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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집 유한라산기
면암 최익현의 면암집 <유한라산기>에 나오는 제주의 위치에 대해 궁금합니다.
최익현 선생이 한라산에 오른 감회를 적은 수필인데 여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제주 한라산 정상에서 바라다본 소회를 적은 것인데,
"위로는 별자리를 다다르듯 하고 아래로는 세상을 굽어보며, 좌로는 부상(扶桑)을 돌아보고 우로는 서양을 접했으며, 남으로는 소주(蘇州)ㆍ항주(杭州)를 가리키고 북으로는 내륙(內陸)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옹기종기 널려 있는 섬들이 큰 것은 구름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 하는 등 놀랍고 괴이한 것들이 천태만상이었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문에는 '소항'이라고 되어 있는데 소주와 항주를 말한다고 하네요.
이 글을 볼 때, 소주와 항주 아래가 조선은 아닐테고 그 위쪽이라면 한라산 정상에서 남쪽을 향해 바라보고 동서남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좌(왼쪽)은 동쪽이 되고, 우(오른쪽)은 서쪽이 될 것이며 북쪽이 뒤쪽이 될 것입니다.
남쪽에 소주, 항주가 있다면, 제주는 소항보다 위쪽에 제주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것에 대해 댓글 부탁드립니다.
=========================== <유한라산기>===========================
遊漢挐山記 - 1875년 勉菴 崔益鉉(1883~1906)先生의 글
고종 10년(1873) 겨울에 나는 조정에 죄를 지어 탐라(耽羅)로 귀양을 갔다. 하루는 섬사람들과 山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내가 말하기를, “한라산의 명승은 온 천하가 다 아는 바인데도 읍지(邑誌)를 보거나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구경한 이가 아주 적으니, 갈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인가?”하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이 산은 4백 리에 뻗쳐 있고 높이는 하늘과의 거리가 겨우 한 자 정도로 5월에도 눈이 녹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정상(頂上)에 있는 백록담(白鹿潭)은 곧 뭇 신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던 곳으로 아무리 맑은 날이라 할지라도 항시 흰 구름이 서려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세상에서 영주산(瀛洲山)이라 일컫는 곳으로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에 들어가니 어찌 범상한 사람들이 용이하게 구경할 수 있겠습니까.”하므로, 나는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
그후 을해년(1875, 고종12) 봄에 나라의 특별한 은전(恩典)을 입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윽고 한라산을 탐방할 계획을 정하고, 사인(士人) 이기남(李琦男)에게 앞장서서 길을 인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일행은 어른이 10여 명에 종 5, 6인이 따랐으며, 출발 시기는 3월 27일이었다.
일행이 남문(南門)을 출발하여 10리쯤 가니 길가에 개울이 하나 있는데, 이는 한라산 북쪽 기슭에서 흘러내리는 물들이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드디어 언덕 위에 말을 세우고 벼랑을 의지하여 수십 보를 내려가니, 양쪽 가에 푸른 암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그 가운데에 큰 돌이 문 모양으로 걸쳐 있는데, 그 길이와 너비는 수십 인을 수용할 만하며, 높이도 두 길은 되어 보였다. 그 양쪽 암벽에는 ‘방선문(訪仙門)ㆍ등영구(登瀛丘-선문을 찾아 영주 언덕에 오르다)’란 6자가 새겨져 있고 또 옛사람들의 제품(題品)들이 있었는데 바로 한라산 10경(景)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문의 안팎과 위아래에는 맑은 모래와 흰 돌들이 잘 연마되어 그 윤기가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고, 수단화(水團花)ㆍ철쭉꽃이 열을 지어 좌우로 심어져 있는데 바야흐로 꽃봉오리가 탐스럽게 피어나고 있으니, 역시 비할 데 없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한참 동안 풍경에 취해 두리번거리며 조금도 돌아갈 뜻이 없었다. 