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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 ~ p29에서
<원문>
위 《충주시구개정도》가 작아 보이지 않는다. 화면을 키워 풀이한다.
위 사진을 확대 하였다.
위에서부터 지탄금대(至彈琴台), 지경성급청주(至京城及淸州), 대수교(大手橋), 일출교(日の出橋), 대신궁(大神宮), 천기정(川崎町), 금평정(錦平町)이 보인다.
탄금대와 서울ㆍ청주로 가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다.
각각 오테바시(大手橋), 히노데바시(日の出橋), 다이신구(大神宮), 가와사키초(川崎町), 니시키히초(錦平町)가 된다. 대수교는 현 충주교, 일출교는 현 성서교에 해당된다.
충주심상고등소학교(忠州尋常高等小學校, 충주 신조고토쇼가코)는 일본인 자녀를 위한 학교인데 지금 예성공원자리에 있었고, 지제천(至堤川)은 제천으로 가는 도로, 지공자묘(至孔子廟)는 향교로 가는 도로, 천교(川橋, 가와바시) 현 예성교 자리에 있었다.
천정일정목(泉町一丁目, 센마치 잇쵸메), 천정이정목(泉町二丁目, 센마치 니쵸메), 대수정일정목(大手町一丁目, 오테마치 잇쵸메), 대수정이정목(大手町二丁目, 오테마치 니쵸메), 대수정삼정목(大手町三丁目, 오테마치 산쵸메)이 보인다.
금정, 중정, 금융조합이 보인다. 금융조합은 지금 농업은행이라 하는데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흔치 않은 건물이라 한다.
금정이라 쓴 곳은 제1로타리가 된다. 금융조합 오른쪽으로 본정통이 보이고 아래로 은행, 우체국, 헌병대가 보인다. 그리고 밑으로 가면 수비대가 예전 세무서 자리에 보이고, 아래로 충주교라 쓴 곳은 현 용산교, 흔히 지곡다리라 부르는 곳이고 지상주(至尙州)라 써있는데 조령을 넘어 상주로 가는 도로인데 지현동을 지나 호암지로 통한다. 이미 신작로가 나있다.
여기서 수비대는 일본야전부대를 말한다. 조선주둔 일본군을 말한다. 헌병대는 1910년 강제합병 직후에는 헌병경찰제로 운영되어 군인인 헌병이 일반 경찰의 역할을 한 것이다. 주요임무는 다음과 같다.
*민간 통제의 핵심: 일반 범죄단속은 물론, 세금징수, 산림감독, 위생검사, 국어(日語)보급 등 한국인의 일상생활 전반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막강한 무법 권한: 재판없이 자체적으로 벌금이나 체벌을 가할 수 있는 '즉결처분권'과 악명 높은 '조선태형령(매질)' 집행권을 가졌다.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의병을 토벌하는 주력이었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보통경찰제로 바뀌었는데, 헌병은 본래 군사경찰로 돌아갔고, 흔히 말하는 순사가 그 역할을 맡았다.
지상정(池上町, 이케가미초), 공주지방법원 충주지청, 공립 보통학교, 군청, 헌병대 관사, 사내정(寺內町, 테라우치초), 위술분병원, 오처정(吾妻町, 아즈마초), 충주지청관사, 진야정(秦野町, 하다노초)이 보인다.
위술분병원(衛戍分病院)이 나오는데, 위술병원(衛戌病院)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주둔 군대(일본육군)의 장병 치료와 위생 관리 및 군사적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설치한 군전용 병원이다. 따라서 위술분병원은 각주둔지에 설치된 병원으로 볼 수 있다.
지단양(至丹陽), 단양으로 가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다. 지금 안림동 마스막재로 통하는 길이다. 기호에 신도로, 구도로가 표시되어 있는데 단양으로 가는 길은 아직 구도로이다.
아래로 용산동 《전매과충주출장소》가 보인다.
p1
忠州最近歷史の 卷頭を飾るものは市區改正である、朝鮮は、建國二千年の舊邦にして、中世紀に於ける文藝、美術の進步は感勝に値するもの多しと雖も、近世に迨ひ、末世紀的國民性の退嬰と共に、都府廢頹し、夕陽斷霞と相映帶する飛閣雲樓は、徒らに千歲の昔を語る形見となつた、昔中部朝鮮の樂境として、碧瓦朱欄、金光燦然たりし中原の舊都忠州は、漢城の背影として要害の地たり、亦觀察府所在地として忠清北道の首都であつた、過去十年前の忠州は、城壁巍然として一劃を爲し、東西南北の樓門儼然として聳え、城內人煙稠密にして、舊都の面影を探たりしも、草賊暴徒蜂起して、屢ば燋爛の厄に會ひ、鬼哭啾々たる慘劇が演せられた、桑滄の變は、新羅時代の樂境、中原の舊都を其の帳に收めて、明治四十一年(원문에는 명치사십이년이나 명치사십일년, 1908년이 맞으므로 고친다.)、忠清北道觀察府を淸州に移轉さゝるに及び、昨日の都城は盛衰地を易へ、寥々として、曉天の星斗を望むが如く、寂寞たる一寒村と化し、當時、生活難に追はれて、衰頹の故山を捨て白衣の放浪人の悲しい歌は、今猶は、松の梢に哀調を漂はして居る、其の後明治四十五年、忠州特產黃色煙草の指定耕作地として、度支部專賣課出張所を開設し、大正二年一月、黃色煙草耕作組合を設け、銳意斯業の奬勵に努め、郡當局亦産業の啓發に鞅掌し、商工業の隆興旭日昇天の勢を以て蘂城を照らし、忠州復活の礎は築かれた、時恰も、總督府官房土木局出張所の管掌に係る京城大邱間一等道路は、京城忠州間第一期線竣工を遂げ、淸州忠州間二等道路の開通と共に、鳥致院、芙江の兩驛を通じて、京釜線に連結さゝるに及び、邊陬僻地の寒村は、一躍して、四通八達の殷賑を極め、全鮮に其の頭角を現すに至つた、殊に中央鐵道布設の計畫
喧傳さゝるや、將來商業上の霸權を掌握すべき地の理を得たる忠州は、全鮮母國人の心臟に共鳴して、來往者踵を接して蝟集し、人口五百、小都市の觀を呈するに至つた、朝鮮趣味を根柢から打破することは、歷史保存上の大問題であるに係らず、將來の忠州は、現狀維持を許さなくなった、則ち大正二年九月、衆議一決にして、市區改正計畫を企たのである、昔高句麗の文明を誇りし、東西南北の樓門は除却され、邑內を圍繞せし城壁は撤去された、斯くて、衰凋の影は消えて、爽快なる現代的色彩を裝ひ、風光美と市街美とを以て生命とする新忠州は現實した、今や歐洲大戰亂の勃發と共に、鑛業熱天下を風靡するに當り、忠州は、タングステン、モリブデンの名をもつて知られ、中部朝鮮に其の雄姿を現はして居る、市區改正の大要は左の如し。
一、市區の構造
元市區의 錯綜せる部分の樞要線路を、表圖の如く、改正したるものにして、京城より尙州に通ずる、一等道路に接續する道路を幹線とし、左の如く改正す。
A 有效五間幅、 四線、 延長六百二十間、
B 同 四間幅、 十三線、 同 千六百二十一間、
C 同 三間幅、 四線、 同 五百六十六間、
D 同 二間幅、 三線、 同 五百十八間、
合 計 廿四線、 同 三千三百二十五間、
內舊北門より南門に至る有效四間幅三百四十二間は、總督府の直營工事にして、又孔子廟及び大神宮に通ずる道路は、市區改正の附屬工事として施行したるものである。
二、工事費
側溝、石垣及び暗渠、土管等の構造物に要する工費豫算は、九千七百十七圓にして、內七千五百圓は、公募寄附金とし、二千二百十七圓は、忠清北道地方費補助をもつて支辦し、構造物以外に要する土工は、忠州郡內各面人民より、賦役として、延人員六萬二千八百四人の人夫を使役したり。
三、土地及び支障家屋
本事業に屬する土地及び支障家屋は、全部、無償にて提供し、又は移轉し、其の遂行を容易らしめたり。
四、起業者及著手竣工期間
本工事は、郡事業とし、地方費補助、寄附金及び寄附人夫を使用し、大正二年九月十二日をもつて工事に著手し、同年九月月竣功せり。
五、功勞者氏名
本工事は、忠淸北道長官鈴木隆、同第一部長齋藤禮三監督の下に、土木係主任三宅貞太郎、同技手富田虎猿郞の設計に成り、忠州郡守徐晦輔、同郡書記田中勳、擔任し、工事監督として、小松原新吉、堀井佐傳次、渡邊安藏を常置し、其の街に當らしむ、本工事中民間に於て、委員として盡瘁したる功勞者は、宇野佐平、高村甚一、新井田四郞、水野彌吉、岡田市藏、大石長作、川本角一、鈴木政一、馬場廣太、井上肇、原口一二、原田長次郞、福山忠太郞、赤松時員、永留信之、中川龍藏等の諸氏である。
<번역문>
충주 최근 역사에서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시가지 개정(도시 정비)이다.
조선은 개국 2천 년의 옛 나라이며, 중세의 문예와 미술의 발전은 감탄하고 뛰어나다 여길만한 것이 많다. 하지만 근세에 이르러 말세적인 국민성의 퇴영과 함께 도읍이 폐허가 되었다. 석양과 노을에 어우러진 비각과 운루는 한낱 천년 옛날을 말해주는 유물이 되고 말았다.
옛 중부 조선의 낙경(樂境)으로서 푸른 기와와 붉은 난간, 금빛이 찬란하던 중원의 옛 도읍 충주는 한성(漢城, 서울)의 배후 요새지이자 관찰부 소재지로서 충청북도 수도였다. 지난 10년 전의 충주는 성벽이 우뚝하여 한 구역을 이루고, 동서남북의 누문이 엄연히 솟아있으며 성 안에는 인가가 조밀하여 옛 도읍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초적(草賊, 의병 등) 폭도가 봉기하여 여러 번 불타는 화를 입었고, 귀곡성(鬼哭啾) 진동하는 비극이 연출되었다.
상전벽해의 변화는 신라 시대의 낙경이자 중원의 옛 도읍을 그 장막 속으로 거두어들였다. 대정 41년(1908년,
원문은 명치 42년이나 명치 41년 1908년이 맞으므로 고친다. 충청북도 관찰부(충북도청)가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한 시기는 1908년 6월 5일(광무/융희 연간, 칙령 제30호)이라고 한다.), 충청북도 관찰부를 청주로 이전함에 따라 어제의 도성은 흥망성쇠를 달리하여 썰렁해졌다. 마치 새벽하늘의 별을 바라보듯 적막한 한 가난한 마을로 변하였다. 당시 생활고에 쫓겨 퇴락한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백의(白衣) 방랑자의 슬픈 노래는 지금도 소나무 가지 끝에 애조를 띤 채 감돌고 있다.
그 후 대정 45년(1912년), 충주 특산 황색 담배의 지정 경작지로 탁지부 전매과 출장소를 개설하였고, 대정 2년(1913년) 1월에는 황색 담배 경작조합을 설치하여 열의를 다해 본 사업을 장려하였다. 군 당국 또한 산업 개발에 분투하여 상공업의 흥왕함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예성(蘂城, 충주)을 비추니, 충주 부활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때마침 총독부 관방 토목국 출장소 관할 하의 경성-대구 간 1등 도로 중 경성-충주 간 제1기 선이 완공을 보았고, 청주-충주 간 2등 도로의 개통과 함께 조치원, 부강 두 역을 통해 경부선에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변방의 구석진 외딴 시골 마을은 일약 사통팔달의 번화한 도시가 되어 전 조선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중앙철도 부설 계획이 널리 알려지자, 향후 상업상의 패권을 장악(掌握)할 입지 조건을 얻은 충주는 전 조선의 내지인(內地人, 일본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왕래하는 자들이 꼬리를 물고 몰려들어 인구 500(문맥상 일본인 숫자를 말한다.)의 소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의 옛 취향을 근본적으로 타파(打破)하는 것은 역사 보존상의 큰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향후의 충주는 현상 유지를 허용하지 않게 되었다. 즉, 대정 2년(1913년) 9월, 중의를 모아 시가지 개정 계획을 도모한 것이다. 옛 고구려의 문명을 자랑하던 동서남북의 누문은 철거되었고, 읍내를 둘러싸고 있던 성벽도 철거되었다.
※ 충주읍성은 1869년(고종 6) 음력 2월부터 11월까지 약 10개월에 걸쳐 충주목사 조병로의 주도로 개축하였는데 1896년 을미의병 호좌의진 유인석(柳麟錫) 부대가 동 2월 18일 점령후 파괴되었다.
이로써 쇠퇴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상쾌한 현대적 색채를 갖추어, 풍광의 아름다움과 시가지의 미관을 생명으로 하는 '신충주'가 현실화되었다. 이제 유럽 대전(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광업 열풍이 천하를 풍미함에 따라, 충주는 텅스텐과 몰리브덴의 명산지로 알려지며 중부 조선에 그 웅자(雄姿)를 드러내고 있다. 시가지 개정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一. 시가지의 구조
원래 시가지의 복잡하게 얽혀 있던 주요 선로를 표와 같이 개정한 것으로, 경성에서 상주로 통하는 1등 도로에 접속하는 도로를 간선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개정함.
