정’에 이르러야 하겠다.
「수척함에 대하여」는 철이 바뀌는 때에 가을 산의 수척함에 대하여 말하면서 사람살이의 수척함을 조용히 환기시킨다.
⑴
세상을 가리키기에 너만 한 것 있으랴
세상을 떠받치기에 너만 한 것 있으랴
세상을 두드리기에 너만 한 것 있으랴
-「지게작대기」전문
⑵
둘이서 혹은 셋이서 버선발로 디딘 끝에
이마에 내린 줄잡고 부지런히 디딘 끝에
근심도
하얗게 빻아
눈에 고왔던 것이다
-「디딜방아」전문
⑶
몸을 낮추어야
속살 파헤쳐지는 것을
저렇듯 긴 이랑 땀방울로 적시기까지
쪼그려
앉은 그대로
뻗어 나가야 하는 것을
-「호미」전문
⑷
얼어붙은 땅을 파 본 사람이면 안다
삽자루가 가슴팍에
들이치듯 부딪칠 적마다
삽날에
불꽃에 튀듯
마음에 솟는 화염을
-「삽」전문
⑸
힘껏 내리찍는 옹골찬 어깨에 실려
청석에 부딪쳐 푸른 불꽃 터뜨리는
언 땅에 봄빛 흩으며
실한 씨 흩뿌리는
-「괭이」전문
⑹
속살 드러내며 젖은 흙 뒤집힐 때
가슴골을 깊숙이 파 들어갈 일이다
몸속의
피의 길도 이 봄
거꾸로 흐르고 흐를
-「쟁기」전문
⑺
삶이 둥글어야 함을 너는 말하고 있다
때로는 뚫려야 함을 너는 말하고 있다
세상을
줄줄이 꿰어
흔들어 보겠느냐
-「상평통보」전문
⑴은‘지게작대기’를 통해 가리키고 떠받치고 두드리는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것은 모두 세상을 향한 것이다. 이러한 행위를 시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가 바로 ‘지게작대기’라는 것이다.
⑵는‘디딜방아’를 노래한다. 디디고 디딘 끝에‘근심도/ 하얗게 빻아/ 눈에 고왔던 것’을 본 것은 의외지만 인상적이다. 내면의 문제가 일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얻고 있다.「지게작대기」의 3장의 형태가 일정한 리듬을 타고 있고,「디딜방아」에서는 초장과 중장이 한 호흡으로 놓인 점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⑶에서 ⑹까지는 농기구들을 노래하고 있다. 사물의 외양을 그리지 않고, 그 농기구의 특성에 맞게 사람의 움직임이 편편이 녹아들어 있다. 결국 처한 상황에 따라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편들을 담은 시조집『원에 관하여』가 나왔을 무렵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인 이경철은 ‘시조 틀 속의 자유를 얻다’라는 제하에 2003년 3월 29일 중앙일보 6면에 박기섭의 시조집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와 함께 자세히 보도한 적이 있다.『원에 관하여』를 두고 이경철은‘한 땀 한 땀 시화시킨 그 사물들은 우리의 삶의 진실과 한에 직접 이어져 있다.’면서 ‘풀었다 다시 죄는 긴장과 깊이, 내공이 없으면 단시조는 소품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끊임없는 실험과 천착으로 우리 시대에 살아 있는 정형시로 시조의 허리를 떠받치고 있다.’라고 했다.
⑺은‘상평통보’라는 옛 화폐를 통해 삶의 태도, 삶을 향한 의지와 같은 것을 보다 적극적으로 설파한다. ‘둥글어야 함’과 ‘때로는 뚫려야 함’을 상평통보의 외양에서 간파한다. 그리하여 ‘세상을/ 줄줄이 꿰어/ 흔들어 보겠느냐’라는 단호한 반문을 던진다.
대상 수상작「원에 관하여·5」는 그가 이미 시도한 연작 형태 장시조의 일부이다. 그의 시조는 정신의 깊이에 닿는 감성의 바탕 위에 우리의 삶을 아우르는 작업이, 원이라는 큰 둘레 안에 꿈틀대며 숨 쉰다. 호미, 삽, 괭이, 쟁기, 낫 등이 아직까지 쓰이는 연장들로, 독립된 단시조의 이미지가 큰 하모니를 이루며 인간의 내면을 눈부시게 일구어나가고 있다. ‘쟁기’에서 ‘속살 드러내며 젖은 흙 뒤집힐 때’, ‘몸속의/ 피의 길도 이봄/ 거꾸로 흐를’과 같은 진한 감성, 옹골찬 시 정신을 내비치고 있다. 작자는 직조 능력이 빼어나다.
중앙일보 심사평에서 지적한 것처럼「원에 관하여·5」는 그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어 인생사의 한 단면을 축약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⑴
서로를 제대로 눈여겨볼 틈도 없이
버겁고 숨 가쁘게
부대끼며 사는 동안
나뭇잎
한 장의 잎맥
섬세하게 뻗는다
-「그동안」전문
⑵
밥을 먹다가
굵은 돌을 씹는다
놀라지 마라, 네 뼈의 일부인지도 모를 일에
먼 훗날
조각난 네 뼈가
돌로 씹힐 지도 모를 일에
-「밥을 먹다가」전문
⑶
유모차를
천천히 밀며
길을 가는
할머니
기울어진 몸이 점점, 땅에 가까워져서
종내는
저 언덕에 기대어
흙이 되어
갈 것이다
-「예각에 대하여」전문
⑴은 쫓기다시피 사는 이들의 삶에 대해 자성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시편이다. ‘서로를 제대로 눈여겨볼 틈도 없이// 버겁고 숨 가쁘게/ 부대끼며 사는 동안’에 일어난 일은 우리가 그리 관심 가질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나뭇잎/ 한 장의 잎맥/ 섬세하게 뻗’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너는 대체 무엇을 하며 살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이면에 깔려 있다.
⑵는 음식을 먹다가 ‘굵은 돌을 씹’게 되면서 ‘놀라지 마라, 네 뼈의 일부인지도 모를 일’이라는 자각을 갖게 되면서 ‘먼 훗날/ 조각난 네 뼈’가 누군가의 입의 ‘돌로 씹힐 지도 모를 일’이므로 그리 놀라서는 아니 된다고 말하고 있다.
⑶은 특이한 시각으로 한 시적 정황을 목격하고 수학 용어인 ‘예각’을 도입하여 생자필멸의 한 과정을 집약하여 보여주고 있다.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직립 보행이 아닌 것을 발견하고 각이 줄어들면서 끝내 한 사람이 땅 속에 묻혀 흙이 되는 것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기울어진 몸이 점점, 땅에 가까워’지게 되면서 죽음은 찾아오고 종언을 맞는다. 이러한 시적 육화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이 단절된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작품에 대해 채천수는 ‘누구에게나 그림자처럼 불어오는 삶의 비극적 방향성(기울기)은 물론 있다. 경건한 곳이나 자기 삶에 절을 하고 모두 굽히지 않는가? 죽음이 없는 곳에 예술이 존재하지 않듯이 인간의 육신은 순환구조를 갖는다.’라고 보았다.
⑴
무의미의 가락을 하나로 꿰는 것은
무를 얇게 썬 듯한 ‘있다’의 시학
무엇이 정작 있는지 종내 오리무중인데
흡입되듯 일사불란하게 읽어내려 가다가도
어디로 이끌리는지 도시 알 수 없는 것은
뜻밖에 낯선 낱말이 튀어 오르기 때문이다
말할 때 좌우로 조금씩 고개 흔드는 버릇
그로부터 ‘무의미론’이 비롯된 것일까
의미가 스러진 행간에 붉은 구름 일고 있다
-「무의미론에 대하여」전문
⑵
그래 울음무덤은 중천에 늘 떠 있지
좇아가지 못하는 눈길 탓하지 말라
끝없이 쌓아올려도 보이지를 않으니
눈에 닿지 않는 저 아득한 꽃무더기
꽃무더기 속으로 달아오른 몸뚱어리
오늘도 울음의 무덤 중천에 떠 있지
-「울음 무덤」전문
⑶
1
강렬한 햇빛이다
바로 저 햇빛은
눈을 뜰 수 없으니
무서운 햇빛이다
창문을 내리치듯이
퍼붓는 저 햇빛은
2
어느 날 부신 빛이
곧장 빌미가 되어
뫼르소 그가 바로
너를 죽인 것이다
너 역시 저 햇빛 탓에
그를 죽일지 모른다
-「뫼르소의 햇빛」전문
⑴은 시조로 쓴 ‘김춘수론’이다. ‘무의미의 가락을 하나로 꿰는 것은/ 무를 얇게 썬 듯한 ‘있다’의 시학‘이라는 첫 두 줄에서 김춘수 시인의 시론과 작품의 개성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없는 것을 탐구하던 이가 ‘있다’ 혹은 ‘있었다’의 되풀이를 자주 보이는 것의 모순성을 ‘무엇이 정작 있는지 종내 오리무중인데’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어서 ‘흡입되듯 일사불란하게 읽어내려 가다가도// 어디로 이끌리는지 도시 알 수 없는 것은// 뜻밖에 낯선 낱말이 튀어 오르기 때문이다’라는 둘째 수에서 시의 경향을 다시 살필 수 있다. 끝으로 ‘말할 때 좌우로 조금씩 고개 흔드는 버릇’에서 ‘무의미론’이 비롯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의미라고는 하지만 ‘의미가 스러진 행간에 붉은 구름 일고 있다’라고 진술함으로써 무의미론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의미의 완전한 배제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다.
