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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리 한반도 길 나의 길 북간도 중심길
북간도 중심 도시 연길시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 주도이며 한중수교 이후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2014년 기준 도시 인구는 약 65만 명으로 20년 사이 3 배 가까이 늘었으나 조선족 인구는 급속히 줄고 있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연변은 이주 초기 당시 농업 중심 도시나 2.000년대를 전후해 중장년층 조선족 대다수가 대도시나 한국등으로
빠져나가 농촌 노령화 현상이 급속히 진행되고. 현재 연길시를 중심으로 서비스 산업이 빠르게 성장해
농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갈수록 저조하다, 지금 연길시 경제의 90% 이상이 서비스 산업이 차지한다.
외지로 빠져나간 조선족 중장년층들이 벌어들인 수입을 연길시에 남은 가족들에게 송금하는데 이 액수가
연길시 정부 연소득 보다 높아 서비스 산업 발전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물가는 치솟고 빈부 격차는 더욱 심화돼 한 번 떠난 이들이 다시 유턴하기 쉽지 않은 도시로 변해가고 있다.
중국 내 대졸 평균 월급이 2014년 기준 3300원인데 연길시 식당 종업원 평균 월급은 4.000원이 넘는다.
연변은 지하자원이 없고 2차 산업이 발전하기 어려운 지형적 여건 등이 조선족을 외부로 내모는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되고 연변 조선족 자치주 정부에서는 서비스 산업에 치우친 경제 구조의 취약점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개발구(공단)를 건설하는 등 새로운 정책들을 내놓으나 그리 간단치 않고 살인적 물가 잡기는 역부족이다..
중국 중앙 정부에서도 예의 주시하며 특별대책을 강구하고 있으나 마땅한 대안책을 내지 못하고 있다.
중국 내 최고 수준의 임금 도시나 조선족 인구는 매년 줄고 있다는 기이한 현상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
높은 수준의 임금과 소득 등은 한국등으로 유출된 조선족들로부터 송금되는 외부의 많은 자금이 물가 거품을 일게 했고
임금이 따라올라 서민들의 소득으로는 치솟는 물가를 따라잡기 어렵다.
한국 마트에서 1100원 하는 한국산 소주 1병 가격이 이곳 마트에서는 15원으로 우리 돈 2.500원 정도다.
또 재래시장 장바구니 물가도 만만치 않다. 20여 년 전 서 시장에서 자연산 송이 상품 1Kg을 50원에 살 수
있었는데 지난여름 600원까지 치솟았다, 초기 환율까지 계산해 보면 20년 사이 22배 기까이 오른 살인적 물가다.
임금과 소득은 중국 평균의 갑절이 넘고 물가는 2~ 3 배 뛰고 있다.
남아 있는 조선족들마저 버티지 못하고 외부로 빠져나가는 기이한 현상이 지금 연길시에서 일어나고 있다.
연길시에 거주하는 조선족 인구는 도시 전체 인구의 4분의 1 수준이며 현재 약 15만 명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서 3D 업종에 종사하는 조선족은 70만 명에 가깝고 또 미국에 거주하는 조선족도 약 20만 명으로
현재 연길시에 거주하는 조선족들보다 더 많은 아이러니한 현 상을 보이고 있다
2000년에 20만 이 조금 넘던 도시 인구가 2010년에 40만이 넘고 10년 사이 2배 가까이 늘었고.,2014년에는 약 65만 명에
달해 4년 만에 다시 1,6 배 이상 인구가 늘었다.
인구 유입의 가장 큰 원인은 근로자들의 임금 수준이 중국 내 타 도시 평균을 넘고 배이상 높다는 소문이 나면서부터다.
유입되는 인구 대다수가 중국 내 서, 북 지역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나선 위구르족과 몽골족 등이다..
이들은 중국말도 우리말도 되지 않는다, 소통 부재로 취직이 힘들고. 이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은
막노동이나 나쁜 짓밖에 없다, 연길시는 현재 치안이 안정된 상태이나 시내에 나가면 좀도둑이 많다.