다시 언덕으로 올라와 동쪽으로 10리쯤 가니 죽성(竹城)이라는 마을이 나왔는데 꽤 즐비한 인가가 대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큰 집 한 채를 얻어 숙소를 정하니 날이 저물었다. 하늘이 캄캄하고 바람이 고요한데 비가 올 기미가 있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지새웠다. 새벽에 일어나 종자에게 날씨를 살펴보라고 했더니, 어제 초저녁보다 오히려 심한 편이라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바로 돌아갔다가 후일에 다시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자가 열에 칠 팔은 되었다. 나는 억지로 한 잔의 홍조(紅潮 술인 듯함)를 마시고는 드디어 여러 사람의 의사를 어기고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아가니, 돌길이 꽤 험하고도 좁았다. 5리쯤 가니 큰 언덕이 있었는데 이름이 중산(中山)으로, 대개 관원들이 산을 오를 적에 말에서 내려 가마를 갈아타는 곳이었다. 여기에 이르니 갑자기 검은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새어 나와 바다의 경치와 산 모양이 차례로 드러나기에 말을 이성(二成, 人名)을 시켜 돌려보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서 올라가는데, 주인 윤규환(尹奎煥)은 다리가 아파서 돌아가기를 청했고 나머지는 모두 일렬로 내 뒤를 따랐다. 한줄기 작은 길이 나무꾼과 사냥꾼들의 내왕으로 조금의 형태는 있었지만, 갈수록 험준하고 좁아서 더욱 위태로웠다. 구불구불 돌아서 20리쯤 가니 짙은 안개가 모두 걷히고 날씨가 활짝 개었다. 그러자 일행 중에 당초에 가지 말자고 하던 자들이 날씨가 좋다고 하므로 나는, “이 산을 중도에서 가느냐 가지 않느냐 함이 모두 자네들의 농간에서 나왔으니 어찌 조용히 삼가지 아니하는가.”하였다. 여기서 조금 앞으로 나아가니 계곡의 물이 바위 밑에서 쏟아져 나와 굽이굽이 아래로 흘러갔다. 평평한 돌 위에 잠시 앉아 갈증을 푼 뒤에 계곡의 물을 따라 서쪽으로 갔다. 돌 비탈길을 몇 계단 넘고 또 돌아서 남쪽으로 가니, 고목을 덮은 푸른 등(藤)나무 덩굴과 어지럽게 우거진 숲이 하늘을 가리고 길을 막아서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이런 데를 10여 리쯤 가다가 우연히 가느다란 갈대가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름다운 기운이 사람을 엄습해 왔으며 또 앞도 확 트여서 바라볼 만하였다. 다시 서쪽으로 향하여 1리쯤 가니 우뚝 솟은 석벽이 대(臺)처럼 서 있는데, 뾰족하게 솟은 것이 수천 길은 되어 보였다. 이는 삼한(三韓) 시대의 봉수(烽燧) 터라고 이르지만 근거될 만한 것이 없고 또 날이 저물까 염려되어 가보지 못하였다. 또 몇 보를 나아가서 가느다란 계곡의 물줄기를 하나 발견했다. 위에서 흘러내린 물의 흔적을 따라 위로 올라가니 얼음과 눈이 특출나게 빛나고 여러 잡목들이 위와 옆으로 뒤덮여 있어 머리를 숙이고 기어가느라고 몸의 위험이나 지대가 높은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모두 6, 7리를 나아갔다. 여기에 이르니 비로소 상봉(上峯)이 보이는데 흙과 돌이 서로 섞이고 평평하거나 비탈지지도 않으며 원만하고 풍후한 봉우리가 가까이 이마 위에 있었다. 봉우리에 초목이 나지 않았고 오직 푸른 이끼와 담쟁이 넝쿨만이 돌의 표면을 덮고 있어서 앉아 휴식을 취할 만하였다. 높고 밝은 전망이 확 넓게 트여서 해와 달을 옆에 끼고 비바람을 어거할 만할 뿐 아니라, 의연히 진세의 세상을 잊고 홍진에서 벗어난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얼마 후 검은 안개가 컴컴하게 몰려오더니 서쪽에서 동쪽으로 산등성이를 휘감았다. 나는 괴이하게 여겼지만, 이곳에까지 와서 한라산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바로 ‘구인(九仞)의 공이 한 삼태기로 무너지는 꼴(書經 旅獒)’이 되므로, 섬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을 굳게 먹고 곧장 수백 보를 전진해 가서 북쪽 가의 오목한 곳에 당도하여 상봉(上峯)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이르러서 갑자기 중앙이 움푹 팬 구덩이를 이루었는데 이것이 바로 백록담(白鹿潭)이었다. 