⑵는 접근하기 어려운 난해성을 가지고 있다. 첫 줄 ‘그래 울음무덤은 중천에 늘 떠 있지’가 벽에 부딪치게 만든다.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은 ‘울음무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라는 문제다.그 울음무덤에 대해 ‘좇아가지 못하는 눈길 탓하지 말라’면서 ‘끝없이 쌓아올려도 보이지를 않’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또 다시 의문이 드는 것은 ‘눈에 닿지 않는 저 아득한 꽃무더기//꽃무더기 속으로 달아오른 몸뚱어리’라는 표현이다. 수미상관과 비슷하게 둘째 수 종장은 다시 한 번 ‘오늘도 울음의 무덤 중천에 떠 있지’라고 노래한다. 그렇다면 두 번이나 나온 울음무덤이 있는 ‘중천’과 ‘아득한 꽃무더기’가 무엇인지 유추해 보아야 한다. 중천은 울음무덤이 있는 곳이다. 울음의 실체, 울음의 주체가 누구인가. 이것은 꽃무더기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한여름 날의 백일홍 꽃을 떠올릴 수 있고, 그때 찾아온 매미를 떠올릴 수 있다. 꽃이 불타오를 때 매미도 흡사 불타오르듯이 운다. 그 울음들은 붉은 빛깔을 띠면서 솟아올라 중천의 어느 지점에 축조된 ‘울음무덤’을 채운다. 이러한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내리쬐는 뙤약볕도 한몫을 하고 있는 셈이다.
⑶은 ‘강렬한 햇빛’이어서 눈을 못 뜨게 한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알베르트 까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 ‘뫼르소’가 그러했듯이 ‘창문을 내리치듯이/ 퍼붓는 저 햇빛 ’탓에 시의 화자인 나도 ‘그를 죽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세상을 밝히는 빛도 때로는 이렇듯 살인의 계기를 안겨줄 수다.「뫼르소의 햇빛」은 존재의 다양한 의외성 혹은, 처한 정황에 따라 행동하는 방식의 개별성과 특이성을 환기하게 하는 작품이다.
⑴
내게 이해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여기 있네, 와 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너는 왜
거기 섰느뇨
물을 수가 없듯이
하루를 이해하고
살아온 것 아니어서
꽃은 거기 피어 몇 줌 향기를 흩고
나는 또
갈맷빛 하늘
오래 우러를 뿐이다
-「꽃의 이해」전문
⑵
너와 나 사이에
정지신호가
보인다
이젠 피할 길 없는 9분 간격의 가을
피마자
잎사귀에 앉은
푸른 사마귀의 가을
-「47분과 56분 사이」전문
⑶
삶의 비루함은 계측되지 않는 것
이젠
부려놓아라
남녘
몽돌밭에 가서
저 바다
네 무덤인 것
헤아리게 될 것이다
바다가
무릎 꿇는 것
그것이
파도임을
곧 알아차릴 것이다
출렁이는
무한 기도
눈 씻고
비로소 오래
바라보게 될 것이다
-「정도리에서」전문
⑷
저토록 환하지만
항용 분명한 일은
결코 산 위로 곤두박질치지 않는다는 것
빛나는 모든 것들은 높이 떠 있다는 것이다
한순간 산 능선에
걸터앉아 있다가
낙하하여 지축을 천둥치듯 두들기거나
발 앞에 굴러 내려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서녘으로 끝없이
길 밝히는 만월에게
가당찮은 질문을 무수히 던져 보지만
아무런 답변도 없이 저리 휘영청 할 뿐이다
-「휘영청」전문
⑴은 한 송이 꽃을 통해 삶을 성찰한다. 그 누구도 주어진 하루에 대해 이해를 하고 살지는 못한다. ‘내게 이해하라고/ 말하지는 않는’ 꽃은 ‘여기 있네, 와 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꽃이 ‘너는 왜/ 거기 섰느뇨’라고 묻지 않듯이. 이해 문제를 넘어선 것이 내 게 허락된 하루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꽃이 피듯이 ‘나는 또/ 갈맷빛 하늘/ 오래 우러를 뿐’인 것이다. 하늘을 우러른다는 것은 천명을 기다린다는 의미다. 하늘 뜻을 좇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꽃이 피어 향기를 흩는 것과 진배없다.
⑵는 기차를 기다리며 바라본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너와 나 사이에/ 정지신호가/ 보인다’라는 진술은 자아와 타인 사이의 경계이자 거리다. 제목으로 보아 두 열차의 간격은 9분이다. 불과 9분 사이에 승객들의 시공간은 달라진다. 이때 9분은 ‘너와 나’ 사이의 거리일 수도 있다. 그를 두고 ‘이젠 피할 길 없는 9분 간격의 가을’이라고 계절의 정감을 삽입하고 있다. 그 순간, 시의 화자는 ‘피마자/ 잎사귀에 앉은/ 푸른 사마귀의 가을’을 본다. 이 일들은 모두 9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여기서 ‘푸른 사마귀’는 자아의 투영으로 보인다.
⑶은 시어에서 잘 쓰이지 않는 ‘계측’이라는 어휘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삶의 비루함은 계측되지 않는 것’이라는 표현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부려놓을 것을 말한다. ‘저 바다/ 네 무덤인 것/ 헤아리게 될 것이다’라면서 ‘바다가/ 무릎 꿇는 것/ 그것이/ 파도’이고 또한 ‘출렁이는/ 무한 기도’임을 상기시킨다. 삶은 계측되지 않는 미지의 것이므로‘눈 씻고/ 비로소 오래/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환기시키고 있다.
(3)의 작품에 대해 박성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의 공간은 전남 완도의 정도리 몽돌밭이다. 일반적으로 ‘돌’은 존재나 응집, 자아와의 화해를 상징한다. 정도리의 돌멩이들은 모난 제 살점들을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덜어내면서 더욱 둥글고 단단해진다. 화자는 정도리에서 오랜 시간의 퇴적을 보면서 ‘저 바다/ 내 무덤인 것’을 깨닫고 자신의 몸들을 부수며 울었던 몽돌들의 시간을 읽어낸다. 세찬 파도에 제 몸을 깎이며 울음이 가득했을 정도리 바닷가의 내밀한 시간들을 들춰내는 것이다. 뼈까지 시려오는 바닷물 깊이 제 몸을 담그고 울어본 사람만이 비로소 아름다운 진실 앞에 서게 된다. 하여 정도리 몽돌들의 몸을 깎았던 파도는 이제 하나의 종교처럼 몽돌들 앞에 부딪쳐 와서 쓰러진다. 둥근 것들 앞에서 세찬 ‘바다가/ 무릎 꿇는’ 것이다. 어쩌면 정도리의 하늘 아래 툭 튀어나온 돌, 모난 돌은 인간 밖에 없을 것이다. 정도리 몽돌들은 모두가 둥글어서 아무렇게나 옆의 몽돌들과 부딪쳐도 서로 아프게 하지 않는 것들끼리 함께 모여 한 세상을 이루고 있는데, 오직 인간은 모난 마음으로 타자의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이런 인식의 끝자락에서 화자는 이제 ‘삶의 비루함’을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세차게 밀려오는 파도마저도 이제는 ‘출렁이는/ 무한 기도’가 되는 정도리 바닷가는, 화자에게 자기반성과 함께 삶의 깨달음을 부여하는 공간이다.
