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드-19’ 시절
사윤수(시인)
삶의 격랑을 비유할 때 산전수전이라는 말을 쓴다. 이제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야겠다, 산전수전세균전. 자의든 아니든 삶의 고개를 넘으며 우리는 저마다 산전수전을 겪는다. 그런데 세균전까지 겪게 될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과거에 여러 바이러스가 유행해서 인류가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출현은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것이고, 온 세계에 충격을 주며 죽음으로 몰아가는 강력한 바이러스여서 가장 가까이 체감하고 직접적인 현실이 되었다. 날마다 감염자와 사망자 통계 수치가 증가하고, 수시로 안전 안내 문자가 날아온다. 모두가 마스크를 하고 서로가 서로를 멀리해야 하는, 어색하고 낯설지만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던 삶의 방식이 시작되었고 또 적응해야만 하는 일상이 되었다.
현미경으로 확대한 코로나19의 생김새가 예쁘고도 무섭다. 그 작고 예쁜 것이 인간을 공격하고 있다. 이 화창한 봄날, 천지에 꽃핀 보람도 없이! ‘매화축제를 취소합니다. 벚꽃 길을 폐쇄합니다. 유채꽃 관광 오지 마세요.’ 이런 날이 있을 줄 그 누가 알았을까. 그래도 그 꽃 한 번 보고 싶어서 목숨 걸고 나선 사람들도 있다. 나중에 어찌 될 값에, 모두 마스크를 끼고 봄날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는다. 마스크 시대의 이 기념사진은 길이 남으리라. 제주도에선 급기야 유채꽃밭을 갈아엎는다. 꽃이 무슨 죄가 있나. 찬란한 봄이 영문도 모른 채 노랗게 질려 쟁기에 갈아엎어진다.
‘아프면 퇴근하기, 마주보지 않고 식사하기, 퇴근 후 약속 잡지 말고 바로 귀가하기.’ 이건 또 상상도 못했던 주문이다. 일이 밀리면 아파도 퇴근을 미루고, 동료들과 마주보고 밥 먹으며 상사 험담도 하고, 불타는 금요일 불금엔 술집마다 시끌벅적 2차 3차에 이어 노래방까지 순례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데 마주보고 밥을 먹거나 퇴근 후 약속을 잡으면 잡아갈 것만 같은 국가지상명령이 떨어졌다.
다들 그랬으리라. 처음엔 이 첨단시대에 바이러스쯤이야 곧바로 퇴치되겠지 싶었다. 그러면서 긴가민가하다가, 조금 지나서는 그래도 설마? 하는 사이에 전염은 걷잡을 수 없이 일파만파 퍼졌다. 적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전쟁의 기류가 순식간에 세상을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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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동시에 방공호가 되었다. 적이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니, 그토록 세상을 가득 메우고 언제나 북적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집으로 피난했다. 거리와 가게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도시가 텅 비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불안과 공포의 전주곡이 흘렀다. 삶은 어쩜 이렇게도 바람 잘 날이 없는지, 나라와 나라간의 전쟁, 인간과 인간끼리의 전쟁, 이번엔 인간과 세균과의 전쟁이라니!
처음엔 나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저 비상식량을 조금 구입해 놓고, 돌아서보니 수돗물이 나오고 변기에 물이 내려가고 전기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새삼 고마웠다. 졸지에 인류에게 닥친 위험 신호지만 생태계가 흔들리는 건 그만한 원인이 있겠지 싶었다.
이 격리와 칩거가 언제 끝날지 혹은 더 악화될지 예측할 수 없기에 생사에 대한 모종의 비장함마저 설핏 들었다. 나는 비정규 강사라서 겨울 방학 두 달과 개강 연기로 넉 달째 수입마저 없다. 그러나 어쨌든 처음 겪어보는 이 삶의 변화를 응시하며 창의적이고 생산성 있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구입해 놓고도 미뤄두었던 책들을 읽고, 종일 음악을 듣고, 보고 싶었던 영화를 실컷 다운받아 봤다. 바이러스 때문에 고통 받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생각 하니 희희낙락한 영화를 보는 건 예의가 아니다. 열두 살짜리 어린 레바논 난민의 비애가 눈물겨운 <가버나움>, 아우슈비츠에서의 부성애가 가슴 저린 <인생은 아름다워>, 소박한 두 여인의 우정이 빛나던 <바그다드 카페>, 그리고 눈이 멀어지는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의 적나라한 인간성을 보여주는 <눈 먼 자들의 도시> 등등을 봤다.
관심은 있었으나 도전해보지 못 했던 동시도 백 편 쯤 쓰고, 이 와중에 짬짬이 받은 청탁 시와 코로나19에 대한 글도 쉬엄쉬엄 썼다. 작년에 하려다가 차일피일 했던 화분갈이를 일 년이 지난 이제야 하고, 늘 바쁘다는 핑계로 이 삼 년 넘게 냉동실에 쟁여 두었던 먹을거리를 한동안 꺼내 먹었다. 수입이 없으니 그 냉동식품들을 때맞춰 요긴하게 정리했다.
