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미전우회’(정식 명칭은 ‘공군 실미도 생존자 전우회’다)에서 연락을 받았다. 부대창설 때부터 참여, 실미도의 ‘진짜’ 산 증인이라고 할만한 이가 따로 있다고 했다. 냉혹한 군인이면서도 사실은 인간적인 내면을 가진 영화 속 ‘조 중사’(허준호 분)의 캐릭터에 정확히 부합하는 인물이라고도 했다. 실미도에서 3년간 소대장을 맡아 훈련병들을 교육했던 김이태(金利泰.60.당시 중사)씨였다.
고향(경북 의성군 안계면)에서 만년을 지내고있는 그를 만났다. 환갑의 나이에도 그의 몸은 차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간혹 번득이는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군인(그것도 특수부대원 같은)처럼 보였다. 그는자신의 경험을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자조하지도 않았다. 그냥 담담하게옛일을 회상하듯 말을 이어갔다.
그가 온몸으로 겪어낸, 전혀 극화(劇化)되지 않은 실미도의 생생한 이야기다.김이태씨는 36년 전의 그날을 선연하게 기억한다. 20명쯤 되는 이른바 ‘684부대’ 제1진으로 실미도에 첫발을 디딘 1968년 4월4일. 칠흑 같은 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속에 인천부두를 출항한 배는 한시간여 만에 낯선해안에 멎었다. 동이 트면서 모습을 드러낸 능선 여기저기에 진달래꽃이흐드러지게 피었다. 그런데도 섬은 왠지 음산해 보였다.
4년 전 공군 하사관 27기로 임관한 김씨는 대북 비밀정보.첩보임무를 수행하던 공군 2325전대 소속으로 온갖 특수전 과정을 거친 베테랑 요원이었다. 며칠 전 부대의 김모 소령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나와 같이 일해보자. 특수공작을 해볼 생각이다.”
‘평양에 침투, 주석궁을 폭파하고 김일성의 목을 따기 위한 작전’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실미도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황량한 섬에 40인용 텐트 하나만 설치해놓고 부대 창설준비에 들어갔다.바위를 TNT로 폭파해 충분한 식수원을 찾아냈을 때 언뜻 ‘전조(前兆)가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훗날 정반대의 결과가 빚어지기는 했지만. 몇 주뒤 훈련병들이 들어왔다.
무장한 교관과 기간병들이 해안에 도열, 배에서뛰어내리는 31명을 맞았다. 사회에서 문제가 있던 애들(사실은 30대 중반들도 있었다. 교관이나 기간병들은 대개 그보다 어린 20대 초.중반이었다)이라는 얘긴 들었지만 과연 외양들이 만만치 않았다. 머리를 밀어 유난히험악해 보이는 한명이 경례도 안하고 지나치길래 권총을 뽑아 발치 앞으로쏘았다. 첫날부터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섬을 휘감았다.
곡괭이와 야전삽 만으로 야산을 깎아 연병장을 만들고 막사를 지어 시설을대강 갖추고 나서 정식 입소식을 치렀다. 10명씩으로 3개 소대가 구성됐다. 김씨(하사였지만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는 B소대장을 맡았다. 부여된 시간은 단 3개월이었다. 악과 ‘곤조’ 뿐 기본적인 규율도 전투능력도 없는집단을 단기간에 ‘살인병기’로 탈바꿈시키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인간의 한계를 고려치 않는 가혹한 훈련 뿐이었다.
목표는 무조건 ‘김신조 부대(그 해 1월21일 청와대 습격을 기도했던)보다한단계 더’였다. 그들이 몇 분만에 몇㎞를 산악구보했다고 하면 1~2분이라도 단축해야 하는 식이었다. 구보, 행군, 유격훈련 때마다 정해진 시각이 되면 가차없이 캘리버30 기관총이 훈련병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실제로 뒤쳐진 H가 총탄에 옆구리를 관통 당했다.
40여m 외줄타기 도강훈련 과정에서는 K, L 두 명이 10여m 아래로 추락했다. 내무반, 화장실 앞에 철봉을 세워 드나들 때마다 무조건 매달리도록 했다.강철 같은 체력을 키우는 외에 침투, 사격, 격투, 살상 등의 전투기술도고도로 숙달시켰다. 30m이상 떨어져 출몰하는 이동표적을 뛰며 쏘아 맞추고, 전광석화 같이 대검을 던져 6m쯤 떨어진 과녁을 정확히 꿰뚫는 것쯤은기본이었다.