매우 깊이 있는 해석을 통해「정도리에서」가 가진 개성적인 인생 담론과 미학적 시선을 환기시키고 있다.
⑷가 극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자연 앞의 인간의 한계다. 한계의식의 절감이다. ‘결코 산 위로 곤두박질치지 않는다는 것’과‘빛나는 모든 것들은 높이 떠 있다는 것’에서 자연의 이법을 감지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화자의 생각은 이어진다. ‘낙하하여 지축을 천둥치듯 두들기거나/ 발 앞에 굴러 내려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길을 밝히는 만월이지만, 인간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가당찮은 질문을 무수히 던져 보지만/ 아무런 답변도 없이 저리 휘영청 할 뿐’인 달은 빛남으로써 모든 것을 말하고, 인간은 자연의 흐름 앞에서 순응의 도리를 배우게 된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인간의 능력은 제한되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⑴
잎사귀들은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떨어져 내렸다
참거나 참지 못하거나 떨어져 내렸다
-「십일월」전문
⑵
뒤란 우물 곁
감나무 가지 끝
남은 감 한 알이
버티고 있는 저녁
버티고 버티는 일의
그 끝을 보는 저녁
-「어떤 저녁」전문
.
⑶
1981년 1월 8일 금요일 하오 네 시
시상식 참석 바람 중앙일보 문화부
지례면
우체국 지붕에
첫눈이 쌓이던 날
-「전보」전문
⑷
치렁치렁하던 잎사귀들 송두리째 시들어 하루아침에 여지없이 거덜나버린 것을 눈으로 바라보면서 믿어지지 않는 아침
언젠가 함께 푸르게 서 있겠다던 약속 마주 보며 긴한 얘기 나누고자 한 약속 모두가 된서리에 맞아 거덜나버린 것을
파초여, 너로 말미암아 거덜나버릴 수 없어 거덜나버린 너를 보며 거덜나버릴 수 없어 검붉은 잎사귀들을 뚝뚝 꺾고 있는 아침
-「입동 무렵」전문
⑴은 묘하다. 정경을 바라보고 어떤 사실을 혹은 현상을 발견한다. 그것은 예민한 감각의 촉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늦은 가을에 ‘잎사귀들은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게 마련이다. 순서가 따로 없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떨어져 내’린다. 그 정도의 발견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종장은 새로운 발견이다. 즉 ‘참거나 참지 못하거나’ 떨어져 내리는 일은 한결같다는 사실이다. 나뭇잎이 참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자연의 변화 앞에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어져 내리는 일은 거듭된다. 부단히 순환하는 계절의 흐름은 개인의 의지 혹은 한 나무의 생태에 반하는 것이다. 이렇듯 존재는 주위 환경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⑵는 역시 견디는 일을 노래하고 있다. ‘뒤란 우물 곁/ 감나무 가지 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남은 감 한 알이/ 버티고 있는 저녁’풍경이다. 참거나 참지 못하거나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과 한 알 감이 처한 상황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견디고 또 견딘다. 시의 화자는 ‘버티고 버티는 일의/ 그 끝을 보’고 있다고 진술한다. 그 장면을 에의 주시하는 이도 견딤에 대하여 배운다. 견디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지난 삶의 순간순간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왜 사는가 하고 반문하면서 자연을 통해 삶의 방향을 잡게 될 것이다.
⑶을 2015년 3월 중앙일보 초대시조에 소개하면서 이달균 시인은‘김천 지례면 어느 초등학교 교사였는지 모른다. 80년대는 새로운 연대이길 기다렸지만 더 큰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청년시인은 몇 편의 시를 쓰고 신춘문예를 준비했다. 당선 소식을 기다리는 며칠은 얼마나 긴 시간인가. 삽짝 밖에 집배원이 다녀가는 자전거 소리가 나면 문을 열어젖혔으리라. 전보는 지난 시대의 것이다. 행사 축전이야 아직도 존재하지만 요즘 당선통보나 군문에 보내는 소식은 전보를 띄우지 않는다. 예전엔 전보가 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이 한 편 단시조로 훌륭한 시조창작 강의를 들은 셈이다. 어떤 감정도 싣지 않았지만 첫눈 내리는 날 불현듯 던져진 전보를 받는 기쁨과 설렘이 고스란히 묻어나지 않는가. 시조는 짧은 시다. 절제하라. 괜히 설명하지 말고, 섣부른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짐짓 보여준다. 10여 권의 시조집을 펴낸 시인이기에 한 수를 뽑는 일이 난망했지만 고심 끝에 이 작품을 골라보았다.’라고 적고 있다.
⑷도 역시 견디는 일에 관한 보고서다. ‘거덜나버림’에 대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치렁치렁하던 잎사귀들 송두리째 시들어 하루아침에 여지없이 거덜나버린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다. ‘언젠가 함께 푸르게 서 있겠다던 약속’과 ‘마주 보며 긴한 얘기 나누고자 한 약속’들이 모두 된서리에 무산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파초여, 너로 말미암아 거덜나버릴 수 없’다라고 힘주어 발언한다. 이미 파초는 거덜나버렸지만 나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지의 발현으로 ‘검붉은 잎사귀들을 뚝뚝 꺾고 있’다.
때를 따라 순응하는 자연의 변화를 바라보며 사람살이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시편들이다.
⑴
자신의 볼카운트와 승부한다는 투수
자신의 아름다움과 승부한다는 여인
자신의 미친 언어와 승부한다는 시인
-「톱클래스」전문
⑵
사방으로 물줄기가
골고루 퍼져나가
젖을 만큼 젖어서
호흡이 가쁜 풀밭
그러나
마르고 있는 곳
바로 그 밑에 있다
등불 아래가 몹시
어두운 것처럼
끝내 젖지 못하는
스프링클러 주변
그곳을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스프링클러 주변」전문
⑶
족족 저두족이다
지하철 칸칸마다
족족 저두족이다
집집마다 방방마다
실시간
살피지 않으면
오금이 저려온다
꽃에서 눈을 떼면
위는 무한 하늘이다
높푸르게 솟아오른
저기 저 뭉게구름
이제는
고개를 들라
누군가가 외친다
-「저두족」둘째, 셋째 수
⑴은 가장 높은 경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스포츠 선수와 미인과 시인이 순차적으로 등장한다. 첫 번째는 야구선수 중에 투수다. 최고의 투수는 상대하는 타자를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볼카운트와 승부’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진정한 미인은 다른 이의 미모와 견주지 않고 ‘자신의 아름다움과 승부한다’는 것이다. 이달균은 이에 대해 ‘자신의 미친 언어와 승부하지 못하는 시인은 이미 시인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종장에 시인을 배치한 것은 이런 시인의 속성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의 미친 언어와 승부하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투수, 그런 여인, 그런 시인만이 마침내 톱클래스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라고 논의하고 있다.
⑵는 특이한 소재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표현하고 있다. 자칫 소외되기 쉬운 곳에 대하여 유의하라는 조언같이 들린다. ‘사방으로 물줄기가/ 골고루 퍼져나가// 젖을 만큼 젖어서/ 호흡이 가쁜 풀밭’에서 보듯 충분히 갈증의 해소에 이른 ‘풀밭’보다는 스프링클러 아래를 보라고 말한다. 그곳은 해갈을 이루지 못한 곳이다. 그것은 흡사 ‘등불 아래가 몹시/ 어두운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끝내 젖지 못하는/ 스프링클러 주변’을 놓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시의 화자가 말하는 사랑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⑶은 현대인들의 일상 중에 가장 많이 다루고 있는 휴대폰에 관한 것이다. ‘족족 저두족’으로만 가득한 ‘지하철 칸칸’이고 ‘집집마다 방방마다’임을 상기하게 한다. 고개를 숙이는 일에만 몰두하여 정작 ‘꽃에서 눈을 떼면/ 위는 무한 하늘’임을 모르고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높푸르게 솟아오른/ 저기 저 뭉게구름’을 볼 것을 권유한다. 그래서 ‘이제는 고개를 들라’고 누군가가 목청껏 외치고 있는 것이다.「저두족」은 첨단문명기기에 매몰되어 자아를 상실하다시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군상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시편이다.
