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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우곡 성지
한국교회 최초 수덕자 홍유한 선생과 후손 순교자들의 안식처
도로주소: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시거리길 397 안동교구
경상북도 봉화군 문수산(1206m) 중턱의 우곡리(愚谷里) 골짜기 안에는 한국 교회 창립 이전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스스로 그 가르침을 고요한 가운데 실천한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있다.
농은 홍유한(隴隱 洪儒漢, 1726-1785년)은 서울 아현동에서 홍창보(洪昌輔)의 아들로 태어났다. 풍산 홍씨(豊山 洪氏) 가문은 정조 임금의 외가인 혜경궁 홍씨의 친정 집안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발휘했던 그는 이미 8, 9세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백가제서(百家諸書)에 통달하여 신동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6세 때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했다. 1750년경부터 이익 선생의 제자들과 교유하며 함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서학(西學)을 연구할 때 홍유한은 유학이나 불교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오묘함이 천주학의 가르침 안에 숨어 있음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했다.
성지 입구 피정집 맞은편에 조성된 홍유한 후손 순교자들의 가묘와 순교자 현양비.깨달은 바가 남달리 컸던 홍유한은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할 것을 결심하고 서울의 살림을 정리하여 1757년 충청도 예산 여촌(餘村)으로 이주하여 18년간 “칠극”에 따른 천주교의 수계생활(守誡生活)에 정진하였다. 고요한 가운데 참 진리를 따라 살았던 그는 1775년 더 깊은 믿음을 위해 경상북도 소백산(1439m) 밑 영주군 단산면 구구리(九邱里)라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다블뤼(Daveluy) 주교가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했듯이 홍유한은 천주교 서적을 몇 권 읽고, 축일표도 기도서도 없었지만 매월 7 · 14 · 21 · 28일 등 7일째 되는 날을 주일(主日)로 정하고 세속의 모든 일을 접어두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또한 금식재(禁食齋)와 금육재(禁肉齋)를 지키는 정확한 날을 모르는 대신 언제나 가장 좋은 음식은 먹지 않는 것으로 규칙을 삼았다. 동시에 육욕을 금해 30세 이후에는 정절의 덕을 실천했다.
그가 이렇게 열심히 수덕생활을 실천하는 동안 정조 임금이 두 번이나 스승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사양했다.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낸 그는 1785년 3월 10일(음력 1월 30일)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 해 4월 문수산 자락에 있는 우곡리에 안장되었다.
2014년 11월 홍유한 선생의 수덕생활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 기존의 성당을 칠극 성당으로 명명하였다.그가 만년에 이르러 10년간 살았던 구구리에는 그의 자취가 서려 있는 유택지가 있고, 이곳에는 경종 4년(1724년) 홍유한의 조부인 홍중명(洪重明)이 임금에게 하사받은 효자문 현판이 가보로 내려오고 있고, 권철신과 주고받았던 홍유한의 친필 서찰들이 후손에 의해 보존되어 오다가 현재는 천진암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록 그는 세례를 받고 교적에 오른 공식적인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학문 연구를 통해 얻은 진리에의 깨달음을 실제 자신의 삶속에서 실천한 경건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의 뜻을 이어받아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한 후손들이 13명이나 된다. 그 중 2명(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은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의해 시성되었고, 5명(홍낙민 루카, 강완숙 골룸바, 홍필주 필립보, 홍재영 프로타시오, 심조이 바르바라)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후손들의 순교 여정을 보면, 1801년 신유박해 때 홍유한 선생의 인척인 홍정호와 재종(再從) 조카인 홍낙민 루카(洪樂敏, 1751-1801년),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한국 최초의 여성회장으로 선교활동에 앞장섰던 강완숙 골룸바(姜完淑, 1761-1801년)와 그의 아들 홍필주 필립보(洪弼周, 1774-1801년),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 임금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洪樂任, 1741-1801년) 등 5명이 순교하였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수덕자 홍유한 선생의 묘비. 묘소 뒤에는 대형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1839년 기해박해 때는 홍낙민의 셋째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洪梓榮, 1780-1840년)가 전주에서 참수되었고, 그의 며느리 심조이 바르바라(沈召史, 1813-1839년)와 두 살 난 홍[아기] 베드로는 전주 감옥에서 옥사하였으며, 홍재영의 부인 정조이(丁召史)도 이때 순교한 것으로 문중에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홍낙민의 손자인 홍병주 베드로(洪秉周, 1798-1840년)와 홍영주 바오로(洪永周, 1801-1840년) 형제가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홍재영의 아들인 홍봉주 토마스(洪鳳周, ?-1866년)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고, 그의 아들 홍 베드로는 1867년 가을 전주 초록바위에서 수장되었다.