※여기서 거리단위 1間(켄)은 일본에서 쓰던 단위이다.
1間은 1.818m. 그리고 원(圓)은 엔(円)으로 일본화폐 단위다. 유효 너비는 도로폭, 연장은 도로 길이가 된다.
A (유효 너비 5간(9.09m)): 4개 선, 연장 620간(1,127.16m).
B (유효 너비 4간(7.27m): 13개 선, 연장 1,621간(2946.98m).
C (유효 너비 3간(5.45m): 4개 선, 연장 566간(1,028.99m).
D (유효 너비 2간(3.64m): 3개 선, 연장 518간(941.72m).
합계: 총 24개 선, 총연장 3,325간(6,044.85m).
(※ 구 북문에서 남문에 다다르는 유효 너비 4간(7.27m), 길이 342간(621.76m)은 총독부 직영 공사이며, 공자묘 및 대신궁으로 통하는 도로는 시가지 개정의 부속 공사로 시행한 것임)
※구 북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도로를 흔히 본정통(本町通)이라 불렀다.
二. 공사비
측구(측랑), 축대, 암거, 토관 등 구조물에 들어간 공사비 예산은 9,717원(円)이다.
7,500원(円): 공모 기부금
2,217원(円): 충청북도 지방비 보조금
노동력: 구조물 이외에 필요한 토목공사는 충주군 내 각 면의 주민들로부터 부역(賦役, 부역 노동)으로 동원하여, 연인원 62,804명의 인부를 사역함.
三. 토지 및 장애 가옥
본 사업에 속하는 토지 및 장애가 되는 가옥은 전부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이전(移轉)하게 하여 사업 수행을 용이하게 함.
四. 사업자 및 착공·준공 기간
본 공사는 군(郡) 사업으로서 지방비 보조금, 기부금 및 기부 인부를 사용하여 대정 2년(1913년) 9월 12일에 공사를 착공하여 동년 9월에 준공함.
五. 공로자 명단
본 공사는 충청북도 장관 스즈키 다카시(鈴木隆), 동 제1부장 사이토 레이조(齋藤禮三)의 감독 하에, 토목계 주임 미야케 사다타로(三宅貞太郎), 동 기수 토미타 토라시로(富田虎猿郞)의 설계로 성립되었다. 충주군수 서회보(徐晦輔), 군 서기 다나카 이사오(田中 勳)가 담당하였고, 공사 감독으로 코마츠바라 신키치(小松原新吉), 호리이 사덴지(堀井佐傳次), 와타나베 안조(渡邊安藏)를 상주시켜 그 직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본 공사 중 민간에서 위원으로서 진력한 공로자는 다음과 같다.
우노 사헤이, 타카무라 진이치, 니이이다 시로, 미즈노 야키치, 오카다 이치조, 오이시 초사쿠, 카와모토 카쿠이치, 스즈키 마사이치, 바바 히로타, 이노우에 하지메, 하라구치 이치지, 하라다 초지로, 후쿠야마 추타로, 아카마츠 토키카즈, 나가도메 노부유키, 나카가와 류조 제씨.(宇野佐平、高村甚一、新井田四郞、水野彌吉、岡田市藏、大石長作、川本角一、鈴木政一、馬場廣太、井上肇、原口一二、原田長次郞、福山忠太郞、赤松時員、永留信之、中川龍藏等の諸氏である)
※스즈키 마사이치(鈴木政一)는 호암지 축조를 주도한 인물이다.
청주에서 음성, 대소원을 지나 충주까지 자동차 운전도로가 나 있다. 아래 보이는 철도는 1905년 1월 1일에 개통된 경부선이다. 조치원역은 경부선 개통에 맞추어 영업을 시작하였고, 부강역은 1909년 11월에 영업을 시작하였다. 충북선 조치원 ~ 청주구간은 1921년 11월 1일 개통되었다. 청주 ~ 청안구간은 1923년 4월 28일, 청안 ~ 충주구간은 1928년 12월 25일 개통되었다.
綱羅萬象 (강라만상)(세상 만사를 그물로 걷어 올리듯 모아서 망라하다)
忠州郡守 徐晦輔(충주군수 서회보)
※책 출판을 축하하는 뜻으로 써준 것이다.
충주수비대전경
○충주수비대장교
*전열 오른쪽부터 (前列右より)
星野軍醫 (호시노 군의), 大海大隊長 (오오미 대대장),山縣中隊長 (야마가타 중대장).
*후열 오른쪽부터 (後列右より)
金山少尉 (카나야마 소위), 橘副官 (타치바나 부관),
島野大尉 (시마노 대위)
*우측 원형 사진 (右側)
高橋中尉 (타카하시 중위)
충주수비대하사
*상단 우측 사진
島崎軍曹 (시마자키 군조 / 시마자키 중사)
*前列右より (전열 오른쪽부터)
吉水軍曹 (요시미즈 군조), 金森軍曹 (카나모리 군조), 高井曹長 (타카이 조장), 柏村特務曹長 (카시와무라 특무조장), 竹內軍曹 (타케우치 군조 ), 白石軍曹 (시라이시 군조), 安村軍曹 (야스무라 군조)
*後列右より (후열 오른쪽부터)
松富伍長 (마츠토미 오장), 松本軍曹 (마츠모토 군조), 村田軍曹 (무라타 군조), 部坂軍曹 (헤사카/부사카 군조), 山田軍曹 (야마다 군조), 白橋伍長 (시라하시 오장), 御旗伍長 (미하타 오장)
※참고: 계급 명칭은 조장(원사급), 특무조장(상사급), 군조(중사급), 오장(하사급)에 해당한다.
충주군청
*前列右より (전열 오른쪽부터)
宮武書記 (미야타케 서기), 尾西書記 (오니시 서기), 徐郡守 (서 군수 - 서회보(徐晦輔)),
田中書記 (타나카 서기)
경성위술병원충주분원
*前列右より (전열 오른쪽부터)
熊谷一等看護長 (쿠마가이 일등간호장),
星野軍醫 (호시노 군의),
米澤二等看護長 (요네자와 이등간호장)
충주헌병분대
○충주헌병분대직원
*前列右より (전열 오른쪽부터)
藤井上等兵 (후지이 일등병), 谷田軍曹 (타니다 군조 / 타니다 중사), 銅原軍曹 (도하라 군조 / 도하라 중사), 小林上等兵 (코바야시 일등병).
*後列右より (후열 오른쪽부터)
金補助員 (김 보조원 - 한국인 보조원), 古賀上等兵 (코가 일등병), 村田軍曹 (무라타 군조 / 무라타 중사),
伊藤上等兵 (이토 일등병), 吉田上等兵 (요시다 일등병)
탁지부전매과충주출장소
공주지방법원충주지청
공주지방법원충주지청직원
*前列右より (전열 오른쪽부터)
卞判事 (변 판사 ), 湊判事 (미나토 판사),
井上書記 (이노우에 서기)
충주우편국
*前列左より (전열 왼쪽부터)
金尾事務員 (카나오 사무원), 酒井局長 (사카이 국장), 磯田書記補 (이소다 서기보), 生田事務員 (이쿠타 사무원)
*後列右より (후열 오른쪽부터)
岡本事務員 (오카모토 사무원), 張事務員 (장 사무원 - 한국인 사무원), 海原事務員 (카이하라 사무원)
공립 충주보통학교
前田 (마에다) - 전임 교장(前校長),
元田 (모토다) - 훈도(訓導)
공립충주심상고등소학교
읍내면사무소
한호농공은행충주지점
충주지방금융조합
평의원 川本角一 (카와모토 카쿠이치),
평의원 馬場廣太 (바바 코타),
평의원 鈴木政一 (스즈키 마사이치),
평의원 大石長作 (오오이시 조사쿠)
전면의원(前面議員) 水野彌吉 (미즈노 야키치),
재향군인분회장 山崎泰次郞 (야마자키 타이지로),
조선신문충주지국 木村房次 (키무라 후사지),
내국통운회사파출인 永留信之 (나카토메 노부유키)
저자 가나야 마사키 (金谷雅城)
신문기자였다.
*資本金 壹百萬圓 (자본금 100만원)
*政府貸下金 參拾貳萬九千貳百圓 (정부대하금(정부정책융자금) 32만 9,200원)
*農工債券發行高 六拾萬圓 (농공채권발행고(총액) 60만원)
○銀行長 白完爀 (은행장 백완혁)
○本店支配人 遠山熙 (본점지배인 토야마 히로시)
○忠州支店長 河野州心 (충주지점장 코노 슈신)
●本店: 京城 南大門通 株式會社 漢湖農工銀行 (본점: 경성 남대문통 주식회사 한호농공은행)
●忠清北道 忠州 同 忠州支店 (충청북도 충주 동 충주지점)
○支店: 開城、春川、江景、太田、公州、鐵原、清州、論山、鳥致院 (지점: 개성, 춘천, 강경, 대전, 공주, 철원, 청주, 논산, 조치원)
○右ノ外內地及朝鮮各樞要地ニ爲替取引先有之候 (우측 언급 외 내지[일본 본토] 및 조선 각 주요 요충지에 환거래처가 있습니다)
○當銀行ハ普通銀行業務モ確實親切ニ御取扱申候 (당 은행은 보통은행 업무도 확실하고 친절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화폐단위 원(圓)은 일본 화폐 단위 엔(円)이다.
陸軍御用達
東亞煙草株式會社特約店 /
日本醬油株式會社特約店 /
スタンダード石油會社特約店 /
度量衡器委託販賣 /
清酒 菊正宗 白鶴 販賣 /
食料品 日用雜貨類 /
忠州 本町 三丁目
[米 質部]
原口一二商店 /
原口分店 /
原口支店 (忠清北道 丹陽)
(육군 납품 지정업체
동아연초주식회사 특약점 / 일본간장주식회사 특약점 /
스탠더드 석유회사 특약점/ 도량형기 위탁 판매 /
청주 키쿠마사무네·시라츠루 판매 /
식료품·일용 잡화류
충주 혼마치 3초메 (충주 본정 3丁目)
[미곡 질권부]
하라구치 이치지(原口一二)商店 /
하라구치(原口)분점 /
하라구치(原口)지점 (충청북도 단양)
食料品諸雜貨 / 清酒並醬油類 /
東洋生命保險會社代理店 /
東亞煙草株式會社特約店 /
ライジングサン石油特約店 /
忠州 本町 一丁目 /
諸官署御用達 /
宇野佐平商店
(식료품 및 각종 잡화 / 청주 및 간장류 / 동양생명보험회사 대리점 / 동아연초주식회사 특약점 /라이징썬(Rising Sun) 석유 특약점 /
충주 혼마치 1초메 (충주 본정 1丁目) /
각 관공서 납품 지정업체 /우노 사헤이商店 (宇野佐平商店))
帝國生命保險株式會社代理店 /
朝鮮煙草株式會社代理店 /
土佐紙株式會社特約店 /
文房具 化粧品 卸小賣 /
忠州 錦町 /
雜貨 貿易 /
井上肇商店/
(振替口座京城一六八一番)
(제국생명보험주식회사 대리점 / 조선연초주식회사 대리점 / 도사지주식회사 특약점 / 문방구·화장품 도소매 /
충주 니시키초 (충주 금정) /
잡화 무역 /
이노우에 하지메商店 (井上肇商店)
(대체계좌 경성 1681번))
※土佐紙 (도사지): 일본 고치현(옛 토사국(土佐國)) 지역의 전통 특산 종이인 토사화지(土佐和紙), 또는 이를 생산하는 상호를 뜻한다.