⑴
꽃이 핀다 생각이 묵고 묵어 묵정밭 이룬 둔덕에 꽃이 핀다
검은 비닐봉지가 걸려서 검은 새 깃털마냥 바람에 나부끼는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로 아이들은 와르르 몰려가고 지상 6, 7층 돼 보이는 히말라야시더 맨 꼭대기에 앉은 까치 한 마리 또 다시 한낮의 적막을 깨뜨릴 무렵 턱 괴고 생각에 잠긴 나는 문득 붓을 든다 노래할 것 끝없건만 무딘 붓끝으로 나비 한 마리 날아오지 않고 수묵의 향기만 산그늘 지듯 서늘히 내려와서 내 낮고 우울한 심령의 한 모퉁이를 돌아나간다 탱자 울타리를 시방 지나가는 저 골바람처럼 개울물 소리처럼
비로소 내 안 그 비인 자리에 희디흰 꽃이 핀다
-「생각이 묵고 묵어」전문
⑴은 자연스러운 호흡과 가락으로 자칫 산문화 될 법한 세계를 시로 끌어올린다. ‘꽃이 핀다 생각이 묵고 묵어 묵정밭 이룬 둔덕에 꽃이 핀다’라는 초장의 내용을 증명이라도 하듯 꽤 긴 중장에서 ‘검은 비닐봉지가 걸려서 검은 새 깃털마냥 바람에 나부끼는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로 아이들은 와르르 몰려가고 지상 6, 7층 돼 보이는 히말라야시다 맨 꼭대기에 앉은 까치 한 마리 또 다시 한낮의 적막을 깨뜨릴 무렵 턱 괴고 생각에 잠긴 나는 문득 붓을 든다’라면서 노래에 대한 열망을 보인다. 즉 ‘무딘 붓끝으로 나비 한 마리 날아오지 않고 수묵의 향기만 산그늘 지듯 서늘히 내려와서 내 낮고 우울한 심령의 한 모퉁이를 돌아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시의 화자는 내적 변화를 체험한다. ‘비로소 내 안 그 비인 자리에 희디흰 꽃’이 개화하고 있는 것을 감지하게 된 것이다.「생각이 묵고 묵어」는 한 편의 시가 어떻게 해서 빚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노래다. 숙성의 시간과 천착 없이 소우주라고 이를 시가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환기한다. 그러므로 부단한 내적 성찰이 요청된다.
이상으로 적지 않은 작품들을 통해 다채로운 실존적 성찰의 세계를 고찰해 보았다. 이정환의 시각은 그 폭이 넓고 깊이가 있다. 자연으로부터 소재를 얻어올지라도 내면의 문제와의 융합으로 의미가 확장되고 심화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그의 형상능력에서 기인된 것이다. 삶과 세계를 노래하되 새로운 미적 질서 혹은 인생과 결부된 시적 육화에 대한 천착이 연이어졌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라. 생명회복 의지
이제 어떠한 시각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날로 황폐해 가고 있는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생명 회복 의지를 육화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은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점점 오염되고 있는 중이다. 주된 원인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욕망과 야욕적인 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일이다. 공생 관계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라는 그릇된 인식으로 환경이 점차로 피폐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⑴
저 소리들 산이 죄다 거두어들였다가
수천수만의 나뭇잎들 푸르게 피워 올린다
때로 먼
산짐승들의
울음으로 터뜨려진다
-「폭포의 소리」첫수
⑵
침묵과는 가장 잘
어울리는 빛입니다
말이 필요 없는 자리
촘촘히 들어박혀
하늘과 맞포갤 수 있는
넉넉함의 빛입니다
-「푸른빛을 노래함」첫수
⑶
밤낮없이 바람을
자아올리는 곳이다
껍질 갓 깨고 나온 바람의 어린 새끼들
무성한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것 보인다
-「수목원에서」전문
⑷
돌아와서 보니, 나는 한 마리 소였다
온몸이 젖은 채로
자라풀에 휘감기어
늦도록
뒤척거리는
한 마리의 소였다
가시연꽃, 노랑어리연꽃 연신 되새김질 끝에
밤새 진초록 물을
삼켰다 뱉었다 하며,
늪 속을
허우적거리는
한 마리 붉은 소였다
-「여름, 우포늪」전문
네편은 모두 환경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연 그대로의 생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조심스레 일깨운다.
⑴에서 ‘저 소리들 산이 죄다 거두어들였다가/ 수천수만의 나뭇잎들 푸르게 피워 올린다’라는 표현에서 그와 같은 의미를 읽게 된다. 우렁찬 폭포소리를 모두 받아들인 산이 나뭇잎들을 푸르게 피워 올린다는 것은 경이로운 상상의 발현이다. 또한 그것은 ‘산짐승들의/ 울음으로 터뜨려’진다는 대목에서는 더욱 실감하게 된다. 이처럼「폭포의 소리」가 보여주는 사유는 자연친화적이다.
⑵에서 푸른빛은 ‘침묵과는 가장 잘/ 어울리는 빛’이라고 단정하고 ‘말이 필요 없는 자리/ 촘촘히 들어박’힌 푸른빛은 ‘하늘과 맞포갤 수 있는/ 넉넉함의 빛’임을 상기하게 한다.「푸른빛을 노래함」역시 자연과의 합일을 꿈꾼다.
⑶은 ‘밤낮없이 바람을/ 자아올리는 곳’이어서‘껍질 갓 깨고 나온 바람의 어린 새끼들’이‘무성한/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것’을 보게 된다. 수목원은 동화적인 분위기를 가진 그런 곳이고, 생명성이 약동하는 공간임을「수목원에서」는 동심의 시선으로 잔잔히 노래한다.
⑷는 여름 우포늪에서 받은 기운으로 말미암아‘가시연꽃, 노랑어리연꽃 연신 되새김질 끝에// 밤새 진초록 물을/ 삼켰다 뱉었다 하며,// 늪 속을/ 허우적거리는/ 한 마리 붉은 소’로 거듭나는 시의 화자의 모습이 실감실정으로 다가오고 있다.
⑴
한밤중 한 시간에 한두 번쯤은 족히
찢어질 듯 가구가 운다, 나무가 문득 운다
그 골짝
찬바람 소리
그리운 것이다
곧게 뿌리내려 물 길어 올리던 날의
무성한 잎들과 쉼 없이 우짖던 새 떼
밤마다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일순 뼈를 쪼갤 듯 고요를 찢으며
명치끝에 박혀 긴 신음 토하는 나무
그 골짝
잊혀진 물소리
듣고 있는 것이다
-「가구가 운다, 나무가 운다」전문
⑵
어느 선로 아래 놓여 시간을 떠받쳐 올릴
기름기로 잘 절인 저 무수한 침목들
야적장 한복판에 쌓여
햇살에 빛나고 있다
한때는 꼿꼿한 수직의 꿈이었다가
가로눕혀져 끝없는 굉음을 퉁기어 올릴
침목들, 침묵의 소리에
가만 귀 기울인다
버팀목이었기에 결코 서럽지 않던 나날들
온몸으로 버팅기며 일러주고 있는 듯
끝없는 쇠바퀴에 눌려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침목, 침묵들」전문
⑶
거대한 칼날은 느닷없이 목줄 찢고
가슴 아래쪽을 불쑥 헤집고 나온 손
두 발은 몸통을 잃고 기우뚱하니 놓인,
사각의 시멘트에 문득 갇혀 버린 꿈
더는 어쩔 수 없이 뒤틀리고 문드러져
불현듯 쇠사슬 휘감고 허공을 딛고 서는
-「허공을 딛고 서는」전문
⑷
충북 그리고 충남, 물빛 경계를 허물며
무슨 아픈 조치 기다리는 사람처럼
7번 홈 한 귀퉁이에 서서
바퀴 소리를 듣는다
쓰린 세월의 무게 떠받쳐 올리고 있는
붉은 녹물 깊게 밴 각이 진 버팀목들
역무원 눈가의 주름살
또 한 번 파들거린다
머물 데를 찾지 못한 무수한 쇠바퀴들
쿵쾅거리며 밤새 머리맡을 지날 때
한 그릇 찬물에 괴는
가슴뼈 금 가는 소리
-「조치원 시편」전문
⑴의 시적 모티브는 생명성에 기인하고 있다. ‘한밤중 한 시간에 한두 번쯤은 족히/ 찢어질 듯 가구가, 나무’가 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이 오밤중이기에 보다 선연히 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가구 이전에 생생히 살아 있던 나무였기에 회귀 본능이 작동하였을 법하다. 그런 까닭에 ‘그 골짝/ 찬바람 소리’가 그리워져서 사람들이 곤히 잠든 한밤중에 고요한 울음소리를 내곤 하는 것이다. 둘째 수에서는 뿌리 내리고 있던 나무일 때를 그리고 있다. 즉 ‘물 길어 올리던 날의/ 무성한 잎들’속으로 찾아들던 ‘쉼 없이 우짖던 새 떼’들의 환영이다. 정적인 이미지의 나무에 동적인 이미지의 새 떼들이 찾아드는 일은 이질적인 생명의 역동적인 교감이다. 그로 말미암아 상생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밤마다/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나무가 달려갈 수 있도록 하는 동력이 곧 소리인 셈이다. 그 일이 하도 간절하여서 ‘일순 뼈를 쪼갤 듯 고요를 찢으며/ 명치끝에 박혀 긴 신음 토하는 나무’라는 대목이 빚어졌을 것이다. 결국 나무와 사람과의 교감이다. 그러므로 景의 세계인 나무와 情인 자아 곧 사람이 ‘그 골짝/ 잊혀진 물소리’를 함께 듣게 된 것이다.「가구가 운다, 나무가 운다」는 그러한 발상을 바탕으로 생명성을 일깨우고 있다.