지갑은 늘 조심해야 한다.
끝나지 않은 이들의 유랑 생활. 한 세기가 지나서도 대물림으로 이어지고 연변에 남아 있는 조선족 대다수는
현재 이들의 어린 자녀들과 노년층이며 또 잘 나가는 서비스업계 업주들이다, 문화혁명 이후 초기 개방 정책의 혼란기에 많은
돈을 긁어모은 소수의 졸부들이며 정상적 기업은 없다고 보는 게 맞다.
시간이 지나 더 이상 빠져나갈 인구가 남지 않고 노년층이 모두 세상을 뜨고 나면 지금 조선족 연변 자치주 경제 구조는
자연스럽게 무너지는 취약점을 안고 있어 북간도 조선족 자치주 미래는 밝지 않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자치주 총인구 중 3분의 1에 미달하면 조선족 자치주는 취소된다, 지금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설립 후 최대 위기에 직면한 안타까운
현실에 놓여 있다.
1차 1월
다음 날 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유경호텔에서 새벽을 맞이한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서시장을 찾는다,
시장 입구에 접어들자 장판이 이제 막 열리고 있으나 아직 이른 시간이라 많이 한산하다.
좌측 편 가게 간판에 재미있는 글귀가 하나 시야에 들어온다
바삭 구운 오리.
바삭은 경상도 사투리로 이곳에서도 등장한다.
연길 시민과 연변 지역 사람들 대다수가 함경도 출신들이다.
한중수교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는 조선족 대다수가 억센 함경도 사투리를 구사했는데 2004년 참여정부 당시
재중 동포법이 개정되고 한국 방문이 활발해지고 지금 연길시 조선족 대다수는 서울말을 구사한다.
바삭 구운을 경상도 말로 달리 표현하면
단디 꾸버라
디기 꾸버라
시기 꾸버라
미 꾸버라
바삭 꾸버라
또 야무지게 꾸버라 등 경상도 사투리로 다 같은 뜻이다, 참 재미있는 우리 한글이다.
서 시장 새벽장터 풍경이 다각도로 다가온다.
숙소로 돌아와 2층 식당에서 조식이 시작된다
20여 년 전이나 지금도 토속적 된장국 맛이 식성에 맞다, 긴 세월 유경호텔을 이용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또 어려운 북녘 동포들과 같이한다는 내 마음도 함께 담겨 있다.
유경호텔 조식
오랜만에 식성에 맞는 조식을 마치고 거리 투어에 나서는데 북간도 차가운 바람이 세차다.
찬 바람에 쫏겨 커피숍에 들러 따뜻한 커피 한잔에 시간을 보낸다.
연변대학교 특강 시간이 다가온다.
시가지 투어에 나선 일행들이 하나둘 호텔 로비에 모여들고 택시 3대에 나누어 타고 연변대학 서문으로 간다.
강의동 건물로 들어가 6층으로 올라가자
김 교수가 몇몇 여학생들과 함께 우리 팀을 반갑게 맞이한다.
강의실 문화가 20여 년 전 김 교수와 첫 인연을 가질 때와 많이 달라져 있다. 당시 학교 출입구는 정문 하나밖에 없었고
강의동은 본관 1층에 있었다, 당시 원탁형 테이블 위에는 생수병 대신 재떨이가 놓여 있어 매우 의아해했는데 당시
이곳 문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담배를 피우며 행사를 진행했고. 당시 한국에서 공수해 간. 전문서적 500여 권의 기증식도 함께 있었다.
중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캠프스 분위기도 많이 바뀌어 있다
강의 주제가 새롭게 다가온다. 한반도 문제와 한중 협력
김교수는 수십 년 넘게 남북을 자유롭게 넘나 다니며 김일성 종합 대학 등 또 남쪽의 유명 대학이나 통일부에서
주관하는
초청 강연자로 남북의 현실을 직접 체험한 교수다. 한국 중앙 언론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동생은 북경대학 교수로 북경대학 민족문제 연구소 소장을 겸하고 있다. 연변 조선족 사회에서 보기 더문
학문으로 성공한 형제들이다
두 시간 가까이 열강이 이어진다.
