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하동>에서 제 마음에 든 단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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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에서/이시영
선내에 진입해 아이들 시신을 발견해 데리고 나오다보면 여러가지 장애물에 걸려 잘 안 나올 때마다 “애들아, 엄마 보러 올라가자. 엄마 보러 나가자”고 하면 신기하게도 잘 따라나왔다며, 잠수사는 잠시 격한 숨을 들이쉬며 말했습니다.
산책로에서/이시영
오늘도 국립국악원 철책을 타고 넘어온 나팔꽃들은
일제히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하늘을 보다/이시영
오늘 하늘이 저처럼 깊은 것은
내 영혼도 한때는 저렇듯 푸르고 깊었다는 것
호수/이시영
오리 한 마리가 느리게 물살을 가르고 지나가자
호수는 그만 간지러워서 오리 발을 꽉 붙잡았다
깜짝 놀란 오리가 깃을 털며 날아오르는 소리에
후다닥 깨어지는 오후의 적막한 평화
2014년 9월 19일,/이시영
-어느 세월호 어머니의 트윗을 관심글로 지정함
“가난한 집에 태어난 죄로…… 2만원밖에 못 줬는데 고스란히 남아 있던 지폐 두장. 배 안에서 하루를 보냈을 텐데 친구들 과자 사 먹고 음료수 사 먹을 때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능선/이시영
형의 어깨 뒤에 기대어 저무는 아우 능선의 모습은 아름답다
어느 저녁이 와서 저들의 아슬한 평화를 깰 것인가
바다에 이르기 전/이시영
바다에 이르기 전 강물들은 마침내 호수처럼 한곳에 그득하니들 모여, 오리 같은 긴 목을 들어 꽥꽥거리며 간혹 바다보다 매서운 푸른빛으로 빛나기도 합니다.
첫 아침/이시영
주차장 공터에 흰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그 위에 까치 동무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다
나는 저 두줄의 시린 발자국이 지상의 끝까지 펼쳐졌으면 좋겠다
어느 성탄/이시영
성탄절 아침 어미 고양이 한 마리가 새끼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빈약한 성탄 음식을 나눈 뒤 새끼 등을 하염없이 핥아주고 있다. 곧 폭설이 내려 저들의 등을 양털처럼 하얗게 덮을 것이다.
외꽃/이시영
꽃들도 밤에는 입을 오므리고 잔다
외꽃이 그것을 내게 일러주었다
아침 노래/이시영
로자 룩셈부르크에 의하면 북유럽의 추운 계절, 머나먼 남쪽 나라를 향해 하늘을 나는 독수리 등에는 작은 새들이 겁먹은 눈을 깜빡이며 업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드디어 나일강 변에 이르면 수천 킬로의 비행에 지쳐 나자빠진 독수리 머리맡에서 자신이 지닌 가장 영롱한 아침 노래를 들려준다고 한다.
저문 날/이시영
손톱만 한 나비 한 마리가 밀고 나가는 서녘 하늘길
집채 같은 비행운이 일었다간 곧 스러진다
그네/이시영
아파트의 낡은 계단과 계단 사이에 쳐진 거미줄 하나
외진 곳에서도 이어지는 누군가의 필생
솔/이시영
소나무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땅 위에 내려놓는다
볼이 붉은 한 가난한 소년이 그것을 쓸어모아
어머니의 따스한 부엌으로 향한다
박성우/이시영
저물녘 길을 나서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그 앞에 모든 사물은 엎드려 묵상에 잠기다
보길도/이시영
몽돌밭에 낮은 파도 몰려와 쓸리는 소리
세상에서 가장 작고 낮은 그 소리
동장군/이시영
뜨거운 눈 속을 뚫고 솟구쳐오른 파 대가리
저것이 있어 올겨울은 매섭게 푸르다
어느 상형문자/이시영
꿩은 사라지고
그가 남긴 발자국만이 눈밭에 파르르하다
산길/이시영
밤새워 고라니가 파놓은 흙 위에 흰 눈이 소복이 쌓이셨다
봄/이시영
보도블록과 보도블록 사이에서
민들레 한송이가 고개를 쏘옥 내밀었다
너 잘못 나왔구나
여기는 아직 봄이 아니란다
나무/이시영
강변에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한그루는 스러질 듯 옆 나무를 부둥켜안았고
다른 한그루는 허공을 향해 굳센 가지를 뻗었다
그 위에 까치집 두채가 소슬히 얹혔다
강변에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