忠州 本町 二丁目 /
米穀 貿易商 /
高村甚一
(충주 혼마치 2초메 (충주 본정 2丁目) /
미곡 무역상 / 타카무라 진이치 (高村甚一))
會席 御料理 / 忠州 錦町 / 末廣館 / 稻田 四馬治 /
*藝妓: 一奴、政奴、榮龍、新奴、久仁葉、ツバメ
*酌婦: 榮、愛子、照子 /
*仲居: 信子
(六十疊敷宴會場の備あり)
(연회·요리 전문 / 충주 니시키초 (충주 금정) /
수에히로칸 (末廣館) / 이나다 시마지 (稻田四馬治) /
*게이샤: 이치야코, 마사야코, 에이류, 신야코, 쿠니하,
츠바메
*작부: 에이, 아이코, 테루코
*나카이: 노부코
(60다다미 규모의 연회장 완비) )
眺望絶佳 深切丁寧 / 忠州 錦町 / 御旅館 星光館
/ 星野竹次 / 本館は忠北自動車組合停柴門畫靜かにして(뛰어난 전망, 친절하고 정성 어린 서비스 / 충주 니시키초 (충주 錦町) / 御旅館(오료칸, 저희 여관) 세이코칸 (星光館) / 호시노 타케지 (星野竹次) / 본관(本館)은 충북 자동차 조합 정류장에서 가장 가까움)
御旅館 / 陸軍指定旅館/ 忠清北道指定旅館 / 忠北館 / 忠州 本町 四丁目/ 忠州最古の旅館にして玉突場の設備あり(여관 / 육군 지정 여관/ 충청북도 지정 여관 / 충북관 / 충주 혼마치 4초메 (충주 본정 4丁目) / 충주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으로 당구장 시설을 갖추고 있음)
御旅館 / 忠清北道廳指定旅館 / 忠州 日の出町 / 鶴屋旅館 / 館主 宮地幸吉 /
眺望絶佳、深切丁寧、室內清潔、器具清新 / は本館の特色
(여관 / 충청북도청 지정 여관 / 충주 히노데초 (충주 일출정)/ 츠루야 여관 / 여관주인: 미야지 코키치 (宮地幸吉)/ 뛰어난 전망, 친절하고 정성 어린 서비스, 깨끗한 객실, 신선하고 깔끔한 기구는 본관의 특색)
會席 御料理 / 忠州 錦町 /加納屋(연회·요리 전문/ 충주 니시키초 (충주 금정) / 카노야 (加納屋))
呉服 太物商 / 舶來 雜貨商 / 忠州 本町 四丁目 / 水野呉服店 / 水野彌吉(포목·직물상 / 수입 잡화상 / 충주 혼마치 4초메 (충주 본정 4丁目) / 미즈노 포목점 / 미즈노 야키치 (水野彌吉))
( 1 ) 序文
忠州發展誌序
柴門畫靜かにして、蜻蜒蛛蝶籬邊に飛び、新樹空に連りて、風露香を送るの時、南山城趾永劫に眠り、彈琴臺は默して語らず、碧瓦、朱欄、白壁、金泥、輪奐の美を極めし中原の舊都は、風に移ろひ、雨に褪せて、觀る影もなく、盛者必衰の理、轉た懷舊の情に堪へざらしむ。
想ふに我忠州は、古來、歌舞劍戟の地にして、名勝舊跡に富む全鮮に冠たり、若し夫れ、三國の爭變、文祿の役、古刹佛敎の由來等、長夜未だ眠をなさず、千載の老翁に就きて、古今興廢を聞かば、快樂何ものか是れに如かん。
本書は、市區改正竣工を記念とし、忠州郡の名勝舊跡を蒐錄し、日韓併合後、內地人發展の實況を、普く社會に紹介し、以て涓滴の貢獻を致さんの微意にして、題して忠州發展誌と謂ふ、行文澁滯、內容貧弱にして、推敲及ばず、其の眞影を捉ふる能はざるは、編者、淺學駑鈍の罪にして、識者の垂敎を俟ちて、增補改訂以て其の完璧を期
せん、讀者之を諒焉。
大正五年仲夏蘂城の茅舍にて
金谷雅城 識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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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1)서문
「충주발전지」 서문
사립문 밖이 고요하고, 잠자리와 거미, 나비가 울타리 곁을 날아다니며, 새로 난 나무들이 하늘에 잇닿고 바람과 이슬이 향기를 보내는 때이다. 남산성 옛터는 영겁토록 잠들어 있고, 탄금대는 말없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푸른 기와와 붉은 난간, 흰벽과 금빛으로 단장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던 중원의 옛 도읍은 바람에 빛이 변하고 비에 색이 바래어 이제는 볼 만한 모습조차 없다. 성한 자는 반드시 쇠한다는 이치가 더욱더 회고의 정을 견디지 못하게 한다.
생각건대 우리 충주는 예로부터 가무와 검극(劍戟)의 땅(격렬한 전쟁과 전투가 끊이지 않았던 격전지이자 요충지)으로서 명승과 옛 유적이 풍부하여 온 조선에서 으뜸가는 곳이다. 만일 삼국시대의 쟁탈과 변란, 임진왜란, 옛 사찰과 불교의 유래 등을 밤새도록 잠들지 않고 천 년 묵은 노인에게 찾아가 고금의 흥망성쇠를 듣는다면, 그 즐거움이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시가지 개수공사의 준공을 기념하여 충주군의 명승과 옛 유적을 모아 기록하고, 한일병합 이후 일본 본토인들의 발전과 정착 실정을 널리 사회에 소개하여, 이로써 조금이나마 공헌하고자 하는 뜻에서 편찬한 것이다. 제목을 붙여 《충주발전지》라 한다.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고 내용도 빈약하여 충분히 다듬지 못했으며, 충주의 참모습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것은 편자의 학문이 얕고 재주가 둔한 탓이다. 식견 있는 분들의 가르침을 기다려 증보하고 개정함으로써 완전한 책을 이루기를 기약한다. 독자들께서는 이를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기 바란다.
대정 5년(1916) 한여름, 예성(蘂城)의 초가집에서
가나야 마사키(金谷雅城) 씀
<번역문>
○忠州發展誌 目次 (충주발전지 목차)
◇ 目次 (목차) (1)
第一章 地誌 (제1장 지지) ……………………………1
(1)沿革 (연혁)………………………………… 1
(2)地勢 (지세)…………………………………………… 4
(3)戶口 (호구) ……………………………………………… 5
(4)郡內主要市場 (군내 주요 시장)…………………… 6
第二章 行政 (제2장 행정) ……………………………… 7
第三章 敎育 (제3장 교육) ……………………………… 8
(一) 內地人敎育 (내지인(일본인))교육…………… 8 (二) 鮮人敎育 (선인(조선인))교육 ……………… 10
第四章 警察 (제4장 경찰) ……………………………… 11
(一) 忠州憲兵分隊 (충주 헌병분대)……………… 11
(二) 衛生及消防 (위생 및 소방) …………………… 13
第五章 裁判 (제5장 재판) ………………………………… 14
◇ 目次 (목차) (2)
第六章 守備隊 (수비대) ……………………………… 15
第七章 通信 (통신) …………………………… 17
第八章 金融 (금융) …………………………… 18
第九章 農業 (농업) …………………………… 20
第十章 黃色煙草 (황색 연초)…………………… 29
第十一章 商業 (상업) ………………………… 35
第十二章 鑛業 (광업) ………………………… 40
第十三章 交通 (교통) …………………………… 50
第十四章 宗教 (종교) …………………………… 52
第十五章 在鄕軍人會 (재향군인회)………… 53
第十六章 民情 (민정) …………………………… 54
第十七章 官公衛名譽職々員錄 (관공위 명예직 직원록) ………… 55
忠州守備隊 (충주수비대), 忠州郡廳 (충주군청), 京城衞戌病院忠州分院 (경성위술병원 충부분원), 忠州憲兵分隊 (충주헌병분대, )公州地方裁判所忠州支廳 (공주지방법원 충주지청), 度支部專賣課忠州出張所 (탁지부 전매과 충주출장소), 忠州郵便局 (충주우편국), 公立忠州普通學校 (공립충주보통학교), 公立忠州簡易農業學校 (공립충주간이농업학교), 公立忠州尋常高等小學校 (공립충주심상고등소학교), 忠州地方金融組合 (충주지방금융조합)
◇ 目次 (목차) (3)
漢漢湖農工銀行忠州支店 (한호농공은행 충주지점), 忠州學校組合 (충주학교조합), 忠州衞生組合 (충주위생조합), 忠州消防組 (충주소방조), 忠州內地人農事改良組合(충주 내지인 농사개량조합), 忠州郡黃色煙草耕作組合 (충주군 황색연초 경작조합), 忠州郡蠶業組合 (충주군 잠업조합), 帝國在鄕軍人會忠州分會 (제국재향군인회 충주분회), 忠州商業組合 (충주상업조합), 忠州婦人會 (충주부인회)
第十八章 人格 (인격/인물) …………………………… 64
(一) 鹽田禎介氏 (1) 시오타 사다스케 씨 …………… 64
(二) 高村甚一氏 (2) 다카무라 진이치 씨 …………… 65
(三) 宇野佐平氏 (3) 우노 사헤이 씨 ………………… 65
(四) 大瀨由平氏 (4) 오오세 요헤이 씨………………… 66
(五) 珠玉一束 (5) 주옥일속(명사 소개) …………… 67
※珠玉一束 (주옥일속)은 주요명사일람(主要名士一覽)이란 뜻.
第十九章 名勝舊蹟 (명승구적)……………… 71
(一) 忠州市街全景(충주 시가지 전경)……………… 72
(二) 忠州神社と忠魂碑 (충주신사와 충혼비) …… 73
(三) 忠州錦町通り(충주 니시키초(금정) 거리) …… 74
(四) 忠州市場 (충주 시장) …………………………… 75
(五) 天雲亭 (천운정) …………………………………… 76
◇ 目次 (목차) (4)
(六) 彈琴臺 (탄금대) ………………………………… 77
(七) 忠烈祠 (충렬사) …………………………………… 78
(八) 陵岩里重石鑛 (능암리 중석광) ……………… 79
(九) 弘法大師碑 (홍법대사비)……………………… 80
(十) 狂佛 (광불)………………………………………… 81
(十一) 中央塔 (중앙탑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 82
(十二) 補遺 (보유) ……………………………… 83
附錄 忠州著名人物名鑑 (부록 충주 유명 인물 명감) …………… 85
忠州發展誌目次 終 (충주발전지 목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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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章 地誌
一 沿革
千載の好黨骨朽ちて、獨り苔節の芳芬を傳ふゐ南山城は、隍濠埋まりて、殿堂樓門、輪奐の舊を極めし中原京は、樓閣迹なく、城址僅かに存して、たゞ昔日の壯觀を偲ぶ形見となつた、忠州は、昔范茱城と稱し、新羅眞興王元年(欽明天皇御宇)小京府又は四川省と改め、貴戚子弟及び六部豪族を此地に移し、歌舞歡樂の地とした、其の後新羅景福王元年(聖武天皇御宇)小中原京と改稱した、中原京は實に、忠州の黃金時代にして、加耶國の樂師于勒が、琴を抱いて彈琴臺に餘生を送つたと謂ふ、浪漫的な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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語も潛んで居る、金泥、銀塗、丹青の彩、蒼然として古色を帶びたる中原館は、樓門朽ち、檐端壞れ、たゞ悲慘の形見として、春風秋雨幾度か經つる、今や改修して、公立簡易農業學校たり、是れより後、高麗太祖王三年、忠州の名を冠したるが、時恰も、新羅の逆臣、甄萱、反逆を企て、雲霞の大軍、魚鱗の銳鋏、山を掩ひ、野を塡め、四方の郡縣其の旗下に靡く、忠州は、高麗朝に歸順し、纔かに劍戟を免れ、民庶生を楽しむを得た、其の後成宗二年、忠州に道を配置し、今の仰城面龍堂里に、節度使及び昌化軍、別抄軍三百人を置きて邊域に備ふ、高麗朝文宗三十五年(後三條天皇御宇)忠州都督府と改稱し牧使を置きて、軍務、行政の任に當らしめた、時しも高麗朝、高宗四十一年、國原京と改め、文恬武熙、世は泰平を唄ふ時しもあれ、元の大軍、怒濤澎湃して東進し、鴨綠江以南の郡縣、悉く屠戮され、餓餓道に滿ちて一日數萬の墓を築いた、獨り忠州は、倉正權守勇士を募り、敵を金堂峴(今の東良面)に擊破し、防禦都監金允侯は、朴達面(今の山尺面)に伏兵を置き、敵を邀擊して、其の梟帥を斬り、旗を奪ぎ、北ぐるを追ひ、之を塵殺して、慶尙以南、戰亂の厄を免れしむるを得た、其の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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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烈王三年、忠州城を改築し、礎石に蓮花を彫刻したるより、一名忠州を藥城と稱した、降つて、李太宗元年(後小松天皇御宇)高麗朝の郡名を襲ひ、牧使を配置し、行政區劃を忠淸道に改め、特左監司を置き、世祖三年(後土御門天皇御宇)忠州鎭營と改稱し、七邑則ち永春、堤川、丹陽、淸風、槐山、延豊、陰城の軍務行政を管掌し、城內人煙稠密にして、殷賑を極めた、其の後李大王建陽二年(明治二十八年)舊韓國政府、行政改革の擧あるや、忠州に觀察府を置き、忠淸北道行政の主腦地として、都城五百年の歷史は、一段の光彩を添へ、殊に日露戰役後、內地人の來住するもの日に增加し、前途の光明を祝福するの時に當り、明治四十年代、日韓保護條約の締結さるゝや、義軍を名とせる暴徒は、忠州を中心として蜂起し、掠奪を擅にし、交通の危險名狀すべからざるものあり、我守備隊の駐屯するに及び、住民稍其の堵に安んずるを得たりと雖も、李王隆熙三年(明治四十二年)觀察府を淸州に移轉さゝるに會ひ、燈火滅して、忠州の空暗淡として聞く、槿花一朝にして、凋落の運命は刻一刻に逼つた、其の後大正二年、中央鐵道布設の計畫、坊間を騷がし、地價熱の高潮に誘はれて、來住者蟻集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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殊に、道路交通の完備と、産業の發達とは、忠州に潑刺たる新生命を授け、今や內地人在住者千以上に達し、鑛業の忠州、黃色煙草の忠州として、頭角を現はし、曩に五月十日、寺內總督閣下、駕を忠州に枉げ、親しく發展の實況を觀察さるゝに會ひ、汎く社會に其の存在を認識さるゝに至つた、前途亦多慶なりと謂はねばならぬ。
二、地 勢