권투와 합기도를 가르치고 서로 치고받게 하는 방식으로 실전능력을 키웠다. 김포와 여의도 등지에서 숱하게 낙하훈련도 실시했고, 물에 던져져도 서너 시간은 견디도록 만들었다. 침투방법을 논의 끝에 기구(氣球)에도 착안했다. 지금에야 레저로도 하지만 당시로선 기발한 수단이었다. 김씨 자신도 포항까지 날아가는 훈련을 함께 하다 가스(위험한 수소가스를 썼다)가 새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실미도에서 인정(人情)은 주어서도, 기대해서도 안될 것이었다. 작전에선한명의 낙오가 곧 몰살이니까. 아무리 해도 진전이 더딘 C가 있었다. 전체를 위해 제거하는게 낫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저녁 때 해안으로 끌고 나가물 속에 집어넣고 밟았다. 10분이 지났는데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다시백사장에 묻었다. “내일 아침 점호 때까지 죽지않았으면 살려줘라.” C는그렇게 살아났다. 그래 봐야 3년쯤 목숨을 연장한 것에 불과했지만.
작전지역이 북한이었으므로 개인화기는 모두 당시 북한에서 쓰는 것들로제공됐다. 제식훈련도 북한식으로 이뤄졌다. “평보로 가!” “정보(다리를 90도로 들어올리는)로 가!”하는 식이었다. 틀리면 미군 야전침대목을뽑아 만든 몽둥이가 사정없이 머리로 날아갔다. 워낙 단단한 목질이어서맞으면 그대로 피를 뿜으며 거꾸러졌다. 군가도 “장백산 줄기 줄기…”로시작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나 ‘적기가(赤旗歌.영화에 나오는 “비겁한 자들아 갈테면 가라/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하는 가사의 그노래다)를 부르도록 했다.
훈련병 한명이 사회에서 걸린 지독한 성병이 통 낫지를 않았다. 누군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면 된다”고 했다. 야산의 오래 된 무덤을 파헤쳐노란 물이 고인 유골을 찾아냈다. (중국 산동성 사람의 묘였다) 아무도 먹으려 들지않아 김씨가 역한 비위를 참아가며 시범을 보였다. 남은 해골을내무반 앞에 내다 걸었다. 그게 부대표지가 됐다. 어쨌든 그 훈련병은 성병이 나았다.
예정된 기간이 지났을 때 김씨를 포함한 지휘부는 “이만하면 됐다”는 평가를 내렸다. 작전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전진기지로 삼은 백령도로 가 대기했다. 그러나 끝내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한달여만에 귀대했다. 이 때부터 지루한 유지훈련이 반복됐다.
그래도 한 동안은 불시 출동명령에 대비하느라 긴장감이 팽팽했으나 1년여를 넘기면서 확연히 분위기가 바뀌어갔다. (69년10월 중앙정보부장이 김형욱에서 이후락으로 바뀌어남북화해가 시도되면서부터다) 쌀밥에 소고기, 닭고기 등으로 풍성하던 식사(너무 많이 먹어 소화제를 복용할 정도였다)가 보리밥에 단무지로, 아리랑 파고다담배도 화랑으로 바뀌었다. 전에 없던 사고가 잇따랐다. 강간사건도 그 중 하나였다.
밤에 내무반에서 교육용 영화 ‘전투’(인기 TV시리즈물이었던 빅 모로 주연의 그 영화다. 김희갑.황정순의 ‘팔도강산’과 함께 단골 상영작이었다)를 보고있을 때 K 등 셋이 화장실에 간다며 줄줄이 밖으로 나갔다. 밤 점호 때 B조 조장이 “애들 셋이 없어졌다”고 다급하게 보고했다. ‘아차’싶었다. 마을이 있는 인근 무의도는 간조 때면 걸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누군가 통신을 시도했다. “바보 같은 놈아! 침투훈련 받은 놈들이 전화선을 그대로 두었겠느냐.” 전 부대원을 이끌고 무의도로 건너가는 데 총성이 울렸다. 국민학교 쪽이었다. 예비군, 경찰, 교직원들 얼굴이 공포에 질려있었다. 숙직실 안에 주민 20여명이 잡혀있다고 했다.
