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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인간의 처지를 결정하는 것 10 /
영계에서 벗어던지는 낡은 의복
- 사후 인간이 거치는 ‘황폐(Vastation)’과정과 영적 해방
먼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황폐'의 개념부터 정리해보자.
사람이 죽은 후에 맞게 될 황폐는
본래의 나를 드러내기 위해 붙들고 있던 것을 떠나보내는 과정이다.
즉, 황폐란 사람이 세상에서 애지중지하며 붙들고 있던 애정과 생각들이
자신의 본질과 맞지 않음을 드러내면서,
그것들을 더 이상 붙들 수 없게 되고 하나씩 떠나보내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져
황량하고 고통스럽지만, 그 과정을 통해
본래의 내면을 가리고 있던 것들에서 풀려나고,
결국 자신의 사랑과 진리에 맞는 새로운 질서로 재배열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황폐에는 상실의 고통뿐 아니라,
자기 본질에 맞지 않는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의미도 함께 들어 있다.
특히 황폐는 단순한 빼앗김이 아니라
붙들고 있던 것이 더 이상 나를 붙잡지 못하게 되는 과정으로
이 황폐는 일종의 영적 폐허(destruction, devastation)와 같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모든 것이 파괴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황폐에는 폐허와 같은 상실감과 황량함이 있지만,
그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분리와 정돈에 있기 때문이다.
(황폐를 단순히 ‘좋아하던 것들을 잃어버리는 과정’으로만 설명하면
중요한 의미가 하나 빠진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맥락에서는
그 애정과 생각들이 자기 본질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에 붙들려 있던 상태에서
풀려나는 과정이라는 측면도 함께 들어가 있다.
그래서 황폐는 자신이 사랑하고 진리라고 믿으며 붙들고 있던 것들을
떠나보내는 고통인 동시에, 그것들이 더 이상 자신의 본질을 가리지 못하도록
그 집착에서 풀려나는 해방의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내면에서 의지와 지성의 중심을 ‘선과 진리’가 차지하고 있는 경우,
사후 세계의 황폐 과정에서는 겉으로 드러났던 악과 거짓 가운데
자신의 본질과 맞지 않는 것들이 점차 벗겨지고 결국 분리된다.
이는 영계의 질서가
‘유유상종’과 ‘본질의 발현’이라는 원리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단순히 그가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가장 사랑했는가가 그 사람의 본질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사람의 생명 자체는 그의 사랑이며,
그의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그의 생명이 어떠하고,
심지어 사람 전체가 어떠하다.
그러나 사람을 만드는 것은 지배적인 사랑이다.’ TCR 399
그리고 그 지배적인 사랑은 단순히 여러 사랑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랑들을 자기 아래에 거느리고 그것들의 방향까지 결정한다.
따라서 사람이 무엇을 가장 사랑했는지는
결국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하는 가장 깊은 기준이 된다.
스베덴보리는 이 지배적인 사랑에 따라
선한 사람의 천국과 악한 사람의 지옥이 형성된다고까지 말한다.
이것은 사후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가 된다.
세상에서는 사람의 내면과 외면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본래적인 사랑을 숨길 수도 있고,
사회적인 예절과 도덕, 종교적인 지식과 교육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어느 정도 다른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러나 사후에는 육체와 세상이라는 자연적인 환경이
더 이상 사람의 내면을 가려 주는 동일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후에도 자신의 의지와 지배적인 사랑에 있어서는
세상에서와 동일하게 남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바로 그 사람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바꾸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HH 480
따라서 사후의 삶은 사람이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하는 과정이라기보다,
그가 본래 어떤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왔는지가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영계의 질서를 ‘유유상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유유상종은
단순히 성격이 비슷한 사람끼리 친하게 지낸다는 세상적인 의미가 아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사람의 내면을 이루는 사랑의 성질에 따라
그가 연결되는 세계와 공동체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스베덴보리는 DLW 141 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천국 전체는 사랑의 모든 차이에 따라 공동체들로 나뉘어 있으며,
지옥도 그러하고 영들의 세계도 그러하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문맥에서
모든 영은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에 따라 움직이고
그 사랑을 향하여 돌아선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영계에서 어떤 사람이 어디에 속하는가는
외적인 신분이나 세상에서 얻은 명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내면에서 실제로 지배하고 있는 사랑이 무엇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을 ‘유유상종’이라는 말로 표현한다면,
같은 본질을 가진 사랑들이 서로 만나고 결합하는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을 사랑하는 이들과 더 깊이 연결되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이들과 더 깊이 연결된다.
