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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내 안에
2025년 12월 25일
눅 1:26-38 /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 교황청, 수백년 논쟁 끝냈다. ‘성모 마리아는 공동 구세주 아냐’ / 교황청이 가톨릭 신자에게 성모 마리아를 ‘공동 구세주’로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기독교 내부에서 성모 마리아가 세상을 구원한 예수를 도왔는지를 두고 수백 년간 논쟁이 이어져 왔는데, 교황청의 새 교령으로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지난 11월 4일 가톨릭 뉴스에이전시(CNA)에 따르면, 교황청 신앙교리부는 이날 성모 마리아에 대해 ‘공동 구세주’라는 칭호는 적절하지 않다고 밝혔다. 교황청은 ‘성모 마리아는 예수를 낳음으로써 모든 인류가 기다렸던 구원의 문을 연 것’이라며 ‘공동 구세주’가 아닌 신과 인류의 중재자로서 성모 마리아의 역할을 부각했다. 그동안 가톨릭은 ‘마리아는 죄가 없다, 마리아는 죽지 않고 승천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라고 주장했었다. 기독교는 천주교의 이런 주장을 ‘마리아 숭배’(Mariology)라 하여 비판했다. 마리아라는 한 인간에게 기도하고 또 그를 찬양하는 성모송을 만들어 부르는 일은 그 자체가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드릴 대상, 찬양을 받으실 분은 오직 성삼위일체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리아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마리아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문제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리아는 여전히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의 좋은 모범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시고 소중하게 사용하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리아가 본을 보여준 신앙의 모범은 무엇일까?
1. 성령으로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믿음과 겸손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가브리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도 없고 받으려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다. 마리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유일무이(唯一無二),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것으로 여겨 마리아를 너무 높여 떠받드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았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은 ‘여자들보다 높은 네가 복이 있으며’라고 노래하지 않고, ‘여자(들)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눅 1:42)라고 노래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한 것 외에 다른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여느 신자와 똑같았다. 성경에 기록된 그녀의 마지막 말은 가나 혼인 잔칫집에 가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하인들에게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5)라고 지시했던 것이고, 그녀가 성경에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장면은 119명의 다른 신자들과 함께 성령이 임하시기를 마가 다락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도하는 모습이었다(행 1:12-15).
이런 마리아의 삶을 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앙생활을 배워야 한다.
2.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야 한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눅 1:28-30 /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은혜’란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好意)이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마리아의 성품이 좋거나 아름다운 행실 때문이 아니라, 마리아의 성품이나 행실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셨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은혜’는 내가 원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은혜’는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실 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은혜를 받은 자’에서 나온 것으로 ‘은혜를 베풀다. 복을 주다.’의 의미라고 한 가브리엘 천사의 진술은 신약 성경에서 딱 두 번 사용된 헬라어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한 번은 누가복음 1:28에서 사용되었고, 또 한 번은 에베소서 1:6절에서 사용되었다. 에베소서에서 그 단어는 예수 믿는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엡 1:6 /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따라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은혜를 입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 믿음도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살후 3:2 /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엡 2:8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므로 성도는 마리아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 마리아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능력이나 성품이나 재능, 물질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마리아는 가난한 처녀였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재물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는 버림받은 민족,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데는, 당시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의 시민권 같은 특별한 시민권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녀는 유대인들조차도 무시하는 나사렛 출신이었다(요 1:46). 하나님의 복은 특별한 주소, 특정한 지역을 가지고 있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은혜는 세상 사람들의 인정과 호평을 받는 데 필요한 모든 것과 무관하다.
누가복음 1:46-55에 기록된 마리아의 ‘은혜의 노래’(일명 마리아의 찬가)가 이를 증명한다.
눅 1:46-56 /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마리아의 찬가에는 하나님에 의한 세 가지 개혁을 말해 주고 있다.
❶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신다.
