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욥기 37장 1절 – 24절) 37:1 이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떨며 그 자리에서 흔들렸도다 2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3 그 소리를 천하에 펼치시며 번갯불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4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그의 위엄 찬 소리로 천둥을 치시며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를 멈추게 아니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6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 비도 내리게 명하시느니라 7 그가 모든 사람의 손에 표를 주시어 모든 사람이 그가 지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8 그러나 짐승들은 땅 속에 들어가 그 처소에 머무느니라… 12 그는 감싸고 도시며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그는 땅과 육지 표면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시느니라 13 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하여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 14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15 하나님이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로 번쩍거리게 하시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 16 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 17 땅이 고요할 때에 남풍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그대가 아느냐 18 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 녹여 부어 만든 거울 같이 단단하게 할 수 있겠느냐 19 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그대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아둔하여 아뢰지 못하겠노라 20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21 그런즉 바람이 불어 하늘이 말끔하게 되었을 때 그 밝은 빛을 아무도 볼 수 없느니라 22 북쪽에서는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23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24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을 두고 친구들 간에 벌어진 3차례의 변론(4-31장)이 끝나면서, 그 자리에 참관하여 모든 내용을 듣고 있던 엘리후가 참여한 변론(32-37장)의 마지막 네 번째 후반부 내용입니다. 엘리후가 네 차례에 걸쳐 행한 변론의 종결이자, 모든 변론의 종결 부분인 오늘의 본문은, 욥에게 자연 현상을 통해 나타나는 놀랍고 크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위대한 권능을 증언하며, 그러한 하나님의 지혜 앞에 겸손한 경외의 자세로 설 것을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욥이 자신에게 닥친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앙의 원인으로 인한 고뇌와, 세 친구들이 욥 자신이 저지른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기에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정죄에 대한 고통의 탄식과 호소를, 욥의 친구들처럼 엘리후 역시 욥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태도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행으로 규정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욥의 탄식을 하나님을 향한 “분노”로 보았던 엘리후는, 4차 변론의 전반부에서 욥을 가리켜서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36:13)라며, “그대는 분노하지 않도록…조심하라”(36:18)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욥으로 그가 당하는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 “사람이 받는 고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가르치시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귀를 열어서 경고를 듣게 하십니다.”(36:15,새번역)라며, 고난의 때를 회개의 기회로 삼을 것을 당부합니다. 때문에 엘리후의 변론에서는, 욥에게 반복하여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 섭리에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탄식의 호소를 하지 말 것과, 자기 무죄를 주장하는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순종하여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 통치 섭리와 절대 공의로 행하시는 모든 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기 때문에, 욥에게 자연 현상을 통해 나타내신 놀랍고 크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위엄과 권능을 증언하며, 찬양과 경외의 신앙 자세로 설 것을 촉구합니다. 엘리후의 이러한 충고는, 38장 이후에 욥과 친구들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위엄 있는 현현과 권능에 찬 메시지 전달과의 연결을 준비하는 변론이 되게 됩니다. 1. 자연에 나타난 주님의 권능이 무엇입니까? 엘리후는 4차 변론 전반부에서, 자연 현상을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권능을 증언했습니다(36:27-33). “보라, 그가 번갯불을 자기의 사면에 펼치시며, 바다 밑까지 비치시고…그가 번갯불을 손바닥 안에 넣으시고, 그가 번갯불을 명령하사 과녁을 치시도다. 그의 우레가 다가오는 풍우를 알려 주니”(36:30,32-33)라고 했던 엘리후는, “이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떨며, 그 자리에서 흔들렸도다”(37:1) 곧 “폭풍이 나의 마음을 거세게 칩니다.”