생태시조에 대한 이정환의 관심은 남다르다. 그의 시법은 늘 새로우면서도 많은 의미를 활용하고 있다. 심산에서 나무를 벌목할 때와 같은 아픔과 울림이 있다. 주제가 직접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찬찬히 음미할수록 생태의식이 내재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상범은 이정환의 이러한 시법을 우주의 생성과 세월, 무언의 대화, 교훈 등이 어우러져 작자의 정신세계를 확대해가고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솜씨가 만만찮은 것으로 보고, ‘볼 수 없음을 보게 하고, 들을 수 없음을 듣게 하는 득음의 경지와도 상통한다.’고 하였다.
‘산의 깊이를 저 나무의 뿌리는 안다’라고 읊은 「천착」의 시인, 든든한 반석에 천착하는 영혼의 집 모양과 그 짜임새가 갖는 여러 가지 멋을 찾기 위해 먼저 그의 시어들 ‘찢어질 듯, 곧게, 뿌리내려, 길어 올리던, 쪼갤 듯, 꼿꼿한’이 갖는 공학적 의미를 가지고 살펴보면 그의 시는 수직적이다.
⑵는 소재 면에서 ⑴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어느 선로 아래 놓여 시간을 떠받쳐 올릴/ 기름기로 잘 절인 저 무수한 침목들’에게서 나무가 침목이 되어 엄청난 시간의 무게를 꿋꿋이 견디고 있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한때는 꼿꼿한 수직의 꿈이었다가/ 가로눕혀져 끝없는 굉음을 퉁기어 올릴/ 침목들’의 ‘침묵의 소리’를 시의 화자는 귀담아 듣는다. 침목들은 무언가 계속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무관심한 이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침목들의 현재를 진단한다. ‘버팀목이었기에 결코 서럽지 않던 나날들’이라고. 그렇기에 세월이 갈수록 갖은 어려움들을 온몸으로 잘 버티어야 함을 환기시키고 있다. ‘끝없는 쇠바퀴에 눌려/ 더욱 견고해지고 있’는 침목들은 온몸으로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⑶은 한 불운했던 조각가의 최후를 노래하고 있다. 그는 의식의 파편화 현상에 함몰되어 스러져갔다. 끝내 허공을 딛고설 수밖에 없었던 이의 초상을 직조하면서‘뒤틀리고 문드러져’서는 아니 될 사람살이에 대한 열망을 역설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⑷는 조치원이라는 지명에서 보듯 그곳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느낀 소회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조치원’에서‘조치’라는 낱말을 분리하여 시의 화자는 스스로의 힘이 아닌 타자나 다른 힘을 통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자아를 성찰 중이다. 그 아픈 조치는 ‘한 그릇 찬물에 괴는/ 가슴뼈 금 가는 소리’로 마무리되고 있다.
⑴
1
언제 이 철판이 튕기어 오를지 모른다
흙의 숨통 틀어막고 땅을 파헤치고 있는
파헤쳐 길을 열고 있는
그 길목 어디쯤에선가
굉음이 치솟고 거센 불길 이글거릴 때
네 눈이 네 몸뚱어리가 무수한 쇳조각과 함께
별안간 튕기어 올라
허공을 메울지 모른다
2
슬프지만 그것은 몰락을 서슴지 않은
욕망의 포신으로부터 솟구쳐 오른 화염
무덤 속 썩은 관까지
까뒤집어 놓는다
급전직하의 사태, 외려 느긋이 즐기며
차단된 하루하루로 지상에 떠 있는 나날
별안간 튕기어 올라
불타오를지 모른다
-「상판 위에서」전문
⑵
구제역 연쇄살인 백두대간 녹이는 산불
폐비닐 잔뜩 껴안고 신음하는 흙으로 누워
참으로 기막힐 일에도 기막히지 못 한다
미친 기계 속으로 연신 빨려 들어가서
가상공간을 떠다니는 뻘겋게 충혈된 눈
참으로 숨 막힐 일에도 숨 막히지 못한다
-「면역에 대하여」전문
⑶
길 위에 붙들려 숨 막히게 밀리는 저녁
수천수만 바퀴들이 너를 내리누를 때
안에서 들끓는 외침 내 귀엔 또렷이 들리느니
-「도시론·3」둘째 수
⑷
길 위의 느긋함이란 그 어디에도 없는
바짝 붙어 뒤쫓는 급살 맞을 살풍경
짐승이 짐승을 물어뜯는 숨 가쁜 혈전이다
영영 끝나지 않을 내란의 밤은 오고
불빛이 불빛을 물고 벼랑 끝을 내닫는
그 어떤 힘으로도 이젠 제어치 못할 질주여
-「도시론·4」전문
⑸
몸의 일부는 이미 먼지가 되어 버렸을
마구 휘감기어 닳던 어두운 길의 흔적들
둥글게 말아 올리며 밤 불빛에 떨고 있다
만근 쇳덩이에 눌린 시간의 무덤인가
무수한 욕망들 솟구치다 까무러치고
먼 길을 지쳐 나가던 근골마저 바스라진다
세상 떠받치던 힘 스러져 간 자리마다
살 엘 듯 파고드는 이른 새벽의 한기
지하도 한켠을 떠도는 기침 소리 듣는다
-「폐타이어에게」전문
⑴은 오래 전에 대구지하철 사고를 떠올리게 한다. ‘언제 이 철판이 튕기어 오를지 모른다’라는 섬뜩한 첫 구절이 그것이다. ‘흙의 숨통 틀어막고 땅을 파헤치고 있는/ 파헤쳐 길을 열고 있는/ 그 길목 어디쯤에선가’에서 경천동지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있다. 둘째 수는 더욱 끔찍하다. ‘굉음이 치솟고 거센 불길 이글거릴 때/ 네 눈이 네 몸뚱어리가 무수한 쇳조각과 함께/ 별안간 튕기어 올라/ 허공을 메울지 모른다’라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수와 넷째 수에서도 더욱 점층적으로 무서운 예고의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⑵는 보다 구체적으로 생태계의 파괴와 훼손, 나아가 첨단기기에 함몰되어 자아 상실의 삶을 살고 있는 실상을 실감실정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 홍성란은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조주스님은 佛을‘평상의 마음’이라 했다. 이를 풀이하면 ‘번뇌 망념이 없는 본래의 청정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 망념에 물들어 있으면서 번뇌 망념에 물들어 있는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세상에는 기막히고 숨 막히는 일들이 반복된다. 좀 잊을 만하면 되살아나는 유괴살인 사건, 패륜범죄, 부정비리, 자연재해에서부터 갖가지 인재…. 심지어 인터넷에는 자살하고픈 사람을 모집하는 사이트가 등장했는가 하면 도둑질하는 기술도 가르쳐준다고 한다.
이런 도착적인 사건들을 보고 우리는 어느 사이 면역이 생겨 예사스럽게 보고 예사스럽게 말한다. 이를 보다 못한 시인은 시인 특유의 역설적 화법으로‘기 막히는 일에도 기막히지’않고 ‘숨 막히는 일에도 숨 막히지 않는다.’라고 절규한다.