이것은 도덕적 개혁을 말한다. 기독교는 교만함을 죽이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되면, 인간의 모든 교만은 그 마지막 가면까지도 벗겨지기 때문이다. 때때로 사람들에게는 강렬한 빛에 비추어서 자신을 깊이 부끄럽게 여기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 오 헨리(O. Henry)의 단편 가운데 있는 이야기 / 어떤 시골에서 자라난 젊은이가 있었다. 학교에서 그는 언제나 어떤 소녀와 나란히 앉아있게 되었는데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 후에 그는 도시로 나가 악한 길에 빠져갔다. 그는 소매치기와 좀 도둑이 되고 말았다. 하루는 어떤 늙은 부인의 지갑을 낚아챘는데, 그것을 잘 해냈기 때문에 그는 혼자 기뻐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가 전에 좋아하던 여자가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녀는 아직도 귀엽고 천진난만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자기 자신이 보잘것없는 비열한 존재로 보였다. 부끄러운 마음이 온몸에 화끈거려, 가로등의 차디찬 쇠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하나님, 저는 죽고 싶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이제 자신을 보았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자신을 보게 하시는 분이다. 이리하여 도덕적인 개혁은 시작되는 것이다. 참으로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요(잠 15:33),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이다’(잠 16:18).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겸손하신 왕의 모습이었다.
슥 9:9 /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 천박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시더니, 세상에 사시는 동안도 겸손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죽으러 가시는 마당에까지 겸손의 상징인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삶의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시고 몸소 실천해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참된 평화를 이룩하시는 방법은 바로 섬기는 겸손인 것을 보여주셨다. 참된 사랑은 겸손에서 비롯된다.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❷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들을 낮추시며 비천한 자를 높이신다.
이것은 사회적 혁명이다. 기독교는 이 세상의 간판과 지위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회적인 계급과 지위는 사라졌다. 어느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한 부부가 있는데 남편은 매독에 걸려 있고 아내는 심한 폐결핵에 걸려 있다. 이 가정에 아이들 넷이 있는데 하나는 며칠 전에 병으로 죽었고 남은 세 아이도 결핵으로 누워 살아날 것 같지 않았다. 이 부인은 현재 임신 중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러자 그 학급의 한 학생이 ‘낙태 수술해야 한다!’ 하고 대뜸 소리쳤다. 그때 교수는 ‘자네는 지금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라고 말했다. 이런 불행한 환경에서 다섯 번째 아이로 태어난 것이 베토벤이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뜻은 다른 길인 경우가 많다. 이 땅에 지극히 작고 적은 자, 작은 무리일지라도 그들이 존중되는 사회적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❸ 하나님은 주린 자들을 배를 불리시고, 부자를 빈손으로 돌려 보내신다.
이것은 경제적인 개혁이다. 비기독교적 사회란 각자가 이익을 취하면 취한 만큼 부(富)를 축적하는 탐욕 중심의 사회이다. 기독교적 사회란, 다른 사람들이 조금밖에 갖지 못하였을 때는 자기도 많은 것을 가지려 하지 아니하는 사회이며,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단지 주기 위해서만 소유하는 사회이다. 기독교는 이처럼 각 사람 속에서 개혁이 일게 하므로 그것은 세계에 개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을 변화시킨다. 겸손한 종들은 복을 받고, 교만한 사람들은 흩어진다. 약한 사람들은 놀라운 힘을 얻게 되고, 힘 있는 사람들은 그 권좌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자리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에게 넘어간다. 배부른 사람들은 굶주리지만 주린 사람들은 배부르게 된다. 부자들은 가난하게 되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혜는 인간 야곱을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되도록 변화시켰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기드온을 승리의 용사가 되게 했으며, 불쌍한 미망인 모압 여인 룻을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와 구주 예수님의 조상으로 만들었다. 또한 은혜는 고집불통이었던 다소의 사울을 사도이자, 기독교 교회 역사상 최고의 선교사와 신학자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로 변화시켰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부르며 수태고지를 했을 때, 천사에게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며 순종했다. 아름다운 겸손과 강인한 믿음으로, 마리아는 하나님이 그녀에게 하고 싶어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린 것이다. 사가랴와는 달리 마리아는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지 않고, ‘어찌 이 일이 있으리까?’라고 물었다(눅 1:18, 34).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는가? 가브리엘은 하나님에게는 능하지 못하심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영이 그 기적을 행하실 것이라고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눅 1:35-37 /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천사를 통하여 들려준 하나님 말씀을 마리아는 굳게 믿었다. 그리고 처녀인 그녀의 태에 예수님이 잉태되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물이 포도주가 되었고, 폭풍우가 잔잔해졌으며, 병든 자가 나았고, 앉은뱅이가 일어섰으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 마리아의 몸은 성령에 덮혀졌고, 그녀의 태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던 성막의 지성소처럼 되었다(출 25:20). 마리아의 노래를 보면, 마리아는 특별히 시편을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녀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에 대해 시편 71:19, 89:10, 98:3, 111:9, 103:13, 17, 107:9 등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하나님 말씀과 약속을 근거한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근거로 행동할 때, 성령은 그 능력을 발하시고 그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말씀을 통해 일하신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일하신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눅 1:45)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마리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근거로 행동하는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겸손한 믿음과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란다.