忠州は忠淸北道の東北に位し、忠淸北道廳(淸州)を距る十七里二十一丁、北に鷄足山を負ひ、東は南山一帶の丘陵、突兀として聳え、南社稷山は、松翠濃かにして、其山麓を傳ふゐ、潺湲たる小流は、昔城廓の外濠なりしたものゝ如し、今や市區改正と共に、樓門、城壁、悉く其影を沒し、規矩整然たる、風光美の忠州は、商買櫛比し、中部朝鮮の大市場である、郡は東西九里、南北八里、面積五十七方里にして、平野は西方に展開し、耕地面積一萬二千町步である、漢江の本流、郡の中央を貫流し、舟楫の便あり、其の支流は、郡內各面に通じ、水害と早魃の聲を聞かず、地味豐饒にして、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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候は概して溫和である。
三、戶 口
內鮮人戶數、一萬七千三百三十八戶、人口八萬五千五百九十五人を包容せる忠州は、古來、行政機關の主腦たる、觀察道廳所在地にして、頗る股賑を極めた、有譽に、華かなりし忠州の運命も、春花地に委して、殘鶯聲漸く稀に、新綠陰深くして、杜鵑一聲、悲報は忠州の天地を震駭して、明治四十二年、道廳移轉後に於ける忠州は、寂寥たる一寒村と化した、當時、內地人は、二十餘名にして、今猶ほ現住せるものは、官界に湊信三、酒井文次郎、民間に行新井田四郎、高村甚一、原口一二、岡田市藏、鈴木政一、原田長次郎、宇野作平、福山忠太郎、赤松時圓等の諸氏にして、何れも忠州の元老たり、開拓者たり、成功者として畏敬されて居る、最近忠州の發展は、我先輩の奮鬪努力の產兒にして、今や一躍して、中鮮に頭角を現はし、內地人戶數二百六十七戶、人口九百〇九名である、數年前、交通運輸の便開けず、邊險の僻地とし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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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の視線から遠ざかつた、過去を聯想すれば、實に隔世の感がある、忠州が今日の發展を齎した道程は、勿論、地の理の然らしむる所にして、前 broadly 萬頃の沃田良畝あり、後に無限の鑛產を埋藏せる寶庫あり、殊に歐洲大戰亂勃發以來、重石鑛の無盡藏と稱せらるゝ忠州は、是等企業家注意の焦點となり、市況遽かに活氣を呈し、最近の人口增加率は、驚くべき趨勢である。
四、郡內主要市場
忠州郡內各面に常置せる市場中、主要なるものは、嚴政面牧溪及び利柳面大召院の兩市場である、牧溪は、湖西臺に倚りて漢江に望み、山紫水明の幽境である、舊韓國政府の徵稅倉庫を置さし所にして、鮮人兩班、富豪の多きことは、郡內第一である、商業上の勢力は、遠く、堤川、原州、平昌、寧越等の各郡を包容し、物質の移出入中繼地として、市況殷賑を極む、市日は、陰曆二、七の開市にして、其の取引額は、忠州市場と伯仲の間にありて、三萬圓以上に達す、內地人在住者は、二十餘名にして、忠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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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兵分隊派遣所あり、所長小竹憲兵軍曹は、溫厚篤實、內鮮人の信望厚く、消防、衛生機關の充實せることは誇るに足る、大召院は、忠州を距る三里、淸忠街道の要路にありて、過去、鳥致院、忠州間の道路開けず、人肩馬背に倚りて、往復したる時代に於ては、此の間、旅客の宿驛として、頗る繁榮を極めた、此の附近は、有名なる黃金山系に屬する金鑛所在地にして、萬頃の沃野は、漢江支流の兩岸に展開し、忠州郡の寶庫と稱せらる、內地人在住者は、二十餘名にして、忠州憲兵分隊派遣所あり、所長は、村田憲兵軍曹である、消防、衛生機關の完整せること、牧溪と遜色なく、忠北自動車組合、織居自動車部の停留所ありて、旅客の往復頻繁である。
第二章 行 政
廣袤五十七方里の忠州郡は、邑內面、利柳面、周德面、薪尼面、老隱面、仰城面、蘇臺面、可金面、金加面、嚴政面、山尺面、東良面、洗味面の十三面、百四十二里の大郡である、日韓併合以來、總督の施政方針に基き、當局の誘導提撕、能く其の效を奏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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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附同胞の啓發、農事の改良、殖林の獎勵、道路の開整等、治績大に擧り、殊に殖林成績は、全鮮に冠たるものにして、滿目荒涼の赭山、靑裳綠衣を纏ひて、新政を謳歌し、蒼生孜々として、其の業を勵み、疲窮困憊せし民力充實し、納稅成績は、忠淸北道中首位を占めて居る、從來、民族階級の壓迫と、酷吏の苛斂誅求に苦んだ良民は、行政の施設整然たるに及び、民庶樂生に安んじ、鼓腹して、天恩の無窮に感泣して居る、官廳の重なるものは、忠州守備隊、公州地方法院忠州支廳、忠州憲兵分隊、京城衛戍病院忠州分院、忠州郡廳、忠州郵便局、度支部專賣課忠州出張所、忠州憲兵分隊牧溪派遣所、同大召院派遣所、公立簡易農業學校、忠州學校組合等である。
第三章 敎 育
一、內地人敎育
朝鮮に於ける內地人敎育は、其の制度、方針に於て、大差なしと雖も、公立學校は、學校組合令に依りて、設置するを以て條件として居る、明治四十二年の創立に係る、忠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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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人會は、實に現學校組合の核子であつた、人は、京城、仁川等の都會に眩惑して、奧地の開拓を夢想だもせざりし、明治三十七八年頃から、忠州には、內地人が移住した、鐵道沿線から二十三里の僻邑、而かも、交通の危險な時代に於て、遺利拾得すべく、先見の明を樹てゝ、奮鬪努力したる居住民の、勇氣と鐵膽とには敬服の外はない、明治四十年代、暴徒討伐の爲め、忠州に大隊本部を置き、守備隊の駐屯するに及び、沈默より復活したる忠州は、來住者日に増加し、明治四十二年三月、敎育機關の設置は、焦眉の急を告げ、公立小學校の設立を、京城理事廳に請願したるも、學齡兒童、規定數に滿たざるを以て却下された、當時に於ける兒童は、私立鮮人學校に敎鞭を執れる、原口二一氏に嘔吟の薰陶を受けた、其の事後兒童數の激增に伴ひ、明治十四年二月、時の公州地方法院忠州支廳判事湊信三、忠州憲兵分隊長玉井八十彥、忠州郡廳庶務主任重富佐八、忠州郵便局長酒井文次郎、漢湖農工銀行忠州出張所長赤松時圓、民間有志、高村甚一、宇野佐平、新井田四郎、原口二一、福山忠太郎、水野彌吉、岡田市藏等諸氏の斡旋にて、學校組合を組織し、赤松時圓氏挙げられて、第一次管理者となり、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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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三月十七日、公立忠州尋常小學校を設立した、其の廣、從來の校舍にては、衛生上不適當なるのみならず、狹隘感をずるに至り、前任管理者宇野佐平氏時代に於て、總督府補助金及び公募寄附金を以て、三千餘圓の工費を投じ、現校舍を新築し、且つ時勢の要求に逼られ、大正四年高等科を併置し、同年十月十七日、今上陛下、御登極の佳晨をトし、現校舍の落成移轉式を挙げた、現在學校組合員數は、百九十五名、生徒七十二名にして、大正五年度、歲入出經常預算は、八千八百三十四圓である、現學校組合管理者は、高村甚一氏にして、校長は、木藤周三郎である、同校附屬、御大典記念圖書館は、篤志家鹽田禎介氏、其の他有志家の寄附金を以て基本金とし、兒童に適切なる、單行本及び雜誌等を備へ、放課後、兒童の讀書趣味を涵養し、知識の開發を助長して居る。
二、鮮人敎育
從來朝鮮の敎育は、書堂より鄕校、四學に進み、成均館に入りて、最高の學問を修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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るを以て順序とした、併合以前に於ける敎育は、單に、儒學を講ずるのみで、所謂、寺小屋式であつた、忠州に鮮人學校の設置されたのは、明治三十九年にして、今の公立忠州普通學校は、忠淸北道に於ける、公立學校の嚆矢である、其の校舍は、舊韓國政府時代の築造にして、內地製材を用ひ、敎育用器具、機械の完備せることは、道內第一である、其の後半度の發達に伴ひ、舊中原館を改修して、大正四年四月、公立簡易農業學校を新設した、校長は、兩校を併せ、訓導前田牧次氏にして、現在生徒數、普通學校百八十五名、農學校二十九名である、其の他、嚴政面龍山里に、公立龍山里普通學校あり、大正四年九月の認可設立にして、校長は、訓導田邊英彥氏である、現在生徒數は百三十七名にして、大正六年度に於て、校舍增築の計畫中である、猶ほは、仰城面龍堂里に、私立學校あり、各面に、四十五の書堂ありて、鮮人子弟を啓發して居る。
第四章 警 察
一、忠州憲兵分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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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韓併合以前に於て、暴徒の戡定と、秩序の恢復に全力を、傾注したる時代に於て、警察力集中の必要上、忠州には、警備機關として、警察署を配置せる外、天安憲兵分隊の一管區として、憲兵を配備せしも、併合後、仁政の普及と共に、産業振興し、民心靜謐に歸せしを以て、憲警合併の結果、分散的警備機關の配備と共に、憲兵分隊を以て、警察に代へ、忠州憲兵分隊長をして、公州地方法院忠州支廳の、檢事事務を兼攝せしむることゝなつた、由來、忠州は、暴徒の巢窟にして、狂躁にして浮動の弊あり、警戒の焦點となりしも、歷代の憲兵分隊長は、常に、新附同胞の窘撫誘導に努め、今や民心全くな一變して、總督政治を謳歌するに至つた、忠州憲兵分隊の管轄區域は、忠州郡、丹陽郡及び槐山郡の一部(舊延豐郡)にして、丹陽、延豐に分遣所を配置し、卽決處分、民事訴訟の調停及び執達吏事務取扱はしめて居る、卽決事件の最多なるものは、賭博罪、警察犯處罰規則、暴行罪(刑法第二百八條)屠獸規則、民籍法違反等にして、一般人民は、其の處斷敏速にして、且つ公正なりとて、好感を以て迎へ、正式裁判を請求するものが、ない、現任分隊長は、陸軍憲兵大尉有馬精秀氏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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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衞生及消防
名にし負ふ山紫水明の忠州は、空氣透明にして、淸嵐社稷山頂に流れ、水淸冽にして、衞生上最良の土地である、忠州市街は、市區改正、竣工を告げ、街衢整然として、溝渠、街路の淸潔なる、都會地の感あらしむ、暴に、寺內總督、巡視に際し、殖林、道路行政と併せ、衞生の施設、治績顯著なりとて、賞辭を授かりしを以て、其の一般を窺知することが出來る、現憲兵分隊長、有馬大尉は、精勵恪勤にして、夙に衞生、消防の施設に執掌し、水質の改良、傳染病及び獸疫の豫防、除穢事業等問然するなく、大正五年四月、從來の自衞組合解散し、法規により、衞生組合、消防組合を分離し、組合機關を內鮮人合同に改めた、從來の衞生機關は、內鮮人法規を異にし、內地人は法規の羈束を受け、鮮人は、全放任せらるゝの奇觀を呈したりしも、新設組合は、統一的にして、全く面目を一新した、消防機關としての忠州消防組は、明治四十四年の創設にして、大正四年度に於て、大改革を行ひ、基本金の蓄積、消防夫の救濟法等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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制定し、健實なる基礎を確立するに至つた、創立以來、勇敢にして、忠實なる消防夫が任俠の二字を標榜して、社會に貢獻したる、義的奮鬪は、嘗に賞讚の外はない。
第五章 裁 判
朝鮮の裁判は、三審制度に則り、地方法院、覆審法院、高等法院の三階級に區分し、地方法院支廳は、地方法院事務の一部を取扱ふ、公州地方法院忠州支廳は、明治四十一年八月の開廳にして、舊觀察府內房を以て廳舍とした、管轄區域は、忠州、堤州、陰城、丹陽、槐山の五郡にして、近來、鮮人民度思想の進步は、裁判事務を繁激ならしめ、廳舍新築の急を告げ、舊東門內一劃に、千九百四十一步の敷地選定し、三萬餘圓の工費を投じて、大正四年十月、落成移轉式を擧げた、法廷は、民刑事兼攝し、正面東西の二隅を以て之に充て、事務室、人民控所、被告人留置所等、規矩整然として、森嚴にして、豪壯の觀、期せずして襟を正さしむるものがある、市區改正後、市街の一轉化と共に、寺內町の颯爽たる英姿は、塗板塀の公州地方法院忠州支廳に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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りて、誇るべき權威を保たれた、忠州郡附近の各郡は、旣に土地調査終了を告げ、査定公示期間の完了を俟ちて、大正五年十二月より登記所を併置する豫定である、大正五年の民刑事々務取扱件數は、六月末現在、民事百八十件、刑事百九十四件、申請二百件、督促三百六十四件、檢事搜査事件二百九十二件である、職員は、內地人判事一名、鮮人判事一名、內地人書記一名、鮮人書記四名にして、支廳長は湊信三氏である。
第六章 守 備 隊