반대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적인 사람은
그 사랑과 일치하는 영적인 상태와 공동체를 향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황폐의 의미가 비로소 분명해진다.
세상에서 사람은 여러 가지 사랑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간다.
선을 사랑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을 수 있고,
진리를 사랑하면서도 세상적인 명예와 인정에 집착할 수 있다.
선한 삶을 살려고 하면서도
여전히 제거하지 못한 악한 습관이나 애착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어느 정도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육체가 있고, 사회적인 관계가 있고, 여러 가지 환경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아직 변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후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사람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그대로 똑같은 방식으로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 실제로 속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점차 구별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황폐는 단순히
‘악을 벌 받게 하는 과정’이라고만 이해해서는 부족하다.
황폐는 자신이 세상에서 애지중지하며 붙들고 있던 것들 가운데
자신의 본질과 맞지 않는 것들을 하나씩 떠나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세상에서는 자신에게 기쁨을 주었고,
때로는 자신을 지켜 주는 것처럼 느껴졌으며,
오랫동안 자기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떨어져 나갈 때 처음에는 황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내가 좋아하던 것을 왜 이제는 붙들 수 없는가?’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왜 더 이상 나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는가?’
‘나는 왜 이것을 떠나야 하는가?’
이런 의미에서 황폐에는 분명 상실의 고통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황폐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자기 본질에 맞지 않는 것들에 붙들려 있던 상태에서
풀려나는 해방의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내면에 선과 진리가 중심이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결국 선과 진리에 맞지 않는 외적인 애정과 생각이
계속해서 그 사람을 지배할 수 없게 된다.
그것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은
겉으로 보면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일이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는
본래의 자신과 맞지 않는 것에서 자유롭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황폐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다.
잘못된 것을 무너뜨려
그 자리에 본래의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사후의 사람에 대해 말하는 매우 중요한 원리와 연결된다.
그는 사람이 저 세상에 들어간다고 해서 세상에서 가졌던
모든 기억과 생각과 애정이 즉시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은 자신의 기억과 생각과 애정을 가지고
사후 세계에 들어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의 내면에 실제로 속한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두 번째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외적인 모습과 내적인 본질 사이의 차이가 점차 드러나고,
결국 그 사람은 자신의 본질에 맞는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황폐는 단순히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본질과 맞지 않는 외적인 것들을 벗겨 내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에서 HH 512의 내용도 매우 중요하다.
‘사후의 모든 이는 자기 자신의 사랑 혹은 자기 자신의 의지이며,
그 사랑이 어떠한지에 따라 그 자신의 상태가 결정된다.
그는 자신의 이해력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해력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며,
의지의 사랑이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매우 엄격하다.
사람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알고 있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의지했느냐’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생각하는 것과 상당히 다르다.
사람은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수 있다.
진리에 관한 책을 많이 읽을 수도 있고,
신앙적인 교리를 잘 설명할 수도 있으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상당히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실제로 자신의 사랑과 의지가 되지 않았다면,
그 지식만으로 그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스베덴보리는 이해력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해력은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올바른 방향을 보여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실제로 사랑하고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사람의 생명 자체가 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지성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말은
단순히 그 사람이 선과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들이 실제로 그 사람의 사랑이 되고 삶의 목적이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다시 황폐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후에 사람의 외적인 모습 가운데
내면의 본질과 맞지 않는 것들이 벗겨지는 것은,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서 임의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가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이 무엇인지가 드러남에 따라
그 사랑과 맞지 않는 것들이
더 이상 그 사람의 중심을 차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악과 거짓이 주변부로 밀려나 결국 분리된다.’는 표현은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면의 중심을 차지한
사랑과 진정으로 일치하지 않는 악과 거짓이
점차 그 사람의 생명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TCR 399와 DLW 140,
그리고 HH 480과 512의 내용을 종합한 설명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분리가 단순히 사후에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기계적인 정화 과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자신의 악을 어떻게 대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면서도 겉으로만 선한 모습을 유지했다면,
그 외적인 모습은 결국 자신의 본질을 계속 가려 줄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사람이 자신의 악을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죄로 여기며 주님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거부하려고 살아왔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이미 내적인 질서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황폐의 해방은 사람이 세상에서 자신의 악을 죄로 여기고
그것과 결별하려는 삶을 살아온 것과 연결된다.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서 악을 제거하시는 일은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고 강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롭게 악을 거부하고 선을 선택하는 과정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노력의 관계와도 정확하게 연결된다.
