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입 연합고사를 치르고 나니 석 달여의 긴 겨울방학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헌 책방에서 무협지 사서 볼래?"
"무협지...?"
비슷한 시기에 대입을 치르고 나처럼 시간이 많아진 가람형이 제안을 해왔다.
그때까지 참고서를 제외하면 헌 책이라도 사서 읽어본 적은 없었다. 형과 누나가 각 둘이다 보니 조금 낡기는 했지만 형과 누나들이 읽던 책이 제법 있었고, 중학생이 되면서 동화와 만화에 손을 놓고 나서는 책읽기에 그렇게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니 외팔이 영화 기억나제? 무지 재미있어했잖아."
"그래 히야. 히야도 재미있어했잖아. 명절에 용돈 타서 그거 같이 보러 갔잖아."
"그런 걸 책으로 만든 게 무협진데, 영화보다 훨씬 더 재미있단다."
초등학생일 때 본 왕우 주연의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돌아온 외팔이' '일본에 간 외팔이'와 로레 주연의 '옥중도' 깡따위 주연의 '복수' 등등의 영화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 사러 가자. 히야~"
"무협지는 '와룡생'이 쓴 책이 제일 재미있다더라."
서로 꼬불쳐둔 용돈을 합해서 집 근처의 헌 책방에 가서 무협지 두 질을 사서 왔다.
<大血掌>과 <魔雄>, 그때 산 책 제목이었다.
며칠 동안 날밤을 꼴딱 샐 정도로 그렇게 재미있는 책읽기는 처음이었다.
부모를 영문 모르게 잃은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무예를 익히고, 강호로 나아가 악의 무리들을 통쾌하게 처단도 하고, 때론 위기도 겪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면서, 결국은 부모의 원수를 갚고 강호의 평화를 가져온 후 강호를 떠나 은거하는 이야기. 지금 돌아보면 너무나 상투적인 무협지 이야기였는데... 처음 접하던 그때는 신세계였다.
그 속엔 정의가 있고, 사랑이 있고, 우정이 있고, 용기와 인내가 있고, 모험이 있고, 뜨거운 피눈물도 있었다. 두 번을 읽고 나니 세상의 다른 재미들이 다 하찮게 여겨졌다.
형은 대학 입학을 앞두고 다른 관심거리가 많아서였는지, 사온 무협지도 다 읽기 전에 손을 놓았지만 나는 새 무협이야기에 목이 말랐다. 용돈이 궁하니 새로 헌 책을 사서 보기는 힘들었고 결국 만화방에서 빌려보는 방법을 찾아냈다.
만화방은 그 당시 규제가 풀린 성인만화들로 넘쳐날 때였고, 사춘기의 또래 친구들은 그 만화들 보는 것에 열을 올렸지만, 내 관심은 오직 무협지였다.
한 권씩 빌려오던 것이 두 권으로, 세 권으로 늘어났고, 그 만화방에 있던 무협지들을 다 읽어갈 즈음, 새로 입학할 고등학교에서 입학 전 지정한 날에 학교를 찾아오라는 연락이 왔다.
학교에 갔더니 수학과 영어 시험을 쳤는데, 연합 고사를 치르고 나서 무협의 세계에 빠져 사느라 공부라곤 해본 적이 없는 데다가, 연합고사형 객관식도 아니고 모두 주관식으로 푸는 문제들이라 제대로 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보니, 그 시험은 반 편성 시험이었고, 나는 특설반이 아닌 평반으로 편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업자득이니 누굴 원망하랴...
고등학교 1학년, 나는 시련을 극복하려는 무협지의 주인공이 되어 살았고, 다행히 고2로 올라가면서 이과 특설반에 간신히 턱걸이를 하게 되었었다.
그 후로 가끔 한 번씩 무협지를 읽었지만 그때처럼 빠져들진 않았다. 대신 장편 대하소설들을 읽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긴 소설들을 지루해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된 데에는 그때 읽은 무협지의 공이 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괜히 애들에게 판타지 소설 읽는 걸 가르쳐 가지고......"
아내는 나를 보며 자주 그런 불평을 해댔었다.
딸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 내가 책 대여점에 가서 '드래곤 라자'라는 판타지 책을 빌려주며 읽어보라고 권했고, 그때부터 판타지 소설에 맛을 들인 딸이 나이 서른을 넘긴 요즘까지도 판타지 소설들을 즐겨 읽는 걸 두고 하는 불평이다.
아들도 장편 책 읽기의 시작은 '드래곤 라자'였다. 때문에 아들의 초등학교 시절 추억엔 밥을 굶고 잠을 자야 했던 추억도 제법 서럽게 남아있다.
여러 번에 걸친 제 엄마의 '당장 밥 먹으러 안 오면 밥 안 준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누나가 다운받아준 '드래곤 라자'를 읽다가 그만 제 엄마의 화를 꼭지까지 돋우었기 때문이다. 물론 덕분에 내가 아내에게 받은 눈총 또한 사뭇 살벌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드래곤 라자'는 내 취향에는 안 맞아 읽다가 말았지만, 딸과 함께 읽은 판타지 소설 '하얀 로냐프강'과 '은하영웅 전설'은 지금까지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즈음에는 여유시간이 생기면 대체 역사소설 작가인 <소년행>의 연재소설들을 카카오페이지로 즐겨 읽는다.
다 어릴 때 읽은 무협지 '대혈장' 덕분이다. ㅎ
첫댓글 마음자리님도 만화를 즐겨 읽었군요.
나도 만화를 좋아하여 다음에 만화가가 되고 싶었답니다.
무협만화. 환타지 만화는 아니고
순정 만화를 좋아하였으므로< 슬픈 옥이>. 이런 만화를 좋아하였답니다.
