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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명분
창세기 25: 27-34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25:33-34)
1. 27절 : 야곱의 성품과 생활
성경을 살필 때, 우리는 야곱에게서 대단히 훌륭한 성품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야곱이 “조용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그가 “단순한 소년”이었음을 알려줄 뿐입니다. “조용한”(탐)이란 “완전한”, “성실한”, “건전한”, “착실한”이란 의미가 담겨있는데, 영어 성경에서는 “평이한”, “조용한”, “순진한”으로 변역되어있습니다.
본문에서 “조용한”이란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보다는, 에서가 가진 강인하고 거칠고 호전적인 성품과 대조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야곱은 에서와 대조적으로 내성적이고 부드러운 성품을 가졌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에서가 특출난 성격이었다면, 야곱은 평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 시대상으로 보면, 에서가 훨씬 그 시대에 적합한 남자상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경제는 농사와 유목 그리고 사냥과 같은 활동에 의해 지탱되었을 것입니다. 남자는 노동력에 있어 몹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헬라어로 “집에 있는 자”를 오이코시투스라고 하여,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삭은 그 시대의 세속적인 기준에 따라 에서를 더 사랑할 만하였습니다. 에서는 남자답고 많은 자원을 가정에 공급할만한 강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야곱이 “종요했다”는 말은 결코 그 시대상으로 따지면 유능하거나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남자에게 필요한 것은 힘이 넘치는 기질, 용맹성이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야곱과 에서의 성품을 기록해 놓으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장자의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행위와 재능과 기질에 의해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선택은 인간의 잘나고 못남에 제약되지도 않으며, 그것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선택은 사람들이 소유한 바에 상관없이 그들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야곱은 그에게 속한 그 어떤 요소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혈통적으로 정당하게 형으로 태어나고, 그 시대의 장자가 갖추어야 할 경제력, 곧 자원을 획득하여 가정을 부유하게 할 그런 재능을 야곱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진 에서에게 하나님의 선택은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그분의 사랑과 긍휼로 아무런 자격 없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과 선택하신 자에게 나타날 모든 결실과 은총이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선택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 선택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도록 하시지만,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선택이 베푸는 선택의 목적의 수단이지 믿음이 선택을 일으키는 원인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을 인해 그 선택의 목적은 결코 인간이나 세상에 속한 어떤 것들, 혹은 그것을 훼방하는 어떤 요소에 의해 흔들리거나 실패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28절 : 이삭과 리브가의 신앙적 반응의 대조점
우리는 28절에서 야곱을 향한 선택을 계시 받은 두 사람, 야곱의 부모의 상반된 신앙의 반응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삭이 보여준 신앙에 어울리지 않는 실책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계획과 언약의 약속은 무산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의 완악함과 미련함으로 일어난 불상사와 상관없이 당신의 뜻을 성취해 가십니다.
22-2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선택과 이삭의 유기를 계시한 바가 있었습니다. 두 형제가 태 중에 다툴 때, 리브가가 하나님께 묻고 이 선택의 사실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리고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더 사랑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고 성경은 대구의 형식으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사랑한 이유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으로 기록한 이유는 그것을 기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구체적으로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 때문에 에서를 좋아했던 것입니다.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다는 말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와 같은 식량을 제공할 수 있는 에서의 강인함과 재능인 것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을 따라 자녀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매우 세속적인 이유만으로 에서를 사랑한 것입니다. 영적 장자권이 야곱에게 있다는 사실을 들은 사람으로서 언약의 공동체의 족장으로서 이삭은 적절치 않은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아버지가 에서를 사랑하므로 편애할 때, 어머니는 소외된 자녀를 더 긍휼히 여길 수 있고, 또 그러한 모성애가 야곱을 향해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영적 장자권을 야곱에게 주셨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마음 속에 품고 있었고 그것을 기억하며 야곱을 바라보았음도 분명합니다. 그녀는 혈통과 야곱의 성품과 재능, 그리고 그 가정에 기여도를 초월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야곱을 양육하고 사랑했던 것입니다.
3. 29절 : 선택의 목적은 신앙이라는 수단을 통해 역사 속에서 실현
리브가의 사랑을 받고 양육을 받으며 야곱은 자신에게 주어진 약속과 그 성취를 사모하는 마음이 길러졌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야곱의 존재가 있기도 전에, 야곱이 신앙을 소유하기 전에, 시간을 초월해 결정된 하나님의 선택을 소개하였습니다.
이제 성경은 영원 전에 하나님의 확고 불변한 선택이 역사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 사는 선택받은 인생 속에 어떻게 실현되고 드러나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야곱의 도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선택된 자는 이 세상에 태어나 반드시 성령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고, 선택된 자들은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과 연합하여 한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뜻하신 계획들을 이루며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선택된 자에게는 반드시 신앙이 나타나고 신앙의 반응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들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선택된 자로서, 그의 성장 속에서 두각을 나타낼 만한 인간적인 면모가 뛰어나지 못했을 지라도, 그에게는 신앙의 표가 나타났고, 신앙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에게 반응하는 신앙의 결실들, 신앙의 증표들이 나타났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건에는, 유기되어 신앙을 갖지 못한 에서의 생활 태도가 나타나있고, 이와 대조적으로 선택되어 신앙을 가진 야곱의 생활 태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29-34절에는 야곱과에서 사이에 일어난 한 사건의 장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그 일어난 일이 매우 아이들 장난 같고, 실제로 매우 일상적인 일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일상적이고 별일 아닌 듯 보이는 이 사건이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의 차이, 선택되어 신앙을 가진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와 그렇지 못한 사람의 태도가 반영되어있습니다.
