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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선교사는
아리랑을 악보로 표기화하여 우리나라에 전했다
아리랑(알이랑) 하나님이랑 이란 뜻으로 미국에서 찬송가로 쓰이고 있다
한글 아리랑 태극기 무궁화(Rose of sharon):샤론의 꽃 예수
모두 크리스토교에서 나온 것이다
무궁화는 우리나라와 이스라엘만 국화로 정하고 있다
1863년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들베리 칼리지의 총장을 지낸 목사였고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교 창립자의 증손녀였다.
다트머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대를 수료한 뒤
1886년 길모어(George W. Gilmore) 부부, 벙커(Dalzell A. Bunker) 부부와 함께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영어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에 응해 국내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점차 한국의 생도들이 학업에 열정을 보이지 않자 이에 실망하였고,
1891년 12월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한국에서 일하다가 일시 귀국한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권유로
1893년 9월에 재입국하였다.
이때 그는 외국 서적의 한글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 구전으로만 전하는 형편이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한 것도 그이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헐버트는 조선 내외의 정치,
외교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최측근의 자리에서 보좌, 자문의 역할을 하며,
미국 등 서방 강대국들과의 외교 관련 업무에도 힘썼다.
비슷하게 고종의 신임을 받고 이런저런 일을 맡으며
조선 주재 미국공사까지 역임했던 미국인 호러스 뉴턴 알렌은 조선의 국권 상실이 가시화되고 있던 1905년에 일찌감치 조선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었지만,
그는 조선이 가장 약해진 시기에도 줄곧 한국의 자주 독립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특히, 1905년에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 한 시도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이 유명하다.
이런 공로로 3인의 헤이그 특사에 뒤이어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1906년, 고종은 헐버트를 '특별 위원'에 임명하여 외교 업무에 전권을 부여하고,
조선과 수교한 나라들 중 미국을 비롯한 9개국의 국가 원수에게
1906년 6월 22일자로 된 을사늑약 무효를 선언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1907년 7월 20일자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여 헐버트의 밀사 임무는 중단되고 만다.
또한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같은 점찍기를 도입하고,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 연구소를 만들도록 했다.
이 공을 인정받아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금관 문화 훈장을 받게 되어
그의 증손자가 행사에 참석해서 훈장을 대신 수여 받았다.
한글 학회에서는 한힌샘 주시경을 위시한 여러 근대 국문학자들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평상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3년 만에 한국어를 익혔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 지리서를 한글로 간략하게 정리해 1889년에는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책을 쓴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이기도 하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미국으로 출국했으나,
이후에도 독립 활동에 힘을 보태는 등 한국을 잊지 않았다.
그는 1918년에는 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열릴 파리 강화 회의를 앞두고
여운형과 함께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과 함께 올리기도 했으며,
1942년에는 이승만의 한미협회에도 참여했다.
1949년 7월 29일, 광복절을 맞아 국빈으로 한국에 초대되었으나
기관지염으로 8월 5일에 별세했다.
당시에 한국으로 가는 배편에 오르면서 언론에
"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한 달여에 가까운 여행은
역시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인 그에게는 너무 무리였는지 한국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별세했다. 그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헐버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묘비명을 써주겠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이름이 적히지 못한 채 한가운데가 비어 있던 묘비는 50년이 지난 1999년에 와서야 헐버트 기념 사업회 집행 위원장 정용호가 수차례에 걸쳐 청와대에 청원한 끝에 동년 8월 5일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헐버트 박사의 묘' 일곱 글자를 새겨넣었다.
1999년 8월 4일 동아일보 13면 기사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을한의 취재기 《인간 이은》에 따르면,
제물포(인천) 항으로 배를 타고 방한한 뒤 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하면서
여기가 제물포, 인천이라는 지명을 똑똑하게 구사했다고 하며,
자신이 떠나왔을 때보다 훨씬 발전했다며 연신 놀라워했다고 한다.
사실 헐버트는 고종황제의 내탕금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왔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로 폐위된 고종 황제는
헐버트를 통해 상하이 독일 은행에 숨겨두었던 내탕금을 되찾아 독립 운동에 투자할 예정이었고, 출국이 자유로웠던 헐버트에게 그것을 찾아오도록 부탁하였다.
이에 헐버트는 상해로 가서 내탕금을 찾으려 하였으나,
이미 고종의 내탕금 정보를 알고 있었던 일제가 가짜 증명서와 차용증으로
고종의 내탕금을 털어간 후였다.
설사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겪은 초인플레이션 문제 등으로 휴지 조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비자금 관련 서류는 현재 국립 정부 문서 보관서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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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띄어쓰기와 마침표 기원. 1896년 독립신문 제작시 적용.
