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러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수행인지 모른다.
중도(中道)라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여기서 출발한다.
불교사상사를 살펴보면 항상 대립된 입장이 공존하면서 유기적인 통합을 추구해 왔다.
대표적으로 소승과 대승이 그렇다. 실천수행인 선(禪)과 경전연구인 교(敎)가 그렇다.
양자는 서로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실천수행의 면에 있어서 상호보완적인 대표적 예가 난행도와 이행도, 또는 자력문과 타력문이다.
대승불교의 탁월한 철학자인 나가르주나, 즉 용수(龍樹)는 일찍이 성불하는 방법에는 어려운 길과 쉬운 길이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어려운 길이란 곧 난행도(難行道)이며, 쉬운 길이란 곧 이행도(易行道)이다.
먼저, 그 길이 어려운 이유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길로 들어서는 것이 자력문(自力門)이다.
사실 불교는 이 자력문과 난행도로부터 출발하였다. 근본적으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그렇고,
인간 모두는 부처의 성품을 이미 간직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스스로 개발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함이 그렇다.
중도, 연기, 공 등의 진리를 깨닫는 것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가능하다. 인간에 대한 모든 신뢰가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길을 철저히 따르고자 한 입장으로서 대표적인 예가 제64문에서 설명한 선종이다.
그러나 이 길을 걷는 데에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육바라밀은 이들이 수행해야 할 구체적인 방도이다.
그런데 만약 부처님이 인간 각자가 이 어려운 길을 택하여 스스로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굳이 자신이 얻은 진리를 제시하면서 거기에 이르는 방법을 알려 주고자 애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일상생활을 하는 인간은 대개 자신의 능력을 모르면서 살고 있거나, 안다고 하여도 그것을 스스로 개발할 만한
정신적 여유를 갖지 못하고서 살아가기 일쑤이다.
예로부터 성인들은 주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힘써 왔다. 보다 더 쉽게 올바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며,
스스로 그 사람들의 의지처가 되든가, 의지할 대상을 마련해 주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행도, 즉 타력문(他力門)이 제시된 것이다.
따라서 이행도와 타력문은 부처님의 구제를 바라는 불교이며, 신앙의 불교는 남의 힘을 믿고 그에 의지하면 되므로
쉽게 수행할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이다.
불교사적으로 볼 때, 이는 제87문에서 설명한 불탑신앙에서 발전했다고 볼 수 있으며,
부처님의 무궁한 자비와 구제력을 중시하는 대승불교의 기본입장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을 포함한 여러 부처들이 중생을 구제한다고 믿는 것은 신앙의 불교가 되는데,
이 점에서 대표적인 것이 제65문에서 설명한 정토교 또는 아미타신앙이다.
아미타불은 자비와 다양한 방편을 겸비한 부처이다.
대승불교의 자비를 대표하는 부처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승경전에 이 부처가 소개되어 있다.
경전들 속에서 아미타불이 중생을 구제하는 '구제의 논리'를 밝히고, 어떻게 하여 구제되는가 하는 이유를 펼쳐 나가고 있다.즉 아미타불이 보살이었을 때에 세웠던 본원(本願) 중에서 중생의 구제를 맹세하고 있다는 것과 이 본원을 달성하기 위해
기나긴 수행을 했다는 것, 그 결과로서 서방에 극락국토를 건립했다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그 국토에 중생을 맞아 들여 구제한다는 것이다. 결국 구제의 근거가 되는 것은 여러 부처의 굳건한 결의이다.
모든 세계는 인간의 결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부처의 결의가 구제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중생의 입장에서 말하면 이상세계인 극락에 왕생하는 것이 구제인 셈이다.
그러나 그런 왕생은 사후의 일이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구제는 의지의 대상에 대한 신앙, 즉 믿음에 의해 가능하다.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불교는 이행도의 불교이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그 대상이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겠다는 것이므로 다시 스스로의 노력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