주위가 1리를 넘고 수면이 담담한데 반은 물이고 반은 얼음이었다. 그리고 홍수나 가뭄에도 물이 줄거나 불지 않는데, 얕은 곳은 무릎이, 깊은 곳은 허리에 찼으며 맑고 깨끗하여 조금의 먼지 기운도 없으니 은연히 신선이 사는 듯하였다. 사방을 둘러싼 산각(山角)들도 높고 낮음이 모두 균등하였으니 참으로 천부(天府)의 성곽이었다. 석벽에 매달려 내려가서 백록담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털썩 주저앉아 잠깐 휴식을 취했다. 일행은 모두 지쳐서 남은 힘이 없었지만 서쪽을 향해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절정이었으므로 조심스럽게 조금씩 올라갔다. 그러나 따라오는 자는 겨우 3인뿐이었다. 이 봉우리는 평평하게 퍼지고 넓어서 그리 까마득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위로는 별자리를 다다르듯 하고 아래로는 세상을 굽어보며, 좌로는 부상(扶桑)을 돌아보고 우로는 서양을 접했으며, 남으로는 소주(蘇州)ㆍ항주(杭州)를 가리키고 북으로는 내륙(內陸)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옹기종기 널려 있는 섬들이 큰 것은 구름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 하는 등 놀랍고 괴이한 것들이 천태만상이었다. 孟子에 ‘바다를 본 자는 뭇 것이 물로 보이지 않으며, 태산에 오르면 천하가 작게 보인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 難爲言(孟子 盡心上).’하였는데 성현의 역량을 어찌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또 소동파(蘇軾)에게 당시에 이 산을 먼저 보게 하였다면 그의 이른바, ‘허공에 떠 바람을 어거하고,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는 시구가 적벽(赤壁)에서만 알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회옹(朱子)이 읊은, ‘낭랑하게 읊조리며 축융봉을 내려온다.’라는 시구를 외며 다시 백록담 가로 되돌아오니, 종자들이 이미 밥을 정성스럽게 지어 놓았다. 곧 밥을 나누어 주고 물도 돌렸는데 물맛이 맑고도 달기에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맛은 금장옥액(신선이 먹는 仙藥)이 아니냐?”하였다.
북쪽으로 1리 지점에 혈망봉(穴望峯)에 전인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 있다고 하는데, 해가 기울어 시간이 없으므로 가 보지를 못하고 산허리에서 옆으로 걸어 동쪽으로 석벽(石壁)을 넘는데 벼랑에 개미처럼 붙어서 5리쯤 내려갔다. 그리고 산남(山南)으로부터 서지(西趾)로 돌아들다가 안개 속에서 우러러보니 백록담을 에워싸고 있는 석벽이 마치 대나무를 쪼개고 오이를 깎은 듯이 하늘에 치솟고 있는데, 기기괴괴하고 형형색색한 것이 모두 석가여래가 가사(袈裟)와 장삼(長衫)을 입은 모습이었다. 20리쯤 내려오니 이미 황혼이 되었다. 내가 말하기를, “듣건대 여기서 인가까지는 매우 멀다 하며 밤공기도 그리 차지 않으니 도중에 길거리에서 피곤해서 쓰러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잠시 노숙하고서 내일 일을 홀가분하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하니, 일행이 모두 좋다고 하였다. 드디어 바위에 의지해서 나무를 걸치고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한 뒤에 앉아서 한잠을 자고 깨어 보니 벌써 날이 새어 있었다. 밥을 먹은 뒤에 천천히 걸어가는데 어젯밤 이슬이 마르지 않아서 옷과 버선이 다 젖었다. 얼마 후 또다시 길을 잃어 이리저리 방황하였는데 그 고달픔은 구곡양장(九曲羊腸)과 십구당(양자강 상류에 있는 험한 협곡) 같았으나 아래로 내려가는 형편이어서 어제에 비하면 평지나 다름이 없었다. 또 10리를 내려와서 영실(瀛室)에 이르니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에 우뚝우뚝한 괴석들이 웅장하게 늘어서 있는데 모두가 부처의 형태였으며 백이나 천 단위로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는 바로 천불암(千佛巖) 또는 오백장군(五百將軍)이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산남(山南)에 비교해 보면 이곳이 더욱 기이하고 웅장하였다. 그리고 산 밑 길가에는 얕은 냇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는데 다만 길가에 있었기 때문에 매우 얕게 드러나 있었다.
