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을 통해서 샐러리맨들의 삶과 일상을 담아내었던 만화책 '미생' 1권을 참 재미있게 보았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문득 주인공 장그래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가 무척 궁금했고 보고 싶어졌다. 그는 인턴생활을 어떻게 해 나가고 있을까? 2권에서는 인턴사원을 벗어나 정식사원이 될 수 있을까?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는 왜 날개를 달고 있을까? 궁금함을 가득 안고 책장을 펼쳤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바둑이 있다. 73p
책 표지에 등장하는 인물은 IT 영업팀 박 대리였다. 그는 직장과 가정 양쪽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직서를 낼까 말까 고민 중에 우연히 장그래를 만나게 되고, 둘은 함께 그의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게 된다. 박대리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던 장그래를 보면서 한 친구를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렸다.
종종 나를 찾아와서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는 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항상 같은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들을때마다 참 안타깝고 답답했다. 하루는 참다못해 흥분한 나머지 내 주장을 펼쳤는데, 친구가 아무 말 없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난 뒤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의 섣부른 충고로 그 친구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그 친구가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것 뿐이었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내가 남보다 조금이라도 낫다는 생각은 교만이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건 자신의 방식을 바꾸기보다는 단지 자신의 방식을 지지해주고 이해해 주는 걸 더 원하지 않을까? 그것이 옳고 그름은 그 다음 문제인 것이다.
어떤 수를 두고자 할 때는 그 수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계획이 있어야 해. 그걸 '의도'라고 하지.
또 내가 무얼 하려고 할 때는 상대가 어떤 생각과 계획을 갖고 있는지 파악해야 해. 그걸 상대의 '의중'을 읽는다라고 해. 왜 그 수를 거기에 뒀는지 말할 수 있다는 건 결국 네가 상대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형세를 분석한 너의 안목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된다는 뜻이야. 그냥 두는 수라는 건 '우연'하게 둔 수인데 그래서는 이겨도 져도 배울 게 없어진단다. '우연'은 기대하는 게 아니라 준비가 끝난 사람에게 오는 선물 같은 거니까. 208-209p
난 무슨 일을 할 때 먼저 계획을 세우거나 그 일에 대해서 생각 해 보는가? 누군가와 함께 일을 할 때 상대방의 생각을 파악해 보려고 하는가? 그리고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는가? 모든 일과 사건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냥 일어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의도'와 '의중'은 단지 바둑에만 한정되는 용어가 아닐 것이다. 일상 생활 중 어떤 순간에서도 적용이 되는 중요한 단어가 아닐까? '우연'이란 건 준비가 끝난 사람에게 오는 선물이란 말이 울림을 주었다. '우연'을 기대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놓인 일과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충실하고 또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우연'이란 것은 정말 선물처럼 주어지지 않을까?
[31수] 단수(單手)! 죽음 직전의 상황을 "단수에 몰렸다"고 한다. 단수에 몰렸다고 해서 무조건 삶을 서두르지는 않는다. 폐석(廢石)은 그냥 버리고 요석(要石)은 반드시 살린다. 어느 것이 폐석이고 어느 것이 요석이냐. 그건 판이 정한다. 상황이 변하면 애지중지하던 요석도 순식간에 폐셕이 되고 만다. 235p
쓸모 없게 된 돌과 중요한 구실을 하는 돌이란 뜻을 가진 '폐석'과 '요석'. 폐석과 요석을 결정하는 건 판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 펼쳐진 판에서 폐석은 무엇이고 요석은 무엇일까?
정진홍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한다]를 읽은 후 세웠던 하나의 모토가 있다. 책 속의 글 귀를 따라서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로 정했다. 이 모토에 따라 매달 달성이 가능한 목표를 서너 개 정했는데, 그 중 버려야 할 습관과 가져야 할 습관을 꼭 섞었다. 나에게는 버려야 할 습관이 폐석이고 가져야 할 습관이 요석인 셈이다. 새로운 한 달이 시작될 때 마다 새로운 폐석이 생겨나고 새로운 요석이 생겨났다. 달이 바뀌어도 꾸준히 올라오는 폐석도 있었다.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난 지금, 그래도 3분의 1 정도는 새로운 폐석과 요석이 판 위에 올랐다.
개인 P.T 시험에서 장그래와 한석율은 서로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팽팽한 싸움을 벌였고,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만약 장그래가 공장 보다 사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의견을 밀어 붙였다면 과연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었을까? 한석율은 장그래가 내민 실내화를 끝까지 거부했을지도 모른다. 장그래는 공장과 사무 둘 다 중요하다며 대립 보다는 함께 공존을 선택했다. 정말 멋진 선택이었다!
내가 어려움에 처해있고 힘든 상황이라도 나만 생각하고 나 혼자 살려고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도 배려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살자는 생각으로 일과 만남에 조금 더 노력한다면, 결과 또한 그 만큼 조금 더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턴 장그래는 2년 계약직 사원으로 최종 합격한다. 장그래의 얼굴에서 합격의 기쁨이 생각만큼 커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새로운 시작의 기쁨 보다 앞으로 짊어져야 할 그 무게가 더 커 보여서 그랬던 것일까? '쌍용차 해고자 전원 복직'이라고 쓰여있는 현수막과 농성장소, 그것을 바라보는 장그래의 표정이 왠지 슬퍼 보였다. 현수막과 관련된 기사를 검색해 본 후 내 마음 또한 그랬다. 장그래는 이제 정사원이다. 그는 앞으로 근로자로서 어떻게 삶을 살아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