사건의 내막은 그야 말로 대단한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에서는 사냥하고 돌아와 피곤했고, 허기졌습니다. 야곱은 마침 팥죽을 쑤었고, 어찌 보면 야박하게 지친 형을 위해 한 그릇 팥죽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좀 야비하게 보이고 치사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야박한 야곱의 행동은 결코 칭찬받을 만한 행동은 아니지만, 이러한 야곱의 행동의 동기와 본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권에 대한 약속을 향한 집요한 믿음과 사모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우 책략을 가지고 장자권을 넘겨줄 것을 조건으로 팥죽 한 그릇을 놓고 흥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서는 장난삼아 행동하듯,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말로서 넘겨줍니다. 즉,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집요할 만한 사모함으로 행동했고, 야곱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에서에게는 일종의 시험대가 되었습니다.
몹시 어린 아이 장난 같은 일들 속에 선택과 신앙과 신앙을 가진 자의 태도가 반영되어있었습니다. 사건의 외형적 면모는 어린 아이 장난 같지만, 그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 속에서 두 형제가 보여주고 있는 행동과 태도는 신앙과 관련된 본질들과 연관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섭리 안에서 이 사건을 통해 역사하고 계시고 두 형제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시고 두 형제의 믿음을 살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결정적으로 장자권이 야곱에게 주어졌음을 다시 한 번 공고히 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작정된 일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어 나타나는 성취 가운데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장자권이 야곱에게 주어졌음을 증거하는 사건으로서, 그리고 에서는 불신앙으로 인해 스스로 자신이 유기된 자임을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 12:16)
즉, 이 한 사건이 야곱과 에서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 그리고 선택과 유기로 인해 각 사람 속에 들어있는 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그러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선택과 믿음 그리고 신앙을 인해 일어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교회의 참된 회원들,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은 결코 인공적이거나 인간에게 속한 어떤 것에 의해서 세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 덕성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부름 받은 성도들의 연합체입니다. 이 선택의 근원으로부터 신앙이라는 수단을 통해 성도들이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며 의도하셨던 일들이 열매로서 맺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선택이 있고, 선택된 자들에게 약속된 신앙이 있고, 신앙이란 수단을 통해 하나님과 연합한 자들을 통해 드러나는 열매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구원을 성취하셨다. 그리고 구원의 성취를 어느 역사의 때에 하나님의 주권대로 성령을 통해 한 심령에 구원을 적용하시므로 역사 속에 실제적인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선택된 자들은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총을 받지 못한 자들은 세상적이고 육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선택이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라면, 성령께서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내주하시고 충만해지는 역사는 선택받은 표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총이 없이는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신앙을 주시므로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고, 성령의 충만을 통해 신앙의 열매들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신앙과 열매를 통해 우리의 선택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선택 안에는 생명을 신앙과 순종 안에서 즐기는 일들이 존재합니다. 에베소서 말씀을 따르면, 선택 안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자들을 위한 속죄와 성령의 선물, 곧 신앙과 신앙의 열매가 꾸러미처럼 엮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됨으로 영원 전의 하나님 안에 예정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회를 통해 실제화 되는 것입니다.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유기된 에서는 하나님의 시험을 넘어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신앙이 부재했습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은총을 부여받지 못한 마음으로, 성령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부패한 마음과 인격으로 하나님의 장자권을 경홀히 여기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야곱과 에서가 각각 보인 태도들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사냥한 자가 배고파 팥죽 한 그릇을 구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음식을 간청한 일이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일은 야곱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문제는 이 본능과 육체적 욕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뜻이라는 것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는데 크고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내가 죽을 지경이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서 결코 들려질 수 없는 말이 그의 영혼의 상태를 드러냅니다. 그것은 “장자권을 넘겨 줄테니 팥죽을 달라.” 이 지점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브레이크가 없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약속이나 뜻,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지위와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흥정할 만큼 경솔하고 신앙이 없었던 것입니다. 팥죽 한 그릇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 작고 사소한 사건을 통해 에서는 불신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실제 삶과 생활에 있어서도 작고 사소한 일들이 많이 있지만, 엄밀히 하나님 앞에서 작고 사소한 일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언행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일들이며 우리가 매우 사소한 일들이라고 여기는 일들 속에는 우리의 신앙이 투영되고 반영되기에 일은 사소하나 그 안에 담겨진 태도와 마음은 몹시 큰 것이란 것입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영혼을 팔아먹는 그러한 행위를, 그리고 스스로의 입으로 장자권을 넘겨주는 그 소리를 하나님께서는 또렷이 듣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작고 사소한 일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망령됨을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진노는 컸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크고 작은 일이 없습니다.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태도는 동일한 것입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7)
이 일은 작은 일이 아니었고, 진정 영적 장자권이 야곱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택된 자에게 장자의 명분이 주어질 뿐만 아니라, 선택 안에서 장자의 명분을 신앙으로 대하고 사모하는 자에게 약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본문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신령한 복을 소중히 여겨야 하고, 신령한 복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기준으로 삼고 생각하고 말하고 선택하고 행한다면, 하늘의 상속권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을 구하고 신앙의 눈으로 신령한 복의 가치를 사모하는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마귀도 세상도 늘 상 우리의 영혼을 빼앗아 가려고 흥정의 시험을 합니다.
야곱은 에서와 대조적입니다. 그는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의 대가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장자권 하나만을 유일하게 요구했습니다. 어찌보면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도둑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애초에 야곱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혈통이라는 것에 가려지고 훼방될 때,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을 확증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땅의 것을 주고 하늘에 속한 권한과 신령한 은혜를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야곱처럼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상속한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하신 구원과 그 안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들을 추구하고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이 이름과 지위 안에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 갖는 권리와 유익들을 감사하며 추구하는 마음을 견고히 해야겠습니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g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