풀밭에 앉아서 얼마쯤 쉬다가 이윽고 출발하여 20리를 걸어 서동(西洞)의 입구를 나오니 영졸(營卒)들이 말을 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가에 들어가서 밥을 지어 요기를 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성으로 돌아왔다. 대개 이 산은 백두산(白頭山)을 근원으로 하여 남으로 4천 리를 달려 영암(靈巖)의 월출산(月出山)이 되고 또 남으로 달려 해남(海南)의 달마산(達摩山)이 되었으며, 달마산은 또 바다로 5백 리를 건너 추자도(楸子島)가 되었고 다시 5백 리를 건너서 이 산이 된 것이다. 이 산은 서쪽으로 대정현(大靜縣)에서 일어나 동으로 정의현(旌義縣)에서 그치고 중간이 솟아 절정(絶頂)이 되었는데, 동서의 길이가 2백 리이고 남북의 거리가 1백 리를 넘는다.
어떤 이는 산이 지극히 높아 하늘의 은하수를 잡아당길 만해서 한라산이라 이른다고 하고 어떤 이는 이 산은 성품이 욕심이 많아서 그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관장(官長)의 청탁(淸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으며, 외래의 선박이 여기에 정박하면 모두 패하여 돌아가므로 탐산(眈山)이라 이른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이 산의 형국이 동쪽은 말, 남쪽은 부처, 서쪽은 곡식, 북쪽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모두 근거 없는 말들이다. 그중에서 오직 형국설(形局說)만을 가지고 비슷한 점을 찾아본다면, 산세가 구부러졌다가 펴지고 높았다가 낮아지는 것이 마치 달리는 듯한 것은 말과 비슷하고, 깎아지른 바위가 층층이 쌓인 절벽이 나란히 늘어서서 두손을 부여잡고 예를 표하는 모습은 부처와 비슷하다. 평평하고 툭 터진 곳에 산만하게 활짝 핀 듯한 것은 곡식과 비슷하고, 북을 향해 껴안은 듯한 산세가 곱고 수려함은 사람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말은 동쪽에서 생산되고 불당은 남쪽에 모였으며, 곡식은 서쪽이 잘되고 인걸은 북쪽에 많을 뿐더러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각별하다는 것이다. 이 섬은 협소한 외딴섬이지만 대해(大海)의 지주(砥柱)이며, 3천 리 우리나라의 수구(水口)며 한문(捍門)이므로 외적들이 감히 엿보지를 못한다. 그리고 산과 바다에서 생산되는 진귀한 음식 중에 임금에게 진공(進供)하는 것이 여기에서 많이 나온다. 공경대부와 백성들이 일상생활에 소요되는 물건과 경내 6, 7만 호가 경작하고 채굴하는 것도 이곳에서 자급자족이 된다. 그 이택(利澤)과 공리(功利)가 백성과 나라에 미치는 것이, 금강산(金剛山)이나 지리산(智異山)처럼 사람에게 관광을 제공하는 산들과 함께 놓고서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 산은 궁벽하게 바다 가운데 있어서 청고(淸高)하고 기온도 많이 차므로, 지기가 견고하고 근골이 강한 자가 아니면 결코 올라갈 수가 없다. 그리하여 산을 올라간 사람이 수백 년 동안에 관장(官長) 몇 사람에 불과했을 뿐이어서 옛날 현인들이 거필(巨筆)로는 한번도 그 진면목이 발휘된 적이 없다. 그런 까닭에 세상의 호사자들이 신산(神山)이라는 허무하고 황당한 말로 어지럽힐 뿐이고 다른 면은 조금도 소개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이 지니고 있는 본연의 모습이겠는가. 우선 이 말을 써서, 구경을 가고 싶은데도 못가는 자들에게 고하는 것이다.
을해년(1875, 旃蒙은 天干의 乙의 古甲子, 大淵獻은 古甲子 十二支의 열둘째 亥를 이름) 음력 5월(孟仲季의 仲)에 최익현 찬겸(崔益鉉贊謙)은 적는다.