이에 홍유한 선생 후손들은 선조 순교자들을 현양하고자 했으나 유해를 찾을 길 없어 고심하다가 안동교구와 협의하여 선조인 홍유한 선생의 묘가 있는 우곡 성지에 13위 순교자들을 모두 모시게 되었다. 그래서 2009년 5월 29일 안동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아 13위 순교자들이 순교한 각 순교터의 흙을 담아 가묘를 조성하고 그 앞에 ‘홍유한 후손 순교자 현양비’를 세웠다. 이로써 우곡리의 골짜기는 홍유한 선생과 그 후손 순교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후배 신앙인들에게 신앙의 참된 가치를 일깨워주는 거룩한 땅이 되었다.
이에 앞서 안동교구는 1993년 우곡리에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수덕자인 홍유한 선생의 묘를 발견하고 이듬해 성지개발위원회를 발족하여 1995년 묘지 축복식과 유적비를 건립하고 순차적으로 십자가의 길 등을 조성했으며, 1998년 11월 15일에는 홍유한 피정 집과 사제관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2000년 10월 25일에는 청소년들의 신심 교육과 성지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해 청소년 수련원 겸 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2005년 9월 25일에는 우곡 성지 성역화 10주년을 맞아 대형 십자가와 홍유한 선생 동상을 세워 축복식과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2014년 11월 1일에는 홍유한 선생의 수덕생활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 기존의 성당을 칠극 성당으로 명명했고, 성당 앞 계곡 건너편에 칠극의 길을 조성하여 2015년 9월 20일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 주례로 비석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6일)]
수덕자(修德者) 홍유한(1726-1785년)
풍산홍씨(豊山洪氏)인 홍유한(洪儒漢)은 1726년(영조 2년, 丙午年)에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창보(昌輔)이며 모친은 창령 성씨(昌寧 成氏) 훤의 따님이다. 선조의 원래 고향은 안동현의 풍산(豊山)으로 고려 고종 때 국학직학(國學直學)을 지낸 시조 홍지경(洪之慶)의 16대손이다.
농은의 가문은 선대부터 벼슬을 많이 하였고, 훌륭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명문집안이었다. 이와 같은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도 신동(神童)이라 불릴 만큼 어릴 적부터 매우 영특하여 이미 8, 9세 때에 여러 경서(經書)를 읽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모두 탐독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찍부터 벼슬에 뜻이 없었기에 16세 때 과거 공부를 다 버리고 부친의 당부에 따라 부친 창보와 교분이 깊은 실학자 성호(星湖)의 문하(門下)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 후 거의 20년 동안 성호의 제자로서 진리 탐구에만 정진하였고, 안정복(安鼎福), 체제공(蔡濟恭), 권철신(權哲身), 정상기(鄭尙驥), 윤동규(尹東奎) 등과 함께 수학했으며, 성호의 아들 이맹휴(李孟休), 조카 용휴(用休) · 병휴(秉休), 종손자 삼환(森煥) 등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
그는 시험의 속박에서 벗어난 후에 은둔 생활로 독서에 깊이 침잠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의 심정과 학문적인 생활의 태도를 밝혔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충효로써 임금을 섬기고 공경으로 빈객을 접하고 믿음으로 붕우를 사귀는 것이 사람의 상도(常道)이다. 그러나 비록 그 그윽한 곳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오히려 족히 일컬을 만한 것이 못되는데, 하물며 내가 공인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음에랴?” 하였고 또 후세에 학문을 하는 이들이 상호간에 표방(標榜)하는 것을 매우 미워하여 일찍이 학자들에게 경고하기를 “학자라고 이름만 내세우는 것은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 아니다. 