내용을 요약하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중국 중앙 정치권에서도 이를 바라지 않는다. 남쪽은 서서히 통일을 준비해야
하고 북한과 대화를 해야 한다.
노숙자와 싸우면 누구를 탓하겠는가??
햇볕 정책의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저들을 서서히 녹여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되고
필자도 같은 생각이다, 기념 촬영을 마치고 연변대학 일정을 마무리한다.
강의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문이 열리고 달덩이 같은 아가씨가 나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한국에서 지금 귀국길이라며 교수님께 인사드리러 왔다고 한다, 김 교수가 제자라며 인사를 시킨다. 이곳에서
대학을 마치고
서울 동국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 학위(북한학)를 받고 지금 막 귀국했다고 한다.
무척 반갑다. 조선족 동포 사회에서 미래를 견인해 갈 동량들로 밝은 얼굴만큼이나 이들의 미래를 보는 같다..
더 많은 학생들이 남쪽과 인적 교류를 통해 한 세기를 잃어버린 이들의 정체성을 살려내고 우리 사회 순기능을
연변 사회에 전파하는데
학생들의 교류가 가장 큰 성과를 내고 효과적일 것이다.
연변대학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교문을 나서자 어느새 어둠이 내린다.
몇몇이 어울려 유경호텔에서 석식을 나누기로 한다.
1층 식당에 들어서자 가족으로 보이는 한 팀이 벌써 노랫가락에 흥을 내고 있다.
조선족 동포들로 장모님 생신을 맞아해 사위가 쏘는 자리라고 한다.
이쪽 사회서도 여자들의 파워가 세다.
생일 축하송이 나오고 아리랑 등이 흥겹게 흘러나온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까지 모두 모여 한바탕 흥을 돋우며 춤판이 벌어진다.
얼씨구 조타
장모님 생신을 맞아 절시구 좋다.
거문고와 가야금 장단에 맞추어. 한 가족이 흥겨워하는 모습들. 옆 테이블에서 지켜보는 우리도 내내 즐겁다.
이들의 노래가 한 타임 끝나자 우리 팀 김 선생이 카운터에 가 조화를 하나 사들고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른
평양 미녀들에게
전달한다, 전해받은 꽃은 다시 카운터로 돌아와 재판매되는 방식이다. 봉이 김선달 식으로 참 재미있는 꽃 장사다.
하룻밤에 12번도 더 팔릴 수 있는 꽃으로 봉이 김선달이 꽃이다.
다음은 한복을 이쁘게 차려입은 평양 미녀가 홍도야 울지 마라 를 열창한다.
꽃 하나를 사들고 무대로 가는데 뒤에서 누가 잡는다.
선생님, 노래는 한 사람이 불러도 거문고와 장구등 모두 셋입니다. 한 사람만 주면 두 명은 슬퍼합니다."
세 사람게 다 주면 함께 웃는다며 꽃 2개를 더 건네며 200원을 요구한다.
미처 몰랐다. 맞는 말이다.
200원을 더 건네고 꽃을 세 아름이나 들고 무대에 올라가 하나씩 나눠준다.
한순간에 200원이 털렸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들은 남쪽 사람들을 애써 외면하며 경직된 서비스로 업무 외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이런 유머를 날리는 것 자체가 이들이 이제 중국에서 많은 여유를 찾고 자본시장의 순기능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년 전 큰딸과 이곳에서 며칠 머물 때,
같이 기념사진 등을 찍으며 둘이가 어울려 친근하게 지냈는데 지난겨울 혼자 왔을 때는
딸의 안부를 물으며 선물까지 골라주며 정을 내던 착한 북녘의 딸들이다.