호머 헐버트가 한국어에 기여한 점.
Homer B. Hulbert
한글을 사랑한 첫 외국인, 헐버트
1443년 세종실록의 기록에는
'임금께서 언문 28자를 친히 만드셨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조선의 4대 임금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기록.
그로부터 3년 후, 세종대왕은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이
풀이된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하지만 훈민정음을 비롯해 허균의 홍길동전 최초의 한글조리서 음식 디미방 등을
살펴보면 지금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당시에는 띄어쓰기가 없었다는 사실!
그렇다면 지금의 띄어쓰기는 언제부터 시작 된 걸까요?
놀랍게도 그 해답은 미국 출신 선교사 호머 헐버트에게 있었다.
헐버트는 1886년 우리나라에 온 교육자겸 선교사로
우리나라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독립을 지원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띄어쓰기 해답을 갖고 있을까?
본격적으로 우리말에 띄어쓰기를 사용한 건 1896년 창간 된 '독립신문'에서 였는데
헐버트는 당시 서재필, 주시경과 함께 독립신문을 만들었다.
독립신문은 띄어쓰기를 실천한 최초의 순 한글 신문.
헐버트는 주시경과 함께 한글을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도입했습니다.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만들고 미국에 한글교본을 출간한 한글학자 헐버트는 다수의 논문 등을 통해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문자사에서 한글보다 더 간단하게, 더 과학적으로 발명된 문자는 없다' 헐버트는 한글의 우수성을 알아본 첫 번째 외국인이었습니다.
한글이 만들어진 지 올해로 569주년.
한글의 우수성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입니다.
호머 헐버트 관련 뉴스.
이회영, 헐버트 등 독립유공자 훈격 높아질 듯…60년만에 재평가
CBS노컷뉴스 홍제표 기자 메일보내기2023-03-05 14:11
최초 포상 후 수십년 지나며 새 공적 밝혀졌지만 반영하지 못해
김상옥, 박상진, 이상룡, 최재형, 나철 등 대표적…보훈처, 7일 첫 회의
왼쪽부터 김상옥 의사와 이회영 선생. 국가보훈처 제공
일제 경찰 1천여명과 홀로 맞서다 장렬히 순국한 김상옥 의사와 온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며 헌신한 이회영 선생 등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훈격이 뒤늦게나마 상향 조정될 것으로 보인다.
국가보훈처는 5일 독립유공자 포상이 본격 실시된 1962년 이후 60여년 만에 처음으로 정부 주도로 독립운동에 대한 훈격 재평가를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보훈처는 이를 위해 역사학계와 법조계, 언론계 등의 전문가로 '독립운동 훈격 국민공감위원회'를 구성하고 오는 7일 첫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보훈처는 일부 독립유공자의 경우 공적에 비해 낮은 훈격으로 포상되거나 공적에 비례해 서훈되지 않았다는 공정성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고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왼쪽부터 박상진, 이상룡, 나철 선생. 국가보훈처 제공
훈격 상향 주장이 제기돼온 대표적인 독립유공자는 김상옥(대통령장, 1962), 박상진(독립장, 1963), 이상룡(독립장, 1962), 이회영(독립장, 1962), 최재형(독립장, 1962), 나철(독립장, 1962), 헐버트(독립장, 1950) 등이다.
김상옥 의사는 1920년 미국 의원단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조선총독부 고관 처단을 시도했고, 1922년에는 조선 총독 처단과 총독부 폭파 등을 재차 시도하다 홀로 1천명의 경찰 체포대에 맞서며 격렬히 저항하다 순국했다.
이회영 선생은 1907년 안창호, 양기탁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결성하고, 경술국치 직후에는 중국 만주로 건너가 1912년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설립했다.
1924년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한데 이어 1932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고령의 나이에도 주만 일본군 사령관 처단을 목적으로 활동하던 중 체포돼 혹독한 고문 끝에 옥사했다.
왼쪽부터 최재형 선생과 헐버트 박사. 국가보훈처 제공
최재형 선생은 1906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최초의 의병부대를 창설하고 1909년 한인신문 '대동공보'를 발행하는 한편,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 처단 장소로 하얼빈을 추천하고 사후 대책을 준비했다.
1911년 권업회 초대 회장에 추대되고 1910년대 막대한 재산을 들여 일본군에 대항하는 의병 세력을 지원하다 일본군에 체포된 뒤 피살됐다.
미국인인 헐버트 박사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4의 특사'로 활약하고, 1912년 '뉴욕헤랄드'에 105인 사건이 날조됐음을 폭로하는 등 미국 내 여론에 호소한 공적이 상당하다.
