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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두번째 소명
출애굽기 6: 2~13
모세는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는 임무수행이 실패로 끝이 나자 여호와께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의 관심을 현 상황에서 하나님이 앞으로 행하실 미래로 바꾸어 주심을(출 6:1)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출 6:2~12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킬 계획을 밝히고, 사명을 주는 이야기가 니옵니다. 그런데 이미 모세는 출 3:1~4:31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흔히 “모세의 두번째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첫째, 하나님의 이름
① Yahweh(여호와)라는 이름이 이스라엘에게 알려진 것은 모세시대에 이루어진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출 6:2~3 “...나는 야웨(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Yahweh)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②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전능의 하나님(엘 샤다이)는 무슨 뜻일까? 여기서 샤다이는 여성의 가슴을 의미합니다. 즉 모성적 사랑과 후손의 번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엘 샤다이”로 알려졌다가 이번에는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 바로 ‘야웨 하나님’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즉 새로운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Yahweh라는 의미는 “나는 너희를 위하여 현존한다” 또는 “활동한다”는 뜻입니다. 즉 출 6:2에서 “나는 여호와로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자기소개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백성을 위해 본격적으로 활동하시겠다는 의지가 담긴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현재의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서(출애굽) 약속의 땅(가나안)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좌절한 이스라엘 백성과 낙심한 모세에게 하나님이 행하실 새로운 역사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과거와 현재의 포로가 될 것인지 그것은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둘째, “너희를 구속하여...”(출 6:6)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고역에서 구속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구속은 “속량하다, 구속하다”입니다. 즉 가족 중의 한 사람이 곤경에 빠졌을 때, 또는 억울하게 죽었을 때 도와주는 가까운 친척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자면
ⅰ) 누가 살해되었을 때에 “구속자”는 “피의 보복자”가 되는 것이고(민 35:19~27), 또는
ⅱ) 가장이 자손이 없이 죽었을 때 그 부인과 혼인하여 그에게 후손을 마련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룻 4:14).
ⅲ) 누가 경제적 사정으로 곤란에 빠지거나 종살이를 하게 되면 그 빚을 갚거나 속량해주는 것입니다(레 25:23~28).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구속자”가 되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 된 것을 알 수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책임져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과 하나되어 주시고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출 6:7)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이 말씀은 성경의 핵심 구절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만한 자격을 갖추었는가?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답해 주십니다.
신 7:7~8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이처럼 하나님은 약하고 볼품없는 사람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소외된 자, 약한 자, 죄인들, 38년 동안 병든 자를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치유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는데 실패한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어보내게 하라”
여기서 하나님은 이제 바로에게 말하기를
ⅰ) 출 5:1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절기 지키기 위해서 단지 며칠동안 여행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ⅱ) 그러나 여기서는 완전한 해방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모세는 동족인 이스라엘도 자신을 거부했는데 어찌 바로가 자신의 말을 듣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출 6:12). 그러면서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라고 자신의 무능을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13절에서 다시 명령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예를 들자면 요나는 자신을 포기하고 죽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그를 살려서 다시 일을 맡겨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내가 나를 포기해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결론 :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될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녀 된 우리와 하나 되어 주시고 우리의 앞길을 책임져 주시되, 심지어 내가 나를 포기한 때에도 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존귀하게 세우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감격하시고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행복충전소†대명교회(김종일목사)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6장 육의 욕심때문에 십자가를 거부하지 말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한 것을 지키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하시지만(1-8)
백성들은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9)
그러자
하나님은 아론의 제사장직 계보를 나열하시므로(14-25)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아도 제사장들을 세워 당신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시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거부한 이유입니다
저들은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9)때문에 거부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때문에 바로에게 미움을 받아 고역이 더욱 심해졌으니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육의 욕심은 하나님 말씀을 거부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육의 욕심때문에 말씀을 거부하는 저들에게 십자가를 제시합니다
제사장의 계보를 나열하십니다
제사장 계보의 나열의 핵심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계보를 나열하신 이유는 십자가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육의 욕심으로는 말씀을 거부하지만 십자가의 희생으로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기독교는 십자가를 지기 위한 눈물과 회개의 종교이며
십자가의 고통과 희생을 요구하는 종교인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편안과 안일만을 추구하는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십자가를 지라면 백리는 도망가는
모습이 아닙니까?
이제 내 안에서 종교 개혁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편안과 안일만 추구하는 육의 욕심에서 하나님이 제시하신 십자가로 돌아가는
영의 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육의 욕심때문에 십자가를 거부하는 곳에는 주님이 주시는 생명이 없습니다
■ 출애굽기 6장
출애굽기 6:1-13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욱 심하게 당하는 학대로 인하여 자신을 왜 이곳으로 보내셔야 했는지 다시 항변하는 모세를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을 친히 애굽에서 건져내시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출애굽이라는 사건은 애굽 군대와 하나님 군대의 싸움으로 구체화된다.
