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의 ‘독서여가도’는 위작이다.
겸재 정선의 ‘독서여가도(讀書餘暇圖)’는 보물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하권(간송미술관 소장)에 실려 있는 사인(士人)풍속화의 하나이다. 이 그림은 한 선비가 툇마루에 앉아 마당에 놓인 화분의 꽃을 완상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위작의 근거를 밝히기 위해 검토할 수 있는 참고작품으로 같은 화첩에 실린 ‘척재제시도(惕齋題詩圖)’(1741)와 보물 <퇴우선생진적첩(退尤先生眞蹟帖)>(삼성미술관 리움)에 실린 ‘인곡정사도(仁谷精舍圖)’(1746)를 먼저 설정해 둔다.
1. 필법 면에서
① 사물의 윤곽선 : 위의 두 비교 작품에서 확인되듯이 겸재는 건물이나 인물을 그릴 때 반드시 윤곽선을 계화법(界畵法)으로 국고 진하게 그리는 버릇이 있는데, 이 작품은 모든 윤곽선이 가는 선(細線)으로 그려져 있다.
② 질감 표현 : 이 그림은 나뭇결, 방바닥, 신발, 화분 등에서 가는 잔 붓질로 질감을 나타내고 있으나 겸재의 건물 그림은 확실하고 굵은 윤곽선(鉤勒法)으로 그리는 습성이 있다. 다만 초충도의 경우는 미세하게 표현하지만 이런 경우도 사물의 표면적인 느낌을 살리는데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2. 건물 묘사에서
③ 툇마루와 방안 사이의 경계 벽면이 완전히 없어진 기이한 한옥이 되었다. 겸재의 눈은 정확하고 참고작품과 비교해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④ 책꽂이(書架)가 방 한가운데 놓여 있다. 겸재는 어떤 대상을 가볍게 묘사하더라도 그 형태는 정확하다. 참고작품(1)은 방안의 서가가 벽면에 정확히 붙어 있다.
⑤ 서가, 툇마루 기둥, 오른쪽 문틀 등의 두께 표현이 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참고작품(1)에서 보면 기둥의 주춧돌은 물론 문짝에서조차도 그 두께 표현이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다.
⑥ 오른쪽 문 위쪽 문틀의 방향이 어긋나고, 문짝 역시 상하 문틀이 같은 방향이 아니다. 이것도 참고작품의 문짝 표현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⑦ 인물 윤곽선이 가볍고 가늘다. 참고작품(1)에서 보듯이 겸재의 인물 표현은 윤곽선이 둔하고 억지로 그린 느낌이 들어 인물 묘사에 대한 자신감을 읽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⑧ 나뭇가지 표현 : 문틀 속에 보이는 나뭇가지와 건물 밖으로 보이는 가지의 연결이 굵기 면에서 맞지 않다.
3. 대상을 보는 시각에서
⑨ 화분과 건물을 보는 시각의 불일치 : 툇마루를 보는 시각이 화분을 보는 시각보다 훨씬 위쪽에서 내려다보는 부감시(俯瞰視)로 포착하고 있어서 툇마루와 화분과의 사이에 시각이 어긋나고 있다. 겸재의 대상 표현에서 이처럼 어긋난 시각은 거의 없다.
4. 낙관(落款)에서
⑩ ‘鄭’, ‘敾’이라는 외자 백문(白文) 인장의 경우 일반적인 위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희미하고 크기도 미세하게 다르다. 다만 낙관(인장과 글씨)만으로 작품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왜냐하면 위작자로서는 낙관의 정확한 모방은 의외로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를 적은 글씨도 일반적인 겸재의 글씨체보다 둔하고 부자연스럽다.
이상의 검토에서 본 작품은 겸재 정선의 진작이 아닌 위작의 근거로 10가지 이상으로 나타난다. 겸재는 대상을 속필로 그리는 경우라도 대상 파악은 놀라우리만치 정확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건물의 외형을 결코 허술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중희(李仲熙),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李仲熙, ‘겸재 정선 회화에 있어서의 2, 3 문제’,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1권(항산 안휘준 교수 정년기념논문집), 2006년 3월, pp.314~333) -설날 아침에 위 논문에서 초록
* 묘사의 평면성, 색채의 화려함, 시점의 다양성, 원근법의 무시 등으로 보아 한참 후대인 19세기 말경 개화기에 상업 목적으로 민화를 그리던 작가가 겸재의 작품을 흉내내어 그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화면이 변색된 것으로 보아 혹시 납이 들어간 서양물감이 사용된 것은 아닐런지?(진품을 본 적은 없음)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18세기 화단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문인화가로서 다양한 소재를 소화하였다. 그는 70대 이후 말년까지 화필(畵
筆)을 놓지 않았으며, 때때로 아들과 제자에게 대필(代筆)을 시키기도 했다.
생존 당시부터 명성이 높았던 정선의 화풍은 그의 사후(死後), 20세기 초까지
조선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과정에서 정선 그림의 모방작과 복제작이
만들어졌고, 서명과 인장을 위조한 작품들이 섞인 채 유통되었다. 그와
같은 현상은 조선이 근대화를 향한 대장정에 뛰어들었던 19세기 후반‒20세
기 초 미술시장에서 한층 노골화되었다."
[참고할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