(새번역)라며, 후반부에서도 자연 현상을 통해 나타나는 무한히 크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권능을 계속하여 증언합니다. “이로 말미암아”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상징하는 표징으로서 온 하늘을 번쩍이며 내리치는 “번갯불”과, 함께 뒤따라 쾅 소리를 내며 온 땅을 뒤흔드는 천둥 곧 “우레”와, 이어서 억수같이 몰아치며 쏟아지는 비바람인 “풍우” 곧 “폭풍”으로 인해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 마음 상태를 가리킵니다. 엘리후는, 온 하늘을 번쩍이는 빛으로 가득 채우며 온 땅을 굉음으로 뒤흔들며 내리치는 천둥 번개에, 순간 정신이 나간 것처럼 실신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대자연의 현상을 통해 엘리후를 두려움과 공포에 빠트린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그 소리를 천하에 펼치시며, 번갯불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그의 위엄 찬 소리로 천둥을 치시며,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를 멈추게 아니하시느니라”(37:3-4)고 증언합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욥에게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37:2) 곧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천둥과 같은 소리를 들으십시오.”(새번역)라며, 피조물인 인간은 이러한 천둥소리처럼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에 항상 순종할 것을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연 현상 자체로 끝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상을 통해 인류를 위해 하시는 위대한 일이 있다는 것과, 그 안에는 인간의 지식과 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일을 행하시느니라”(37:5) 곧 “하느님께서는 뇌성벽력으로 신비한 일을 알려주시지만, 그 하시는 큰일을 우리는 감히 알 수가 없소.”(공동번역)라고 증언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대자연 현상을 통해서 나타내 보이시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일”이 무엇이라고 증언합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 비도 내리게 명하시느니라”(37:6)고 증언합니다. “눈”과 “비”가 내리는 자연현상의 신비를, 고대인들은 절대자의 능력으로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팔레스틴 지역은, 레바논이나 헬몬산이 아니고는 “눈”을 본다는 것 자체가 신비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적은 비”는 3-4월에 내리는 늦은 비와 10-11월에 내리는 이른 비를 가리키고, “큰 비”는 이른 비 이후인 12-2월의 우기에 내리는 장맛비를 가리킵니다. 이때가 되면, “그가 모든 사람의 손에 표를 주시어, 모든 사람이 그가 지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짐승들은 땅 속에 들어가 그 처소에 머무느니라”(37-8) 곧 “눈이나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봅니다. 짐승들도 굴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눈비를 피합니다.”(새번역)라고 증언합니다. 사람이 되었든 짐승이 되었든 모두가 일손과 활동을 멈출 수밖에 없지만, 이 고난의 시간을 통해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한편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에 탄식하는 욥의 태도가 옳지 않음을 지적하고자 한 말로, “그의 우레가 다가오는 풍우를 알려 주니, 가축들도 그 다가옴을 아느니라”(36:33)고 했던 것처럼, 재앙과 고통의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발견하는 기회가 될 것에 대한 충고이기도 했습니다. 엘리후는 이어서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적 섭리와 권능으로 행하시는 또 다른 대자연 현상들을, “폭풍우는 그 (남방) 밀실에서 나오고, 추위는 북풍을 타고 오느니라. 하나님의 입김이 얼음을 얼게 하고, 물의 너비를 줄어들게 하느니라. 또한 그는 구름에 습기를 실으시고, 그의 번개로 구름을 흩어지게 하시느니라”(37:9-11)고 증언합니다. “남방 밀실”(개역)은 남쪽에 거대한 비밀스런 저장고가 있어서 그곳에 보관된 “폭풍”이 불어오는 것으로 보았으며, “북풍”이 불면 “추위”가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에 대한 증언입니다. 또한 “추위”가 오면 불어오는 찬바람을 “하나님의 입김”으로 보았으며, 그러면 물들이 얼고, 얼면 물의 부피가 줄어드는 신비한 현상 자체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권능으로 증언합니다. “구름”이 “습기”를 머금고 하늘에 떠있다는 것 자체도 하나님의 신비 그 자체이며, “번개”를 번쩍이게 하심으로써 “구름”이 머금은 습기를 비로 쏟아내게 하시는 것이 또한 신비였습니다. 모든 자연 현상에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되어 있다는 증언입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그는 감싸고 도시며,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그는 땅과 육지 표면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시느니라”(37:12) 곧 “구름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뭉게뭉게 떠다니며,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이 땅 위의 어디에서든지 이루려고 합니다.”(새번역)라며, 하나님이 자신의 때를 따라 땅과 바다에 비를 내리시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주권적인 능력을 증언합니다. 이처럼 대자연 현상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주권적인 능력과 지혜를 “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하여,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37:13) 곧 “하나님은 땅에 물을 주시려고 비를 내리십니다. 사람을 벌하실 때에도 비를 내리시고,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실 때에도 비를 내리십니다.”(새번역)라고 증언합니다. 