사람은 자기 악을 실제로 미워하고 거부해야 한다.
그것을 죄라고 인정해야 한다. 다시 유혹을 받을 때에도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
그래야 그 악과의 결합이 실제로 약해질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 악을 제거하고 새로운 생명을 이루시는 근원은 주님께 있다.
따라서 사후의 황폐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죽은 다음에
주님께서 사람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는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부터 자신의 사랑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이미 그 사람의 영적 방향을 형성하고 있으며,
사후에는 그 방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에서의 삶은 매우 중요하다.
세상에서는 선과 악이 섞여 있고, 진리와 거짓이 함께 존재한다.
사람의 외적인 모습도 얼마든지 내면을 가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혼합된 상태 속에서도 사람은 매일 선택한다.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를 선택하고,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를 선택한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길 것인지 선택하고, 어떤 생각을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한다.
그런 선택들이 반복되면서 우리의 사랑의 중심이 조금씩 형성된다.
결국 사후의 황폐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기보다,
세상에서는 뒤섞여 있던 것들이 본래의 질서에 따라 정리되고,
그 사람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었는지가 드러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황폐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
하나는 내가 사랑했던 것을 떠나보내야 하는 황량함과 상실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것이 더 이상 나를 붙들 수 없게 되는 해방과 자유이다.
세상에서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내 본질과 맞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을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에서 풀려나는 것이
나의 본래적인 생명을 회복하는 길이 될 수 있다.
결국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가장 깊은 사랑을 따라
자신이 진정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게 하시고,
그 본질에 맞는 질서로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계의 질서를
‘유유상종’과 ‘본질의 발현’이라는 두 표현으로 정리한다면,
이것은 단순히 ‘비슷한 사람끼리 모인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가장 깊은 사랑에 따라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 본질과 일치하는 영적 상태와 공동체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본질과 맞지 않는
외적인 애정과 생각들은 점차 벗겨져 나간다.
이것이 우리가 황폐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사후 질서의 중요한 모습이다.
- 영혼이 세상의 무거운 짐을 벗는 과정
이 세상에서 인간을 괴롭히던 질긴 악과 거짓의 무게감에는
육체적 욕망과 세상에서 형성된 습관과 애착,
그리고 그릇된 생각과 감정이 깊이 얽혀 있다.
사람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이러한 것들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그것에 반복해서 끌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단순히 외부에서 묻어온 때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과 일치하는지,
아니면 그가 참으로 원하는 선과 진리에 어긋나는 것인지는
서로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사후 세계에서 그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면,
그 사랑과 일치하지 않는 악과 거짓의 애착은
더 이상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할 수 없게 된다.
세상에서는 여러 환경과 관계와 습관 속에 뒤섞여 있어서
쉽게 떨쳐내지 못했던 것들도, 영적인 상태가 분명해지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드러나게 된다.
이때 세상에서 무겁게 느껴졌던 여러 애착은
더 이상 영혼을 붙잡는 힘으로 남지 못하고, 마치 오래 입어 몸에 익숙해진
낡은 옷을 벗어놓듯 점차 그 사람에게서 분리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짐이 벗겨져 가벼워진다.’는 것은
악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니라, 한때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여졌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과 결합하지 않았다면
결국 그 사람의 영원한 본질로 남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영계에서의 '황폐(Vastation)' 교리에 따르면
중간 영계인 영들의 세계에서 선한 지배적 사랑을 가진 자들은
이생에서 육신과 환경의 연약함으로 인해 묻혀온
겉모양의 악과 거짓들을 벗어던지는 과정을 거친다.
인간이 끝내 떨쳐내지 못한 악의 습관이나 죄책감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끝까지 정당화하며 사랑하지 않고 주님의 도우심을 갈망했다면,
그 파편적 오류들은
영계의 질서에 의해 낡은 허물처럼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영계에서의 무게감은 중력이 아니라 '애착(Affection)'에 의해 결정된다.