실로 이러한 문제들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가 점점 세밀히 분화되고 복잡다단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기막힐 일에는 기막혀야 하고 숨 막힐 일에는 숨 막혀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워낙 대형 악재가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둔감해지고 면역이 되어버려서 실감을 하지 못하게 되고 만 것이다.
⑶은 ‘길 위에 붙들려 숨 막히게 밀리는 저녁/ 수천수만 바퀴들이 너를 내리누를 때/ 안에서 들끓는 외침’을 듣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너’는 길을 말한다, 도시론을 노래하면서 늘 내리눌리는 존재에 대하여 눈길을 돌리고 있다. 도시의 삶들은 매우 복잡하고 타인들을 돌아볼 틈이 없게 만든다. 하물며 그 누가 길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하겠는가.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고 주인이라는 착각으로 부단히 움직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다.
⑷는 도시인들의 폭력적인 질주가 질 제어되지 않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거대 도시 하나가 그와 같은 정황에 처한 것은 아닐까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⑸는 다 닳아버린 폐타이어에서 어떤 억압에 오래 눌려 자존을 잃고 사는 ‘지하도 한켠을 떠도는 기침 소리’의 존재를 그리면서 ‘세상 떠받치던 힘’의 상실에 대한 내밀한 아픔을 드러낸다.
그는「도시론」연작과 함께 생태학적 시각에서 비롯된「압착된 캔들」,「고철야적장에서」,「덤프트럭에게」,「콘크리트 벽」등을 통해 사람살이의 바른 길에 대한 궁구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이우걸이‘문명 비판의 작품을 내놓으면서 갖게 되는 작은 울림은 독자의 반응 이전에 그 스스로가 감지할 수 있는 또 다른 부분의 숙제다.’라고 예리하게 살핀 점은 기억할 만한 일이다. 즉 시인에게는 그만이 지닌 색깔과 향기가 있는데, 그쪽으로 더 매진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중에도 생태학적 시각으로 생산된 작품들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는 충분히 가지고 있는 점도 도외시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 역사의식 구현
이정환은 역사에 대한 정좌를 하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낮은 톤으로 노래한다. 그러나 그 울림은 예사롭지가 않다. 의미심장한 곳을 깊숙이 파고들어 두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⑴
이룰 수 없는 만남이
이루어 놓은 고요
돌로도, 무지개로도
어쩌지 못할 고요
수천만 새 떼들 부딪쳐
피 흘리며 세운 고요
-「벽」전문
⑵
뚫어지도록 쳐다봐도 아무런 말이 없다
즈믄 해의 깊이가 즈믄 해의 높이에 닿아
어디쯤 이르렀는지 이마를 되짚게 한다
왜 거기 서 있느뇨, 내게 묻지 않는다
금성 산정에 얹힌 눈빛 그 서늘함으로
내 안에 천천히 들어와 뿌리를 뻗고 있다
-「탑리 오층석탑」전문
⑴은 자못 역설적이다. ‘이룰 수 없는 만남이/ 이루어 놓은 고요’가 그러하다. 만나야 하는데 만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통탄할 일이 된다. 원래 이 작품은 20여 년 전에 발표될 때 부제 ‘겨레여, 한반도여’가 붙어 있었다. 그 후 삭제하였다. 분단 50년이 가까워올 때까지 겨레의 염원인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움을 노래한 것이다. 중장은 비동일성의 시학이라는 관점에서 살필 수 있는 돌과 무지개가 등장하고 있다. 무력으로도, 대화로도‘어쩌지 못할 고요’앞이라는 것이다. 종장에서는 순국의 열사들을 떠올리게 하듯 ‘수천만 새 떼들 부딪쳐/ 피 흘리며 세운 고요’라고 절박하게 노래한다. 「벽」은 이렇듯 각 장을 체언으로 끝맺으면서 이루지 못한 염원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강렬하게 표출하고 있다.
⑵는 불교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시의 화자와 탑과의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정 종교의 신봉 여부를 떠나 우리의 오랜 역사 속에 세워진 탑과의 내밀한 만남을 통해 자존의식을 북돋운다. 자아인‘시의 화자’와 세계인‘탑’의 혼연일체가 바로 그것이다.
⑴
1
아우스트랄로피테쿠스로부터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에 이르기까지
또는 호모 사피엔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홍적세 그 아득한 날로부터 도무지 까마득한 그 하늘로부터
걸어서 다니기 시작했다고 했지 그들은
절망에서 벗어난 몸짓을 했다고 했지 그들은
어쩌면 종의 기원이 물소리처럼 들린다고 했지 그들은
2
아우스트랄로피테쿠스의 말은 바람처럼 떠돌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표정은 하늘가에 번지고 있다
불현듯, 문화사를 읽다가 떠올린 저 어둠의 연원
아우스트랄로피테쿠스로부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그 후로 불이, 언어가, 말말굽이 역사를 일으키던 그 무렵부터
후빙기 그날의 물로 상기 목 축일 뿐이다, 우리는
-「후빙기」전문
⑵
1
명암 엇갈려
바람 좀체 되눕지 않고
허기진 벼랑 끝에
곤두박질치는 어둠
삽자루 내던져진 하늘
별이 뜨지 않는다
2
문득
탱자울로 치닫는
한 떼의 돌개바람에
온몸
허물어져
피멍 깊이 박혔거니
끝내는 억센 팔뚝의
힘줄마저 삭는다
3
불타는 혓바닥
죄다 쓰러뜨리고
깊은 골짜구니로부터
울려오는 기침 소리
앗기운
당대의 밤은
탱자울에 갇혀 떨고
4
끝내 바닥까지
다 내려앉은 저 허허한 몸짓
어느 날 어느 굴헝 건너
되살아날
별빛인가
도끼가 잔등에 놓일 때
이미 다한 목숨인 것을
-「상황」전문
⑴은 시조 형식에 전혀 구애되지 않고 있다. 긴 명칭으로 그런 점도 있기는 하지만 파격이다. 이 작품보다 훨씬 뒤에 발표된 김상옥의「느티나무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참고로 1998년《열린시조》봄호에 쓴 계간평론을 아래에 옮긴다.
범상치 않은「느티나무의 말」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소유했던 그 모든 말들을 잊는다. 무수한 언어의 홍수 속에 파묻혀 지내다시피하는 타성에 젖은 일상이 어디론가 죄다 쫓겨 가버리고 감당치 못할 밀물이 밀려들 듯이 도저한「느티나무의 말」은 심중의 빈 공간을 남김없이 꽉 채워버린다.
바람 잔 푸름 이내 속을 느닷없이 나울치는 해일이라 불러다오
멀리 뭉게구름 머흐는 날 한 자락 드높은 차일이라 불러다오
천년도 눈 깜짝할 사이 우람히 나부끼는 구레나룻이라 불러다오
-김상옥,「느티나무의 말」전문
한 시인의 일생의 결집이요, 결정체로 읽힌다. 오직 한 길로만 내달려온 생애, 그 결산의 시점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린 함부로 범접치 못할 정신의 세계를 천의무봉의 솜씨로 빚어 올린 관주요, 눈이 번쩍 뜨이는 탄주다. 사실 이런 수사나 의미부여 자체가 사족일 수밖에 없을 만큼 「느티나무의 말」은 참으로 느닷없고 드높고 우람하다.
형식 문제에 초점을 둘 때, 물론 이 작품은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다. 한 편의 단시조로 읽어야할지 세 개의 장이 모두 정도 이상으로 늘어난 것으로 보아 장시조 형태로 보아야 할지 선뜻 규정짓기가 어렵다. 그러나 장시조 쪽보다는 호흡이 다소 긴 변형된 단시조로 읽는 것이 더 무방하리라 본다. 이 작품을 주 논의 대상으로 놓고 수십 번 읽어본 뒤 내린 나름대로의 결론이다. 워낙 그 담긴 주제가 장중한 것이어서 이 경우 내용이 형식 문제를 압도해 버린 느낌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잣대로「느티나무의 말」을 재단할 수는 없다. 물론 이 말은 형식 문제에 한해 이 작품에게 어떤 특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각장마다 결구에서‘불러다오’로 끝맺고 있는 것이 각운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일견 김춘수의「꽃」에서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라는 구절이 함축하고 있는 강렬한 실존의식에 못지않은 존재에 대한 부르짖음이 실로 아침 수평선보다 더 팽팽히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기서 해일과 차일과 구레나룻이 의미하는 바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참으로 한 사람의 생애를 이처럼 적절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해일이되 바람 잔 푸른 이내 속을 느닷없이 나울치는 해일이요, 차일이되 멀리 뭉게구름 머흐는 날 한 자락 드높은 차일이요, 구레나룻이되 천년도 눈 깜짝할 사이 우람히 나부끼는 구레나룻임에랴.