“나 소대장이다. 없던 일로 약속하겠다. 민간인들은 풀어줘라.” 악에 받친 대답이 돌아왔다. “개소리 말아!” 부대원에게 막소주 한사발씩 돌리고는 일제히 총을 난사하면서 숙직실에 뛰어들었다. 이미 둘은 대검에 목과 배를 찔려 내장이 쏟아져나온 채 숨져있었다. K도 목을 찔렸으나 숨은 붙어 있었다. 그가 둘을 죽인 뒤 자살을 기도한 것이었다. 다행히 인질들의 희생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섬 주민에게서 처녀 자매 둘이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아이들도 있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간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즉시 실미도로 돌아왔다. 내무반 침상에 묶인 상태에서 등 뒤 유리창을깨 목을 긁으며 난동을 피우는 C의 머리를 향해 차갑게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하루는 인천의 209파견대를 다녀오는데 부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추궁 끝에 포악한 성격의 A조 조장 Y가 동료 훈련병들에게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자행해온 사실을 알았다. 게다가 그가 ‘감히’ 기간병을 구타한 일이 발생했다.
전원 연병장에 집합시켰으나 상황을 눈치챈 Y만 나오지 않았다.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다”는 훈련병들에게 로프를 던져주었다. 몽둥이를 꼬나 쥔 훈련병들이 내무반으로 난입했다. “악! 깨지는구나”하는단발마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무차별로 난타 당해 만신창이가 된 Y에게 물을 끼얹어 정신을 들게한 뒤 해변에 던졌다. “잘 가라.” Y는 이튿날 아침 숨이 끊어졌다.
아무래도 성욕구 해결이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훈련병들을 인천의 사창가인 속칭 ‘옐로하우스”로 데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좌절감이 깊어지는 훈련병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부대 분위기를 유지하는것조차 힘겨워졌다. 생각 끝에 상부에 건의했다. “이대로 두면 반드시 큰일이 벌어집니다. 차라리 애들을 공군 하사관으로 임관시켜 주십시오.”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후의 방책을 냈다. “어차피 사회에 복귀시킬 생각이 없다면… 그럼 전부 죽여버립시다. 훈련한다며 덕적도 옆 무인도에 상륙시킨 뒤 캘리버50(중기관총)으로 쓸어버리면 됩니다.
못 하겠다면 내가 하겠습니다.” 역시 아무 응답없이 불안한 세월만 흘렀다.일요일이면 섬 한귀퉁이에 혼자 서서 하루종일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일이잦아졌다. 생각할수록 훈련병들의 운명이 불쌍하고 비참했다. 강간사건,훈련 중 사고, 즉결처분 등으로 이미 훈련병 일곱의 목숨이 사라진 터였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려 했지만 세월이 만든 미운정 고운정은 어쩔 수없었다. ‘저들도 가족이 있을텐데….’ 백령도에서 출동명령을 기다릴 때‘이제 저 놈들과도 마지막이구나’하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던 일도, 앞날을 불안해하는 그들에게 “못 믿겠으면 나를 쏘라”며 소련제 떼떼(TT)권총을 내던져주는 모험으로 분위기를 수습했던 일도 떠올랐다.
중사로 진급해있던 김씨는 그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 71년 봄 본부복귀 명령을 받았다. 실미도에 발을 디딘지 꼭 3년 만이었다. 뱃전에서 멀어져 가는 섬을 바라보노라니 회한이 밀려들었다. ‘여기서 보낸 세월을 내 인생에서 파내어버렸으면….’ 그리고 얼마 안돼 8월23일을 맞았다.
김포에서정기 점프훈련을 위해 낙하복 차림으로 수송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돌연 훈련취소 명령이 하달됐다. “인천 송도쪽으로 무장공비들이 들어오고 있답니다.” 뭔가 휙 머리를 스쳐갔다. “확인해 봐! 베레모에 위장복 차림인지.” 잠시 후 “그렇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상부에 “우리 ‘오소리’(실미도부대 작전명) 애들”이라고 알렸다.