이를 논리적으로 정립하면 영혼의 순 질량은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여 자기 것으로 삼은 것들의 무게에서
그가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들의 무게를 뺀 값으로 산출된다.
지상에서 행한 악이 습관적 유혹이나 환경적 파편일 뿐,
본질적 의지가 이를 거부해 왔다면 이 악들은 영적 결합력을 잃는다.
사후 황폐 과정에서 ‘이것은 자신의 본질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악의 질량은 ‘0’이 되어 버린다.
물론 여기서 ‘무게’나 ‘중력’, ‘질량’이라는 표현은
물리적인 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무엇을 깊이 사랑하고 자기 것으로 삼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내면이 일정한 방향으로 기울고,
결국 자신과 같은 사랑을 가진 것들과 가까워지게 된다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비유이다.
그러므로 영계에서의 ‘무게’란 물질적인 무게가 아니라,
사랑과 애착이 사람의 내면에서 차지하는
힘과 방향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거기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말하는 핵심은 ‘사랑이 사람을 방향 짓는다.’,
‘사랑이 사람을 같은 사랑을 가진 이들과 결합하게 한다.’,
‘사후에는 그 사랑의 본질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반면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사랑에는 영적인 무게가 있다.’
또는 ‘영혼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의해 끌려간다.’
라고 표현하는 것은 비유적 설명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돈과 명예를 가장 사랑했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 사람이 단순히 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돈과 명예를 통해 얻는 우월감과 인정받음 자체를 깊이 사랑했다면,
그것이 그의 내면에서 큰 힘을 갖게 된다.
반대로 진리와 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던 사람은
그런 것들이 그 사람의 내면에서 큰 힘을 갖는다.
그러면 사후에는 육체라는 외적인 조건이 사라지면서
차이가 더욱 분명해진다.
세상에서는 서로 전혀 다른 사람도 같은 집에 살고, 같은 직장에 다니고,
같은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도 선한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고,
선한 사람도 아직 자기 안에 이기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여러 가지 성향이 외적인 환경 속에서 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계에서는 겉으로 무엇을 가지고 있었느냐보다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느냐가 훨씬 중요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그 중요성을 빌어 ‘무게’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강한 사람에게는
선과 진리가 마치 그 사람을 그쪽으로 끌어당기는 힘처럼 작용한다.
반대로 악과 거짓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악과 거짓이 그 사람을 자기와 같은 곳으로 끌어당기는 힘처럼 작용한다.
이것이 물리적인 중력은 아니지만,
영적인 차원에서는 그와 비슷하게 방향을 결정하는 힘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영혼의 순 질량은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여 자기 것으로 삼은 것들의 무게에서
그가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들의 무게를 뺀 값으로 산출된다.’
이 표현을 풀어 쓰면 이렇게 된다.
‘영계에서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은 육체의 무게가 아니라
그 사람이 마음 깊이 사랑하는 것에서 나온다.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기 것으로 삼은 것은
그 사람의 내면에서 강한 방향성을 갖는다.
선과 진리를 사랑한 사람은
그것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악과 거짓을 사랑한 사람은
그것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반대로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아무리 세상에서 익숙하게 가지고 있던 것이라도
점차 그 사람에게서 힘을 잃는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영계의 ‘무게’나 ‘끌어당김’은
물리적인 중력이 아니라, 사랑과 애착이 사람의 영혼을 자기와 같은 것에
가까이 가게 하는 영적인 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게가 가벼워진다.’는 것은
영혼의 어떤 물리적 질량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을 붙잡고 있던
사랑과 애착의 힘이 사라진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또 ‘자신의 사랑과 본질에 맞는 것은 끌어당기고,
자기 본질과 맞지 않는 것은 밀쳐낸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누군가를 보이지 않는 힘으로 밀어내거나 끌어당긴다는 뜻보다는,
사람의 내면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에는 편안함을 느끼고,
자기 본질과 다른 것에는 점점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결국 영계에서 사람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했는가.’이다.
이렇게 보면 ‘중력’이라는 비유도 상당히 아름답게 이해할 수 있다.
물질세계에서는 지구의 중력이 몸을 어느 방향으로 끌어당기지만,
영계에서는 사랑이 영혼을 어느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세상에서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의식적으로 움직이지만,
영계에서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결국 내가 머물 곳을 드러내게 된다.