3. 영광된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눅 1:38 /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는 수태고지를 받고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보았다. 흠정역 성경에서는 ‘계집종’ 즉 ‘하녀’라고 번역했는데, ‘하녀’는 여종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낮았다. 아마도 마리아는 룻이 보아스에게 말했던 것을 떠올렸거나(룻 3:8), 한나가 기도했던 것을 떠올렸을 같다(삼상 1:11). 마리아는 자신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정혼한 처녀였지만 분명히 임신할 것이며, 그것은 사람들의 의혹과 조롱을 받고. 그뿐만이 아니라 자칫 간통한 여인으로 간주하여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메시아를 기도 가운데 기다렸던 시므온도 아기 예수를 보고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눅 2:34-35 /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시므온의 예언처럼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동안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였다(눅 2:35 요 19:25-27).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양식으로 여기셨다.
요 4:31-34 /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온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희생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아무리 십자가 형벌이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요 17:1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엡 6:6). 믿음은 착한 행실로 이어지고, 착한 행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마 5:16). 때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힘들고 심지어는 고통스럽기까지도 하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것은 그보다 더욱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는 어려움마저도 우리 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불순종할 때는 그 어려움이 우리의 적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반응에 따라 우리를 온전하게 할 수도 있고 우리를 징계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이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예수님에게 행하는 언어폭력을 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반면 마리아는 많은 여인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 무리 가운데 한 여인이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고 외쳤다. 예수님은 여인이 한 말의 정당성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눅 11:27-28 /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가운데서 한 여자가 소리쳐 말하였다. ‘당신을 낳고 젖을 먹인 여인은 참으로 복 받은 여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더 복받은 사람이다.’)
마리아는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행하셨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굳게 믿고, 그 뜻에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하시기를 소원한다.
4.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눅 1:35 /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면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을 부어주셔서 능력이 있는 삶이 되게 하신다.
눅 1:37 /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래서 마리아가 기뻐하며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눅 1:49)라고 노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눅 24:49) 예루살렘 성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마가의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여 놀라운 일들을 행하게 되었다.
행 1:4-5 /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 2:1-3 /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무능함을 인정하고, 성령만이 주실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해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엡 5:18-21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범사에 성령에 의지하여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마리아처럼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눅 1:49)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한다.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로 범사에 그리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소원한다.
결 론(읽으면 유익한 글들)
❚ 기독교 역사를 자세히 보면 고통 없이 위대하고 아름답게 이루어진 큰일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 아니, 교회가 짐을 벗어버리고 고통을 겪지 않으니까 그 문화가 망했다. 18세기에 산업개혁으로 영국이 엄청난 발전을 했다. 또 청교도의 부흥 운동으로 영국은 완전히 기독교 국가였다. 그런데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갈라져서 싸우게 되었다. 그때, 영국의 빈민들은 돈 많은 사업주들과 귀족을 향해서 ‘당신들의 지갑이 회개하기 전에는 그 회개는 가짜입니다.’라고 외쳤다. 한편 부자들은 영국의 노동자에게 ‘당신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이 땅에서 일해야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외쳤다. 그 일로 말미암아 카를 마르크스는 만약 이 땅에서 공산화가 된다면 가장 먼저 공산화될 나라가 영국일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은 위기를 벗어났다. 한편 러시아는 인구의 99%가 러시아정교회 교인이었다. 그리고 교회는 계속 부자가 되었다. 저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해서 전 국토의 80%를 교회의 재산으로 삼았다. 모든 사람을 농노처럼 부리면서 ‘너희들이 수고하고 고생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라고 외쳤다. 그러다가 결국 망했다. 러시아가 망할 즈음에 만들어놓은 호사스러운 것을 지금도 크렘린궁 안에 있는 예배당에 가면 볼 수 있다. 교회가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그 문화는 망한다.