UH-1H 헬기들이 상공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대방동 공군본부에 달려들어갔다가 인근항공의학연구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수류탄 폭사 현장에서 피투성이가 된채로 살아남은 훈련병 넷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튿날에는 다시 실미도에 들어갔다. 상황은 처참했다. 해변에서 발견된기간병 시신의 총상 부위에는 벌써 바다생물이 잔뜩 기어붙었다. 내무반침상 밑에서 쪼그려 앉아 죽은 기간병을 끌어냈고, 해변 동굴 속에서도 가슴을 난사당한 채 눈뜨고 숨져있던 김모 하사도 찾아냈다. 섬 여기저기에서 아직도 연기가 피어올랐다.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개가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그게 실미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김이태씨는 이듬해 군복을 벗었다. 결혼을 한 뒤 73년 준사관 시험에 응시, 다시 군인(준위)으로 보안사에 근무하다 79년 전역했다. 서울에서 무역업을 하다 고향에 내려가 농업기반공사에서 16년을 일하고 2001년 퇴직했다. 이장을 맡아 마을의 대소사를 챙기며 조용히 지내는 그에게 영화 ‘실미도’가 묻어두었던 기억을 되살려냈다.
“영화를 보며 많이 울었지요. … 그 땐 명령을 수행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악랄하게 대했던 것도 걔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지요. 평양 한복판에서 살아 돌아오게 하려면…. 지금 군인으로서 똑같은 명령을받는다 해도 역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김씨의 눈자위가 젖었다. “다들 힘든 인생사를 겪는다고들 하지만 저만한경우야 있겠습니까. 거기서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이 다음 지옥에 가거든 다 찾아 만나야지요.…”
위령탑을 세워 넋이나마 위로해주는게 마지막바람이라고 했다.긴 고백을 마치고 짙어진 어둠 속으로 돌아서는 뒷모습이 후련한 듯, 그러나 한편으론 쓸쓸해보였다. 우리 모두가 한때는 그랬듯 그 또한 광기(狂氣)의 역사에 치인 똑 같은 희생자였으므로.
민중의 기 붉은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시체가 식어 굳기전에 혈조는 깃발을 물들인다
높이 들어라 붉은깃발을 그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기를 지키리라
원쑤와의 혈전에서 붉은기를 버린놈이 누구냐
돈과 직위에 꼬임을 받은 더럽고도 비겁한 그놈들이다
높이 들어라 붉은기발을 그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기를 지키리라
붉은기를 높이 들고 우리는 나가길 맹세해
오너라 감옥아 단두대야 이것이 고별의 노래란다
높이 들어라 붉은깃발을 그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기를 지키리라
|
||||||||||
설 연휴를 맞아 모처럼 '실미도'라는 영화도 보고 '한씨 연대기'도 관람하는 '문화생활'을 즐겼다. 두 가지 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담은 것이기에 나의 구미를 당겼다. 훌륭한 작품들이었지만 나를 더욱 기쁘게 한 점은 젊은이들이 관람객의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이다. '실미도'는 어디까지나 영화이기에 북파공작원에 관련된 역사의 진실을 한정적으로 다루고, 또 단순화하여 극단화하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영화 자체로만 판단하면 당시 정치적 결정에 의해 공작이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주석궁을 요절냈을 터이고, 그랬더라면 통일이 됐을 것이라는 '순진하고' 어이없는 망상을 할 수도 있다. 이에 필자는 실미도가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북파공작원 관련 역사적 진실을 일부 밝히고, 이 영화가 가져올 수 있는 그릇된 역사해석을 경고하고자 한다. 이로써 우리 현대사의 뿌리와 참모습을 제대로 꿰뚫어 볼 수 있는 비판력을 기르는데 조그만 기여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북파공작원 관련 역사의 진실 진실 하나 실미도는 북파공작원, 다른 말로는 북파 무장간첩 이야기다. 이제까지 우리는 간첩은 북한만 보내는 것으로 믿었지 남한이 북한에 보낸다는 것은 좀처럼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정보사령부에 의하면 휴전이후 남한이 북한에 보낸 간첩가운데 실종된 사람이 7726명이며 이들의 위패를 전부 모시고 있다한다. 