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의 십자가만이 (마 4:1-11)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이 시간에 “대속의 십자가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고전2:2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달리신 십자가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말씀입니다. 공적생애를 앞두고 본문에 기록은 없지만 구구절절 흐르는 그 문맥 속에 주님은 내가 십자가에 달려야 인류를 구원할 대사역이 이루어진다는 진리에 끝까지 서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대속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주장은 달랐습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요, 십자가 없이도 얼마든지 대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왜 주님이 대속의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을까요?
1. 떡으로는 대속사역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3절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 말씀을 단지 배고프신 예수님에 대한 시험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금식은 사역이 시작되는 공생애를 앞두시고 하신 금식이란 점에서 큰 틀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 때 사탄은 예수님에게 죄인을 구원하는 대속사역의 방법을 가지고 흥정합니다. 사람들의 떡의 문제를 해결해 주면 아무런 박해도 없이 모두가 너를 메시아로 추앙하고 따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달콤하고 호소력 있는 유혹입니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오병이어 기적으로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실 때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14-15절) 그러나 주님은 떠나가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구원 받은 것도 물질로 받은 것 아닙니다. 벧전1:18-19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했습니다. 물질이 전도에 도움은 줄 수 있지만 물질로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물질은 우리 삶에 절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도 물질은 꼭 필요합니다. 우리의 사역에 물질의 날개가 붙으면 상상할 수 없이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물질은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은사입니다. 선교사가 구제 교육 의료 문화 기술 혹은 우물을 파주기도 하고 학교 병원도 세우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선교하듯 물질은 선교학적으로나 목회회학적으로나 정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대속의 죽으심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며, 사탄이 주는 그럴듯한 물질적 제안을 물리치셨습니다. 물질은 필요하지만 물질로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능력과 권세로도 대속사역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5-6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두 번째 마귀의 시험은 기사와 이적으로 예수님의 전지전능성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거룩한 성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표적을 보이면 모두가 예수를 메시아로 섬길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그 정도의 표적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초대교회 당시 사마리아에 큰 능력의 마술사 시몬이 있었습니다. 시몬의 마술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사마리아 사람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 사람이 크다”(행8:10)고 추앙했습니다. 시몬은 자신을 “자칭 큰 자”(행8:9)라고 높이면서 스스로 하나님 행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남은 속여도 자신이 거짓인 걸 아는지라 사도들이 안수하여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돈을 주어 성령을 사 자기도 성령을 주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에게 저주 받고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나중에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주려고 결국 높은 곳에 올라가서 떨어지다가 낙상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가 거기서 성공했다면 거짓 메시아로 등극했을지도 모릅니다.
기적 앞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본래 유대인들은 표적 표적 표적, 표적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막8:11에도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만큼 표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큰 표적을 보며주면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십자가 대속 없이 그 어떤 표적으로도 구원할 수 없음을 아시기에 주님은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물리치셨습니다. 그런데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역에 이적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라”(요14:12) 막16:20에도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하셨습니다. 놀라운 성령의 부흥이 임한 곳에는 표적과 기사가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도 기사와 이적이 일어나는 교회는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일의 아주 귀한 정석입니다.
그렇지만 표적으로도 물질로도 능력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대속사역을 이룰 수 없습니다. 십자가 달리심이 없이도 구원하실 수 있는 길이 있었다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능력 받았다고 다 구원 얻은 것은 아닙니다. 은사 받았다고 구원 받은 것 아닙니다. 체험이 있어도 예수를 나의 유일한 구세주로 믿지 않으면 구원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6:4-6에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했습니다.
3. 천하만국을 다 가져도 대속사역을 이룰 수 없습니다.
8-9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누가복음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4:6)
마귀는 자기와 타협하면 수고하지 않아도 아담이 잃어버렸던 왕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유대인들의 메시아만이 아니라 천하만국을 통치하는 메시야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달콤하고도 엄청난 비전을 제시하는 말입니까? 단 조건은 자기에게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교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100% 거짓입니다. 만약 듣는다면 예수님마저도 사탄의 수하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10절) 물리치셨습니다. 사역적으로 볼 때 비전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는 말이 있듯이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가 위대한 것은 모두가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꿈을 꿀 수 없습니다. 교회도 꿈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틀에 사역자를 가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꿈을 꾸도록 놔두십시요. 예수님도 비전이 있었습니다. 오고 가는 모든 세대 사람들을 다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전이 하나님께로 난 것이 아니라면 나를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유혹입니다. 비전이 지나치면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탄 앞에 무릎을 꾸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종교통합을 통해 단숨에 이교도들을 얻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가 정체성을 잃고 죽는 것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천주교와 하나 되자고 직제와 교리를 일치하자는 운동을 벌이지만 그것은 참 신앙이 죽는 100% 거짓입니다.
그래서 고후11:4에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책망했습니다. 누가 어떤 달콤한 말을 해도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12:24-25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죽어야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속의 십자가 없이 물질로나 능력으로나 그 어떤 비전일지라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그럴 듯한 시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말씀에 굳게 서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오직 예수의 믿음으로 승리하고 또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