이처럼 똑같은 자연 현상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깃든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은 “징계”와 “긍휼”이라는 전혀 상반된 사건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편협하고 어떤 틀에 갇힌 도식적인 사고로 함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판단하고 측량할 수 없는 오묘하신 지혜임을 엘리후는 증언합니다. 앞에서도 엘리후는 자연 현상을 통한 하나님의 상반된 통치 섭리를, “이런 것들로 만민을 심판하시며, 음식을 풍성하게 주시느니라”(36:31) 곧 “이렇듯이 사람들을 보살피시고, 푸짐하게 배불려 주신다오.”(공동번역)라고 증언했습니다. 2. 주님이 행하시는 섭리를 누가 깨닫습니까? 엘리후는 대자연 현상을 통해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권능 속에 담긴 지혜에 대하여,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37:14) 곧 “욥 어른은 이 말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정신을 가다듬어서, 하나님이 하시는 신기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새번역)라고 명령합니다. 자연현상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처럼, 욥에게 닥친 고난의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무엇인지, 고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겸손히 회개함으로 받아들이는 신중한 자세를 보일 것에 대한 권고였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섭리에 의해 진행되는 그 현장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나타내시기에 함부로 하나님 앞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탄식의 불평을 하지 말고, 그분이 행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깊이 묵상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엘리후의 말이 전적으로 옳으면서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보다 확실히 알고자 하는 의문 자체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엘리후나 욥의 세 친구들 같은 행태가, 현대 기독교인들로 잘못된 사람들을 맹신적으로 추종하는 우매하고 어리석은 신앙인들이 되게 한다는 것도 깨닫는 이들이 복됩니다. 하나님이 자연 현상이나 우리의 삶 속에서 행하시는 섭리를, 우리 인간이 다 이해하거나 깨닫는다는 것은 분명 불가능합니다. 엘리후는 이 부분을 욥에게 강조합니다. 우리 인간은 무한하신 지혜 곧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주권적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엘리후는 “하나님이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로 번쩍거리게 하시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 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 땅이 고요할 때에 남풍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그대가 아느냐?”(37:15-17) 곧 “하나님이 어떻게 명하시는지, 그 구름 속에서 어떻게 번갯불이 번쩍이게 하시는지를 아십니까? 구름이 어떻게 하늘에 떠 있는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이 놀라운 솜씨를 알기라도 하십니까? 모르실 것입니다. 뜨거운 남풍이 땅을 말릴 때에, 그 더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신 것이 고작일 것입니다.”(새번역)라고 욥에게 계속하여 묻습니다.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는 것은, 인간의 지식과 이해를 뛰어넘는 지혜가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솜씨를 아느냐는 반문입니다. 이처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와 지혜 앞에서 욥에게 더 이상 자기 생각과 주장을 피력하는 탄식으로 하나님 앞에 교만히 행하지 말고 경외심을 가질 것을 거듭 촉구하는 반문이었습니다. 엘리후는 계속하여 욥으로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질문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묘하신 섭리와 한없는 권능을 인정할 것을, “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 녹여 부어 만든 거울 같이 단단하게 할 수 있겠느냐?”(37:18) 곧 “당신은 구리거울을 두드려 펴듯이, 하느님을 도와 창공을 두드려 펴기라도 하겠단 말이오?”(공동번역)라며, 인간이 겪는 일을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하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설적인 질문으로 표현합니다. 결국 욥 역시도 연약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깨닫지도 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책망과 비웃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욥에게 만약에 자연 현상에 개입된 하나님의 섭리를 하나님 앞에 밝힐 수 있을 만큼 지혜롭다면 그 지혜를 자신들에게 보여 볼 것을, “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그대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아둔하여 아뢰지 못하겠노라”(37:19) 곧 “어디 한 번 말씀하여 보십시오. 하나님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는 무지몽매하여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새번역)라며, 욥을 조롱합니다. 욥은 고통을 호소하는 자신의 탄식의 변론을 듣고 하나님께서 속히 응답해 주시기를 바랐지만(23:2-9), 이러한 그의 소망이 실현되지 않을 것을 엘리후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37:20) 곧 “‘제 말을 들으십시오.’하고 말한다고 하여, 하느님께서 정녕 당신의 말을 들으셔야 한단 말이오?”(공동번역)라며, 어떻게 그렇게 하겠느냐고 질책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러한 패역한 행위는 하나님의 진노로 완전히 멸망당할 일 밖에 없다며, “삼켜지기를 바랄 자가 어디 있으랴?”(37:20) 곧 “어찌하여 하나님께 나를 멸하실 기회를 드린단 말입니까?”