또 미군이 북파했다 실종된 간첩이 3천명이란다. 물론 이 숫자도 MBC가 2002년 2월 24일 방영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미군이 주도한 KLO대원들은 터무니없이 축소된 숫자라고 강변하고 있어 축소된 숫자일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간첩들을 북한보다 남한이 오히려 더 많이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국회의원 김원웅은 국방부 자료를 인용해 1950년 이래로 1999년까지 총 남파공작원은 6446명이며, 그중 생포자 3177명, 사살자 1644명, 자수자 275명임을 밝혔다.(<동아일보>-2000-11-8). 이 남파간첩 통계에 의하면 휴전이후 남한에서 생포, 사살, 자수자가 5096명이고 1350명은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보인다. 남파간첩의 생존 북한 귀환율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 수 없어 전체 남파간첩 숫자는 파악하기 힘든다. 북파간첩의 경우 <신동아>(2001년 1월 호)에 의하면 50년대 북파 간첩의 생존율은 겨우 10%에 지나지 않았지만 60년대 이후는 90%에 이른다고 한다. 60년대부터 북파간첩으로 갔다 실종된 숫자는 약 2150명으로 알려졌다. 이렇다면 실제 남한이 북파간첩으로 파견한 숫자는 최소한 연인원 2만1500명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이 정도면 미군이 북한에 보낸 간첩을 빼더라도 남한이 북한보다 더 많은 간첩을 보낸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물론 실미도와 같은 북파공작원 부대는 백의사, HID(Higher Intelligence Dept.), KLO, 호림부대, 구월산유격대, 동키(Donkey), 블루보이스(Blue Boys), AIU, 해군ONI, 해군359부대, UDT(Underwater Demolition Team), CID, 공군첩보대, 단독침투 특수부대인 관악산부대, 대만의 장개석첩보부대 등으로 다양하게 존재했었다. 놀라운 사실이지만 이러한 역사의 진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그 결과 나쁜 짓은 북한만 하는 것이지 남한과 미국은 하지 않는다는 허구 속에 우리가 빠져 있은 셈이다. 진실 둘 설악부대 등의 훈련과정을 보면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정도의 훈련강도를 훨씬 능가하는 반인륜적이고 극한적 훈련과정이 실제 있었다. 훈련병이 굶주리고 지쳐서 도망을 쳐다 붙잡히면 동료들로 하여금 그 도망자를 돌과 주먹으로 쳐죽이게 하는 잔인한 처벌도 있었다. 또 영화와는 달리 먹거리를 주지 않은 채 훈련병을 산 속에 보내 며칠동안 칡뿌리와 뱀, 도마뱀, 다람쥐 등을 잡아먹게 하는 훈련 등이 있어 훨씬 더 극한적인 상황에 그들은 시달렸다. 2002년 3월 15일 200명의 북파공작원들이 서울 광화문에서 도심시위를 하면서 밝힌 바에 의하면 이들은 "입사에서 퇴사까지 단 한 번의 외출, 외박, 면회, 휴가가 없었던 24시간 완벽한 통제 속의 생활"했으며 성적인 욕구도 '가끔 산속 창고에서 위안부와 관계를 맺는 것으로 해결해야 했다'한다. 김아무개(40)씨는 82년 10월에 설악산에 있는 개발단에 들어갔고 당시에 40여 명의 동기가 있었는데 이중 복아무개라는 동기가 탈영을 했다가 잡혀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부대에서는 복씨를 감금한 채 온갖 고문을 자행했다. 나중에는 '배신자'라는 간판을 목에 걸고 동기들로 하여금 3시간 동안 끌고 다니면서 때려죽이게 했다. '나는 동기를 때려죽였다는 죄책감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동기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맞아죽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정보사는 나아가 간혹 탈영하다 잡힌 사람들을 배신자 처리의 본보기로 발가벗긴 채 족쇄와 올가미를 씌워 끌고 다니며 동료들로 하여금 소꼬리 채찍이나 싸리나무, 몽둥이로 때려죽이게 했다"고 전한다(오마이뉴스, "우리의 한 맺힌 인생을 보상하라", 2002. 3. 15) 진실 셋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남이나 북이 서로 간첩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파견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나 이 희생자들에 대한 배려에서 남과 북은 극히 대조적이다. 