결국 ‘영혼의 무게’라는 표현은
이렇게 한 문장으로 바꿔 이해하면 가장 쉽다.
‘영혼의 무게란 영혼이 무엇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있는가에서 생기는 방향성과 끌림이다.’
또 한 가지 주의가 필요한 부분은
여기서 ‘이것은 자신의 본질이 아니다’라고 선언한다는 표현에 대해서다.
이 표현은 단순히 말로 그렇게 인정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드러내 보게 되는 과정 속에서,
지금까지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사랑했던 악과 거짓이
사실은 자신의 참된 본질과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고,
그것에 대한 애착을 실제로 놓아 버리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악의 ‘질량’이 한순간에 '0'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황폐의 과정에서 자신이 붙들고 있던 악한 사랑과 애착이
더 이상 자기 삶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고 점차 힘을 잃어 가면서,
마침내 그것과 자신 사이의 결속이 끊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과정에는 단순한 인식보다 훨씬 깊은 내적인 변화가 포함된다.
‘이것은 내 본질이 아니다’라는 깨달음은
악을 바라보는 생각의 변화인 동시에,
그것을 사랑하고 붙들던 의지의 변화이며,
결국에는 그 악으로부터 실제로 분리되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악의 무게가 사라진다는 것은
악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그것이 그 사람을 붙들고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 악이 ‘0’이 된다는 것은 악의 소멸을 뜻하지 않는다.
악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귀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황폐에서 악이 ‘0’이 된다는 것은
한순간의 선언으로 악이 제거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악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사랑과 애착이 철저히 드러나고 약화되어
마침내 더 이상 자기 본질과 결합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이 사후에 자신의 악을 자신의 본질이 아니라고 거부하고 미워하는 것은,
그 악이 지옥으로부터 유입된 것임을 깨닫고
주님의 빛에 의지하여 그 악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 악은 인간의 영혼으로부터 분리되어
지옥적 무리(지옥에 있는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지, 그
자체로 질량이 ‘0’이 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악과 거짓이 강제적인 무게를 형성하며 우리를 쫓아다니지만,
사후에 선의 지배를 받는 영혼은
그 악을 더 이상 자신의 본질로 인정하지 않는다.
영계의 법칙에 따라 영혼이 특정 속성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할 경우 그 속성의 영적 질량은
‘0’이 되어 분리된다.
즉 세상에서 해결하지 못해 한숨지었던 그 무거운 짐들은
사후에 영혼이 ‘이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영적 영향력을 잃고 소멸하거나 지옥적 무리로 돌아가게 된다.
(선언의 의미는 아래에서 설명)
결국 선이 우세한 자에게 남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가벼운 '빛의 질량'뿐이다.
이 영적 수식은 영혼이 빛을 거부하지 않고 자유의지로
그 빛을 수용할 때에만 '무한한 긍정의 값'으로 산출된다.
인간이 세상에서 겪는 치열한 영적 투쟁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좌절의 무게를 주님께서는 이미 깊이 헤아리고 계신다.
세상에서 처리하지 못해 눈물 흘리며 짊어지고 간 그 짐들이
사후에 비로소 내려놓아질 수 있음은
인간의 유약함보다 주님의 긍휼과 회복의 법칙이
훨씬 더 크고 세밀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비록 이 땅에서는 악과 거짓이 질기게 발목을 잡는 듯 보이나,
선과 진리를 향한 진실한 사랑을 끝까지 놓지 않은 사람에게는
섭리의 자비가 예비되어 있다.
그 사랑이 세상에서 거창한 선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때로는 한 조각의 작은 진심으로만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끝내 버리지 않고 마음 깊이 간직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본질을 향한 살아 있는 방향성이 될 수 있다.
사후에는 바로 그 사랑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그 사랑과 결합하지 않은 악과 거짓의 애착은 점차 힘을 잃고 분리되어,
마침내 그 사람의 본질에 맞는 참된 평안에 이르게 된다.
인간이 세상의 거친 풍파를 겪으며 어쩔 수 없이 묻혀온 영적인 먼지와 때들이
주님의 빛 아래서 낡은 옷을 벗듯 분리되는 과정은
참으로 자비로운 섭리라 할 수 있다.