❚ 서울 광화문에 있는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의 간증 / 그는 4대째 기독교 집안의 사람이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그는 세계적인 사상가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의 책상머리에는 ‘세계의 사상은 내 안에, 내 안의 사상은 세계로’라는 표어를 써 붙였다. 그런데 목사이신 조부님의 권유로 신학교를 지원했는데 성경 시험에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다. 그가 1년 동안 열심히 성경을 읽고 탐구하는 가운데 말씀 안에서 깨어졌다. 그리고 표어가 바뀌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안에 내 안의 말씀은 세계로’ 그 후로 장신대 교수로 있다가 새문안교회 담임이 되었다.
❚ 과학자들이 사람의 힘으로 생명을 가지고 어떻게 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힘은 생명을 복제하거나 변형케 하는 능력은 있을지 모르지만, 생명 자체를 만드는 일은 인간의 능력 바깥의 문제이다. 인간은 고사하고 생명 있는 조그만 씨앗 하나도 만들 수 없다. 예를 들자면, 콩을 가지고 과학적으로 화학적으로 분석할 수는 있겠지만 그 속에서 생명 자체를 찾거나 분리할 수는 없다. 즉, 콩 속에 단백질이 얼마, 탄수화물이 얼마, 무기질이 얼마, 어떤 영양소가 얼마, 세세히 분석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분석된 성분들을 섞어서 씨 모양으로 만든다고 해서 씨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만든 것을 가져다 심으면 싹이 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온갖 종류의 씨앗들은 다 싹이 난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창조력, 생명력이다.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 그대로를 믿고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아멘! 했다.
❚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매우 인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신학 전통에서 자라난 사람이다. 그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스위스 알프스의 산 밑에 있는 작은 교회를 담임하였을 때 ‘적어도 기적과 관련된 것은 하나도 믿지 않으리라’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교인들과 더불어 매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사도신경을 꼭 암송해야만 했다. 이지적인 신학자임을 자처하는 바르트로서는 특히 ‘동정녀 마리아’부분이 마음에 몹시 걸렸다. ‘내가 동정녀 마리아에 관한 조항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지?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 전체를 빼야 할까? 아니면 이 조항을 읽을 때 나 혼자 침묵을 지켜야만 하는 걸까?’ 정직한 인격을 가진 바르트는 이 문제를 가지고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르트는 앉아서 혼잣말로 다음과 같이 뇌까렸다. ‘과연 20세기에 내가 가지고 있는 지성이 2천 년 동안의 기독교 지혜보다 더 나을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겠지?’ 이 말을 하고 나서 바르트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졌다. 그리고 그는 결심하기를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신조는 교회의 신앙이다. 나는 결코 사도신경에서 이 조항을 빼서는 안 돼. 우리 교인들과 함께 이 조항을 계속해서 고백해야만 해.’
동정녀 마리아의 수태설과 탄생설은 어떤 생물학이나 산부인과 의학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오직 믿음과 결단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심어질 수 있을 뿐이다.