식사를 마치고 가는 길에 식당 외부까지 따라온다.
다음에 또 꼭 오시라요
2차 5월
연길시 중심 거리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자리한 주정부 종합 청사를 찾아간다,
새롭게 완공된 주정부 종합청사 앞 광장은 연길시 광장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다.
특히 신랑 신부가 식장에 가기 직전 이곳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길을 비켜라
신랑 신부 납신다.
광장 한쪽에서는 아들, 딸, 손자. 며느리, 사위까지 다 모여있다.
길림시에 산다는 조선족 가족들로 형님 환갑잔치를 맞이해 온 가족이 함께 연길시에 나들이 왔다고 한다. 6~70년대
우리 사회서도
서울구경 가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와 흡사한 분위기다.
동생이라는 사람이 우리 팀에 가족을 소개하면서
자신은 한국 경주에서 일한다며 얼마 전에 왔는데 또 한국에 돈 벌러 간다며 한국이 너무 좋다고 한다..
모처럼 접하는 환갑잔치 참 보기가 좋다
우리 남쪽 사회 서는 어느새 환갑잔치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시내 중심지 공원로에 자리한 연길공원이다.
남쪽의 70년대 공원 풍경과 흡사하다.
한쪽 공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흥에 겨워 즉석에서 한바탕 춤판을 벌이고 있다.
다 함께 차차차 귀에 익은 노랫가락들로 단번에 조선족임을 알 수 있다.
한이 묻어있는 노래와 율동 등.
가는 세월 잡을 수 없다.
우리 할매 할배들 건강하세요
바로 옆 한 곳에서 한족들의 놀이에서는 처음 접하는 악기들이 많이 보이고 조직된 놀이문화로
즉석에서 흥에 겨워하는 조선족들과는 차이가 있다.
연길공원
지구 온난화 영향일까? 연변의 날씨도 많이 덥다. 5월 초순인데 거리 투어 내내 땀에 젖는다.
공원에서 택시로 기본요금 거리에 자리한 유경 호텔 2층 식당을 다시 찾는다.
필자는 연길에서 택시를 많이 이용하는 편으로 싼 요금에 비해 시간적 이득을 많이 본다.
연길시는 중국의 많은 도시들 중 두 번째로 택시 밀도가 높다. 길거리에 가만히 서 있어도 택시가 알아서 멈춘다.
기본요금 5원(3 lkm)으로 매 3km마다 3 원식 올라가며 3분 정차해 있을 때도 3 원식 올라간다. 기본요금으로
시가지 중심 대부분 이동이 가능하다 연길시 물가에 비해 택시 요금이 가장 싼 편으로 20년 전이나 지금도 5원이다..
연길 공항에서는 택시 타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공항 밖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는 무조건 타지 말아야 한다. 공항 내 택시를 이용하면
택시가 손님을 기다리며 대기한 주차요금을 고객이 물어야 하는데 대기시간에 따라 주차 요금이 5원에서 20원까지
차등이 있다, 이 주차 요금을 고객이 물고 공항 주차장을 빠져나올 수 있는데 이것을 아끼겠다고 공항 밖을 나가
택시를 타면 2~300원은 기본이다
심하면 1.000원까지 왕바가지를 쓸 수 있다. 이들은 연길 조폭 택시로 우리 여행객들의 각별한 조심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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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호텔의 평양식 냉면은 연변의 어느 냉면보다 깔끔하고 감칠맛이 있다.
쫄깃한 면에 남북의 슬픈 맛까지...
육회 무침에 평양 소주로 반주로 곁들인다.
내두촌 손혜도 할머니 아리랑은 세 잔이 넘으면 신기루가 보이고
이태백은 삼백 잔에 달나라에 간다.
평양 소주 한잔은 통일을 노래한다.. 평양 딸들과 인증 샷을 하나 남기고 밖을 나선다. 통일 후 다시 만나자며
식당 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한다.