- 내면에서 거부한 악은 영원한 소유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 저 세상으로 들어갈 때
그는 자신의 모든 기억과 애착을 가지고 가지만 그곳의 질서는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잠들게 하거나 분리시킨다.>
사후 내가 선이 우세하여 악이 떨어져 나간다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던 악들은
진정으로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인가?
사랑의 두 층위 : 의지적 사랑과 충동적 애착
AC 8806, DP 78
인간의 마음에는 '자신이 진정으로 지향하는 사랑'과
'일시적인 충동에 의한 애착'이 공존한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사후에 악과 분리된다는 것은
그 악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인
'의지'에 뿌리박은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즉 그럴 경우 세상에서 지녔던 악들은
육체적인 성향, 환경적 유혹 혹은
유전적인 약점 때문에 잠시 붙들고 있었던 '외부적 애착'일 뿐
영혼이 영원히 껴안고 살고자 했던 '본질적 사랑'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만약 어떤 악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그것은 사후에도 결코 분리되지 않고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되었을 것이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자유로부터 생각에 따라 행한 것은 또한 그와 함께 남는다고 한다.
사람이 자기 것으로 삼은 것은 무엇이든 제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사랑에 속한 것이 되었고
동시에 그의 이성에 속한 것이 되었으며,
곧 그의 의지와 동시에 그의 이해에 속한 것이 되었고,
따라서 그의 생명에 속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DP 79
그리고 이어서 아주 중요한 예를 든다.
‘그러나 그가 후에 회개하고 그것들을 피하며
죄로 여기고 혐오해야 할 것으로 여겨
자유로부터 이성에 따라 그것들을 그만두면,
그 악에 반대되는 선의 원리들이 그에게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면 이 선들이 중심을 차지하고,
그가 악을 혐오하고 그것에서 돌아서는 만큼 악은 주변으로 옮겨 간다.’
DP 79
연산 과정을 보면.. 사람이 악을 사랑하여 즐거움으로 행하고
자유롭게 자기 것으로 삼았다면,
그것은 그의 사랑과 의지에 들어온 것이므로 그의 생명에 결합된다.
반대로 그가 그 악을 회개하고 죄로 여기며 혐오하고 돌아서면,
그 악이 중심에서 밀려나고 그 반대편의 선이 중심을 차지한다.
따라서 ‘악의 잔재가 많다는 사실과
그것이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의 중심이라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라는 논리를 상당히 잘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악의 잔재가 많다는 사실’은 그 사람이 실제 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악한 생각과 욕망, 습관, 행동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하는 반면 ‘그것이 가장 깊은 사랑의 중심이다’라는 것은
그 사람이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고 사랑하며,
자기 삶의 방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둘을 동일하게 볼 수 없다.
어떤 악한 욕망이 반복해서 떠오르고 심지어 행동으로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그것을 죄로 인식하고 괴로워하며 벗어나기를 원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면,
그 악이 곧바로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쉽게 말하면 ‘내 안에 무엇이 많이 남아 있는가?’와
‘내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사랑하는가?’는 서로 다른 질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분노, 질투, 이기심 같은 성향과 오랫동안 싸우고 있다고 하자.
그것들이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만 보면
‘나는 결국 이런 사람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 분노를 좋아하고 정당하다고 여기며
계속 붙들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분노가 올라올 때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여기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므로 그 사람 안에 악의 ‘잔재’가 많다는 것은
그가 아직 불완전하고 많은 정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지배적인 사랑’이 악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경계가 하나 있다.
악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 악을 사랑하면서도 입으로만 싫어한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고, 선택하고, 삶으로 받아들이는가이다.
악과 싸우는 과정에서 계속 넘어질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을 자기 것으로 사랑하지 않고
선과 진리를 선택하려는 방향이 지속된다면,
그 방향성이 그의 사랑의 중심을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래서 앞의 문장은 결국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악이 내 안에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많은 악과 싸워야 한다는 뜻이지,
그 악이 반드시 내가 가장 깊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 구별은
‘악의 잔재 때문에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와 연결된다.
악의 존재 자체만 바라보면 ‘나는 악한 사람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보다 더 깊이 들어가
‘나는 이것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것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악의 많음’과 ‘사랑의 중심’을 구별하는 이유이다.