忠州郡は、一帶に險峰峻嶺に富み、地勢上、要害の地として、常に戰亂の中心となつた、東學黨勃興の際も、主力を忠州に置いて、反旗を飜した、當時築造したる、鳳凰臺城壁は、今猶ほ堤川郡德山面に、 load 長く聯綴し、墻壁體々として當時を偲ぶものがある、其の後愚民暴動の焦點となりて、內地人の慘禍を蒙れるもの抄시 small せず、忠州に守備隊を配置せしは、明治三十九年九月にして、一箇中隊の兵員を駐屯して、守備の任に當らしめた、東洋平和の爲め、十萬の生靈を犧牲にした、日露の戰役は其の效を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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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明治四十年代、日韓保護條約成り、七月三十日、朝鮮鎭營兵の解散さるゝや、義兵を名としたる暴徒は、京城包圍して、死戶鮮血に潔ひ、腥羶の氣、山野を蔽ふ慘劇が演せられた、忠州の地、亦奸黨叱咤咆哮して、慘風悲雨降らんとし、兇漢時を得て、掠奪を恣にし、人心恂々として、農は耕すに暇あらず、工は造るの餘閑なく、商は販ぐの途なく、不穩の狀、刻一刻に逼りしかば、朝鮮臨時駐割軍安達中佐は、一箇聯隊を引率して、暴徒討伐の命を受け、八月二十一日、忠州城に入つた、旗手の捧ぐる聯隊旗は、南山麓に飜り、威風堂々、劍戟燦々として天に輝き、城內の內鮮人は、纔かに蘇生の思ひをなした、其の後數日に亙る戰鬪は、猛烈であつた、硝煙濛々として、薄く曇つた日光は、修羅の卷を照らした、我勇敢なる守備兵は、銃を執り氷刀を提げて、彈丸飛雨の間 me 馳騁し、社稷山頭に凱歌を擧げた、斯くて賊草地を掃ふて拔靡四散し、鎭定するを得たるも、殘黨猶ほ各所に出沒し、良民を苦しめ、交通運輸の危險名狀すべからざるものあり、忠州大隊本部を常置して、萬一に備へ、全區平定するに至つた、今や、文明の餘光は、中原の舊都を照らし、商業地として、鑛業地として、霸的中鮮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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唱へ、今日の繁榮を羸ち得たるは、歷代守備隊の恩惠に俟たねばならぬ、其の後忠州守備隊は、朝鮮臨時派遣隊第一聯隊に隸屬せしが、軍政擴張の實現と共に、大正五年四月一日、第十九師團第七十九聯隊に移管した、現在中隊兵員は山縣中隊長以下山口第四十二聯隊の派遣隊にして、第三大隊第十一中隊に編入されて居る、大隊長は、陸軍步兵少佐、大海友次郎氏である。
第七章 通 信
社會の進步、人手の發達、商工業の振興に伴ひ、通信機關の利用さるゝは、當然の理にして、明治三十八年、京城郵便局忠州出張所の、開設當時を聯想すれば、隔世感がある、京城郵便局の羈絆を脫して、單獨なる忠州郵便局と改稱されたのは、明治三十九年七月一日にして、當時に於ては、鮮人は通信機關利用の法を知らず、內地人在住者、亦少數にして、單に守備隊の軍事郵便を、取扱ふに過ぎざりしが、明治四十二年頃より、鮮人一般思想の發達と共に、稍通信機關の正確なるを知るに至り、殊に、電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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の如きは、朝は百里の外に生を慶し、夕に千里の遠きに死を弔するの、快速なる文明の利器會得するや、翁然として、新附民の頭腦を刺激し、明治四十三年以來、年々歲々等比級數の增加率を示して居る、是れ實に忠州發達の反映にして、大正四年度に於ける通常郵便は、引受二十萬餘通、配達二十一萬餘通、小包郵便、引受三千餘通、配達七千九百餘通、爲替、受入十萬餘圓、拂渡八萬六千餘圓、國庫金、受入八萬餘圓、拂渡六萬八千餘圓、電報引受六千七百餘通、配達六千二百餘通、電話呼出 一千三百餘通、通話四千七十餘通等である、大正四年十月、今上陛下御登極に際し、忠州郵便局長酒井文次郎氏の幹旋にて成立せし、御大典記念貯金會は、會員七百餘名、一箇月郵便貯金として、受入金五百餘圓を計上して居る。
第八章 金 融
忠州に於ける、金融機關の重なるものは、漢湖農工銀行忠州支店、忠州地方金融組合等である、一時忠州金融界の濫觴は、一般經濟に惡影響を及ぼし、前途を悲觀する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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のありしも、現在漢湖農工銀行支店長、河野州心氏著任以來、大改革を斷行し、漸次金融經濟順潮に復し、近來、流通資金比較的潤澤にして、金利は年次低落の傾向を示して居る、漢湖農工銀行忠州支店の業務は、確實なる農工資金の擔保貸付、爲替手形其他商業手形の割引、諸會社銀行又は商人の手形代金の取立、爲替及び荷爲替、諸預り金、金銀貨貴金属及び諸證券の保護預り、貨幣の交換、公共團體に對する無擔保貸付等で、特に忠州特產、黃色煙草耕作乾燥者に對し、低利の資金を融通し、産業の啓發に貢獻する所尠からず、大正五年六月現在、營業狀況は、定期預金八千餘圓、當座預金一萬九千餘圓、小額預金四萬二千餘圓、其他の預金一千餘圓、農工資金貸付六萬一千餘圓、商業資金貸付八萬一千餘圓である、金融組合は、明治四十二年五月十四日の設立にして、地方小農民の金融を緩和し、農業の發達圖るにありて、積年の稅政に困憊せし細民は、漸く生計の餘裕を得、孜々として、躬行力營、各其の業に勵み、開墾、排水、灌漑及び土地土質改育、殖林事業等、農業の發展と、産業の仲暢とは、致富成業の基礎を固め、勤儉貯蓄の美風を養成するに至つた、現組合理事奧小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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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氏, 組合設立以來の主管者にして、忠州金融界に貢獻する所尠からず、大正五年六月の業務成績は、資金合計一萬九千九百六十餘圓、諸預り金一千四百九十餘圓、諸貸付金一萬五千四百十餘圓である。
第九章 農 業
郡內沃野饒田に富み、農業に適す、氣候は概して溫和にして、五穀豐熟し、寒氣稍强しと雖も、麥類の如き、冬期作物枯損の憂なく、生育極めて良好にして、殊に、四季空氣の乾燥せる爲め、收穫物の品質佳良なり、水稻の如きは、灌漑施設、不備の點點からずと雖も、郡內一部を除くの外、早害、水害を被ることなく、農民は、道の施政方針に基き、郡當局の指導により、新知識を得、農事の發達著しく、始政五年記念共進會に於て、授賞されたるもの尠からざるを以て、其の一斑を窺知すべし、殊に、近來、農作物價額の騰貴は、未墾地開拓の美風을 釀成し、農民一般に、優柔懶惰の舊態を脫したるの觀あり、內地人農事改良組合は、農事の改良、及び鮮人農民を誘導啓發するを以て目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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とし、篤農家鹽田貞介氏、組合長として盡萃し、範を新附同胞に示して居る、丹月驛、龍院驛には、國有地小作人組合ありて、郡の指導に従ひ、駿々乎として、改良進步の實績を擧げつつあり、特に、本郡に於ては、各面に一町步の、模範探種田を設置し、優良水稻の普及に努め、且つ技術に堪能なる農業敎師を、各面に配置し、專ら、斯業の進步發達に執掌して居る、郡の耕作反別は、苗六千五百九十町步、田五千四百八十一町步、現在農業者、鮮人七萬八千四百九十七名、內地人百三十九名である、本郡の主要農産物は、米六千二百六十八町、七萬三千八百八十七石、大麥四千〇二十町、四萬八千七百九十石、大豆千六百四十八町、一萬八千九百五十五石等である、本郡には、副業獎勵會ありて、餘閑を利用し、繩、叺の製造に従事し、一箇年の産額一萬圓を下らず、養蠶は、忠淸北道中第一位にありて、蠶業組合の設けあり、大正五年度、春蠶掃立數、千三百枚、成繭三百石、價額一萬三千餘圓である、其他、家畜家禽は、飼養法不完全なるに係らず、其の生産巨額にして、今や畜産組合設立準備中である、殖林成績は、全鮮中の巨擘にして、郡苗圃の外邑內面、一町三反、其他の十二面、各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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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步の殖林苗圃ありて、赤松、櫟、ニセアカシヤ、栗、ポプラ等を養育して居る。
忠州郡內地人農事改良組合規約
第一條 本組合は組合員協力一致して農事の改良を計り鮮人農業者に模範を示し其の普及を計るを以て目的とす 第二條 本組合は忠州郡內地人農事改良組合と稱す 第三條 本組合は忠州郡に於て農業に従事するものを以て組織す 第四條 本組合に組合長一名評議員四名を置き其の任期は各二年とす 第五條 組合長及び評議員は組合員の互選とし組合長は組合諸般の事務を總理し評議員は組合長の協議に與るものとす 第六條 本組合員の耕作する重要作物は道の方針に依り左の種類を栽培するものとす 米、錦、多摩錦 麥、ゴールデンメロン、マンムート 小麥、フルツ、マンチェンスカンバ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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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豆、 堤川大豆 甘藷、 元氣 馬鈴薯、 長崎赤 第七條 本組合員は左の件を實行するものとす 米 一、採種田を設け拔穗種子を下種すること 二、鹽水選をなすこと 三、短冊苗代をなすこと 四、害虫驅除をなすこと 五、插秧は正條植をなすこと 六、除草勵行殊に稗拔をなすこと 七、稻扱器及筵の使用をなすこと 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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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採種田を設け病害なき地より得たる拔穗種子を下種すること 二、鹽水選をなすこと 三、黑穗拔をなすこと 其他 一、粒撰大豆をなすこと 二、乾田として裏作をなさざりし土地は二毛作をなすこと 三、刈敷大豆を栽培すること 四、自家耕作に要する堆肥の製造をなすに足るべき簡易なる堆肥舍を設くること 五、肥料溜を設備すること 六、秋耕を勵行すること 七、山草の刈取を爲し肥料をなすこと 八、家屋の附近及未墾地等を利用し桑樹の栽培に勉むること 九、畜牛は道の豫託種牡牛に交配せしむるこ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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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殖林を爲すこと 第八條 本組合員は勞働を重んじ儉約を貴び將來斷じて虛儀虛禮を廢すること 第九條 第六條第七條第八條の目的を遂行せんが爲め春秋二季農閑を利用して總會を開き其筋に技術官の來會を請ひ農事の發展を計るべきものとす 第十條 本組合の規約は郡守の認可を受くるに非ざれば效力を有せざるものとす但し變更せんとするとき亦同じ 第十一條 本組合を變更する場合は組合員三分の二以上同意を要するものとす
忠州郡蠶業組合規約
第一章 總 則
第一條 本組合は忠州郡蠶業組合と稱し事務所を忠州郡廳內に置く 第二條 本組合は蠶業の改良發達を計り組合員の福利を增進するを以て目的とす 第三條 本組合は忠州郡內に於ける養蠶家を以て組織す
第二章 組合員及役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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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條 本組合員は組合員名簿に署名捺印するものとす 第五條 本組合員は組合に要する費用を負擔するものとす 第六條 組合員中不正の行爲あり組合員の體面を汚すものある時は評議員會の決議に依り除名す 第七條 本組合に左の職員を置く 一、組合長 一名 一、副組合長 一名 一、評議員 十五名 一、幹事 二名 一、書記 一名 第八條 組合長は本組合を代表し組合に關する一切の事務を總轄するの外總會及評議員會の議長と爲る 副組合長は組合長事故あるとき之を代理し組合に關する事務を補佐す 評議員は組合に關する重要なる事項を評議す 幹事は本組合の事業を監督す 書記は組合長以下の指揮を受け庶務及會計事務を處理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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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九條 組合長副組合長評議員は郡守に委託し之を推薦す 幹事は忠州郡庶務係主任及農業技手に之を囑託す 書記は忠州郡庶務係勸業事務に従事する郡書記に之を囑託す 第十條 役員の任期は滿貳箇年とす但し再任することを得 但し任期前補缺の役員に於ては前任者の任期に依る
第三章 會 議
第十一條 會議は總會及評議員會の二種とす 第十二條 總會は組合員を以て組織し每年春秋二回に開會し事業の經過及組合狀況の報告並に養蠶に關する講話をなす 第十三條 評議員會は評議員を以て組織し評議權は平等として其の決議は多數決を以て之を定め可否同數の場合は議長の決する所に依る 但し評議員會は組合長の必要と認めたるときの外幹事及評議員三名以上より要求ありたる場合に組合長之を召集するものと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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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章 事 業
第十四條 本組合は第一條の目的を遂行せんが爲め左の事業を行ふ 一、養蠶指導者聘用のこと 二、蠶種、桑苗及其他養蠶に關する器具共同購入 及 殺蛹乾燥所設置 及 之に關する事項 三、成繭は郡の指示に基き共同販賣を行ふこと 四、成繭共同販賣より得たる代金の貯金獎勵 五、蠶業に關する印刷物の配付 六、其他評議員會に於て必要と認めたる事項 第十五條 前條費用は其の年內の共同販賣代金より控除することを得
第五章 會 計
第十六條 本組合事業年度は一月一日より十二月三十一日迄とす 第十七條 本組合の經費は組合事業收入及雜收入を以て之を支辦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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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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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지지(地誌)
1. 연혁
천년의 우호적인 무리는 뼈가 썩었으되, 홀로 이끼 낀 마디의 향기를 전하는 남산성(南山城). 도랑과 못(隍濠)은 메워지고 전당과 루문은 화려함의 옛 모습을 극치로 나타내었던 중원경(中原京)은, 누각도 흔적이 없고 성터만 근근이 남아 옛날의 장관을 추억하는 형체가 되었다.