해일은 격정의 젊음을, 차일은 지천명에 이르러 생을 이윽히 관조하는 내적 조응의 한 상징으로, 구레나룻은 유한의 삶속에서 천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뛰어 넘는 영원 희구 상상 혹은 마침내 덧없음을 극복하게 될 초월 의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읽힌다. 이와 같이「느티나무의 말」에서 3장은 곧 인생을 3기로 나누어 생각하게 한다. 불타오를 때와 그 불꽃을 안으로 다독일 때와 그 자 불씨를 영원의 한 정점으로 옮겨 놓는 일까지 역동적으로 형상화 되어 있다.
그 뉘가 시를 하나의 소우주라 했던가. 소우주의 진면목을 여기 이 「느티나무의 말」이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또한 시인과 느티나무, 느티나무와 시인 사이의 적절한 거리가 시종 팽팽한 긴장의 현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단풍나무나 참나무, 소나무의 말이 아닌, 드높고 우람한 느티나무 그 ‘느티나무의 말’이다. 시인은 아마 어느 날 느티나무로부터 희수를 넘긴 자신의 모습을. 전 생애를 불현듯 떠올리면서 이 작품을 얻게 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김상옥은 굳이 시조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은 시집『삼행시초』를 펴낸 적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시조의 틀을 갖추되 3행으로 직조하면서 장마다 전통 율격을 넘어서는 작법을 보인 것이다. 이러한 점을 다시 제기하고자 하는 측면에서 평문을 길게 인용했다. 「느티나무의 말」은 그 뒤로 많은 이들이 논의한 적이 있다. 일정한 형식을 갖춘 시조가 가진 태생적인 문제다.
다시「후빙기」를 보자. 둘째 수는 거침이 없다. ‘걸어서 다니기 시작했다고 했지 그들은/ 절망에서 벗어난 몸짓을 했다고 했지 그들은/ 어쩌면 종의 기원이 물소리처럼 들린다고 했지 그들은’이라는 구절들에서 험한 자연 환경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가야 했던 고뇌의 일단이 읽힌다. ‘아우스트랄로피테쿠스의 말은 바람처럼 떠돌고 있’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표정은 하늘가에 번지고 있’는 것을 ‘문화사를 읽다’가 생각하게 되고, ‘어둠의 연원’까지 떠올리게 된다. 이 작품을 두고 박기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무지 까마득한 그 하늘로 표현되는 시원의 자연 속에서 걸어서 다니기 시작하고 절망에서 벗어난 몸짓을 하던 인간의 표정, 어둠의 연원을 뚫고 불과 언와와 말발굽의 역사를 일으키던 인간의 존재에 대한 탐구 열기가 불처럼 뜨겁게 번져 온다. 시조에 대한 선입견이나 통념적인 인식을 과감히 벗어던진, 참으로 가슴 후련한 보법이 아닐 수 없다.
「후빙기」는 인간의 연원을 탐구하고자 하는 상상력의 세계가 개성적으로 직조되어 있고 그 호흡이 활달하다. 사설시조로 담아야 할 내용이어서 내용물이 그릇에 넘쳐나는 느낌을 안긴다.
⑵는 시대 상황을 노래하고 있되 구체적이지는 않다. 모든 대목이 은유로 축조되어 상상력을 동원하여 읽어야 한다. ‘허기진 벼랑 끝에/ 곤두박질치는 어둠’, ‘온몸/ 허물어져/ 피멍 깊이 박혔거니’, 앗기운 당대의 밤은/ 탱자울에 갇혀 떨고’, ‘끝내 바닥까지/ 다 내려앉은 저 허허한 몸짓’ 등에서 극대화된 고통의 외상을 읽는다. 그러나 ‘어느 날 어느 굴헝 건너/ 되살아날/ 별빛인가’라는 넷째 수 중장에서 희망을 읽는다. ‘도끼가 잔등에 놓일 때/ 이미 다한 목숨인 것’이라는 결구에서 단호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가로막혀 있는 어두운 현실 상황을 타개하고 새로운 길을 열고자 하는 결기의 표출이다.
박기섭은「상황」을 두고 ‘참담한 시대의 아픔과 외면할 수 없는 삶의 모습에 상당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집착은 곧 개혁이나 혁신을 이루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으므로 그러한 의식은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⑴
꽃을 본다
어둠이 빼곡히 밴 꽃잎사귀를
몇 발의 총성 끝에
몰려온 저 정밀을
그 어떤 올무로라도
포획치 못할
울음을
-「꽃」전문
⑵
1
무어라 이를 텐가, 저 찢겨진 잔등을
하릴없는 아픔만이 아픔을 추스르는 밤
불현듯 몇 발의 총성
산을 넘어 오고 있다
2
아무리 소리쳐도 돌아오지 않는 밤
속엣것 뒤틀리고 온몸 들끓어 올라도
쉽사리 허물지 못할
산은 가로 누워 있다
-「한 사람이 마주한 산은」전문
⑴에서 ‘꽃’은 평화를 표상하고 있다. 그 꽃은 ‘어둠이 빼곡히 밴 꽃잎사귀’이어서 불안하다. ‘몇 발의 총성’을 들은 뒤의 ‘몰려온 저 정밀’이기에 그 불안은 가시지 않고 있다. 그러나 종장에서 힘주어 말한다. ‘그 어떤 올무로라도/ 포획치 못할/ 울음’이라고. 이 때 울음은 평화지향일 것이다. 꽃이 온전히 꽃이 되기 위해서는 어둠도 물리쳐야 하고, 몇 발의 총성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꽃」은 그런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⑵에도 ‘몇 발의 총성’이 들린다. ‘찢겨진 잔등’으로 말미암아 ‘하릴없는 아픔만이 아픔을 추스르는 밤’이 있다. 그 밤은 평화롭지 못하다. 총성 소리가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소리쳐도 돌아오지 않는 밤’ 즉 평화로운 안식의 밤은 오지 않고 ‘속엣것 뒤틀리고 온몸 들끓어 올라도 쉽사리 허물지 못할 산은 가로 누워 있’는 상황이다.「한 사람이 마주한 산은」은 깨어 있는 한 사람 앞에 가로막혀 있는 산, 가로막혀 있는 벽이라는 커다란 장애물에 대한 보고서다. 분단의 현실을 은유하고 있다.
다음 작품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
⑴
떨어져 있어도 너는 홀로 있는 것 아니다
끝없이 댕기는 핏줄 느꺼워하며 우리들
너에게 비로소 안겨 이 겨레를 생각한다
반도의 피붙이로 여기 이렇게 솟아나서
그 무슨 상징처럼 때로 더운 눈물처럼
독도여, 너는 언제나 우리 곁에서 우뚝하다
자기 땅이라고, 竹島라고 우기는
그네들을 보며, 너는 온몸으로 말하리라
조선의 혼이 내 안에 흐르고 있노라고
-「독도」전문
⑵
하나님, 이 땅의 골 이제 채워 주소서 저 햇빛과 구름, 바람의 거침없음처럼 이 땅의 갈라진 골을 이제 메워 주소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나무와 날짐승처럼 서로의 호흡과 눈길 마음껏 주고받는 이 땅에 그런 새 누리 넓게 펼쳐 주소서
노도에 깎이어도 아픈 줄을 모르고 반도의 막내둥이 꿇어 엎드린 한밤 저 별밭 출렁이도록 함께 흐르게 하소서
-「마라도의 기도」전문
⑴에 대하여 이상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못된 제국주의 속성으로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는 일본이, 이번에는 ‘일본 중학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로 독도 침탈 야욕을 노골화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06년 12월 1일자의 무크《디카詩 마니아》 2호에 발표된 이정환의 디카시「독도」가 주목을 끈다. 시인은 독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사랑하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 심장의 언어를 듣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독도가 온몸으로 말하고 있음을 포착하게 되었을 것이다. 시인은 기꺼이 독도의 에이전트가 되어, 반도의 피붙이로 솟아나서 그 무슨 상징처럼 더운 눈물처럼 언제나 우리 민족 곁에 우뚝 솟은 독도, 조선의 혼이 흐르고 있는 독도 그 심장의 뜨거운 언어를 토해내고 있다.