분리의 기준: 의지적 동의와 거부
DP 279, TCR 510
사후에 악이 떨어져 나가는 결정적인 근거는
'그 악이 나의 것인가 아니면
나를 괴롭히던 불청객인가'에 대한 영혼의 판단이다.
세상에서는 이 판단이 흐릿할 수 있으나 영계의 빛 아래서는 명확해진다.
선이 우세한 자는 자신의 악을 대면할 때
'이것은 내가 사랑하는 나의 본질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그것을 타자화한다.
이때 영혼과 악 사이의 결합력이 상실된다.
지금 내면의 악들로 인해 괴로워하고 용기를 잃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 악들이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의 본질이 거부하고 있는 '이물질'임을 방증한다.
물론 이러한 분리는 사후에 주어지는 빛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그 빛의 편에 설 때에만
완성되는 자유의지의 신비이다.
연산 과정을 설명해보면..
스베덴보리는 회개를 단순한 생각이나 말로 보지 않는다.
‘회개가 사람에게서 참된 회개이고 효과적이 되려면,
그것은 의지의 회개여야 하며, 그 의지로부터 나오는 생각의 회개여야 한다.
그러므로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회개여야 한다.’ TCR 510
그리고 더 직접적으로,
‘그것이 의지에 들어갈 때 그것은 사람 안에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의지가 사람 자신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TCR 510
이것이 여기 ‘영적 소유’라는 표현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이다.
즉, 생각 속에 어떤 악이 떠오르는 것 자체와,
그 악을 의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은 구별된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의지는 사랑의 자리이므로, 어떤 것이 의지에 받아들여지고
실제 삶으로 이어질 때 그것이 사람의 생명에 깊이 결합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가 사랑하는 나의 본질이 아니다.’
라는 표현이 연산으로 사용된 것이다.
다만 그러한 선언을
‘그렇게 선언하기만 하면 분리가 일어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선언이라는 표현 안에는 TCR 510이 강조하는
의지의 변화와 실제적인 회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영적 소유권의 무효화 연산
DP 78-81
영계에서 특정 속성이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지의 동의(Consent)가 필요하다.
이를 영적 소유권의 관점에서 설명하면
최종적인 소유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와 그것을 기뻐하고 수용하는
내면적 의지가 완전히 결합할 때 성립한다.
만약 세상에서 수만 번의 악한 생각이나 행위가 있었더라도
내면의 깊은 의지가 그것을 진심으로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밀어내려 했다면 의지의 동의가 없었던 것이므로
영계에서의 최종적 소유권은 무효가 될 수도 있다.
DP 78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자유로부터 자기 생각에 따라 행하는 것은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자기와 함께 남는다.’
그리고 무엇이 사람에게 귀속되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 의지를 통하여 이해에 의해 행한다.
자유는 의지에 속하고 생각은 이해에 속한다.’ DP 78
그러므로 ‘의지의 동의가 있어야 영적 소유가 성립한다.’는
생각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하지만 이는 스베덴보리가 법률상의 ‘소유권’처럼 설명한 것은 아니고
그의 appropriation, 즉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만든 해석이다.
더 중요한 것은 DP 81이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악을 실제로 행하지 않았더라도
그 악을 허용할 만한 것으로 여기고 의지로 동의하면
그것 역시 자기 것으로 귀속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은 현실적인 사정 때문에 어떤 악을 실제로 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
기회가 없었거나, 법이나 사회적 제약 때문에 하지 않았거나,
겉으로는 행동을 억제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마음속으로는 그 악을 좋은 것이라고 여기고,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기회만 주어진다면 하고 싶어 한다면,
그 악은 단순히 외부에 나타나지 않았을 뿐
그의 의지와 사랑 안에서는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실제로 어떤 악한 행동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 행동 하나만으로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이 악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 행동을 자신이 옳다고 여기고 즐거워하며 계속 원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의지와 싸우면서 넘어졌고
그 행위를 잘못이라고 여기며 돌이키려 했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DP 81의 원리는 ‘악의 잔재가 많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 사람의 본질적인 사랑이라는 뜻은 아니다’라는
논리와 정확히 균형을 이루게 해준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악이 자기 것이 아닌 것도 아니고,
행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악이 자기의 가장 깊은 사랑인 것도 아니다.
결국 귀속의 핵심은 의지가 그 악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있다.
