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김광한
어쩌다가 테레비를 틀면 온통 젊은 아이들의 춤 이야기와 맛있는 음식 만드는 이야기로 거의 도배가 되어있다.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교양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는 눈을 뜨고 찾아볼수가 없다.영화관에 가면 외국 헐리웃의 말도 안되는 내용없는 줄거리도 찾기 힘든 영화가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것을 볼수 있다.좀더 인간에 대한 감동적이고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되는 영화의 이야기가 없다.잘 먹고 잘 입고 큰 평수의 아파트에 사는 것이 꿈이란 현대인들의 사고방식,그것을 나무라는는 것은 결코 아니다.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일차적인 동물적 욕망의 달성일뿐,그것이 희망이 될 수가 없다.
그 욕망이 달성이 되면 그 다음은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더 큰 동물적 쾌락을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이들에게 사회정의와 이웃에 대한 배려, 좀더 크게 인간에 대한 사랑같은 것을 이야기 하면 미친놈 취급을 당할 것이다. 불의한 자가 억울한 사람 함부로 재판해서 고역을 치루게 하는데 대한 분노조차 없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빨간옷을 입고 열광한다.음식이나 스포츠 춤같은 것은 순간적인 즐거움은 될지 모르나 지속되는 뿌듯한 인간적 즐거움은 되지 못한다.음식이란 동물성 식물성 재료를 합성해서 여기에 조미료를 첨가해 맛을 내게 한 것에 불과하다.여기에 무슨 큰 철학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가 있는가.주방장을 셀프라고 부르면서 열광하는 젊은 아이들에게 철학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저자(시장)거리에서 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세계적인 대제국 로마가 멸망한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음식문화와 난잡한 이성관계 등이 한몫을 했다.귀족들은 하루 왼종일 맛있는 음식을 탐해 맛있다는 음식은 모조리 뱃속에 채워넣어야 속이 풀렸다. 조막만한 위장에 그 많은 음식이 들어갈수가 없어서 하인들은 주인의 먹고 삼킨 음식을 다시 토해 다른 음식을 먹여주는 역할을 했는데 여기에 갈고리 같은 꼬챙이가 필요했다.갈고리를 목구멍에 넣어 간지르면 방금 먹은 음식이 토해지고 토한 더러운 음식을 곁의 시종이 그릇에 담아 버리곤 했다.그 시종은 굶주리는 가족을 생각하면서 <이런 개만도 못한 새끼.>하면서 욕설을 뱉었을 것이다.돼지라면 살이나 쪄서 잡아먹거니 팔면 돈이나 더 받지 귀족이란 자들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들이었다.
여기에 곁들여서 성욕을 채우기 위해 전쟁에서 잡아온 여자 노예를 이용했다.대다수의 국민들은 배고픔에 허덕이는데 귀족들은 식욕과 성욕을 충족하기에 바빴다.일본의 저명한 저술가 소전실(小田實)의 <벌써 가야할 시간인가>의 내용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관한 것인데 거기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의 동성애(同性愛)를 그리고 있다. 당시 남색(男色)이 얼마나 횡행했는가를 알수가 있다. 여자로서 만족을 못하니까 동성인 예쁘게 생긴 남자를 성욕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그래서 성경 로마서에 남색 이야기가 나온다.거기 이성과의 합리적인 접촉을 마다하고 동성간의 교접은 무서운 결과를 빚는다고 했다. 아마도 에이즈가 아닌가 생각한다.
오래전 서울시장 박씨가 성소수자의 자유를 위해 동성애 합밥화를 한다면서 괴물같은 동성애자들을 서울시청앞으로 끌여들여 별 해괴한 짓을 다하게 만드는 것보면 대한민국이 빨리 망하기를 바라는 자와도 같다.
구약(舊約)에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난잡한 성생활은 하느님의 분노를 자아냈고 거기 살려고 도망하는 롯의 아내를 소금기둥으로 만들었다.동물적 욕망의 끝은 동성애이고 그 끝은 마약(痲藥)으로 귀결이 된다.
이런 인간들의 질서를 잡아주던 사람들이 당시 스콜라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저술을 통해서 인간이 살아갈 길을 안내했던 것이다.인간이란 저혼자만의 홀로서기를 못한다.그래서 전 시대 사람들의 행위를 답습한다.자식은 부모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 역시 그렇다.부모가 올바른 행실을 하면서 인간답게 살아가면 그 자식도 그렇게 된다.올바르게 사는 방법, 그것을 기록한 것이 역사서(歷史書)이고 이를 재미있게 풀이한 것이 소설이고 짧은 문장으로 만든 것이 시(詩)이다.그리하여 예술이란 이름이 붙여졌다.음악 미술 문학 등 모든 예술의 가치는 인간의 선(善)이다.이 선이 지향하는 것이 곧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救援)이다.