외모만 꾸미고 허명만 탐하여 진퇴의 지름길을 구하는 것은 곧 구차히 남의 담장을 넘보는 좀도둑과 같은 재주일 따름이다. 나는 이를 부끄러워하노니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 진실한 마음으로 실질적인 공부를 하는 것이 바른 학문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성호는 농은의 학문의 열정에 대해서 입지(立志)가 확고하고 공부의 독실함이 뛰어나다고 칭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호는 그에 대한 기대와 순결한 성품을 난초에 비기어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정정히 한창 나이로 향기를 토하는 난초와 같네. 재배하기엔 참으로 힘을 들여야 하나니 장차 그대 구슬 같은 보배가 되기를 바라네. … 그대여 백척간두에 진일보를 힘쓸지니 내가 눈을 비비고 빛나는 장래를 기대하리.” 그리고 그의 나이 20세 때인 1745년에 성호가 그의 부친 홍성문에게 편지글을 내어서 재주와 성품이 마치 땅에서 솟아나는 난초와 같다고 말하면서 잘 기르면 크게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한편 그 해(1745년) 성호가 그의 부친에게 농은의 병 증세에 심히 놀라고 걱정된다고 부친 행장(行狀)에서 직접 밝힌 바와 같이 독질(毒疾)에 걸려 무진년(戊辰年, 1748년)부터 임신년(壬申年, 1752년)에 이르기까지 항상 사계(死界)에 있었다. 이것처럼 이제 한창 나이인 20세 때부터 건강이 약화되고 지독한 병에 걸려서 학업을 전처럼 열심히 계속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후에 그는 계속 평생을 약한 건강 때문에 숱한 고생을 하였다. 그리고 아마 이 때에 과거 시험도 완전히 포기한 것 같다.
한편 그가 계속 병으로 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서 성호는 1748년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병 증세를 걱정하여 산천을 유람하면서 먼저 10, 20리의 가까운 거리를 시험해 보면서 마음속에 울결(鬱結 : 가슴이 답답하게 막힘)을 풀어 버리는 것이 병을 다스리는 좋은 처방일 듯하다고 권고했다. 이때는 그가 가장 심각하게 병마와 싸우는 시기로서 성호는 퍽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렇게 가슴에 답답함을 풀기 위해서 산야를 유람하기를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1755년까지 몸이 불편하여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또한 2년 후인 1757년에 부친께서 세상을 떠나시므로 더욱 그의 마음이 맺히고 울결이 쌓였다. 그의 어머니 창녕 성씨(昌寧 成氏)는 1716년에 그의 집에 시집와서 13년 후인 1729년(乙酉)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세 때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잘 알지 못하였고 그 후 줄곧 부친의 지극한 사랑과 돌보심으로 서모와 남원으로 시집갔다가 일찍이 과부가 되어 1697년부터 한집에 살고 있는 남원의 고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러므로 그는 특별히 부친과의 정이 두터웠던 것이다. 그런 부친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의 슬픔은 한층 더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부친이 세상을 떠난 해인 1757년부터 집안의 가세가 점점 기울어지고 또한 시사(時事)가 날로 어렵게 되는 등 말하기 힘든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서울의 집을 팔아서 충청도 예산의 친척들이 있는 조용한 시골로 이사를 같다. 그것은 그의 문중의 후손들이 전하는 바대로 1750년경부터 성호의 제자들과 함께 서학문인 “천주실의”, “칠극”, “직방외기” 등을 연구할 때 다른 제자들은 피상적이거나 비판적인 태도로 대했으나 그는 심각하고 진지한 태도로 받아들여서 깊이 이 학문의 참된 진리(眞理)를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칠극” 의한 천주교 수덕생활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뜻을 알아차린 문중의 여러 사람들과 주위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또한 앞에서 말한 성호가 그에게 산야로 나아가 유람하면서 병 치료를 할 것을 권하는 바도 있고 해서 친척들이 살고 있는 충청도 예산으로 이사간 것이다.