악을 사랑하고 옳다고 여기며 자유롭게 받아들였다면,
비록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어도 그 사람의 생명에 결합될 수 있다.
반대로 악한 행동이 있었더라도
그것을 죄로 인식하고 미워하며 돌이키려는 의지가 있다면,
그 행동 자체와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의지의 동의’라는 표현은 상당히 중요한 개념이다.
다만 이것을 너무 기계적으로 ‘동의하면 귀속,
동의하지 않으면 즉시 제거’라고 이해하면 안 된다.
인간의 의지는 한순간의 생각이 아니라 반복되는 선택과 삶의 방향 속에서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야.
결국 DP 81이 주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무엇을 했느냐.’만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사랑하여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느냐’이다.
그러므로 악의 잔재가 많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해서도 안 되지만,
반대로 악을 실제로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안심해서도 안 된다.
두 경우 모두 마지막 판단 기준은
그 악에 대한 의지의 태도, 곧 사랑과 동의라는 것이다.
이 균형이 들어가야 ‘악의 잔재와 본질적 사랑은 다를 수 있다’는 논리가
스베덴보리 사상에서 훨씬 안전하고 정확하게 자리 잡게 된다.
영계에서 무엇이 그 사람의 생명에
깊이 결합되어 있는지를 결정하는 데에는
그가 그것을 의지로 받아들이고 사랑했는지가 중요하다.
악한 생각이나 충동이 떠올랐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악을 허용할 만한 것으로 여기고 의지로 동의하여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의 생명에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대로 그가 악을 죄로 인정하고 혐오하며 자유롭게 그것에서 돌아선다면,
선이 중심을 차지하고 악은 주변으로 밀려날 수 있다. (DP 78-81 연산)
따라서 선이 우세하여 악이 분리된다는 것은
그동안 영혼을 괴롭혔던 악들이 실상은
'주인 없는 짐'이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영혼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선과 진리만을 '자신의 것'으로 확정하며
나머지 모든 부채는 영적 파산 절차를 통해 떼어내게 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상에서 겪는 모든 유혹과 연약함을
곧바로 우리의 가장 깊은 사랑이나 영원한 생명과 동일시하지 않으신다.
그것이 우리 안에 나타났다는 사실과
그것을 우리가 사랑하여 의지로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유 안에서 사랑하고 의지로 받아들인 것이
그의 생명에 귀속되도록 하시며,
그것이 결국 그의 영원한 상태를 형성하게 하신다.
내적으로 선을 향하는 사람에게는
외적으로 세상의 여러 욕망과 악한 성향이 남아 있을 수 있지만,
그것들이 그의 내적인 사랑과 반드시 결합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인간을 짓누르는 악들이
그의 ‘진심’과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주님께서 주시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그 악을 자기 것으로 사랑하고 정당화하는 것과,
그 악 때문에 괴로워하며 그것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상태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상에서 겪는 유혹과 연약함을
곧바로 우리의 가장 깊은 사랑과 동일시하지 않으시며,
우리가 자유 안에서
그 악을 죄로 여기고 거부하며 선을 선택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악이 우리의 사랑과 결합하지 않도록 하시고
우리를 선으로 이끄신다.
오히려 그 악들로 인해 한숨짓고 그것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은,
적어도 그 악을 자신의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다는
중요한 표지가 될 수 있다.
저 세상에서 악이 떨어져 나갈 때
그는 그것이 마치 몸에 맞지 않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던지는 것처럼
시원하고 당연한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스스로 어둠을 선택할 권리까지 존중하시지만,
그 자유로운 의지로 단 한 순간이라도
빛을 갈망하고 자신의 허물을 부끄러워한다면 그 고귀한 틈을 결코 놓치지 않으신다.
인간 안에는 그가 묻히고 뒹굴었던 악보다 더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보존하시고 일깨우시는 선과 진리를 향한 가능성이 있으며,
주님은 그 사랑이 온전히 자라날 수 있도록
모든 가시덩굴을 걷어내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이러한 섭리는 끝 모를 좌절 속에서도
결코 소망을 잃지 않게 하는 거룩한 빛이 된다.
끝내 거부할 수 있는 자유 속에서도
주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기로 선택하는 인간의 진심은,
주님께서 그를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은혜에 응답하는 소중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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