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삼밭회 인천 나들이
일시:2016년 10월 13일 목요일
장소:인천 차이나타운, 동화마을, 자유공원, 송도 연안부두
* 인천 차이나타운
오늘은 고향 친구 5명 모임인 오삼밭회를 이곳 인천 차이나타운에 갖기로 했다. 각자 11시경 인천 차이나타운에 와서 전화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전철로 와서 인천역에 하차하였다. 전철역 바로 건너에 차이나타운이 있다. 길 하나를 건너 차이나타운의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1884년 이 지역이 청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생겨났다. 과거에는 중국에서 수입된 물품들을 파는 상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현재는 거의가 중국 음식점이다. 현재 이 거리를 지키고 있는 한국 내 거주 중국인들은 초기 정착민들의 2세나 3세들이어서 1세들이 지키고 있었던 전통문화를 많이는 지키지 못하고 있지만 중국의 맛만은 고수하고 있다. 이곳 차이나타운이 유명해진 것은 얼마전 끝난 MBC 드라마 가화만사성 촬영지이기 때문이다. 나도 사실은 그 중국집 건물이 매우 보고 싶어서 찾아보았다. 긴 도로의 삼각점에서 왼편으로 우람한 가화만사성 건물이 보인다. 저 중국집에서 주인이었던 아버지는 자수성가하여 집안을 일구었고, 아내는 힘들어하면서도 우애있게 시댁식구들과 살았다. 큰 아들과 큰 딸은 이란성 쌍둥이로 결혼 문제에 애환이 많았다. 특히 큰 딸의 시집살이와 새로운 만남의 남자와의 사랑은 눈물겨웠다. 삽입곡도 많은데 모두 애절했다. 나는 그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기에 오늘 만난 저 가화만사성 중국 음식점 건물이 정겹다. 그 옆 건물은 며느리가 이혼하고 보란듯이 시아버지의 중국집과 마주하여 운영하던 중국집이다. 저 건물 앞에서 무수한 사연이 맴돌았었다. 친구들을 만나 가화만사성 중국집에 들어가 점심식사를 했다. 유명세로 함참을 기다려서 들어가 먹었다. 식사 후에는 차이나타운 거리와 건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으며 벽화로 유명한 거리로 갔다. 주변은 여러 코스로 나뉘어 탐방할 명소들이 많다. 우리는 A코스 끝인 삼국지 벽화 거리 → 팔각정 →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탑→ 자유공원 광장 → 맥아더장군 동상 → 인주미술관 → 홍예문 →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코스로 보기로 하고 동화마을로 향했다.

* 인천 송월동 동화마을
차이나타운을 지나 동화마을에 접어 들었다. 송월동은 소나무가 많아 솔골 또는 송산으로 불리다가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달이 운치가 있어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후에는 독일인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부촌을 형성하였으나, 수십 년 전부터 젊은 사람들이 떠나고 마을에는 연로하신 분들이 살다 보니 활기를 잃고 침체되었으며, 빈집들은 방치되고 있었다. 이런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꽃길을 만들고 세계 명작 동화를 테마로 담벼락에 색칠을 하여 동화마을로 변화하였다. 아름다운 동화 속 주인공들이 골목마다, 담벼락마다 고운 색상으로 화사하게 그려져 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하루 종일 골목마다 모두 보고 싶다. 어린이들이 오면 참 좋은 듯하다. 개구리 동상도 귀엽다. 우리는 개구리처럼 귀엽게 사진을 찍었다. 자유공원으로 가기 위해서 오르막 언덕길 골목길로 접어드니 초가집도 있다.지붕에는 호박이 뒹군다. 마루에 친구와 앉아 유년의 추억을 되새겼다.