충주는 옛날에 완장성(薍長城, 원문에는 다르게 써있으나 완장성이다.)이라 칭하였고, 신라 진흥왕 원년(흠명천황 어우)에 소경부(小京府) 또는 사천성(四川省)으로 고치고 귀척(貴戚) 자제 및 6부의 호족을 이곳으로 옮겨 가무와 환락의 땅으로 삼았다. 그 후 신라 경덕왕 원년(성무천황 어우)에 중원경(中原京)으로 개칭하였다. 중원경은 실로 충주의 황금시대로서, 가야국의 악사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안고 탄금대(彈琴臺)에서 여생을 보내었다고 하는 낭만적인 이야기(物語)도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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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니(金泥), 은칠, 단청의 빛깔이 창연하여 고색을 띤 중원관(中原館)은 누문이 썩고 처마 끝이 부서져 단지 비참한 형체로서 봄바람 가을비에 몇 차례나 세월을 경과하였으나, 이제 개축하여 공립 간이농업학교가 되었다.
이로부터 후, 고려 태조 왕 3년에 '충주'라는 이름을 얹게 되었으나, 때마침 신라의 역신 견훤(甄萱)이 반역을企圖(기도)하여 구름과 안개 같은 대군, 물고기 비늘 같은 날카로운 칼날로 산을 가리고 들을 채우매 사방의 군현이 그 깃발 아래 복종하였다. 충주는 고려조에 귀순하여 겨우 칼날의 화를 면하고 민서(民庶)가 삶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성종 2년에 충주에 도(道)를 배치하고, 지금의 앙성면 용당리에 절도사 및 창화군, 별초군 300명을 두어 변방을 대비하였다. 고려조 문종 35년(후삼조천황 어우) 충주도독부로 개칭하고 목사(牧使)를 두어 군무와 행정의 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때마침 고려조 고종 41년에 국원경(國原京)으로 고쳤는데, 문관은 태평하고 무관은 희희낙락하며 세상은 태평을 노래하던 바로 그때, 원(元)나라의 대군이 성난 파도처럼 동진하여 압록강 이남의 군현이 모두 도륙되고 기근과 주림이 길에 가득하여 하루에 수만 개의 무덤을 쌓았다.
오직 충주만은 창정 최 수(崔 守)가 용사를 모아 적을 김당현(金堂峴, 지금의 동량면)에서 격파하였고, 방어도감 김윤후(金允侯)는 박달면(朴達面, 지금의 산척면)에 복병을 두고 적을 맞아 격퇴하여 그 요새의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바수어 죽임으로써, 경상도 이남이 전란의 액운을 면하게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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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충렬왕 3년에 충주성을 개축하고 초석에 연꽃을 조각한 데서부터, 일명 충주를 예성(蘂城)이라 칭하였다. 내려와 이씨 조선 태종 원년(후소송천황 어우)에 고려조의 군명을 답습하여 목사를 배치하고 행정구역을 충청도로 고쳐 특히 좌감사(左監司)를 두었으며, 세조 3년(후토어문천황 어우) 충주진영(忠州鎭營)이라 개칭하여 7개 읍 즉 영춘, 제천, 단양, 청풍, 괴산, 연풍, 음성의 군무와 행정을 관장하니 성 안의 인가와 연기가 조밀하여 번화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그 후 이대왕(李大王) 건양 2년(명치 28년, 1895년) 구 한국정부의 행정개혁이 감행되자 충주에 관찰부(觀察府)를 두고 충청북도 행정의 주뇌지(主腦地)로서 도성 500년의 역사에 한단(一段)의 광채를 더하였다.
특히 일러전쟁(러일전쟁) 후 내지인(일본인)의 내주(來住)하는 자가 날로 증가하여 전도의 광명(光明)을 축복하는 때를 당하여, 명치 40년대 일한보호조약의 체결이 이루어지자 의군(義軍)을 이름한 폭도(의병)는 충주를 중심으로 봉기하여 약탈(掠奪)을 자행하고 교통의 위험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우리 수비대가 주둔함에 미쳐 주민이 약간 그 터전에 안주할 수 있게 되었으나, 이왕 융희 3년(명치 42년, 1909년) 관찰부를 청주(淸州)로 이전하게 됨에 마주쳐 등불이 꺼지고 충주의 하늘은 암담하다고 들린다. 근화(槿花, 무궁화)가 하루 아침에 시드는 운명은 격각(刻一刻)으로 닥쳐왔다.
그 후 대정 2년(1913년) 중앙철도 부설 계획이 시골 마을을 소란하게 하고 지가(地價) 열풍의 고조에 끌리어 내주자가 개미처럼 모여들었다. 특히 도로 교통의 완비와 산업의 발달은 충주에 발랄한 새 생명을 부여하여, 이제 내지인 재주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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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명 이상에 달하고 '광업의 충주', '황색 담배의 충주'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지난 5월 10일 데라우치(寺內) 총독 각하께서 가마를 충주로 돌리어 친히 발전의 실황을 관찰하심에 마주쳐, 널리 사회에 그 존재를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전도 또한 다경(多慶)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 지세(地勢)
충주는 충청북도의 동북에 위치하고, 충청북도청(청주)을 거리가 17리 21정이다. 북으로 계족산(鷄足山)을 등지고 동쪽은 남산 일대의 언덕이 우뚝하게 솟아 있으며, 남쪽 사직산(社稷山)은 솔빛이 짙 푸르고 그 산기슭을 흐르는 맑고 쫄쫄 흐르는 작은 개울은 옛날 성곽의 외호(外濠)였던 것 같다.
이제 시가지 개정과 함께 누문, 성벽이 모두 그 자취를 숨기고 규격이 정연한 풍광이 아름다운 충주는 상점이 빽빽이 들어서 중부 조선의 대시장이다. 군은 동서 9리, 남북 8리, 면적 57방리로서 평야는 서쪽에 펼쳐져 있고 경지 면적은 1만 2천 정보이다.
한강의 본류가 군의 중앙을 관류하여 배를 띄우는 편의가 있고, 그 지류는 군내 각 면에 통하여 수해와 가뭄의 소리를 듣지 않으며 토지가 풍요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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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는 대체로 온화하다.
3. 호구(戶口)
내선인(일본인 및 조선인) 호수 1만 7천 3백 3십 8호, 인구 8만 5천 5백 9십 5명을 포용한 충주는 예로부터 행정기관의 주뇌인 관찰도청 소재지로서 자못 번화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명예롭고 화려했던 충주의 운명도 봄꽃이 땅에 떨어지고 남아있는 앵무새 소리 점차 드물어지듯, 신록의 그늘 깊어 가며 소쩍새 한 소리에 비보는 충주의 천지를 진동케 하여, 명치 42년 도청 이전 후의 충주는 적료(寂寥)한 일 한촌으로 변하였다.
당시 내지인은 20여 명으로서, 지금도 현주하는 자는 관계(官界)에 미나토 신조(湊信三), 사카이 분지로(酒井文次郎), 민간에 신이타 시로(新井田四郎), 다카무라 진이치(高村甚一), 하라구치 이치지(原口一二), 오카다 이치조(岡田市藏), 수즈키 마사이치(鈴木政一), 하라다 초지로(原田長次郎), 우노 사쿠헤이(宇野作平), 후쿠야마 추타로(福山忠太郎), 아카마츠 지엔(赤松時圓) 등의 여러 씨(氏)로서 모두 충주의 원로이자 개척자, 성공자로서 외경받고 있다.
최근 충주의 발전은 우리 선배들의 분투 노력의 산물로서 이제 일약 중선(中鮮)에 두각을 나타내어 내지인 호수 267호, 인구 909명이다. 수년 전 교통 운송의 편의가 열리지 않아 변방의 험한 벽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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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시선에서 멀어졌던 과거를 연상하면 실로 격세지감이 있다.
충주가 오늘날의 발전을 가져온 도정은 물론 지리적 이점이 그러하게 한 바로서, 앞에 만 경의 비옥한 논밭이 있고 뒤에 무한한 광산물을 매장한 보물창고가 있다. 특히 유럽 대전란(제1차 세계대전) 봉발 이래 중석(텅스텐) 광산의 무진장이라 칭해지는 충주는 이들 기업가 주의의 초점이 되어 시황이 급격히 활기를 띠고 최근 인구 증가율은 놀라운 추세이다.
4. 군내 주요 시장
충주군 내 각 면에 상설된 시장 중 주요한 것은 엄정면 목계(嚴政面 牧溪) 및 이류면 대소원(利柳面 大召院) 두 시장이다.
목계는 호서대에 의지하여 한강을 바라보고 산자수명한 그윽한 경치이다. 구 한국정부의 조세 창고를 두었던 곳으로서 조선인 양반, 부호가 많은 것은 군내 제1이다. 상업상의 세력은 멀리 제천, 원주, 평창, 영월 등의 각 군을 포용하여 물자의 이출입 중계지로서 시황이 대단히 번화하다. 장날은 음력 2일, 7일의 개시(開市)로서 그 거래액은 충주 시장과 백중지간에 있어 3만 원 이상에 달한다. 내지인 재주자는 20여 명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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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헌병분대 파견소가 있다. 소장 코타케(小竹) 헌병군조는 온후하고 덕실하여 내선인의 신망이 두텁고 소방, 위생 기관이 충실함은 자랑할 만하다.
대소원은 충주를 거리가 3리, 청주-충주 가도의 요로에 있어 과거 조치원과 충주 간의 도로가 열리지 않아 사람의 어깨나 말의 등짐에 의지하여 왕복하던 시대에 있어서는 이 사이에 여객의 숙역(宿驛)으로서 자못 번영의 극치를 이루었다. 이 근처는 유명한 황금산계에 속하는 금광 소재지로서 만 경의 비옥한 들판은 한강 지류의 양안에 펼쳐져 충주군의 보물창고라 칭해진다. 내지인 재주자는 20여 명으로서 충주 헌병분대 파견소가 있으며 소장은 무라타(村田) 헌병군조이다. 소방, 위생 기관이 완비됨은 목계와 손색이 없고 충북자동차조합 찌고(織居) 자동차부의 정류소가 있어 여객의 왕복이 빈번하다.
제2장 행정
광대함이 57방리인 충주군은 읍내면, 이류면, 주덕면, 신니면, 노은면, 앙성면, 소태면, 가금면, 금가면, 엄정면, 산척면, 동량면, 세미면의 13개 면, 142개 리의 큰 군이다.
일한병합 이래 총독의 시정 방침에 의거하여 당국의 유도와 계도가 능히 그 효력을 거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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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복속된 동포(조선인)의 계발, 농사의 개량, 식림의 장려, 도로의 개설 정비 등 치적이 크게 들려왔다.
특히 식림 성적은 전 조선에서 으뜸가는 것으로서 눈에 가득한 황량한 붉은 산이 푸른 옷을 두르고 신정(新政)을 노래하며 백성들이 부지런히 그 업에 힘써 피폐하고 곤폐했던 민력이 충실해지고 납세 성적은 충청북도 중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종래 민족 계급의 압박과 혹리(酷吏)의 가혹한 수탈에 괴로워하던 양민은 행정 시설이 정연해짐에 미쳐 민서가 삶을 즐기고 배를 두드리며(鼓腹) 천은(天恩)의 무궁함에 감격하고 있다.
관청의 주요한 것은 충주수비대, 공주지방법원 충주지청, 충주헌병분대, 경성위생병원 충주분원, 충주군청, 충주우체국, 탁지부 전매과 충주출장소, 충주헌병분대 목계파견소, 동 대소원파견소, 공립간이농업학교, 충주학교조합 등이다.
제3장 교육
1. 내지인(일본인) 교육
조선에 있어서의 내지인 교육은 그 제도와 방침에 있어 큰 차이가 없으나 공립학교는 학교조합령에 의거하여 설치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명치 42년(1909년) 창립에 속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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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일본인회'는 실로 현 학교조합의 핵이었다.
사람들은 경성, 인천 등의 도회지에 눈이 부시어 오지의 개척을 꿈조차 꾸지 않던 명치 37~38년(1904~1905년)경부터 충주에는 내지인이 이주하였다. 철도 연선으로부터 23리의僻邑(벽읍), 게다가 교통이 위험한 시대에 있어서 유리를拾得(습득)하고자 선견지명을 세워 분투 노력한 거주민의 용기와 철담에는 경복 외에는 없다.
명치 40년대 폭도 토벌을 위하여 충주에 대대 본부를 두고 수비대가 주둔함에 미쳐 침묵으로부터 부활한 충주는 내주자가 날로 증가하여 명치 42년 3월 교육기관의 설치는 초미의 급을 고하여 공립소학교의 설립을 경성이사장청에 청원하였으나 학령 아동 규정 수에 미달하여 기각되었다.
당시에 있어서 아동은 사립 조선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하라구치 이치지(原口二一) 씨에게 훈도를 받았다. 그 후 아동 수의 격증에 따라 명치 44년 2월, 당시 공주지방법원 충주지청 판사 미나토 신조, 충주헌병분대장 타마이 야소히코, 충주군청 서무주임 시게토미 사하치, 충주우체국장 사카이 분지로, 한호농공은행 충주출장소장 아카마츠 지엔 및 민간 유지 다카무라 진이치, 우노 사쿠헤이, 신이타 시로, 하라구치 이치지, 후쿠야마 추타로, 미즈노 야키치, 오카다 이치조 등 여러 씨의 알선으로 학교조합을 조직하고 아카마츠 지엔 씨가 추대되어 제1차 관리자가 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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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 3월 17일 공립충주심상소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종래 교사는 위생상 부적당할 뿐만 아니라 협소함을 느끼기에 이르러, 전임 관리자 우노 사쿠헤이 씨 시대에 총독부 보조금 및 공모 기부금으로 3천 여 원의 공사비를 투입하여 현 교사를 신축하고, 또 시세의 요구에 따라 대정 4년(1915년) 고등과를 병설하였으며, 동년 10월 17일 즉위 대전을 기하여 현 교사의 낙성 이전식을 거행하였다.