평양냉면과 반주를 곁들이고 다시 거리로 나서 진달래 광장으로 간다
2002년경 처음 등장한 연길시 광장문화의 중심지다. 당시 많은 연길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연길시 명물 거리로
등장했다..
당시 한국 백두산 여행객들이 많이 찾았는데 지금 연길시 발전 속도만큼이나 구시대 유물이 돼 아이들
놀이 공간으로 변해있다
광장의 기념비는 진달래꽃을 형상화시킨 조형물로 진달래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정부 연길시 시화다.
2004년 8월 광장 노상에 동전 노래방 기기들이 즐비하게 설치돼 있었다
동전을 넣고 노래 한 곡을 부르는데 주변에 숨어 있던 탈북자가 한국 사람임을 알아보고 다가선다.
젖먹이 아이를 업은 30대 초반의 탈북녀다. 북조선에서 왔다며 조금만 도와 달라고 한다.
중국 공안들의 눈을 피해 구석진 식당으로 데려가 식사를 함께 나누며 많은 대화를 나눈다.
배가 고파 아이를 업고 두만강을 건너온 지 20여 일 지났는데 돌아갈 나라가 없다며. 나라 없는
서러움이 상갓집 개보다 못하다며 울먹이던 한 여인의 절규가 아직 것 내 귓전을 때린다.
가슴 아팠던 기억이 새롭다.
연변 대학교
연길시 중심거리 공원로에 자리한 연변 대학교다.
광복 후 1949년 설립자 임민호 선생이 조선인 지도자들과 함께 뜻을 모아 그해 3월 20일 설립한 대학으로
중국 내 55개 소수 민족들 중 유일하게 조선족만이 가진 자랑스러운 종합 대학교로 모택동의 중국 건국일 보다 빠르고
조선족 자치주 정부 수립보다 빠르게 개교한 대학으로 당시 조선인 지도자들의 혜안이 돋보인다.
종합 대학교로 명실 상부한 중국의 중점 대학이다.,
연구 기관으로 동북아 문제 연구원. 동방 문화 연구원, 민족 연구원, 백두산 자연보호 연구원 등이 있는데
특히 동북아 문제 연구소의 연구 결과는 중국의 동북아 정책 결정 과정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남북 관계에도 중요한 기초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통일부와 교류도 잣다.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이 중국과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면서 이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한국의 유명 대학과 독지가들의 지원이 뒤따르며 중국 내 명문대학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가 잠시 걸으면 대학 본관이 나온다.
본관 앞에 진리, 선행. 융합등 글귀가 보이는데 연변대학고 교훈으로 보인다.
5월 연휴를 맞아 외부 학생들이 많이 찾아왔다, 길림에서 연변대학교 캠퍼스 구경 왔다는
길림대 여대생들 멋지게 한 캇트를 부탁한다. 김치,,
연변대학교
연변대학교 설립자 임민호 선생의 동상 앞이다
이색적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여학생 셋이 동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
어떤 기도를 하느냐??
고 3인데 이번 신학기 연변대학에 꼭 붙게 해 달라는 소망을 빌었다고 한다.
아이들 다운 순수한 기도다.
소망대로 꼭 붙거라
중국은 우리와 달리 후학기가 신학기다.
연변대 부설 과학기술대학
과학 기술대학은 연길시 중심지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연변대학 부근에서 택시를 타면 12원 정도의 요금이 나온다
정문 앞에 내리면 정문 외 민가나 다른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20여 년 전 연변대학 정문 앞과 같은 분위기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캠퍼스 내 건물 전체가 하나로 연결된 특이한 구조다, 민족을 하나로 융합한다는 의미를 담고
연변의 만리장성이라는 취지로 대학설립자가 직접 교수들과 함께 설계했다고 한다.
1949년 연변대학교 개교 당시 선조들의 뜻을 이어받은 걸출한 민족주의자 한분이 1992년 한중수교 당시
한국에서 건너왔다.