上之十年癸酉冬 余得罪朝廷 貶于耽羅 日與島人 語及山水 余曰 漢挐名勝 聞於天下 而考諸邑誌 聽於人言 觀者甚鮮 豈不能歟 抑不爲歟 曰 玆山蟠根四百里 高距天才尺 五月雪尙不消 最上白鹿潭 乃羣仙降遊之地 雖當晴晝 白雲恒坌集 世所稱瀛洲 而備數於三山之一者也 豈常調凡人所可容易遊覽也 余聞之 不覺瞿然
乙亥春 適以特恩出棘 遂定尋眞計 約士人李琦男 前進指路 冠者十餘 下隷五六踵焉 時三月二十七日甲子也
出自南門 行十里許 途傍有一溪 漢挐北麓之水 於此會注而入海 遂立馬岸上 緣崖下數十步 兩邊蒼壁削立 當中有石橫跨作門形 長廣容數十人 高可二丈 夾刻訪仙門及登瀛丘六字 亦有前人題品 卽十景之一 門內外上下 淸沙白石 磨礱潤澤 眩人眼目 水團躑躅 列植左右 方蓓蕾丰茸 亦甚奇絶 盤桓少頃 殊無歸志 因復登岸 向東行十里 里名竹城 人戶頗櫛比 植竹以環之 討一寬舍止泊 日已暮矣 天黑風靜 慮有雨勢 轉輾經宵 昧爽而起 使從者視之 所報一如初昏時而反甚焉 且言宜直還 留俟後日者 殆十之七八 乃強飮一盞紅潮 吸一呷羹 遂違衆策馬而前 石逕頗險窄 至五里許 有大阜 名曰中山 盖官行登陟時 卸馬替轎之地 忽然陰雲解駁 日光漏射 海色山容 次第呈露 因歸馬于二成 輕服芒鞋 扶杖進步 主人尹奎煥 脚疲告退 其餘並魚貫隨後 一線微逕 因樵虞人來往 稍有形止 而高峻狹隘 去益艱危 逶迤行二十里 靄霧收盡 軒豁淸明 衆中當初立異者 稱日吉 余曰 此山之中途敗興 未必不由此等人間之 盍從容愼諸 少進有澗瀉出巖底 委曲而下 暫坐盤陀石解渴 由澗而西 過石嶝數級 又轉而南 古木蒼藤 亂林叢藪 參天蔽途 殆靡適從 如是行十里許 偶見細蘆成林 佳氣襲人 且曠然可望 向西里許 有矗壁成臺 槎牙突兀 可數千丈 謂是三韓時烽燧遺址 而無可據 亦慮日力不足 未得往見 又進數步 得細澗自上流注成痕者 循之而上 氷雪崢嶸 鳩桑雜木 上偃旁綴 俛首俯伏而行 不自知身之危地之高 凡六七里 始見上峯 土石相雜 不平不陂 圓滿豊厚 近在額上 草木不生 惟靑苔蔓香 被在石面可坐臥 高明廣濶 直可以旁日月而駕風雨也 依然有遺世出塵之意 俄爾黑霧一抹 疾馳晦冥 自西而東 匝繞山面 心竊怪以爲旣至此 不見眞面 政所謂九仞虧於一簣 得不爲島人所笑乎 信心行數百步 當北邊凹缺處俯瞰 上峰至此忽然中坼 洿下成坎 卽所謂白鹿潭也 周可里餘 止面淡淡 半水半氷 水旱無盈縮 淺處可揭 深處可厲 淸明潔淨 不涉一毫塵埃氣 隱若有仙人種子 四圍山角 高低等均 直天府城郭 懸壁而下 循潭而南 頹坐少憇 一行並澌盡無餘力 向西最高者 是爲絶頂 乃寸進 脅息而登 從者才三人 平舖寬曠 不甚眩視 上逼象緯 下俯人境 左顧扶桑 右接西洋 南指蘓杭 北控內陸 點點島嶼 大如雲片 小如鷄卵 驚恠萬狀 觀於海者難爲水 登泰山小天下 聖賢力量 可以想像 而亦使蘓子當日 有先於此 則所謂憑虛御風羽化登仙之句 其肯施之赤壁而止哉 因誦晦翁詩朗吟飛下祝融峰之句 還至潭邊 從者已炊米虔誠 因賦飯行水 水味淸甘 余顧謂衆曰 此非金漿玉液耶 向北里餘 謂有穴望峯 及前人刻名 而日仄未暇 自山腰 橫步而東踰石壁 攀崖蟻附 下五里 由山南 轉向西趾 霧中仰見 圍潭石壁 竹破瓜削 勢摩九霄 奇奇怪怪 形形色色 盡是釋迦如來 著袈裟長衫形 行二十里 日已黃昏 余曰 聞此距人家甚遠 夜亦不寒 與其顚倒疲困於途中 曷若暫次露宿 使明日事爲易易也 衆曰可 遂倚巖架樹 爇火以溫之 一場假眠 天已曙矣 飯後緩步而前 宿露未晞 衣襪盡濕 行未幾 又迷失途 左右縱橫 其困 不啻若九羊腸十瞿塘矣 而趍下之勢 比諸昨日 有同平地 行十里許 至瀛室 高頂深壑 頭頭恠石 森列䧺威 亦捴是佛形 其數不但以百千計焉 卽名千佛巖 亦所謂五百將軍也 較之山南 尤爲奇壯 山底有一川 流出注海 第傍於道塗 殊涉淺露 班荊少憇 遂行二十里 出西洞口 營卒牽馬來待 入人家 炊飯療飢 薄暮還城 盖玆山根於白頭 南走四千里 爲靈巖月出山 又南走爲海南達摩山 達摩渡海五百里 爲楸子島 又五百里 西起于大靜 東止于㫌義 中聳爲絶頂 東西二百里 南北百里強 或曰山至高 可挹天漢 故謂之漢挐 又曰 山性貪 年糓凶豊 視官長淸濁分矣 而凡異船之來泊者 無不敗還 故亦曰耽山 又曰 山之形局 東馬南佛 西糓北人 是皆無稽之論 惟以形局之說 彷彿想像 則其屈伸高低 勢若奔馳似於馬 危巖層壁 森列拱揖 同乎佛 平舖廣遠 散漫離披 類于糓 拱抱向北 姸美秀麗 疑於人 故馬產于東 佛萃于南 糓宜于西 人傑多於北 而向國之誠 殊別焉 夫以彈丸孤島 砥柱大海 在邦爲三千里 水口捍門 外冦不敢伺 而山珍海錯 可合御供者 多由是出焉 公卿大夫 匹庶日用所需 境內六七萬戶 耕鑿資業 亦於此取足 其利澤功利之及於民國者 又豈可與智異金剛 只資人觀玩者 同日語也 惟玆山僻在海中 淸高多寒 决非志完氣盛而骨強者 不可登矣 而其遇於人者 亦不過數百年內爲官長者 若干人而止耳 其在前贒巨筆 終不得一經發揮 故世之好事者 只以神山荒唐虛無之說亂之 而不及其他焉 豈山之所性也哉 聊書此 以告夫欲往遊而未能者