현재 학교조합원 수는 195명, 학생 72명으로서 대정 5년도 세입출 경상예산은 8천 8백 3십 4원이다. 현 학교조합 관리자는 다카무라 진이치 씨이며 교장은 키토 슈자부로이다. 동교 부속 '어대전기념도서관'은 뜻있는 가 염전(鹽田) 씨 및 기타 유지가 기부한 기금을 기본금으로 하여 아동에게 적절한 단행본 및 잡지 등을 갖추어 방과 후 아동의 독서 취미를 함양하고 지식의 개발을 도모하고 있다.
2. 조선인 교육
종래 조선의 교육은 서당으로부터 향교, 사학에 진행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최고의 학문을 수습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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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를 삼았다. 병합 이전에 있어서의 교육은 단지 유학을 강의할 뿐으로 이른바 서당식(寺小屋式)이었다.
충주에 조선인 학교가 설치된 것은 명치 39년(1906년)으로서, 지금의 공립충주보통학교는 충청북도에 있어서 공립학교의 효시이다. 그 교사는 구 한국정부 시대의 축조로서 내지(일본) 산 재목을 사용하고 교육용 기구, 기계의 완비됨은 도내 제1이다.
그 후 발달에 따라 구 중원관을 개축하여 대정 4년 4월 공립간이농업학교를 신설하였다. 교장은 두 학교를 겸하여 훈도 마에다 마키지 씨이며 현재 학생 수는 보통학교 185명, 농학교 29명이다.
기타 엄정면 용산리에 공립용산리보통학교가 있으니 대정 4년 9월의 인가 설립으로서 교장은 훈도 타나베 히데히코 씨이다. 현재 학생 수는 137명으로서 대정 6년도에 있어 교사 증축을 계획 중이다. 아직 앙성면 용당리에 사립학교가 있고 각 면에 45개의 서당이 있어 조선인 자제를 계발하고 있다.
제4장 경찰
1. 충주헌병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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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병합 이전에 있어 폭도의 진정과 질서의 회복에 전력을 경주하던 시대에 있어 경찰력 집중의 필요상 충주에는 경비기관으로 경찰서를 배치한 외에 천안헌병분대의 일 관구로서 헌병을 배비하였으나, 병합 후 인정(仁政)의普及과 함께 산업이 진흥하고 민심이 정숙에 귀하였으므로 헌경(헌병과 경찰) 합병의 결과 분산적 경비기관의 배비와 함께 헌병분대를 가지고 경찰을 대신하여 충주헌병분대장으로 하여금 공주지방법원 충주지청의 검사 사무를 겸섭(兼攝)하게 하였다.
유래로 충주는 폭도의 소굴로서 광조(狂躁)하고 부동하는 폐단이 있어 경계의 초점이 되었으나 역대 헌병분대장은 항상 새롭게 복속된 동포의 휼무 유도에 힘써 이제 민심이 완전히 일변하여 총독 정치를 노래하기에 이르렀다.
충주헌병분대의 관할 구역은 충주군, 단양군 및 괴산군의 일부(구 연풍군)로서 단양, 연풍에 분견소를 배치하여 즉결처분, 민사소송의 조정 및 집달리 사무를 취급하게 하고 있다.
즉결 사건 중 가장 많은 것은 도박죄, 경찰범처벌규칙, 폭행죄(형법 제208조), 도수(도살)규칙, 민적법 위반 등로서 일반 인민은 그 처단이 민속하고 또 공정하다 하여 호감을 가지고 맞아 정식 재판을 청구하는 자가 없다. 현임 분대장은 육군 헌병 대위 아리마 세이슈(有馬精秀) 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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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생 및 소방
이름에 걸맞게 산자수명한 충주는 공기가 투명하여 청람(淸嵐)이 사직산 정상에 흐르고 물이 청렬하여 위생상 최량의 토지이다. 충주 시가지는 시가지 개정이 준공을 고하고 가구가 정연하여 구거(하수도), 가로의 청결함이 도회지의 감을 주게 한다.
일찍이 데라우치 총독이 순시했을 때 식림, 도로 행정과 함께 위생 시설 및 치적이 현저하다 하여 치사를 받았으므로 그 일반을 들어 알 수 있다.
현 헌병분대장 아리마 대위는 정려하여 일찍이 위생, 소방 시설을 관장하여 수질의 개량, 전염병 및 수역(가축 전염병)의 예방, 오물 제거 사업 등에 결점이 없고, 대정 5년 4월 종래의 자위조합을 해산하고 법규에 따라 위생조합, 소방조합을 분리하여 조합 기관을 내선인 합동으로 고쳤다.
종래의 위생 기관은 내지인과 조선인의 법규를 달리하여 내지인은 법규의 구속을 받고 조선인은 전적으로 방임되는 기관을呈하였으나 신설 조합은 통일적이어서 완전히 면목을 일신하였다.
소방 기관으로서의 충주소방조는 명치 44년 창설되어 대정 4년도에 있어 대개혁을 행하여 기본금의 축적, 소방수의 구제법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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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하고 건실한 기초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창립 이래 용맹하고 충실한 소방수가 임협(任俠) 두 글자를 표방하여 사회에 공헌한 의로운 분투는 항상 상찬 외에는 없다.
제5장 재판
조선의 재판은 3심 제도에 따라 지방법원, 복심법원, 고등법원의 3계급으로 구분하고 지방법원 지청은 지방법원 사무의 일부를 취급한다.
공주지방법원 충주지청은 명치 41년(1908년) 8월의 개청으로서 구 관찰부 내방을 청사로 삼았다. 관할 구역은 충주, 제천, 음성, 단양, 괴산의 5개 군로서 근래 조선인 민도 사상의 진보는 재판 사무를 번격하게 하여 청사 신축의 급을 고하여 구 동문 내 일획에 1,941평의 부지를 선정하고 3만 여 원의 공사비를 투입하여 대정 4년 10월 낙성 이전식을 거행하였다.
법정은 민·형사를 겸섭하고 정면 동서의 두 모퉁이를 이에 충당하며 사무실, 인민 휴게소, 피고인 유치장 등 규격이 정연하여 엄숙하고 호장한 관형이 기필코 옷깃을 바르게 하게 하는 것이 있다.
시가지 개정 후 시가지의 일전화와 함께 테라우치 정(寺內町)의 싹싹한 영자(英姿)는 칠을 한 담장의 공주지방법원 충주지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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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 자랑할 만한 권위를 보존받았다.
충주군 부근의 각 군은 이미 토지조사가 완료를 고하고 사정 공시 기간의 완료를 기다려 대정 5년 12월부터 등기소를 병설할 예정이다. 대정 5년의 민형사 사무 취급 건수는 6월 말 현재 민사 180건, 형사 194건, 신청 200건, 독촉 364건, 검사 수사 사건 292건이다. 직원은 내지인 판사 1명, 조선인 판사 1명, 내지인 서기 1명, 조선인 서기 4명으로서 지청장은 미나토 신조 씨이다.
제6장 수비대
충주군은 일대에 험준한 봉우리와 산에 풍부하여 지세상 요해지로서 항상 전란의 중심이 되었다. 동학당 봉기 때도 주력을 충주에 두고 반기를翻하였다. 당시 축조한 봉황대 성벽은 지금도 제천군 덕산면에 길게 연달아 담벽이 체체하여 당시를 추억하게 하는 것이 있다.
그 후 우민 폭동의 초점이 되어 내지인의 참화를 입은 자가 적지 않아 충주에 수비대를 배치한 것은 명치 39년(1906년) 9월으로서 1개 중대의 병원을 주둔하여 수비의 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동양 평화를 위하여 10만의 생령을 희생한 일러전쟁은 그 효력을 거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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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 40년대에 일한보호조약이 성립되고 7월 30일 조선 진영 병사가 해산되자, 의병을 칭한 폭도는 경성을 포위하여 죽음의 피비린내와 선혈이 흘러넘치고, 비린내 나는 기운이 산야를 가리는 참극이 연출되었다. 충주 땅 역시 간사한 무리가 호통치고 울부짖어 참혹한 바람과 슬픈 비가 내리려 하고,凶漢(흉한)들이 때를 얻어 약탈을 자행하니 인심은 흉흉하여 농부는 농사를 지을 겨를이 없고, 공인은 물건을 만들 여가가 없으며, 상인은 장사할 길이 없어 불온한 상황이 격화되었다. 이에 조선임시주찰군 안다치(安達) 중좌는 1개 연대를 이끌고 폭도 토벌의 명을 받아 8월 21일 충주성에 진입하였다. 깃수가 든 연대기는 남산 기슭에 휘날리고 위풍당당하며 검극이 찬란하게 하늘에 빛나니, 성 안의 내선인(內鮮人: 일본인과 조선인)은 겨우 살길을 찾은 듯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며칠 동안 계속된 전투는 맹렬하였다. 총연이 자욱하여 옅게 어두워진 햇빛은 수라장의 광경을 비추었다. 우리 용맹한 수비병은 총을 잡고 빙도를 차며 탄환이 비처럼 쏟아지는 사이를 내달려 사직산 정상에서 가가를 불렀다. 이리하여 적을 소탕하여 사방으로 도망쳐 산화되게 함으로써 진정시킬 수 있었으나, 잔당은 여전히 각처에 출몰하여 양민을 괴롭히고 교통 운송의 위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충주대대 본부를 상시 설치하여 만일에 대비함으로써 전 구역을 평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문명의 여광은 중원의 옛 도읍을 비추고, 상업지로서, 광업지로서 패적(霸的) 중선(中鮮)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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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하며, 오늘날의 번영을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은 역대 수비대의 은혜에 힘입은 바 크다. 그 후 충주 수비대는 조선임시파견대 제1연대에 속하였으나, 군정 확장 실현과 함께 대정 5년(1916년) 4월 1일 제19사단 제79연대로 이관되었다. 현재 중대 병력은 야마가타(山縣) 중대장 이하 야마구치(山口) 제42연대의 파견대로서 제3대대 제11중대에 편입되어 있다. 대대장은 육군 보병 소좌 야마가와 토무지로(大海友次郎) 씨이다.
제7장 통 신
사회 진보, 인적 발달, 상공업 진흥에 따라 통신 기관이 이용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서, 명치 38년(1905년) 경성우체국 충주출장소 개설 당시를 연상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경성우체국의 속박에서 벗어나 단독 충주우체국으로 개칭된 것은 명치 39년 7월 1일로, 당시에는 조선인이 통신 기관 이용법을 몰랐고 내지인(일본인) 거주자 역시 소수여서 단지 수비대의 군사 우편을 취급하는 데 불과했으나, 명치 42년경부터 조선인 일반 사상의 발달과 함께 점차 통신 기관의 정확성을 알게 되었다. 특히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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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같은 것은 아침에 백 리 밖에서 탄생을 축하하고 저녁에 천 리 먼 곳에서 죽음을 조문하는 경이로운 문명의 이로움을 체득하자, 어엿하게 신부민(新附民: 합병된 조선인)의 두뇌를 자극하여 명치 43년 이래 매년 등비급수적인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이는 실로 충주 발달의 반영으로서, 대정 4년(1915년)도의 보통 우편은 인수 20만 여 통, 배달 21만 여 통, 소포 우편은 인수 3천 여 통, 배달 7천 9백 여 통, 환(爲替) 수입 10만 여 엔, 지불 8만 6천 여 엔, 국고금 수입 8만 여 엔, 지불 6만 8천 여 엔, 전보 인수 6천 7백 여 통, 배달 6천 2백 여 통, 전화 호출 1천 3백 여 통, 통화 4천 70여 통 등이다. 대정 4년 10월 주상 전하(일왕) 즉위에 즈음하여 충주우체국장 사카이 부친지로(酒井文次郎) 씨의 알선으로 성립된 어대전(御大典) 기념 저축회는 회원 700여 명, 1개월 우체국 저금으로서 수입금 500여 엔을 계상하고 있다.