북은 6.15공동선언에서 비전향장기수(대부분 남파공작원)의 송환을 명문화해 이 남파공작원의 존재를 일찍 인정하고 송환까지 요구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 결과 송환된 장기수에 대해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치렀고, 평양에 에어콘이 달려 있는 아파트를 배당하고, 결혼을 주선하는 등 이들에 대한 보상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러나 남은 북파공작원의 가스통시위 등 격렬한 저항운동으로 사회문제화 되기 전까지는 북파공작원 존재자체를 부인했을 뿐 아니라 겨우 작년 연말에 국회에서 보상법을 통과시키는 정도였다. 이전에는 보상은커녕 오히려 이들을 감시 및 정탐하여 이들의 생존권 자체를 방해하는 일들을 국가가 자행했다. 이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가진 인권적 인간이 아니라 그야말로 단순한 인간 소모품으로 취급된 셈이다. 또 영화와는 달리 실미도 사건에서 살아남은 공작원은 네 명으로 정식 재판에 회부되어 결국 사형을 당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이들은 진실을 폭로하지 않고 당국이 요구하는 대로 거짓 진술하면 생명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에 꾀어 거짓 진술을 했으나 결국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 셈이다. 진실 넷 남쪽이 주도해 보내거나 양성한 북파공작원에 대한 전모는 조금씩 밝혀져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고 있지만 미군이 보낸 공작원의 실체는 전혀 드러나지도 않고 언제 밝혀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앞의 정보사 발표에서도 미군이 보냈다 실종된 숫자가 3000명이었다. 또 최근 MBC가 밝힌 바와 같이 어부들을 위장 월선시켜 간첩행위를 한 공작에서도 그 훈련을 부산 미군부대인 하야리아부대에서 시켰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제 미군에 의한 피해자도 당당히 나서고, 우리 정부도 머뭇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또 보상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미군이 저지른 북파공작원 전모도 그 진실이 규명되고 알려져야 할 것이다. 진실 다섯 영화에서는 공작원 모두가 사형수와 같은 범법자였지만 이는 부분적인 사실에 불과하고 많은 수는 엄청난 보상 등을 미끼로 모집된 청장년들이었다. 신출귀몰한 탈옥수 신창원을 경찰에 신고하여 체포하게 한 광주의 김아무개는 대북 첩보부대 HID의 후신인 AIU(Army Intelligence Unit) 출신이었다. 그는 89년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특수부대에 입대해 특수부대에 근무하였으므로 90년대 초까지 이 첩보부대는 활동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구체적인 부대이름은 밝힐 수 없다. 국가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간다는 마음가짐이 있었다. 특수부대도 국가가 불러서 갔다. 훈련과정에서 '나'를 버리게 됐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내 목숨은 국가를 위해 있고 언제든지 바칠 수 있다. 그런 의무감과 사명감이 있어야 자긍심도 생긴다"고 말할 정도로 긍지를 가졌다고 한다. 분명히 자포자기한 범법자가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일반 시민이었다. 영화 '실미도'가 안고 있는 그릇된 역사해석 역사해석 하나 : 군사제일주의
이러한 군사제일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우리는 역사 속에 쉽게 확인한다. 6.25전쟁 때 미군사령관인 맥아더는 한반도와 중국접경에 무려 26개의 원자탄을 투하할 것을 강력히 고집했다. 만약 국제여론과 정치가들이 이 전쟁광인 맥아더의 군사제일주의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미국의 고위장성은 북한에 대한 무력공격을 강력히 주장한다. 이랬을 경우 그 엄청난 전쟁참화는 미국이 안는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우리에게 씌워진다. 필자는 2004년 국방비 증액과 자주국방의 문제점에 대한 학술토론회를 사상 처음으로 국방부산하기관과 민간 평화운동간에 가진 적이 있었다. 당시 절감한 것은 국방장관은 절대 군인출신이 맡아서는 안 되고, 군사정책 문제는 국방부 산하에 둘 것이 아니라 대통령 직속으로 두어 군사제일주의의 침투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분단냉전체제 아래 있는 우리의 경우 국방부나 군사관련기관의 힘이 막강하여 이들에 대한 문민통제는 가장 절실한 문제이다. 