보훈처는 이런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상훈법상 동일 공적에 대해 훈장이나 포장을 중복 수여할 수 없도록 규정돼 법적, 제도적 어려움이 있었지만 '동일하지 않은 공적'에 대한 추가 포상까지 금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정부의 독립유공자 포상은 1949년 최초 실시돼 1960년대 대규모로 이뤄졌지만, 이후 관련 연구 등으로 인해 새로운 공적 사실 등이 발굴됐음에도 이를 반영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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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12월에 출판된 한국 최초의 순한글 지리 교과서이다
육영공원의 교사였던 헐버트는 학생들에게 교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글의 위대함과 학생들의 지식 함양을 위해 제대로 된 책을 쓰기로 했다.
1889년 조선에 온 지 3년 만에 그는 한글로 쓴 교과서를 만들었는데,
책 이름은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에서 『사민필지』라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였다.
헐버트는 『사민필지』를 통하여 세계의 다양한 환경과 정치, 학문 등을 소개하고
앞으로 조선이 나아가야 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사민필지』는 각 교육 기관에서 교재로 썼을 뿐만 아니라, 당시 상류층에게는 인기 서적이었다.
특히 지금까지 러, 일, 청만 주로 알고 있던 조선인들은 『사민필지』를 통하여
세계 여러 나라를 두루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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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는 1886년(고종 23) 조선의 초청으로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취임해
세계의 지리지식과 문화를 소개하는 내용의 교과서 격인 『사민필지』를 저술했다.
1889년 한글본으로 초판이 나왔고, 1895년 학부(學部)에서 백남규(白南奎)·이명상(李明翔) 등이
왕명으로 한문본 『사민필지』를 간행했다.
한편, 1906년에는 아처(Archer)의 도움으로 『Geographical Gazetteer of the World』라는
이름의 Hulbert’s Education Series No. Ⅱ 수정판이 출간되었다.
초판한글본은 17행×28자 161면이며, 10장의 지도가 수록되었다.
한문본은 10행×20자 71장(張)으로 되어 있으며, 지도는 실려 있지 않다.
한글본 목차는 제1장 지구, 제2장 유럽주, 제3장 아시아주, 제4장 아메리카주, 제5장 아프리카주로 되어 있고,
총론에서는 태양계와 그 현상, 지구의 모습, 기후·인력·일월식,
그 밖의 지구상의 현상, 대륙과 해양, 인종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각 주의 총론은 각 주의 위치·지형·면적·기후·인구·인종을 적고,
이어 각 주별로 주요 국가의 위치·방향·기후·산물·국체·인구·씨족·수도·산업·군사·학업·종교·나라나무 등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기술상의 특징은 한국을 기준으로 한 점인데,
예를 들면 “일본: 일기는 대한보다 좀 덥고 습기가 많으며…….” 와 같은 내용이 그것이고,
각국의 수출입액은 한국의 화폐단위인 ‘원’으로 표시했다.
비록, 외국인의 손에 의해서 저술된 것이지만, 한국 최초의 세계지리교과서로,
아직 세계정세에 대해 백지상태이던 한국에 세계지리 지식을 꾸밈없이 심어주어 세계에 눈을 돌리게하고,
근대화의 문을 열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한글 전용인 이 책은 1890년대 국어 연구의 자료가 된다.
표기법에서 한글만으로 쓰면서도, ‘글ㅅ자, 언문ㅅ법’ 등 사이시옷이 사용되고,
된소리 표기에 전통적인 된시옷과 함께 ‘ㄲ, ㅆ’ 등이 ‘
니, 똑똑이’ 등과 같이 사용된 점이 주목된다.
외국, 특히 유럽의 국명이 영어식 발음에 따라
‘유로바·노웨국·쉬덴국·덴막국·네데란스국’ 등으로 적히고, 바른쪽에 가로줄을 친 점도 특이하다.
참고로 한문본에서는 위 지명이 ‘구라파(歐羅巴)·나위(那威)·서전(瑞典)·정말(丁抹)·하란(荷蘭)’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1949년 7월 29일, 광복절을 맞아 국빈으로 한국에 초대되었으나
기관지염으로 8월 5일에 별세했다.
당시에 한국으로 가는 배편에 오르면서 언론에
"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한 달여에 가까운 여행은
역시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인 그에게는 너무 무리였는지 한국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별세했다.
그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헐버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묘비명을 써주겠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이름이 적히지 못한 채 한가운데가 비어 있던 묘비는 50년이 지난 1999년에 와서야
헐버트 기념 사업회 집행 위원장 정용호가 수차례에 걸쳐 청와대에 청원한 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