혹자는 1757년 이후 시사(時事)가 날로 그르게 되었다는 말을, 즉 1762년(영조 38년) 나경언(羅景彦)의 10가지 사도세자(思悼世子) 비행을 영조 임금께 상소함으로 일어난 세자(世子)의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벌써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시파(詩派)와 반대하는 벽파(僻派) 간의 당쟁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같은 세자(世子)의 처가인 홍씨(洪氏) 문중(門中)에서도 의견이 엇갈려서 집안이 불안하므로 이것 때문에 시사(時事)가 날로 어려웠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무튼 그는 1757년 이후 세상이 시끄럽고 부친이 사망하자 본격적으로 수덕생활을 시작하고자 서울의 가사를 정리하고서 충청도 예산의 여사울로 낙향했다. 거기서 1775년까지 18년 동안 수덕생활을 하려고 했으나 서울이 가까워서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가 어렵고, 또한 자연히 남들의 비판이 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번잡한 일들이 많아서 뜻한 바대로 잘 되지 않았기에 다시 1775년에 예로부터 유학과 학문의 고장인 경상도 순흥(順興) 고을 구고리(현 경북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로 이사를 했다. 거기서 6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년 동안 철저하게 천주교 수덕생활과 기도 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1785년 1월 30일(음력) 세상을 떠나 그해 4월 19일에 순흥부 동쪽 문수산 우곡 골짜기에 안치되었다. [출처 : 안동교구 홈페이지]
천주실의(天主實義)
예수회 중국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중국명 利瑪竇, 1552∼1610)가 저술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초명(初名)은 ≪천학실의≫(天學實義)이며 구명(歐名)은 De Deo Verax Disputatio. 저술연대는 1593∼1596년이며 간행 이전에 이미 초고본(草稿本)이 널리 소개되었고, 1601년 풍응경(馮應京)이 간행하려 했으나 재정상 여의치 않아 1603년에야 북경(北京)에서 공간(公刊)되었다. 상 · 하 2권 8편 174항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국인 학자와 서양인 학자가 서로 질문 대답하는 대화체 문장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중국인 학자를 통해 중국 전통유학의 입장과 불 · 도교(佛 · 道敎)를 논하게 하고 서양인 학자를 통해서는 중국 선진맹유(先秦孟儒)의 고전을 예로 들어 스콜라 철학적인 논리로 천주교 교리의 해설과 호교론을 펴고 있다. 각 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제1편 : 인간의 지능(知能)에 대해 설명한 후 우주의 운동 및 질서의 논증으로 천주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② 제2편 : 불 · 도교를 논박하고 태극설(太極說)을 제외한 유교(儒敎)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한편 12개의 중국 고전을 인용하여 상제(上帝)와 천주를 비교, 설명하고 있다. ③ 제3편 : 천당지옥(天堂地獄), 영혼불멸(靈魂不滅)을 논하고 있다. ④ 제4편 : 중국 고유의 범심론(汎神論)을 비판하고 중국고전을 인용하여 천국과 영혼을 설명하고 있다(이상 上卷). ⑤ 제5편 : 윤회설(輪廻說)이 불교 고유의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자 피타코라스(Pitagoras)가 창시한 이론임을 밝히고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여 불교를 비판하였다. ⑥ 제6편 : 상선벌악(賞善罰惡)을 설명하고 이에 따른 천국, 지옥, 연옥을 설명하고 있다. ⑦ 제7편 : 천주성(天主性)과 인간성(人間性)을 설명한 후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自由意志)의 목적이 천주와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음을 밝혔다. ⑧ 제8편 : 서양의 관습과 사제독신제에 대해 설명한 후, 끝으로 원죄(原罪)와 천주강생(天主降生)을 설명하고 만인은 천주교로 귀의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이상 下卷). 이상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첫째 우주에는 만물의 창조자와 주재자가 존재하며 인간의 영혼은 불멸한 것으로서 인간 각자의 행실에 따라 후세에 상선벌악의 응징을 받아야 하고, 둘째로 윤회설과 같은 것은 그릇된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의 ≪천주실의≫은 간행 후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혀지면서 그들을 교회로 끌어들인 촉진제가 되었으나 반면 일부의 유학자들과 불 · 도교 학자들에 의해 격렬한 반박이 일어나게 되어 이른바 천주교리와 ≪천주실의≫에 대한 배척의 문헌인 ≪벽사집≫(闢邪集)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응은 굉장히 좋아 중국뿐 아니라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동양 여러 나라에 널리 유포되어, 1608년 일본에서, 1758년에는 만주에서 그들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한글로 번역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7세기 초에 전래되어 1614년 간행된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에 최초로 그 내용과 비판이 함께 소개되었고 이어 이익(李瀷)은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을 지어 논평하였다. 또한 신후담(愼後聃), 안정복(安鼎福), 이헌경(李獻慶), 홍정하(洪正河) 등은 ≪천주실의≫를 학문적 역사적으로 연구 · 고찰하고 척사적(斥邪的) 입장에서 ≪천주실의≫와 천주교를 배척하는 이론을 펴 신후담은 ≪서학변≫(西學辯)을, 안정복은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홍정하는 ≪실의증의≫(實義證義)를, 이헌경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각각 저술, 척사문헌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천주실의≫과 기타 한역서학서들을 긍정적으로 연구하여 서학(西學) 수용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는 다시 천주교 신앙운동으로 발전,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계기가 되었다.