❚ 벤 카슨(Ben Carson) 의사는 머리가 붙은 샴쌍둥이를 수술해서 두 아이 다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하신 유명한 의사이다.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나름대로 인정받았고 수술실적을 쌓은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는 지금도 기독교인으로 정말 희생적인 정신으로 힘든 수술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이다. 벤 카슨은 고등학교 때에 공부를 잘하여 예일대학에 들어갔다. 예일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함께 입학한 모든 학생이 수재들이었다. 그들과 경쟁하고 학과를 따라가는 것이 여간 벅찬 것이 아니었다. 의사가 되려면 반드시 화학 과목을 이수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힘쓰고 애를 써도 점수가 좋지 않아 학교에서 쫓겨날 형편이다. 흑인으로 예일대학에 들어간 것이며 의사가 되겠다고 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화학 과목에서 꿈을 접어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혔다. 벤 카슨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화학 교수는 한 학기 동안 점수가 좋지 않았다고 하여도 학기 말 시험성적이 좋으면 그 점수를 인정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격려하여 주었다. 그래도 벤 카슨은 자신이 없었다. 시험을 앞둔 날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밤 자정이 넘어가고 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하나님 저를 용서하여 주세요. 제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생 헌신하겠다고 하였지만, 하나님을 실망시켰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에게도 참 미안한 인생이 되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는 어려운 화학 과목을 포기하고 그냥 잠에 들었다. 그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자기가 화학 과목 시간에 교실에 앉아 있는데 전혀 모르는 분이 나타나서 칠판에 화학 시험 문제를 풀기 시작하는 것이다. 너무 신비로워서 꿈속에서 그 문제를 받아 적었다. 그러다가 깨어났다. 그가 꿈속에서 문제를 받아 적었기 때문에 그 문제가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날 꿈에서 깨어나서 교과서를 펴면서 시험에 나올 가능성이 있는 문제들을 암기하였다. 그다음 날 아침에 600명이 앉아서 시험을 치르는데 시험지를 받는 순간 너무 놀랐다. 벤 카슨이 꿈에서 보았던 그 문제들이 나온 것이다. 한두 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꿈에서 풀어본 문제들이었다. 학기말 고사 성적이 발표되었다. 흑인 학생 벤 카슨이 97점으로 일등이었다. 벤 카슨을 하나님이 붙들고 쓰시려고 붙여주셨던 것이다. 그는 참으로 많은 것을 공부하였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인데도 자기가 의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지금도 세계 어디를 달려가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 몸을 던져 희생하고 있다.
❚ 뉴욕에 존 로즌 박사(Dr. John Rosen)라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있었다. 긴장으로 인한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치료하는 세계적 전문가였다. 정신과 의사들은 보통 환자들로부터 멀리 분리되어 있으면서 치료한다. 그러나 로즌 박사는 그의 침대를 그들의 병실로 옮겼다. 그들 곁에 침대를 놓고 그들과 함께 행동했다. 그는 그들을 정말로 사랑하며 그들의 생활 방식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말하면 말하고, 그들이 말이 없으면 자신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며 삶을 나누고 뜻을 통했더니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끔 그는 팔을 뻗어 그들을 감싸 안고 포옹했다. 정말 사랑할 수도, 흥미를 느낄 수도 없는 그들이었지만 그들 속으로 찾아가서 사랑했더니 그들의 입에서 ‘고마워요!’(Thank you!)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치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 112장 그 맑고 환한 밤중에 : 작사 에드먼드 시어스(E. H. Sears 1810-1876)목사는 미국 보스턴 출신으로 안수를 받았지만 대도시에서의 목회를 사양하고 버림받은 마을인 웨일랜드로 갔다가 그보다 더 못한 시골로 갔다. 그곳에서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하다가 몸져눕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몸을 회복한 뒤에 또 다시 전처럼 목회 사역에 온 정열을 다 기울였다. 그런 가운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순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미국인으로부터 나온 첫 번째 캐롤 찬송으로서 성탄절의 사회적 메시지를 강조한 미국적인 찬송시를 만들었다. 이 찬송 시에 묘사된 대로 주님의 탄생은 모든 사람이 다 알 수 있는 그런 떠들썩한 탄생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은 해마다 떠들썩한 행사와 준비로 성탄절을 맞는다. 하지만 성탄절의 참 의미는 뒷전으로 하고 그 해 그 해 그냥 지나가며 더 나아가 불신자들은 성탄절이 자기들이 정해 놓은 놀고 즐기는 날 인양 착각하고 있다. 이 찬송 시는 본래 성탄절의 의미인 사랑과 인내와 용서 등 그리스도의 정신을 여러모로 되새겨보는 복된 날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이 찬송은 선율도 아름답지만 그 내용이 “고요 하도다” “찬송 하도다” “들으며 쉬어라 ” “화답 하도다 ” 로 끝을 장식하며 마음에 참된 기쁨을 주는 찬양이다.