이분이 당시 시대에 부응하는 이공계 대학을 연변대학교 부설로 하나 개교했다.
조선족 동포사회 2세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교훈이 융합이다. 융합에는 남과 북 연변 즉 북간도 까지라는 설립자의
깊은 속내가 숨어 있을 것이다. 설립자는 현 총장인 한국인 김진경 총장이다. 현재 평양의 분교까지 경북대 성균관대 연세대 등 한국의
명문대학들과 교환 협약이 체결돼 있고 안철수 연구소와도 산학 협력을 맺고 있다.
캠퍼스에는 한국에서 온 교환학생. 현지 조선족 학생. 평양의 과학기술대학에서 온 북한 교환 학생들이 함께 어울려
국경도 이념도 없다. 다 같은 민족의 형제들로 자유롭게 함께 학업에 매진한다.
미래 우리 민족 통일의 동량들이다.
남북 정치인들처럼 싸우는 모습도 없다.
한 시대를 앞서 미래 우리 민족 통일을 내다보는 교육현장으로 한 세기 전 만주 신흥무관학교 독립군 양성소가 다시
진일보한 느낌이다.
김진경 총장님 고개가 숙여집니다.
무안한 존경을 담아 남깁니다..
목숨 바쳐 사랑하라
과학 기술대학 개교 당시 설립자의 이념이 담긴 글귀다. 사랑은 목숨보다 고귀하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참 좋은 글귀다.
목숨 바쳐 사랑하라
연변 개척시대 당시 수레도 보이고..
캠퍼스 한 곳에서는
가족 야영객도 보인다.
두 여학생이 캠퍼스의 추억을 담고 있다.
꿈을 안고 펼쳐라 목숨 바쳐 사랑하라
과학 기술대학 일정을 마치고 거리투어 마지막 볼거리로 연길시 재래시장 서시장을 찾는다.
시장 입구에서부터 노점상이 많이 보이고 좌측 한편에 쭈그리고 앉은 할매들의 모습은. 필자가 어릴 적 본
남쪽 시골장터 풍경 그대로다
마늘. 파. 감자. 신네이. 두릅등 장거리들도 똑같다.
서시장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변 조선족 자치주 면적은 43,474㎢로
남한 면적의 반 정도며 자치주 주도 연길시를 중심으로
6 개시(연길시, 용정시, 화룡시, 훈춘시, 도문 시, 돈화시)와 2개 현(안도현, 왕청현)으로 구성돼 있고.
연길시 인구는 2015년 현재 약 65만 명에 달한다.
자치주 초기 당시 조선족이 차지한 비율이 70%가 넘었는데 2015년 현재 조선족이 차지하는 도시 인구 비율은 25% 수준이다.
거리에서 조선족 만나기가 쉽지 않다 간혹 만나는 조선족들은 억샌 함경도 사투리 대신 에둘러 서울말을 구사한다.
시내 곳곳에는 한국 상품 전문매장들이 즐비하고 주말이면 서시장 주변에서는 밀려오는 차량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현재 연길시는 성장에 따른 많은 문제점들이 지적되고 있고. 물질을 찾아 다 떠나버린 빈자리는 지금 외지인들이
대신해 민족의 결집력이 힘을 잃고 조선족 가정들이 점차 붕괴되고 있다.
우리는 조선족 이주사를 좀 더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들은 1880년대 초기 당시 이곳으로 이주를 시작해 1950년대 초반까지 약 70여 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이곳으로 이주했다.
1880년대 초기 당시 함경도 지역의 가뭄으로 수년에 걸쳐 흉년이 들고 기근에 허덕이던 함경도의 민초들이 가장 먼저
두만강을 건너와 첫 이주가 시작됐고
1905년 일본은 조선과 을사 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다. 이 무렵 국내 항일 독립투사들이 국내서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지자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또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북간도를 점령하고 이곳 조선인들에 대한 통치수단의 일환으로
조선에서 반민족 행위자들을 선발해 교사. 의사, 순사등의 직위를 줘 이곳으로 데려왔다, 또 일본이 대련 장춘 간 철도 개설 당시 만주
개척단이라는 구실로 조선인을 이곳에 가장 많이 이주시킨다.