(새번역)라고 욥에게 반문합니다.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모든 일에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순복할 것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3. 주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엘리후는 대자연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과 그 자연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인간 이해의 한계성을 비교하면서, 그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발견할 수도 만날 수도 없기에 오직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선언합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그런즉 바람이 불어 하늘이 말끔하게 되었을 때, 그 밝은 빛을 아무도 볼 수 없느니라. 북쪽에서는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공동번역은 “지금은 해가 구름에 가리워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불어 하늘이 개면, 하느님의 빛나는 영광이 북녘 하늘에서 밝게 비쳐올 것이오.”라고 했고, 새번역은 “이제 하늘에서 빛나는 빛이 눈부십니다.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밝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하늘이 맑아졌습니다. 북쪽에는 금빛 찬란한 빛이 보이고, 하나님의 위엄찬 영광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구름이 끼면 하늘에 있는 태양이라도 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인 것처럼, 고난이 닥치면 고난에 처한 인간은 “지금은 해가 구름에 가리워 보이지 않지만” 곧 그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알 수 없지만, “그런즉 바람이 불어 하늘이 말끔하게 되었을 때” 곧 영광의 빛을 비추실 하나님을 향한 소망 중에 그 상황을 견디어내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충고였습니다. 결국 엘리후는 어둠이 밀려가면 하나님의 찬란히 빛나는 영광의 위엄이 나타난다는 증언을 하면서,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37:23) 곧 “우리 인간이 어찌 이 전능하신 분께 이르겠소? 못할 일 없으시며 공평무사하신 그분이 어찌 억울한 일을 하시겠소?”(공동번역)라며, 욥이 바라던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것이기에 탄식의 호소와 자기 무죄 주장을 멈추고 어둠 후에 비칠 빛을 바라보며 인내할 것을 권고합니다. 완전한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은 죄악 된 인간에게 자신의 행위를 판단 받지 않으신다며,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37:24) 곧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을 무시하십니다.”(새번역)라는 권고로, 엘리후는 자신의 변론을 마무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엘리후가 욥에게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37:14)고 했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 있기에, 결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반론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후는 욥에게 계속 반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대자연의 현상을 일으키셨는지를 “그대가 아느냐?…아느냐?…그대가 아느냐?…할 수 있겠느냐”(37:15-18)라고 반문했던 이유였습니다. 결국 엘리후는 욥에게 자연 현상을 통해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조차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자기 인생에 닥친 재앙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의문의 제기와 고난의 탄식만을 내뱉으며 자기 무죄를 주장할 수 있느냐며, 그러한 욥을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로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를 멈추고 겸손히 자기 허물을 인정하고 공의의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순종할 것을,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37:24)고 권면했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탄식과 주장을 하나님을 향한 불의한 비난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그러한 욥에게 하나님이 내린 고난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정당한 행위였다는 것을 변증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욥의 고통의 탄식과 자기 무죄 주장의 변론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 고통과 소외의 깊은 늪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엘리후의 주장이 교리적으로는 맞지만, 고통 가운데 몸부림치는 욥을 이해하거나 설득시키는 데 실패함으로써 신학적 교리적 논리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인간은 어떤 논리적 말로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이해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욥기서는 이러한 변론의 한계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야만 했고, 그분이 말씀하실 때 비로소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을 계시합니다. 따라서 엘리후의 변론 의미는, 욥으로 하나님과의 극적인 만남을 이끄는 주님의 현현을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벧전3:15-16)는 당부를 기억하고, 많은 이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아픔의 현장을 복되게 살아가는 거룩한 신앙인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