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사
적상산성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찰 안국사는 고려 충렬왕 3년(1277)에 월인화상이 지었
다고 전한다. 광해군6년(1614) 적상산성 내에 사각이 설치되고, 인조 19년(1641)에 선운
각이 설치되어 적상산 사고로 조선왕조실록과 왕의 족보인 선원록이 봉안되었다.
이때 사고를 방비하기 위하여 호국사를 지었으며, 안국사는 그 전부터 있던 절이었으나,
호국사와 더불어 이 사각을 지키기 위한 승병들의 숙소로 사용되어 안국사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적상산 양수발전소 건설 때문에 이 사찰은 호국사지의 위치로 옮겨져 안국사가 호국사지
에 있다.
전각 15여개로 95년 이건, 중창되었고 산 정상에 산정호수가 조성 되어 있다. 가을철 단
풍이 절경이며, 산정상까지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드라이브할 수 있다.
인근에는 무주리조트와 라제통문 구천동 계곡이 있다.
주요문화재는 보물 제1267호 영산회상괘불과, 유형문화재 제42호 극락전, 제85호 호국사
비, 사적 제146호 적상산성, 기념물 제 88호 사고 등이 있으며, 세계의 불상을 수집하여
모신 성보박물관이 있다.
안국사 일주문
적상산 사고터에서 굽이돌아 오르는 안국사의 초입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목조 맞배건물인 일주문이 있다. 낮은 단층기단 위에 다듬지 않은 2개의 기둥을 일렬로 세운 뒤 창방과 평방을 얹고 그 위에 화려하기 그지없는 다포로 장엄하였다. 일주문에는 1992년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이 쓴 ‘적상산 안국사(赤裳山 安國寺)’라는 편액과 1995년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이 쓴 ‘국중제일정토도장(國中第一淨土道場)’이라는 2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특히 권갑석(權甲石)이 쓴 편액 ‘國中第一淨土道場’은 무학대사가 이곳을 ‘국중제일의 길지’라고 한 설화에서 유래한 편액으로, ‘안국(安國)’과 ‘정토(淨土)’를 바라는 안국사의 염원을 담고 있다.
안국사 해우소
안국사 오르는 돌계단
안국사 성보 박물관
성보 박물관에 자리한 외국에서 모셔온 부처님
안국사 범종각
안국사 요사채
안국사 청하루
안국사의 누각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목조 맞배건물이다. 1990년대 적상호의 수몰로 인해 안국사 옛터에 있던 누각을 해체한 후 1992년에 복원한 것으로, 현재 불교용품점과 무주 33경의 비경을 엿볼 수 있는 전망대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 외부는 이중구조로 누각 아래로 출입하며, 건물 내부에는 ‘석실비장(石室秘藏)’ㆍ‘청하루(淸霞樓)’ㆍ‘극락전(極樂殿)’ㆍ‘산신각(山神閣)’ 등 수몰되기 전 안국사에 있던 현판들이 걸려 있다. 특히 이 가운데 현판 ‘淸霞樓’는 송석(松石) 이도익(李都翼)의 글씨로 1859년에 쓴 것으로, 가로 165㎝, 세로 55㎝의 장방형 목판에 활달한 필체로 양각되어 있다.
또한 현판 중 ‘石室秘藏’은 사고와 연관된 상훈(尙訓) 스님의 일화를 전해주는 글씨로서 안국사가 『조선왕조실록』 824책, 『선원록』 1천446책, 『의궤』 260책, 『잡서』 2천984책 등 5천514책의 장서를 얼마나 잘 지켰는지를 말해준다. 1627년(인조 5) 적상산성에 사고가 설치된 후 13년 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전쟁의 불길이 적상산까지 번져왔는데, 사고를 지키기에는 승병의 전투력이 역부족이어서 자칫 사고의 장서들이 모두 유실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상훈스님이 사고 안의 장서들을 모두 적상산 정상인 향로봉 아래 안렴대로 숨김으로써 전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는 한 시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적은 기록들이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스님에 의해 지켜진 일화로, 1902년 안국사의 대규모 중수 때 승정원 비서원랑 유인철(柳寅哲)이 안국사를 방문해 상훈스님의 일화를 듣고 ‘'석실비장(石室秘藏)’이란 현판을 남긴 것이다.
안국사 괘불지주
안국사 극락전을 오르는 축대 좌우에는 한 쌍의 괘불대가 있다.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의 모습을 갖춘 높이 190㎝의 장방형으로, 중간에 간목(竿木)를 세울 수 있는 구멍이 있다. 괘불대 네 면 중 3면은 자연석을 그대로 치석하고, 지주 앞면은 말끔하게 다듬어 ‘擁正八年四月十五日立’이라는 음각의 명문을 새겨 놓았다. 이 괘불대 역시 본래의 안국사 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1728년 괘불이 조성된 후 1730년에 조성한 것이다.