* 인천 자유공원
인천 자유공원은 전에도 몇 번 왔었다. 나의 두 아들이 어렸을 때 왔던 기억이 새롭다. 큰 아들이 6살, 작은 아들이 3살로 기억된다. 그때 은행에 근무하던 남편이 차장 승진 시험공부를 해야해서 집을 조용한 분위기로 조성해주기 위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이곳 자유공원에 왔었다. 서울 화곡동 주택에 살 때였다. 큰 아들이 역사를 좋아하여 맥아더 장군 동상이 인천 자유공원에 있다고, 그를 만나기 위해 가자고 해서 선택한 곳이었다. 그때의 큰 아들은 지금 37세로 대학 사학과를 졸업과 동시에 중등역사임용고시에 합격하여 현재 고등학교 역사교사가 되어 근무하고 있다. 작은 아들은 약대를 졸업하고 현재 약사로 복지부 약사로 공기업에 근무하고 있다. 두 아들은 모두 결혼하여 두 자녀씩 둔 어엿한 가장이 되었다. 그날 두 아들을 데리고 인천 자유공원을 다 돌아보고 월미도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었다. 그때 택시기사가 나에게 '참 안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어쩌다 혼자 되셨는지...'하며 날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나는 아니라고, 남편이 승진 시험공부를 해야해서 두 아기들 데리고 나온거라고 대답했다. 그때서야 택시기사는 웃으며 너그러운 눈빛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었다. 인천 자유공원에 오면 항상 나는 그때의 기억으로 아름답고, 훈훈했던 회억에 젖는다. 오늘도 그날의 추억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인천 시가지의 응봉산 전체를 자유공원이라 부르는데 조성연대는 서울의 파고다공원이 조성된 1897년보다 몇 년 앞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인천항 개항 뒤 1888년 외국인 거류민단에서 관리 운영하여 당시 시민들은 이를 각국공원이라 불렀다. 그 뒤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1914년 각국 거류지의 철폐와 함께 공원 관리권이 인천부로 이관되자 그 때부터는 서공원으로 불렀다. 1945년 해방 후에는 만국공원으로 불렸다.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응봉산 정상에 세워진 1957년 10월 3일부터다. 지난날 이곳에는 존스턴 별장 인천각, 세창양행숙사 청광각 등의 건조물이 들어서 있었으나 6.25 전쟁 때 없어졌다. 충혼탑을 비롯하여 석정루, 연오정 등이 있으며, 학익고인돌을 옮겨 보존하고 있다. 자유공원은 인천 시가지와 주위의 연산, 항만, 앞바다 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시민의 휴식·위락장소이며, 미술대회·글짓기대회 같은 각종 행사도 자주 열린다.
자유공원은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숲속 체육공원에서 휴식하며 운동도 하고, 넓은 정원으로 내려가니 꽃을 예쁘게 가꾸어 조성해 놓았다. 우리 친구들은 꽃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소녀가 되어 사진에 담겼다. 먼 후일 이 사진을 보며 이렇게 젊은 시절이 있었느냐고, 모두 꽃처럼 고왔구나, 하겠지. 언덕을 올라가니 맥아더 장군이 우람한 모습으로 서 있다. 자유공원에서 가장 보고 싶은 동상이다. 한 동안 그 분을 바라보며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동란 중에 우리나라를 도와주신 고마움, 나의 두 아들과 와서 보던 기억 등이 가슴 깊이 솟구친다. 자유공원 곳곳을 둘러보고 숲길을 따라 하산하여 내려왔다. 다시 차이나타운을 만나, 아까 보지 못한 차이나타운 골목길을 걸어서 인천역으로 돌아왔다.

* 송도 연안부두
인천역에서 전철을 타고 송도로 갔다. 송도역에서 연안부두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전철역에서 꽤 먼 거리다. 배를 승선하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우리는 늦은 시간 관계로 배는 타지 않았다. 연안부두 주변은 분수도 있고, 러시아에서 보았던 인형도 세워져 있다. 이곳은 순양함 바랴그호의 슬픈 역사가 있어서 그렇다. 1904년 팔미도 해상에서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싸울 때 러시아군은 일본군에게 밀리자 함선을 내어주지 않고 자폭하였다. 그들의 100주년 추모비가 2004년에 세워져서 연안부두 광장에 설치되어 있다. 저 러시아 인형들이 그날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듯한 눈빛이다. 오붓한 바다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많이 정박해 있다. 한적한 곳에서 가수 배호의 노래비도 만났다. 배호의 흉상과 사진과 '비내리는 인천한 부두'라는 노래의 가사도 적혀 있는 비석이다. 우리들의 20대 꽃다운 청춘시절에 가슴을 울리던 배호다. 그의 품에 안기듯 비석 앞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내가 대학 2학년 때 가을 10월 어느날 그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공주교대 2학년 수학반이었는데 남학생이 등교하여 칠판에 '배호 사망'이라는 글씨를 썼다. 그러니까 내 나이 21세 때다. 나는 지금 아득한 학창시절이 떠오르고, 그의 죽음을 전해듣던 슬픔도 떠오르고, 눈부시게 찬란한 배호의 노래들도 떠오른다. 배호 동상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온 것도 아닌데, 오늘 우리는 참 우연히도 송도 연안부두에서 베호를 만난 것이다. 젊은 날의 훈훈한 재회로 기쁘고, 보람된 만남이다. 석양의 노을이 곱게 내리며 우리의 걸음을 재촉한다. 우리 친구들은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 귀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