마음 같아서는 멀리 여행을 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는 일. 방학 때면 섬에 가서 지내는 걸 좋아하는데 이번엔 갈 수 없었다. 내가 대구 사람이라는 걸 섬 사람들이 알기에 내가 감염 확진자가 아니라도 대구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부감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나는 제주4.3을 알고자 작년에 3년 째 추념식에 갔었다. 올해도 가려고 싼 비행기 표를 일찌감치 예약해 두었으나 역시 오지 않는 게 좋겠다는 뉘앙스의 메시지를 그곳 지인으로부터 받았다. 특별재난지역이 된 대구의 불명예가 운명 공동체인 개인에게 해당되는 씁쓸함을 처음 맛보았다. 올 겨울 푸른 바다는 그리움 속에서만 내내 밀려오고 밀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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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바로 앞에 아름다운 금호강이 흐른다. 하수상한 시절에도 봄꽃은 무작정 피어나고 강둑의 벚꽃 터널은 어김없이 찬란했다. 잠시나마 꽃그늘에서 벗들과 탈옥수처럼 모여 술 한 잔 나누고, 밤이면 혼자 강둑을 걸으며 이 생의 끝에 대해 생각했다. 소설보다 영화보다 기구한 것이 현실이라고 했듯이 내가 본 영화만큼 지금 인간의 삶과 현실도 눈물겹다. 대구를 위로하기 위해 다른 지역 사람들이 보내주는 지원과 애정 어린 메시지가 눈물겹고, 바이러스의 최전방에서 불편한 우주복 같은 방호복을 입고 헌신적으로 진료하는 의료인들의 모습도 눈물겹다. 정부가 국민을 섬기는 건 당연한 책임과 의무지만,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로운 현장에서 고생하시는 의료진들이 참으로 미덥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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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일으키는 현상은 생태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나 어떤 경고의 의미가 크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은 무엇을 경고하고 있을까. 농경시대의 소처럼 21세기 인류가 모두 입마개를 했다. 세상이 너무 시끄럽고 불화와 재앙은 말에서 생기나니, 말을 아끼고 그만 떠들고 입을 다물라는 뜻일까. 욕망의 경제와 소비를 멈추고 이제쯤 자숙하라, 침잠하라, 이 별에서 가장 큰 공해는 인간이므로 자연 파괴와 세상을 오염시키는 짓은 이제 그만하라는 뜻일까.
격리와 봉쇄를 했더니 그 사이 바닷가에 쓰레기가 없고, 평소에 희부옇던 오리온 별자리가 빛나고 마을에서 히말라야산맥이 선명하게 보이고, 거리엔 동물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그것이 이렇듯 개선과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걸까. 강력한 무언의 교훈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람끼리 서로 밉거나 해를 끼치면 서로 분노하고 욕하고 따지려든다. 그러나 태풍이나 홍수, 산불 등 자연 현상이 주는 피해에 대해서는, 심지어 코로나19처럼 치명적이어도 우리는 그것에게 군소리조차 하지 않는다. “코로나19, 뭐 저런 게 다 있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쪼끄만 게 까불고 있네. 야, 너 이렇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면 가만 안 둘 거야.”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자연 현상은 우리의 의지로 바꿀 수 없고, 끝낼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무의식중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연의 분노가 스스로 가라앉을 때까지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해 방어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악마 같은 코로나19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 메시지 앞에서 경건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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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영장류학자인 제인 구달 박사의 인터뷰가 설득력 있고 공감을 준다. 구달 박사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대유행이 인류의 동물 학대와 자연 경시에서 비롯됐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전염병의 출현은 수년 전에 예견됐다. 자연을 무시하고 지구를 공유해야 할 동물들을 경시한 결과로 판데믹(Pandemic 대유행)이 발생했다. 우리가 숲을 파괴하면 숲에 있는 여러 종의 동물이 가까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질병이 한 동물에서 다른 동물로 쉽게 전염된다. 그리고 병이 옮은 동물이 다시 인간과 접촉하게 되면서 인간을 감염시킬 가능성이 커진다. 전 세계 수십억 마리의 동물들이 집약적인 사육농장에서 길러진다. 이러한 조건들이 바이러스가 종의 벽을 넘어 동물로부터 인간에게 전염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늦었으나 지금이라도 제인 구달 박사의 경고에 귀 기울여 자연에 저지르는 인간의 횡포와 오만을 개선해야 한 다. 나는 가수 안치환을 좋아하지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는 별로 유쾌하지 않다. 어디 비유할 데가 없어서 가만히 있는 꽃을 두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그토록 목청을 높이는가. 그 노래를 듣고 꽃들이 뭐라고 할까.
여러 전문가들은 “어쩌면 우리의 삶은 코로나19 이전으로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인류의 생존 방식 자체가 바뀔 것이다”라고 한다. 섬뜩하고 난감하다. 백신이 성공적으로 개발되기 전까지는 땀띠 나는 여름에도 마스크를 껴야 하는 건 아닌지, 마스크를 끼고 다니니 눈 만 보여서 평소에 아는 사람도 모를 때가 있다. 마른기침 한 번 해도 주위 사람에게 눈치가 보이고, 공공장소에 들어가면 귀에 이마에 체온계부터 들이댄다. 열이 없는데도 갑자기 체온이 올라가서 쫓겨날까봐 긴장된다. 없는 애인으로부터 기다리는 문자는 오지 않고, 오늘도 질병예방본부에서 건조한 경고 문자만 몇 통째 왔다.
‘부처님 오신 날’ 봉축행사도 연기되었다. 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을 옮겨본다. 그 옛날, 선각자는 벌써 일찍이 이 시대를 내다본 것만 같다.
“접촉에 얽매이고, 생존의 물결에 휩쓸리며, 그릇된 길에 들어선 사람은 속박을 끊기 어렵다. 그러나 접촉을 잘 알아 평안을 즐기는 사람은, 실로 접촉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쾌락에서 벗어나 평안에 이르게 된다.”
-2020. <대구예술> 여름호 게재
첫댓글 꼭꼭믇어둔 마음속의진솔한이야기가 토요일아침청량감을느꼈습니다
좋은글고맙세 잘읽었습니디
회장님, 긴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