저는 주인공이 '백덩'이란 이름을 가진 인간승리 만화와 '자무카'라는 주인공이 나오는 로마시대 만화를 주로 본 기억이 납니다. ㅎ
중학 시절 무협지가 유행했는데
전 그보단
괴도 루팡과 명탐정 홈즈의 대결 시리즈에 푹 빠져
틈만 나면
학교 도서관에 가던 생각이 나네요.
매번 감탄하게 되는 기억력의 마음자리님이세요.
덕분에
잊고 있던 오래 전 추억을 떠올려 봅니다.
저도 탐정 추리 소설도 열심히 읽었네요. 루팡과 홈즈 이야기가 압권이지요. ㅎ
무협지 , 무협영화 를 한때 아주 좋아했는데?
취미도 변하나 봅니다
요새는 케이블 티브 에서 무협영화를 보면 그냥 시큰둥 합디다
충성 우하하하하하
ㅎㅎ 저도 무협영화는 이제 별로 보지 않게 되었네요.
강호풍운 무명소 군협지....와룡생 3대 무협지라고 하였던가요? ㅎ
잘 기억하시네요. ㅎㅎ
전 강호풍운과 군협지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저는 무협지는 한번도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ㅎㅎ
그래서 전혀 아는척을 못하겠네요 .
중학교때 만화방에 갔었던 기억은 있는데
가슴이 콩당콩당 했습니다 .
걸리면 학생과에 가야 했었거든요 .
마음자리님의 기억력이 대단하십니다 .
만화방은 국민학생일 때 앉아서 보고 중학생 때는 방학 때 무협지만 빌려 보았습니다.
만화책 종이냄새, 흙바닥과 긴 나무 의자, 무릎 안쪽을 물던 벌레들 기억도 납니다.
어려서 아이들에게 판타지소설을 접하게 한것은 아주 잘한것입니다. 그게 아무것도 아닌것 같지만 성장과정서 크게 자양분이 되는것입니다. 무협지에 빠졌던 마음자리님처럼 말입니다.
네. 아내는 여전히 저를 잘못했다하지만 아이들은 제 편에 서서 고맙다 해줍니다. ㅎ
무협지는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어요.
아이들과 같이 무협지를
읽는 멋진 아빠시네요.
아산병원 로비에서
마음자리 님 글 잘 읽었습니다.
이베리아님! 어디 편찮으신가요?
무슨 일이든 안 좋은 일은 아니기를
기원합니다.
@마음자리 손자가 아토피가 좀 있어서
딸이 혼자 가기 힘든 것 같아서
따라 갔습니다.
마음자리 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자리님은
어렸을 적 기억은 물론이고
참 다방면으로 놀았는 어린시절인 것 같습니다.
그때 상상력과 도전과 버티는 힘이
형성된 것 같아요.
잘못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초등교 시절에 만화책을 보면 안되는 줄 알았습니다.
학교에서 소지품 검사에 걸렸습니다.
저는 부모님이나 학교에서 못하게 한 것은
절대 하면 안되는 줄 알았지요.^^
막내라고 제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놔두셨던 것 같습니다.
형과 누나들은 공부를 잘 하면서
만화도 소설도 보곤 했었는데,
전 공부는 뒷전이고 놀이가 앞전이라 늘 어머니 걱정거리이기도 했어요.
사춘기 시절, 작은 오빠가 빌려 온
무협지를 다락방에서 몰래 읽었어요
조금 야한 대목들도 있어 더 재밌게
읽은 듯 합니다
오빠가 엄청 빌려왔는데
제가 본 건 알려나 모르겠네요~ㅎㅎ
무협지에 빠질 때가 사춘기라
저도 야한 대목에서 가슴이 콩닥거리곤 했습니다. ㅎㅎ
홍콩 무협영화가 인기를 끌기 전에는 남자들
대부분이 무협지에 열광했지요.
뜻도 모를 해괴한 용어의 무술이 난무하는
그 소설 읽느라고 밤도 많이 새웠습니다.ㅋ
요즘은 초등학생도 컴퓨터 게임에 빠져서
정신이 없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전 홍콩영화에 빠진 다음에 무협지를 시작해서 그랬는지 무협지 읽으며 장면 연상하기가 수월해서 더 박진감 있게 읽은 것 같습니다.
온라인 컴퓨터 게임이 하나의 큰 세계 시장으로 자리잡았고, 한국 청소년들이 세계를 주름 잡고 있으니 한번 지켜볼 만 한 것 같습니다.
무협지는 읽어 본 적 없어 잘 모릅니다.
밥을 굶고 잠들 정도로
입구는 있지만 출구는 없어서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무협지네요.
늘 지난 시간의 상세한 기억과 묘사에 감탄하면서
오늘도 감사히 읽었습니다.
수호 도깨비 빽으로 언제나 안전여행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ㅎ
지금도 그렇지만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그 세상에 호기심이 발동되면 그 호기심이 어느 정도 충족이 될 때까지는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 제 성향이었던가 봅니다. ㅎ
도깨비가 지켜주어서 먼길 오가는 일이 든든합니다. ㅎ
저희때도 만화방은 최애 놀이터였죠.하지만 아버지 무서워 감히 여자들은 발길을 못했고 친구들이 ㆍ캔디ㆍ빌려오는데 일정금액 보태어 돌려서 봤지요.
. 옛 추억을 소환해주시는 얘기입니다. 어제와 그제 좀 바빠서 긴글은 이제야 읽습니다.
안전운전.!!!
캔디는 그야말로 건전 만화인데도 만화방이란 이유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려웠군요. ㅎ
캘리포니아로 달려가는 중입니다.
안전운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