그리고 50년대 6.25 사변이 끝나고 북한의 김일성 체제에 반감을 가진 북한 주민들이 이곳으로 자발적 이주를 했다.
이주 경위는 조금씩 다르나 대부분 힘없는 민초들이었다..
1945년 8월 이곳에서 광복을 맞이한 조선인들은 남쪽이나 북으로 자유롭게 돌아올 수 있었고 당시 조선인 반 이상이 남쪽이나
북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반 정도가 이곳에 남아 정착한다.
이후 이곳 조선인 지도자들은 중국 모택동 공산당에 줄을 서 중국 국공내전에 조선인들을 참전시킨다.
1949년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 장개석이 패하고 중국 본토에는 모택동 공산당 중화인민민주공화국이 들어서고.. 다음 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 이때 모택동은 항일 공산당 동지 김일성을 돕기로 하고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인 대다수를 항미원조 전쟁의 일원으로
차출해 중공군과 함께 남북전쟁에 투입시킨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9월 3일 조선인 지도자들은 모택동으로부터 연변 조선족 자치구를 받아내고 선포한다.
모택동은 국공내전과 남북 전쟁에서 조선인들의 기여도를 일정 부분 인정한 것이다.
남북 전쟁이 끝나고 1955년 12월 자치구에서 한 단계 격하된 조선족 자치주로 공식 선포되고 초대 주장 주덕혜가
연변 조선족 자치주 정부를 이끌어간다. 조선족 명칭이 이때 공식화 되고 한반도 조선인은 결국 중국 내 하나의 소수민족 조선족으로
전략하고 만다..
공산당과 이념을 달리 한 한국은 1049년 당시 모택동 공산당과 국교를 단절하여 북간도에 남은 조선인들은 남쪽으로 돌아올 길이 막혀 버린다.
1992년 한. 중 국교가 정상화되고 북간도가 열리자 반세기 가까이 잃어버린 한반도의 역사를 찾아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북간도를 찾아갔지만 당시 역사 주역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난 뒤였고 공산당에 학습된 남은 2~3세들은
어느새 뿌리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시 많은 조선족 2~3세들이 한국 드림을 안고 한국을 찾아오는데 당시 자본의 노예가 돼 버린
이들은 불법입국, 체류 등 적지 않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나 누구 한 사람 관심을 주지 않았다.
2004년 참여정부 당시 한반도 선구자들의 후예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특단의 조치를 통해
조선족 동포 모국 방문법을 새롭게 개정해 같은 민족의 구성원으로 제자리를 찾아주게 된다
이후 이들은 한국 출입국이 자유롭게 가능해지고 우리 사회와 더 많은 소통이 이뤄지고. 이후 노무 등으로 얻은 소득은 연변에
유입되고 연변 조선족 사회서는 성장 동력을 얻었다.
현재 조선족은 한족을 포함해 중국 내 56개 전체 민죽들 중 소득이 가장 높은 민족으로 평가받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민족 포용 정책이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한, 중 축구 경기가 열리면 지금 이들은 당연히 중국을 응원한다. 이들은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혁명 등을 거치면서
소수민족이 생존 게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통일된 하나의 한반도는 남북을 포함해 연변 즉 북간도까지다. 북간도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조선으로
어어진 한반도의 고토다.
그 중심에서 피와 땀으로 일궈낸 조선족 자치주 연변사회 우리는 이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를 잊으면 미래가 없다.
팔공산 자락에서,,,,,
이 정 우
백두산과 1만 리 한반도 둘레길 어느 구간이던 정보 지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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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함께 하길 기대합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걸으면 우리길이 된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 승리한다
이정우 E_mail : kdjj8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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