제8장 금 융
충주의 주요 금융 기관으로는 한호농공은행(漢湖農工銀行) 충주지점, 충주지방금융조합 등이 있다. 한때 충주 금융계의 남상(발단)은 일반 경제에 악영향을 미쳐 앞날을 비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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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도 있었으나, 현재 한호농공은행 지점장 고노 주신(河野州心) 씨 부임 이래 대개혁을 단행하여 점차 금융 경제가 순조로운 흐름을 되찾았고, 근래 유통 자금이 비교적 윤택해져 금리는 해마다 하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호농공은행 충주지점의 업무는 확실한 농공 자금의 담보 대출, 환어음 및 기타 상업어음 할인, 제회사 은행 또는 상인의 어음 대금 수금, 환 및 화물환, 제예금, 금은화 귀금속 및 제증권의 보관 예치, 화폐 교환, 공공단체에 대한 무담보 대출 등이며, 특히 충주 특산물인 황색 담배 경작·건조자에 대해 저리의 자금을 융통하여 산업 개발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대정 5년 6월 현재 영업 상황은 정기예금 8천 여 엔, 당좌예금 1만 9천 여 엔, 소액예금 4만 2천 여 엔, 기타 예금 1천 여 엔, 농공자금 대출 6만 1천 여 엔, 상업자금 대출 8만 1천 여 엔이다. 금융조합은 명치 42년 5월 14일에 설립되어 지방 소농민의 금융을 완화하고 농업 발달을 도모하는 데 목적이 있는바, 오랜 세월 수탈적인 세정에 곤폐했던 세민(가난한 주민)들은 겨우 생계의 여유를 얻어 부지런히 각자의 업에 힘쓰게 되었다. 개간, 배수, 관개 및 토지 토질 개량, 식림 사업 등 농업의 발전과 산업의 신장은 부를 이루고 업을 성취하는 기초를 다지고 근검저축의 미풍을 양성하기에 이르렀다. 현 조합 이사 오쿠 오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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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奧小金吾) 씨는 조합 설립 이래의 주관자로서 충주 금융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대정 5년 6월의 업무 성적은 자금 합계 1만 9천 9백 6십 여 엔, 제예금 1천 4백 9십 여 엔, 제대출금 1만 5천 4백 1십 여 엔이다.
제9장 농 업
군 내는 기름진 들판과 비옥한 전답이 풍부하여 농업에 적합하다. 기후는 대체로 온화하여 오곡이 풍성하게 익으며, 추위가 다소 강하다고는 하나 보리류와 같은 동계 작물의 폐사 우려가 없고 생육이 극히 양호하다. 특히 사계절 공기가 건조한 덕분에 수확물의 품질이 우수하다. 수도의 경우 관개 시설의 불비한 점이 없지 않으나, 군 내 일부를 제외하고는 가뭄이나 수해를 입는 일이 없다. 농민들은 도(道)의 시정 방침에 의거하여 군 당국의 지도 아래 새로운 지식을 얻어 농사 발달이 현저하며, 시정 5주년 기념 공진회에서 수상한 자가 적지 않음을 통해 그 단면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근래 농작물 가격의 상승은 미간지 개척의 미풍을 양성하여 농민 일반이 유유부단하고 게으른 옛 태도를 벗어난 모습이다. 내지인 농사개량조합은 농사 개량 및 조선인 농민을 유도·계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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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뜻있는 농가인 시오다 사다스케(鹽田貞介) 씨가 조합장으로서 진력하여 새롭게 편입된 동포(조선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탄월역(丹月驛), 용원역(龍院驛)에는 국유지 소작인조합이 있어 군의 지도를 따라 눈부신 개량·진보의 실적을 올리고 있다. 특히 본 군에서는 각 면(面)에 1정보(町步)의 모범 채종전을 설치하여 우수 수확 벼의普及에 힘쓰고 있으며, 기술에 능통한 농업 교사를 각 면에 배치하여 전적으로 이 사업의 진보·발전에 힘쓰게 하고 있다. 군의 경작 경지 면적은 묘(苗) 6천 5백 9십 정보, 전(田) 5천 4백 8십 1정보이며, 현재 농업 종사자는 조선인 7만 8천 4백 9십 7명, 내지인 1백 3십 9명이다. 본 군의 주요 농산물은 쌀 6천 2백 6십 8정(7만 3천 8백 8십 7석), 대맥(보리) 4천 2십 정(4만 8천 7백 9십 석), 대두(콩) 1천 6백 4십 8정(1만 8천 9백 5십 5석) 등이다. 본 군에는 부업장려회가 있어 농한기를 이용해 새끼, 가마니 제조에 종사하며, 1년간 생산액이 1만 엔을 하회하지 않는다. 양잠은 충청북도 내 제1위로서 잠업조합이 설치되어 있다. 대정 5년도 봄누에 소립수(掃立數)는 1천 3백 매, 성견(고치) 300석, 가액 1만 3천 여 엔이다. 기타 가축과 가금류는 사육법이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생산량이 거대하여 현재 축산조합 설립을 준비 중이다. 조림 성적은 전 조선 중 으뜸(巨擘)으로서, 군 묘포 외에 읍내면 1정 3단, 기타 12개 면에 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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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보의 조림 묘포가 있어 적송, 떡갈나무, 아까시나무, 밤나무, 포플러 등을 육성하고 있다.
◇충주군 내지인 농사개량조합 규약
제1조 본 조합은 조합원이 협력 일치하여 농사의 개량을 도모하고 조선인 농업자에게 모범을 보여 그普及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본 조합은 충주군 내지인 농사개량조합이라 칭한다.
제3조 본 조합은 충주군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자로 조직한다.
제4조 본 조합에 조합장 1명, 평위원 4명을 두며 그 임기는 각 2년으로 한다.
제5조 조합장 및 평위원은 조합원의 호선으로 하며, 조합장은 조합 제반 사무를 총리하고 평위원은 조합장의 협의에 참여한다.
제6조 본 조합원이 경작하는 중요 작물은 도(道)의 방침에 따라 다음 종류를 재배한다.
쌀: 錦(니시키), 多摩錦(타마니시키)
보리: 골든멜론, 맨머스
소맥(밀): 풀츠, 만첸스칸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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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두(콩): 제천대두
감저(고구마): 元氣(겐키)
마설서(감자): 長崎赤(나가사키아카)
제7조 본 조합원은 다음 사항을 실행해야 한다.
[쌀]
1.채종전을 설치하고 발삭(拔穗: 우수 이삭) 종자를 씨앗으로 심을 것.
2.염수선(소금물 가르기)을 실시할 것.
3.단작 못자리를 만들 것.
4.해충 구제를 실시할 것.
5.이앙(모내기)은 바른 줄짓기(正條植)로 할 것.
6.제초를励行(여행: 힘써 행함)하고 특히 피뽑기를 실시할 것.
7.탈곡기 및 멍석을 사용할 것.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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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채종전을 설치하고 병충해가 없는 땅에서 얻은 우수 이삭 종자를 심을 것.
2. 염수선을 실시할 것.
3. 깜부기병(黑穗)을 뽑아낼 것.
[기타]
1.알골라내기(粒撰) 콩 만들기를 실시할 것.
2.건전(乾田)으로서 이모작을 하지 않던 토지는 이모작을 할 것.
3.녹비용(刈敷大豆) 대두를 재배할 것.
4.자가 경작에 필요한 퇴비 제조에 충분한 간이 퇴비사를 설치할 것.
5.비료 웅덩이를 설비할 것.
6.추경(가을갈이)을 힘써 행할 것.
7.산풀을 베어 비료로 삼을 것.
8.가옥 인근 및 미간지 등을 이용해 뽕나무 재배에 힘쓸 것.
9.가축 소는 도(道)의 위탁 씨수소와 교배시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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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식림을 실시할 것.
제8조 본 조합원은 노동을 존중하고 절약을 귀하게 여겨 향후 단연코 허례허식을 배제할 것.
제9조 제6조, 제7조, 제8조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봄·가을 두 계절의 농한기를 이용해 총회를 개최하고 해당 기술관의 참석을 요청하여 농사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제10조 본 조합의 규약은 군수의 인가를 받지 않으면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 단, 변경하고자 할 때도 같다.
제11조 본 조합 규약을 변경할 경우 조합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요한다.
◇충주군 잠업조합 규약
제1장 총 칙
제1조 본 조합은 충주군 잠업조합이라 칭하고 사무소를 충주군청 내에 둔다.
제2조 본 조합은 잠업의 개량·발달을 도모하고 조합원의 복리를 증진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 본 조합은 충주군 내의 양잠가로 조직한다.
제2장 조합원 및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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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조 본 조합원은 조합원 명부에 서명 날인한다.
제5조 본 조합원은 조합에 필요한 경비를 부담한다.
제6조 조합원 중 부정한 행위가 있거나 조합원의 체면을 더럽히는 자가 있을 때는 평위원회의 결의에 의해 제명한다.
제7조 본 조합에 다음의 임원을 둔다.
*조합장 1명
*부조합장 1명
*평위원 15명
*간사 2명
*서기 1명
제8조
조합장은 본 조합을 대표하고 조합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총괄하며 총회 및 평위원회의 의장이 된다.
부조합장은 조합장 유시 시 이를 대리하고 조합에 관한 사무를 보좌한다.
평위원은 조합에 관한 중요한 사항을 평의한다.
간사는 본 조합의 사업을 감독한다.
서기는 조합장 이하의 지휘를 받아 서무 및 회계 사무를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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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조
조합장, 부조합장, 평위원은 군수에게 위탁하여 추천받는다.
간사는 충주군 서무계 주임 및 농업기술자에게 촉탁한다.
서기는 충주군 서무계 권업 사무에 종사하는 군 서기에게 촉탁한다.
제10조 임원의 임기는 만 2년으로 한다. 단, 재임할 수 있다. 단, 임기 전 보궐 임원의 임기는 전임자의 남은 임기에 따른다.
제3장 회 의
제11조 회의는 총회 및 평위원회 2종으로 한다.
제12조 총회는 조합원으로 조직하고 매년 봄·가을 2회 개회하여 사업 경과 및 조합 상황 보고와 양잠에 관한 강연을 실시한다.
제13조 평위원회는 평위원으로 조직하고 평의권은 평등하게 하며, 그 결의는 다수결로 정하고 가부동수일 때는 의장이 결정하는 바에 따른다.
단, 평위원회는 조합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외에 간사 및 평위원 3명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 조합장이 소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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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사 업
제14조 본 조합은 제1조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다음의 사업을 행한다.
1.양잠 지도자 고용에 관한 사항
2.잠종(누에알), 뽕나무 묘목 및 기타 양잠에 관한 기구의 공동 구입, 살용(살번데기) 건조소 설치 및 이에 관한 사항
3.성견(누에고치)은 군(郡)의 지시에 기반하여 공동 판매를 행할 것
4.성견 공동 판매를 통해 얻은 대금의 저축 장려
5.잠업에 관한 인쇄물의 배포
6.기타 평위원회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한 사항
제15조 전조의 비용은 그 해 내부의 공동 판매 대금에서 공제할 수 있다.
제5장 회 계
제16조 본 조합의 사업 연도는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로 한다.
제17조 본 조합의 경비는 조합 사업 수입 및 잡수입으로 이를 지출·충당한다.
충주 대수정(大手町) /
시오타 테이스케 (鹽田禎介)
충주 오즈마정(吾妻町)/
니이다 시로 (新井田四郎)
公州地方法院忠州支廳(공주지방법원 충주지청) /
미나토 신조 (湊信三)/ 이노우에 마사히로 (井上正博)
忠州郡廳 서회보 (徐晦輔) / 타나카 이사오 (田中勳) / 오니시 키요시 (尾西清)
忠州郵便局(충주우편국)
사카이 분지로 (酒井文次郎) 외 국원 일동
忠州金融組合理事(충주금융조합이사)
오쿠코 긴고 (奧小金吾)
忠州守備隊(충주수비대)
타치바나 마사오 (橘正雄) /
타카하시 만키치 (高橋萬吉) /
김산균 (金山均)
京城衛戍病院忠州分院
(경성위수병원 충주분원 호시노)
호시노 켄타로 (星野健太郎) /
쿠마가이 치카조 (熊谷千賀藏)
公立忠州尋常高等小學校
(공립 충주 심상고등소학교)
키토 슈자부로 (木藤周三郎) /
아이베 슌스케 (相部俊介)
忠州憲兵分隊 (충주헌병분대)
아리마 세이슈 (有馬精秀)
公立忠州普通學校 公立忠州簡易農學校
(공립 충주보통학교 공립 충주간이농학교)
職員一同(직원 일동)
忠州郡邑內面事務所 職員一同
(충주군 읍내면 사무소 직원 일동)
忠州郡黃色煙草耕作組合
(충주군 황색연초 경작조합)
충주 수비대(忠州守備隊)
니노미야 스에오 (二宮季夫)
야마가타 쇼료 (山縣祥亮)
바바 코타 (馬場廣太)
충주 중지정(仲之町)
公醫 福岡醫院(공의 후쿠오카 의원)
福岡醫學士(후쿠오카 의학사)
후쿠오카 에이타로 (福岡英太郎)
충주 본정(本町) 4정목
충주 금평정(琴平町)
츠츠미 타츠 (堤タツ)
明治公債株式會社出張所
(메이지 공채 주식회사 출장소)
스즈키 마사이치 (鈴木政一)
충청북도 충주 대수정(大手町)
오카다 이치조 (岡田市藏)
忠州 龍山里
p29
第十八條 每事業年度於テ經費二剩餘ヲ生シタルハ之ヲ本組合ノ基本トシテ積立ツルモノトス
附則 本規約ハ郡守ノ認可ヲ得テ之ヲ施行ス變更ノ場合亦同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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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p29
제18조 매 사업 연도에 경비의 잉여가 생긴 때에는 이를 본 조합의 기본 자금으로 적립한다.
부칙 본 규약은 군수의 인가를 얻어 이를 시행한다. 변경의 경우에도 또한 같다.
《제 10 황색연초, p29 ~ p35》는 이미 다루었으므로 생략함.
※ [충주의 황색연초(담배) ‐‐‐ 충주발전지(忠州發展誌, 金谷雅城 著,1916년)에서 인용] 참고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