❚ 119장 옛날 임금 다윗성에 : 작사자 세실 F. 알렉산더 부인은 아동 찬송 작가로서 영국교회의 보배였다. 그녀의 노래는 어렵지 않으면서 동심의 깊은 곳을 열어 주었고, 음률이 아름답고 부드러워 주일학교와 각 가정에서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였다. 그녀가 평생 지은 찬송가 및 작시는 400편이나 된다. 북 아일래드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맡고 있던 작시자 알렉산더는 요리문답을 어린이들에 가르쳐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어린이들이 이 요리문답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관한 교리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린이들에게 신조의 깊은 진리를 가르친다는 일은 무척이나 힘 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실마리가 풀어졌는데 그녀는 어린이들이 시를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요리문답을 될 수 있도록 간단하게 쓴 것이 바로 이 찬송시를 짓게 된 동기다. 이 찬송이 갖고 있는 특색 중 하나는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평이한 용어로 된 찬송이라는 점이며 비단 어린이들만 아니라 어른들도 어색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는 찬송이라는 점이다.
❚ 109장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유래 : 작사: 요셉 모어(Joseph Mohr, 1792-1848) 작곡: 프란츠 그루버(Franz Gruber 1787-1863) 작사자는 요셉 모어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인 오벤도르프에 있는 성 니콜라스교회 신부로 봉직한 지 3년 되던 해였다. 그리고 이 찬송의 작곡자인 프란츠 그루버는 당시 31세로 학교 교사이자 이 교회의 오르간 반주자였다. 1818년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전국을 순회하는 연극배우 일행이 예수 탄생에 관한 연극을 보여주기 위해 이 마을에 머물렀다. 모어는 연극을 보며 많은 감화를 받았다. 연극이 끝난 후 모어는 잘츠부르크 산맥 기슭 작은 언덕에 올라갔다. 별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밤, 이 작은 마을에서 그는 예수 탄생 당시의 아름다운 광경을 그려보게 되었다. 모어는 갑자기 이 밤에 어울리는 시상이 떠올랐고, 자정이 다 되어 집으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자신의 감상과 시상을 종이에 써 내려갔다. 이 소박한 시 한편이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예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부를 불후의 명곡이 되리라고는 그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교회 반주자인 프란츠 그루버에게 자신의 찬송시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면서 작곡을 요청하였다. 그날이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그날 저녁 성도들은 교회에 모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르간이 고장이 났다. 수리공이 왔지만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급하게 구할 수 없는 재료가 망가져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루버는 기타를 가지고 나왔고 손에는 모어의 시에 곡을 붙인 악보를 들고 있었다. 그는 기타 줄을 튕기며 모어와 함께 반주에 맞추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불렀다. 작사가와 작곡가가 처음으로 함께 찬양을 한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오르간 수리공은 그 찬송에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당시 유럽을 순회하며 공연 중이던 스트라스 어린이 합창단에게 이 곡을 주어 그들의 공연에 이 노래가 불릴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이들이 전 유럽을 순회하며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선 보였는데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모든 청중은 하늘에서 온 노래라고 그 감동을 표현했다. 이 찬송은 독일 섹소니 왕국의 음악 총책임자인 폴렌츠에게 전해졌으며 폴렌츠는 스트라스 어린이 합창단을 초정하여 1832년 크리스마스 전야에 황실교회에서 왕의 가족들에게 들려주었고 프러시아의 왕 프레드릭 윌리엄 4세 앞에서도 이 찬송을 부르게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 아름다운 찬송은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찬송을 특별하고 오묘한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선물로 오도록 허락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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