旃蒙大淵獻仲夏日 崔益鉉贊謙記<勉菴先生文集 卷之二十, 遊漢挐山記>
첫댓글 대륙 동남부 지역은 그 일부분이 원래 바다였고 모든 지명들이 동쪽으로 이동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접근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감히 지명 찾기를 논할 입장은 아닙니다만,
'한라산에 3개의 연못이 있다'는 기록이 카페에 올라와 있는걸 봤습니다. 크고 작은 호수들이야 그 일대 지천에 널브러져 있지만, 산꼭대기에 있는 연못이라면 아무래도 구글어스에서 봤던 그 위치(..?)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파양호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아직은 심증 뿐이라 아무한테도 얘기한 적은 없지만 소항(蘇杭)의 북쪽이라는 점을 볼 때 거기가 맞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댓글 남겨 봅니다. 섬들이 옹기종기 널려 있다는 건 파양호 쪽을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소주 뱃사공'이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노래 가사 중에 '나가사키 항구'라는 구절도 등장합니다! 뜬금없이 일본열도에 있는 지명이 왜 나오겠습니까. 근데 이걸 '제주 뱃사공'이라고 제목을 바꾸고 개사해 버립니다.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도 남는 이야기입니다. 한반도에는 소주(蘇州)라는 지명이 없죠..)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전 문외한이라 솔직히 뭐가뭔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
소주 뱃사공에 보니까 나가사끼가 나오네요. 항주가 나가사끼 맞을 싶네요. 참 재밌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구글어쓰 위치 링크 좀 주실수 있나요. 아님 지도 이미지에 생각하신 위치를 표기한 사진 한 장 올려주심 감사하겠습니다.
한라산 올라가 보면 정말 볼거 없는 산이죠... 그래도 백록담 한 번 봤으니 만족한다,, 정도지요..
그리고 제주도는 농사를 논할 자리가 없는 걸로 압니다.. 논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말씀드린 곳, E115N29 지역입니다..
여기가 100% 맞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고요..
아직은 뭐라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3개의 연못'이라는 기록과 일치하는 곳이 여기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윗분 말씀대로 현 제주도는 농산물이 나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현무암 지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