역사해석 둘 : 국가혐오주의 영화는 국가주의의 문제점을 아주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훈련병의 주민등록을 아예 말소시켜버리고, 훈련병 모두를 살해함으로써 부대해체와 비밀의 탄로를 막는 계획을 국가가 꾸몄다. 그야말로 인간은 없고 단순한 소모품으로만 부대원들이 인식 및 취급되었다. 이 결과 국가혐오주의가 영화 전 장면에 깔리고 있다. 물론 이러한 국가주의에 대한 경계는 정당하다. 그러나 모든 국가가 이런 혐오주의의 대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등 냉전개발독재국가 시대의 국가와 민주화 시대의 국가는 동일한 국가가 결코 아니다. 영화 속의 국가가 모든 국가의 본질인양 과대 일반화되는 영역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국가주의에 대한 경계는 좋지만 잘못하면 신자유주의 식의 시장독재 찬양주의로 빠질 우려가 있다. 역사해석 셋 : 패거리주의 영화는 훈련병들 사이의 끈끈한 전우애를 듬뿍 담고 있다. 극단적 상황일수록 이런 전우애는 필요하고 끈끈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피로 뭉쳐진 전우애가 가져올 파국에 대한 경계심이 희박해지는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스럽다. 특히 군사문화가 시민사회 곳곳에 침투한 우리 사회의 경우 유독 의리를 강조하는 악습이 남아 있다. 흔히들 전두환과 장세동 간의 의리나 깡패들 사이의 의리도 의리 그 자체는 높게 평가되어져야 한다고 한다. 전우애나 의리가 변종이 되다보면 패거리주의가 된다. 이는 소집단의 이익과 의리 및 전우애를 위해 보편적 가치인 사회규범이나 윤리규범을 박 먹듯이 위배하는 것으로 반윤리와 범법행위로 귀결된다. 친구간의 우의를 위해 친구의 강도 짓에 동참하는 것이 올바른 우의나 우애는 아니듯이 빚나간 전우애가 XX대 전우회 같이 얼마나 극우적인 폐단을 가져오는지를 우리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전두환이 이끈 하나회라는 군대 패거리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짓밟고 광주학살을 불러온 반역사적 범죄는 바로 패거리의리와 전우애에 기반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냉전성역 허물기'의 일상화를! 위의 북파공작원 문제와 같이 현대사, 북한, 통일 영역의 많은 현상들은 극단적인 냉전분단체제 아래 이제까지 음폐되고 왜곡되어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 남북이 서로를 원천적으로 적대 및 부정(否定)하여 상대방에 대해 악의적인 덧칠을 하여 악마화 하고 자기 것은 절대적인 선으로 미화하거나 신성시 해왔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전쟁, 친일파청산, 정통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주한미군, 연방제, 주체사상, 김일성, 김정일, 민족자주, 평화협정 등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교과서와 같은 '표준정답'이 있어 이에 도전하게 되면 그들은 인혁당이나 조봉암처럼 죽음에 처하게 되거나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을 받고 또 왕따도 당하고 불이익을 겪어야 했다. 필자는 이들을 냉전성역이라고 개념규정 했다. 곧, 극단적인 냉전분단체제 아래 어느 누구도 감히 손댈 수 없는 성역, 곧 금기영역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규정했다. 이들 냉전성역에 대한 표준정답은 진짜 정답이 아니라 허물어져야 할 허구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세계사적인 탈냉전과 민족사적인 통일시대를 맞은 이 시점에서 이들 냉전성역을 허물지 않고는 민족의 화해, 협력, 평화, 통일을 향해 제대로 나아갈 수 없다. 냉전허물기를 통해 역사의 진실과 실재를 밝혀 냉전논리에 의해 왜곡된 것을 바로잡고 극복해서 이 냉전성역들이 더 이상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는 민족앞길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일, 곧 냉전성역 허물기는 꼭 거창한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맞닥뜨리는 영화 실미도와 연극 한씨 연대기 등을 통해 영감과 고뇌를 얻어 한 두 발자국씩 역사의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데서 이룩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