“강한 손을 더하므로”(1절)라는 표현은 전쟁에 쓰이는 용어이다(참고 3:19-20). 그러나 모세가 싸워야 할 전쟁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1절)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하나님의 전쟁’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움직일 따름이었고 하나님 편에서 전쟁의 목격자가 될 뿐이었다.
이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을 내놓으라고 하는 모세와 그 이스라엘을 내놓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바로와의 싸움이다. 그러나 실상은 자기 백성을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백성을 주지 못하겠다고 움켜쥐는 마귀와의 전쟁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라고 하지만 직접 참전할 수 있는 성질의 군대가 아니라 어느 편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는가를 보여주는 노획된 전리품의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전쟁의 승리가 여호와께 돌아간다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는 여호와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결국에는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에서 쫓아낼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하나님은 자신이 여호와임을 모세에게 상기시킨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3절)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는 자기 백성에게 주신 자신의 언약에 충실하시기 위하여 친히 싸우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통해 잘 나타난다.
이제 약속의 땅을 그들에게 주심으로 그 전능한 언약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구체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7절).
과연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사람들은 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19에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있다고 지적했다.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도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교회에 나온다. 그 때 교회에서는 그 사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나타내주고 있는 하나님이 아님을 지적하고 밝혀주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빼내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 사도가 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 1:22-23)고 했을까?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만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기 때문이다(고전 1:2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서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으로 알고 믿는 자가 천국 백성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요 12:44-45).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전했다(9절).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마음이 상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역사의 혹독함 때문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애초부터 바라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자기들에게 오는 고난을 해결하지도 못하는 하나님은 결국 자기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뿐이지 구원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맞추어 주는 하나님을 원한다. 인간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하나님이라면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십자가의 하나님을 이런 우상의 하나님으로 바꾸어 놓고 사람의 기분을 맞추어 주는 서어비스로 손님들을 청하고 있다. 마치 편의점이 사람들의 갖가지 구미에 맞는 상품들을 진열해 놓고 24시간 영업을 하는 것과 같이··· 그들은 갈라디아서 1:10에 주어진 이런 대목을 기억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오늘날의 교회는 자기들의 신학에 의해 정립된 하나님을 내세우는 종교 장터에 불과하다. 도무지 말씀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가난한 자의 하나님’으로 주장하면서 경제 정의가 이상적으로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특히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구원한다는 5절과 같은 말씀을 근거로 삼고 있다. 뜻이 하늘에서만 아니라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만약 가난한 자의 하나님으로 소임을 다할 것 같으면 굳이 출애굽이라는 역사를 일으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애굽과 이스라엘의 위치를 바꾸어서 애굽을 이스라엘의 노예로 만들어 주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경제적인 학대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반드시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하는 이유는 구원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즉 구원의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 언약은 이 땅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루어 낼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있는 자 중에 누구도 자기 자신만큼은 당연히 구원되어야 하고 마땅히 복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만한 존재가 없다.
하나님은 또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애굽 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을 내어 보내도록 요구하라고 명하셨다(11절). 그러나 모세가 가졌던 항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12절).
모세는 백성들의 반응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고민에 젖는다. 모세는 자신의 임무가 백성들의 호응을 얻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알리는데 있는 것임을 알아야 했다(겔 3:17-2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란 다른 말로 ‘증인’이라는 말이다(행 1:8). 증인은 본 것을 그대로 전할 뿐이다. 그렇게 전하는 것을 사용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을 비롯한 사역자들은 심고 물을 주는 정도에 불과한데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고 말씀한다(고전 3:6-7). 그러므로 우리가 가져야 하는 관심은 내가 전한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받았는가 라고 하는 전도의 실적이 아니라 말씀대로 바르게 전했는가 하는 것이어야 한다.
모세의 좌절은, 그가 하나님의 권능보다는 자신의 약점에 과도히 치중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모세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말 재주가 바로를 설득할 수 없다고 염려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능수능란한 기능이나 재주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시는 것이다(고전 2:4).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고전 4:20). 그러기에 인간의 능력이 죽어지면 죽어질수록 하나님의 능력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6:14-30
여기서 잠간 모세의 족보가 언급되고 있는데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조부의 형제들을 언급한 부분(14-16절), 둘째는 모세의 부친과 사촌들을 언급한 부분(16-22절), 그리고 셋째는 제사장 가문을 이루는 아론의 가계를 기록한 부분(23-27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이 본문을 가지고 야곱의 아들들 이후부터 모세까지 빠짐없는 계보로 보아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당시 남자들의 인구만 총 60만명이 넘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곳에 기록된 족보상의 4대(代)는 실상 몇 대의 생략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도적인 생략 형태는 성경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스 7:3; 마 1:8 등). 성경의 초점은, 인물의 빠짐없는 나열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계시에 모아져 있기 때문이다.
아마 4대 만에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기 위한 것이리라(창 15:16).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