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야스나고라수도원에 보존된 검은 성모화.
폴란드 쳉스토호바 침략·항쟁에서 지켜준 ‘수호자’
매년 전 세계에서 500만 명 이상의 순례객들이 찾아오는 폴란드 최대의 순례지이며 영적 수도라 할 수 있다. 야스나고라수도원에 보존된 검은 성모화를 보려고 수많은 신자들이 쳉스토호바를 방문한다.
전승에 따르면 이 그림은 성 루카가 그린 것으로 300년 동안 예루살렘에 숨겨져 있던 중 성녀 헬레나가 성 십자가를 찾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헬레나 성녀는 이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왔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성화를 위한 성당을 봉헌했다고 기록돼 있다.
검은 성모화는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벨즈를 거쳐 최종적으로 1382년 4월 오폴레 공작 부아디수아프 오폴츠치크에 의해 쳉스토호바에 도달하게 됐다고 한다. 17세기에는 성화가 기적을 일으켜 야스나고라수도원을 스웨덴 침략으로부터 구해주었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또 성화를 보관하고 있던 성당을 검은 성모화가 화재로부터 구해냈다는 설도 있다.
검은 성모화는 특히 뺨에 두 줄의 상처가 나있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것은 1430년 후스파가 성모화를 약탈하는 과정서 그림을 실은 마차가 떠나지 않자 성모화를 땅에 내동댕이쳤고 일당 중 한명이 칼로 초상화를 내리치면서 두 줄의 상처가 났다는 것이다.
이 성화는 처음부터 정치적 불안 시대에 살던 수도자들과 기사들 그리고 치유 은사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병자들, 교회의 일치를 위해 기도해온 신자들로부터 큰 공경을 받았다고 알려진다.
18세기 폴란드가 독립을 지키기 못하게 됐을 때, 성모화는 모든 항쟁의 수호자가 되었고 민중들은 마리아를 해방과 국가 통치권의 수호자로 열렬히 공경했다. 현재에도 폴란드교회의 심장 역할을 하는 곳으로 주교회의를 비롯, 다양한 교회 관련 회의 심포지엄 등이 모두 이곳에서 열린다.
폴란드 쳉스토호바의 야스나 고라(Jasna Gora, 빛의 언덕)에 있는 성 바오로 은수자회의 수도원에는 검은 성모(폴란드어 : Czarna Madonna)로 알려진 성모 마리아의 성화가 모셔져 있다, 이 성화는 600년 이상 폴란드와 친숙한 관계를 맺고 폴란드인들의 신앙과 민족적 단합의 상징으로 수많은 역사적 질곡에서 폴란드인들과 함께 하며 폴란드의 상징이 되었다. 이 성화는 특히 폴란드인인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이 요한 바오로 2세로 교황에 선출되면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성화는 동방 정교회의 ‘호데게트리아’(길을 가리키는 인도자)라는 성화상의 전통적인 구도로 그려져 있다. 성모님은 오른손으로 구원의 원천인 아기 예수를 가리키는 손짓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아기 예수를 항해 주목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성모님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는 왼손으로 복음서를 들고 오른손은 앞으로 들고 축복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는 백합 문장이 있는 겉옷을 입고 있다.
이 성화의 유래와 제작 년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본래의 성화가 1430년에 후스파의 급습을 받아 크게 파손 당한 후 복원하면서 이곳저곳을 다시 채색하였기 때문에 성화상의 연대를 측정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스웨덴의 약탈과 파괴로부터 수도원 구해줘
이 성화는 신비스런 여행 끝에 이곳에 모셔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성화가 도착하기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성 루카가 성가정의 집에서 예수께서 성 요셉과 직접 만든 탁자 위에다 성모 마리아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때의 성화가 이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승일 뿐 신빙성은 없다.
그리고 야스나 고라의 가장 오래된 문서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이 성화상은 4세기에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발견해서 유럽으로 건너왔는데 이후 헝가리로, 또 우크라이나 지역의 루테니아(Ruthenia)와 벨즈성(Castle Belz)을 거쳐 그 후 최종적으로 1382년 8월 오폴레 공작 부아디수아프 오폴 츠치크에 의해 폴란드의 쳉스토호바에 옮겨졌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성화를 과학적으로 조사해본 결과, 5세기 내지 8세기의 것으로 판명 되었다.
이 성화상이 더욱 유명해지고 폴란드인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여러 가지 기적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17세기에 스웨덴의 침략으로 야스나 고라의 수도원이 위험에 처했을 때 이 성화 앞에서 모두가 함께 기도를 바쳤고, 성모님께서는 기적적으로 약탈과 파괴로부터 구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이후로 전쟁의 양상이 폴란드에 유리한 쪽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인 1656년 4월1일 폴란드 국왕 얀 카지미에슈는 르보브 대성당에서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를 폴란드의 여왕으로 선포하는 의식을 치렀다.
이 성화의 성모님과 아기예수의 피부는 짙은 갈색인데 어두운 실내에서는 특히 검게 보여 검은 성모라 불리기도 한다. 피부가 이러한 색이 된 것에 대해서는 성화를 보관하고 있던 성당에 화재가 나서 불에 의해 그슬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또 다른 의견은 성모님 성화 앞에 너무나 많은 초를 봉헌하여 이렇게 변했다고도 한다.
폴란드 조국의 해방과 국가 통합의 수호자로 모셔
성모의 뺨에 생긴 두 줄의 상처에 관해서도 기적적인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1430년에 개신교 후스파(Huss :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가 성 바오로회 수도원을 습격하여 수도원 안에 있던 성물들을 약탈하였는데, 도난품 가운데는 이 검은 성모 성화도 있었다. 후스파는 야스나 고라의 모든 보물들을 마차에 싣고 떠나려고 하였지만, 말들은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이 성모 성화 때문에 말들이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들은 성모성화를 땅에 내던져 버렸다. 그러자 비로소 말들이 마차를 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약탈자 중의 한사람이 성화를 뒤덮고 있던 보석들과 금을 보고 성화에서 떼어 내려고 칼로 성화를 내리쳤는데, 이때 성모님의 뺨에 두 줄의 큰 상처를 남겼다. 이 약탈자가 다시 세 번째로 칼을 내리치는 순간, 갑자기 땅에 쓰러져 고통으로 몸부림치다가 죽어버렸다. 그 후에 이 흉터를 없애려고 수많은 화가가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그 상처들은 매번 다시 나타났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약탈자가 성화를 향해 두 번째로 칼을 내리친 순간, 성모 마리아의 뺨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다고 전해진다.
18세기에 폴란드는 독립을 잃고, 국토가 주변 여러 나라에 의해 나누어지는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 러시아의 혁명 이후 잠시 독립을 얻었지만 이어 공산치하에서 많은 박해와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폴란드 민중들은 이 성모 마리아 성화 앞에서 기도하며 조국의 해방과 국가 통합의 수호자이며 모든 항쟁의 중심으로 모시며 그 모든 시련을 이겨냈다. 그로인해 오늘날도 이 검은 성모성화가 모셔진 쳉스토호바의 야스나 고라 수도원은 폴란드의 영적 수도로 인정받고 있으며 폴란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순례 장소가 되어 매년 폴란드의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역대 교황들도 이 성모님의 성지를 방문하는 순례자들에게 영적인 지원과 함께 많은 특전들을 부여하였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5월호, 글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