「독도」는 보다 구체적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떨어져 있어도 너는 홀로 있는 것 아니다’라면서 공존하고 있는 점을 환기한다. 그것은 ‘끝없이 댕기는 핏줄’을 느꺼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도를 통해 이 겨레를 생각하고, ‘반도의 피붙이’, ‘그 무슨 상징처럼 때로 더운 눈물처럼’ 독도는 우리 곁에서 우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온몸으로 말하’는 독도, ‘조선의 혼이 내 안에 흐르고 있노라’는 독도 앞에서 숙연해지게 된다.
⑵는 국토의 최남단 마라도에서 드리는 기도 시편이다. ‘하나님, 이 땅의 골 이제 채워 주소서 저 햇빛과 구름, 바람의 거침없음처럼 이 땅의 갈라진 골을 이제 메워 주소서’라고 다소 직설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이어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나무와 날짐승처럼 서로의 호흡과 눈길 마음껏 주고받는 이 땅에 그런 새 누리 넓게 펼쳐 주’기를 열망한다. 그 간절함은 ‘노도에 깎이어도 아픈 줄을 모르고 반도의 막내둥이 꿇어 엎드린 한밤’이어서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하늘의 ‘저 별밭 출렁이도록 함께 흐르게 하소서’라는 결구는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
「독도」와「마라도의 기도」는 간절함이 묻어나는 시편들로서 전자는 국토 수호 의지를, 후자는 평화통일에의 염원을 담고 있다.
⑴
볕살 좋이 들어 눈부셔라 남녘 마을
노랑 바람개비 노란 바람 돌리는 길
울음을 짓누르고 선 부엉이바위 보인다
밀짚모자 아래 푸른 휘파람 흩날리며
힘찬 페달로 마을 한 바퀴 휘도는 일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었을까 묻는다
한 송이 꽃 바치고 눈을 감는 앳된 바람
삶과 죽음 떠남과 머묾 그 모진 끄트머리
먼저 간 그 길을 좇는 노란 바람이 분다
-「남녘마을의 여름」전문
⑵
가슴 풀어헤치고 바다와 마주앉아서
당신은 장탄식 끝에 한 마디 묻는다
무엇이
그리 아쉬워
배를 삼켜 버렸는지
사람이 삼켰다고 바다는 대답한다
욕심이 삼켰다고 바다는 대답한다
끝까지
밀어 올렸지만
힘에 부쳤노라고
파도치고 파도쳐도 파도칠 수밖에 없는
바다일 뿐이라고 받아들일 밖이라고
파도는
당신 안으로
뛰어들며 말한다
-「맹골 바다」전문
⑶
창을 깨뜨렸으나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어간 한 사람을
잠수사는 보았다
머리를 내밀었지만
살아나오지 못한 이
빠져나올 수 없는
얼굴 크기의 창문
안간힘을 다한
마지막 희망마저
밀려온 물살이 온통
삼켜버린 순간을
-「물속의 창」전문
⑴은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소회를 잔잔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봉하 마을의 여름이다. ‘볕살 좋이 들어 눈부셔라 남녘 마을/ 노랑 바람개비 노란 바람 돌리는 길’은 평화롭다. 하지만 ‘울음을 짓누르고 선 부엉이바위 보’이는 까닭에 그 평화의 이면에는 크나큰 아픔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이 작품에 대해 유성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름 풍광은 볕살 눈부신 남녘 마을에서 채집하였다. 그런데 남녘마을은 그저 단순히 방위상의 남쪽에 있지 않다. 그곳은 노랑 바람개비 노란 바람 돌리는 길을 품은 채 역사의 비극적 순간을 각인하고 있는 공간이다. ‘부엉이바위/ 밀짚모자/ 페달’ 등의 세목들이 그곳에서 살다 그곳에 묻힌 한 자유인의 삶을 조형한다. 그래서 그곳에서 부는 바람은 꽃 한 송이 바치고 눈을 감은 채 ‘삶과 죽음 떠남과 머묾 그 모진 끄트머리’에서 불어와 ‘먼 저간 그 길’을 좇고 있는 것이다. 노란 바람이 부는 여름은 그래서 삶과 죽음, 떠남과 머묾이 공존하는 시간적 은유로 다가오고 있다.
역사는 후세에 정립되겠지만 일어나서는 아니 될 일들로 말미암아 우리의 역사는 크고 작은 상처들로 점철되어 오래도록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일이 허다하다. 다른 분야에 비하여 정치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남녘마을의 여름」을 그런 시각에서 눈여겨 읽어야 할 작품이다.
⑵와 ⑶은 얼마 전 일어난 세월호 사건과 깊이 연관된 시편들이다. ⑵는 보다 구체적으로 묻고 있다. ‘가슴 풀어헤치고 바다와 마주앉아서/ 당신은 장탄식 끝에 한 마디 묻’고 있다. ‘무엇이/ 그리 아쉬워/ 배를 삼켜 버렸는’가 하고. 그를 두고 ‘사람이 삼켰다고, 욕심이 삼켰다고’ 단호히 바다는 답한다. 그리고 ‘끝까지/ 밀어 올렸지만/ 힘에 부쳤’다고 밝힌다. 바다는 이어서 말한다. ‘파도치고 파도쳐도 파도칠 수밖에 없는/ 바다일 뿐이라고 받아들일 밖이라’면서 ‘파도는/ 당신 안으로/ 뛰어들며 말’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세월호 사건에서 바다의 잘못은 전혀 없다. 모든 것은 인재일 뿐이다. 사람의 잘못으로 기인한 일이다. 그러므로 ‘맹골 바다’의 항변은 한 마디도 그르지 않다.
⑶은 뼈를 저미게 하는 구체적인 죽음의 정황을 세밀히 그리고 있다. ‘창을 깨뜨렸으나/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어간 한 사람’을 잠수사는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것이다. ‘머리를 내밀었지만/ 살아나오지 못한 이’의 안타까운 순간은 ‘빠져나올 수 없는/ 얼굴 크기의 창문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안간힘을 다한/ 마지막 희망마저// 밀려온 물살이 온통/ 삼켜버린 순간’을 그는 처절하게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대체 이러한 비극은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상황이 우리나라의 적나라한 실상이라는 현실에 통탄할 뿐이다. 「물속의 창」은 그런 점에서 지우고 싶지만 영영 지울 수 없는,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⑴
넘지 못하는 것
참 마음 아픈 일이지요
눈에 빤히 보이는 곳
멍하니 바라보다가
되돌아 내려오는 길
바람만 차가웠지요
-「자유의 다리에서」전문
⑵
어느 날 책 속의 길
그 길을 걸었어요
들찔레 꽃향기 같은 아뜩한 힘에 이끌려
길 끝에
무엇이 있을까
자꾸 걸어갔어요
정말 책 속에는
끝없는 길 보였어요
북녘 어린이들의 퀭한 눈빛과도 마주치고,
꿈같은
우주 바깥까지도
숨 쉬며 걸었어요
세종대왕께서 내 머릴
쓰다듬는 꿈도 꾸고,
말 타고 국내성을 한 바퀴 휘돌아보았어요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것
이젠 믿어지겠지요
-「책 속의 길」전문
두 편은 동시조집에서 찾은 작품이다. ⑴은 ‘자유의 다리’에서 북으로 가는 길이 막혀버린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눈앞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다. 같은 우리 땅이므로. 그곳은 ‘눈에 빤히 보이는 곳’이어서 ‘멍하니 바라보’는 일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시의 화자는 되돌아오면서 ‘바람만 차가웠지요’라고 잔잔히 읊조린다. 그 잔잔한 어투에는 강한 열망이 묻어난다.
⑵는 시상의 전개가 활달하다.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어느 날 책 속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 힘은 ‘들찔레 꽃향기 같은 아뜩한’ 어떤 힘에 의해서다. 무한한 호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끝없는 길’에서 먼저 ‘북녘 어린이들의 퀭한 눈빛과도 마주치고, ‘우주 바깥까지도/ 숨 쉬며’ 걷는다. ‘세종대왕’도 만나고 ‘말 타고 국내성’을 휘돌아보기도 한다. 이 모든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책 속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역사의식을 구체적으로 구현한 작품들을 살폈다. 특히「벽」이나「독도」와「마라도의 기도」같은 시편들은 통일 교육과 애국애족 교육의 텍스트로 쓰일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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