이 구원의 방법들을 기록한 것이 문학이고 소설이고 수필 그리고 시(詩)이다.문학이란 문학인 몇의 전유물이 아니다.인간이 인간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접해야한다.책을 읽지 않는 사람,책 안읽은 것을 자랑으로 아는 인간,그것은 스스로 인간됨을 포기하는 것이다.책 안에 전(前)시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그 책을 쓴 사람들의 고뇌가 있다.바로 이런 글을 쓰는 사람, 흔히 작가라고 한다. 작가는 일반인들보다 더 많은 인생 공부를 하고 독서를 하고 고뇌를 하고 많은 체험을 하고 생각을 해야한다.이런 사람들이 평생을 걸려 쓴 책들을 단 며칠만에 읽는 것은 그들의 지식을 거저 얻는 것이다.고리타분한 것같지만 고전(古典)을 읽는 것은 그 안에 현대적인 문물이 들어있지 않지만 생각이 들어있고 그것은 시대가 지나도 변치 않는 진리가 곁들어있기 때문이다.국회의원에 나오기 위해 엉터리 자서전을 싸구려 작가에게 원고료 몇푼 주고 쓴 그런 글을 글이 아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책이 나오는 것이 제일 기쁘다. 이 책이 서점의 진열대에 놓일때는 그 서점에 가끔씩 들려서 책이 좀 팔렸나 물어보는 재미도 보통이 아니다.인쇄된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상큼한 잉크 냄새, 그리고 잘 다듬어진 제본(製本) 등 마치 친자식을 대하는 것처럼 여간 대견하고 뿌듯하지 않다.그래서 출판사에서 작가용으로 나온 책 외에 도매가격으로 책을 사서 아는 분들에게 증정(贈呈) 도장을 찍고 거기에 누구누구 혜존(惠存)이라고 붓글씨로 써서 혹시나 분실이 될까 등기로 보내주기도 한다.
그리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도 책을 나눠주기도 하고 친척되는 분들에게는 당연하게 보내준다.그런데 이 책이 작가가 생각하는 가치관이 틀린 사람의 손에 들어갔을때는 여간 박대를 받지 않는다.작가의 가치란 좋은 글을 써서 많은 분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읽히게 해주고 세상에 태어나 남들이 못하는 활자화된 이야기와 이름을 남기는 것도 괜찮은 것인데 비해 장사를 하시는 분이거나 공장을 하는 분이거나 과수원을 하시는 분이거나 고리대금을 하시는 분이거나 부동산업을 하시는 분 같은 경우는 생각이 좀 다르다.그걸 좀 유식하게 이야기하면 견해(見解)를 달리한다고 한다.
작가는 자신의 영혼의 분신인 책, 시집이나 소설책이 그 집에 가서 귀한 대접을 받고 주인이 읽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참 대단한 사람이야 하며 작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생각해준다고 생각을 하나 그것은 작가의 개인적인 희망사항에 불과하고.그렇지가 않은 것이 현실이다.나 역시 90년도에서부터 약 10여년간 20여권이 넘는 소설책을 썼는데 그 책들이 동서(同壻)나 친척들 집에 가있는 것들이 많이있다.지금 생각해도 그 내용이 신통치 않은 것들이지만, 그런데 어느 집에 가니까 내 영혼의 분신,땀과 노력의 산물인 그 책,손가락이 마비가 되어 고생하면서 원고지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책이 파리 방재용 밥뚜껑 역할을 하고 있고 어느집에서는 표지를 찢어서 파리채를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었다.남들 돈벌때 방구석에 앉아 무슨 대단한 작가나 된듯 쭈그리고 앉아 뭘쓴다고 고민하고 한숨쉬고 하는 나를 우리집노파는 얼마나 밉살스럽게 생각했겠는가.아마도 귀싸대기를 훔쳐갈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 친구 파리채 하나 사지 돈 몇푼 된다고,하필 책을 찢어서 파리채를 만들게 뭐람, 책하고 불구대천의 원수를 졌나,고얀 사람...참으로 화가 날 일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상대가 갖는 가치가 틀리기 때문에 그런것같다.그 사람들의 가치는 금부치라든가 귀한 브랜드 표시가 붙은 물건 같은 것에 있지 작가가 힘들여 쓴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책을 주면 안된다는 생각이다. 그런 사람들 아무리 많은 책을 줘도 고맙다고 생각지도 않는다.자기 물건은 팔아먹고 남의 책은 거저 얻는 것도 좋지만 밥뚜껑이나 파리채, 과수원의 사과 봉지같은 곳에 쓰니까 책은 꼭 줄만한 사람에게 줘야한다.
그리고 놔뒀다가 세월이 지난뒤에 그럴듯한 말상대가 될 인격자가 생기면 그때 사용해야 한다.사람 사귈 때 비지니즈 모임이 아닌이상 책이라도 좀 읽고 오가는 대화가 서로 평행선을 유지해야 공감대도 형성되고 보기 싫은 문씨 일당에 대해 욕설도 함께 퍼붓고 하는 거지 그렇지 않고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과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것은 시간의 낭비이다.차라리 혼자있는게 편하다.
책을 줄만한 사람들이란 내 소중한 것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그 책을 끝까지 읽어보지 않아도 추억처럼 여겨주는 그런 사람이다.그런 사람들이 세월이 지나면 가끔씩 나타난다. 그런 친구 두어명 갖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