≪천주실의≫의 참다운 가치는 첫째 중국 고전을 인용하여 서양의 그리스도교를 무리없이 중국을 비롯한 종앙에 소개한 호교서(護敎書)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며, 둘째로 ≪천주실의≫의 간행으로 인해 동양 여러 국가에서 서양에 관한 학문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과 그리스도교를 동양에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천주실의≫을 비롯한 한역서학서들이 조선 후기사회에 전해져 젊은 지식인들에 의한 서학 수용이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서학수용은 다시 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는 점에서 ≪천주실의≫의 의미와 가치는 매우 큰 것이었다.
칠극(七克)
≪칠극대전≫(七克大全)의 약칭(略稱). 저자는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 판토하(D. Pantoja, 龐迪我, 1571∼1618).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뿌리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 자지 덕행(德行)을 다룬 일종의 수덕서(修德書)이다. 1614년에 중국 북경에서 7권으로 간행된 이래, 여러 권 판을 거듭하였고, ≪천학초함≫(天學初函) 총서에도 수록되었으며, 이를 상 · 하 2권으로 요약하여 ≪칠극진훈≫(七克眞訓)이라는 책명으로도 간행되었다.
이 책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함께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연구되었고, 남인학자(南人學者)들을 천주교에 귀의케 하는 데 기여한 책 중의 하나이다. 즉 이익(李瀷, 1681∼1763)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이 책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는 곧 유학의 극기설(克己說)과 한가지라고 전제한 다음, 죄악의 뿌리가 되는 탐욕, 오만, 음탕, 나태, 질투, 분노, 색과 더불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덕행으로 은혜,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인내의 일곱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이어 ≪칠극≫ 중에는 절목(節目)이 많고 처리의 순서가 정연하며 비유가 적절하여 간혹 유학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도 있는 만큼, 이는 극기복례(克己復禮)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천주교와 유교 사이에 윤리면에서 어느 정도 일치할 뿐 아니라, 때로는 천주교가 우월함을 은연중에 시인하였다. 그의 제자인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칠극≫이 공자의 이른바 사물(四勿)의 각주에 불과하며, 비록 심각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취할 바가 못 된다고 논평하였다.
한편 ≪칠극≫은 1777년부터 1779년간의 소위 천진암 · 주어사(天眞菴 · 走魚寺) 강학에서 남인학자들에 의해 연구 검토되었음이 확실하며, 일찍부터 한글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혀져, 감화시켰음을 짐작 할 수 있다. 한글필사본이 절두산순교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직방외기(織方外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예수회 선교사 알레니(Aleni, 艾儒略, 1582∼1649) 저술의 세계 인문지리서로 1623년 중국 항주(杭州)에서 6권으로 간행되었다.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명에 의해 예수회 선교사 판토하(Pantoja, 龐迪我, 1571∼1618)와 우르시스(Ursis, 熊三拔, 1575∼1620)가 편찬에 착수하여 조사, 기록해 둔 기초자료를 판토하의 사후에 알레니가 증보한 것으로 5대주(五大州)의 역사 · 기후 · 풍토 · 민속 등과 6대양(六大洋)의 해로(海路) · 산물 · 섬 및 남극(南極)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고 천주교 교리도 약간 다루고 있는데 이지조(李之藻), 양정균(楊廷筠), 구식곡(瞿式穀) 등의 서(序)를 비롯, <만국여도>(萬國輿圖), <북여지도>(北輿地圖), <남여지도>(南輿地圖) 등의 지도도 수록되어 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사부(史部) 지리편(地理篇)과 ≪천학초함≫(天學初函)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17∼18세기에 전해져 실학자들에게 주로 읽혀졌는데 이익(李瀷)은 ≪직망외기 발≫(織方外紀 跋)을 써 인문지리적인 논평을 하였고, 그의 제자 신후담(愼後聃)은 이 책에 언급된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비판하였다.
봉쇄적 조선 사회에 종래의 중화(中華)적 세계관을 깰 새로운 세계지리 지식을 심어주어 의식의 확대, 자아의 각성을 촉구한 세계지리서로 주목되어 왔다.
[출처 : 이상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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