안국사 극락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42호
높게 쌓아 올린 축대를 한 걸음 올라서면 누각 위로 구름에 두둥실 떠 있는 듯한 안국사의 큰 법당이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 맞배건물로, 1991년 원행(圓行) 스님이 옛 안국사 터에서 옮겨지은 것이다. 잘 다듬어진 자연석 축대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정면 3칸에는 꽃빗살문을 칸마다 설치하였다. 정면과 좌측은 4분합이나 우측은 2분합으로 협칸의 구조가 특이한 평면을 보여준다. 건물 외부는 정면과 배면에 다포계양식의 공포를 설치하였는데, 외부는 3출목으로 되어 있으나 내부는 4출목으로 쇠서는 연봉으로 장엄한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 건물 외벽은 삼면에 심우도(尋牛圖)를 비롯하여 석가탄생도 등 다양한 설화적 도상을 표현하였으며, 단청은 얼금모로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엄하였으나, 극락전 우측창방 쪽에는 안국사의 설화를 입증하듯 딱 하루만큼 단청할 분량의 목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안국사 극락전
안국사 극락전 삼존불
안국사 극락전에는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있다. 불상의 조성기록은 없으나, 고개 숙인 자세에 굵고 짧은 목, 장방형의 얼굴에 오뚝한 코, 자연스런 천의(天衣)의 옷주름, 사실적인 손표현 등에서 17세기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이 보인다. 본존인 아미타여래좌상은 앉은키 67㎝, 무릎 폭 43.5㎝의 중형 불상이다. 전반적으로 고개를 숙여 움츠린 듯한 어깨에 구부정한 자세를 보이며 장방형의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띤 원만한 상호를 가지고 있다. 얼굴은 중앙계주와 정상계주를 가진 나발에 턱이 짧아지고 각이 진 모습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오뚝한 코에 삼도가 표현된 짧은 목을 지니고 있으며, 법의는 통견의로 자연스런 옷주름과 사실적인 손표현에서 아미타불의 원만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좌협시인 관음보살은 본존불과 흡사한 모습으로 짧은 상투 속에 보관을 착용하였으며, 보관(寶冠) 아래쪽으로 자연스럽게 머리칼을 흘러내리고 있어 보살의 오묘함이 느껴진다. 우협시인 세지보살은 관음보살과 대칭적인 구도로 조각수법에 있어 아미타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닮고 있다. 관음과 세지보살은 앉은 키 61㎝, 무릎폭 36.5㎝로 아미타불상과 함께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은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국사 지장전
지장전내의 지장보살상
극락전에서 바라다본 청하루 전경
안국사 천불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건물로 극락전 우측 축대 아래에 있다. 1991년 옛 사고(史庫) 터에 있던 선원각을 옮겨 지은 것으로, 전란의 화마를 입지 않은 유일한 사고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건물은 중간에 가로로 방(枋)을 쳐서 중층의 구조를 가진 독특한 모습으로, 하부는 사고를 수장한 창고를 겸하며 상부는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어칸에는 4분합의 빗살문과 강암(剛菴) 선생이 쓴 ‘千佛殿’ 편액이 걸려 있으며, 좌우 측면에는 내부에 채광을 공급하는 특이한 교창이 있다. 건물 내부는 중앙 불단을 중심으로 좌우 보조단이 있으며, 1995년 합성수지로 만든 석가여래좌상과 문수ㆍ보현보살을 비롯하여 석고천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후불탱은 붉은 바탕에 금니로 출초한 홍탱으로 금어 남인식(南仁植)이 1969년에 조성한 것이다.
안국사 천불전내
안국사 삼성각
천불전에서 바라다본 전경
안국사 전경
안국사 찾아가는 길
대전통영간 고속국도 - 무주IC - 무주 - 덕유산, 적상산 방향 - 괴목 - 양수발
전소 입구 - 산 정상에 위치한 안국사까지 진입 가능
첫댓글 그렇게 크지는 않은 사찰이지만 수련회는 두번 참여했던 전망 시원한 도량입니다^^
어느한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방생에 참여하여 데리고 앉아 생각많이 했던 그자리,하지만 인간구제는 너무 힘들어~~~전망이 참 멋진곳이었던거 같아요,기회가 되면 다시 가보구 싶은곳인데 법우님덕에 다시 보네요,감사...()
안국사 !!! 잘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