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소리가 들리는 책장 / 서하
높낮이 다른 책들 키순으로 정리했더니 책장에서 파도 소리가 들린다 둥둥 떠다니는 달을 건졌는데 활어였다 성대가 없는 활어의 이야기는 유효기간이 없다 내 활활 죽고 나면 지느러미 꽁꽁 묶여 횟집 저울추처럼 파들거릴 활어
움푹 패인 곳에서 건져 올린 물미역 같은 가름끈 옮겨가며 읽은 책 또 펼쳐 읽는다 당신을 읽는데 내가 젖는다 갈매기 깃털 닮은 책갈피가 할딱이는 해변, 난독의 해안선 한 권을 온전히 읽지 못하겠다 뭉툭한 눈이 삐댄 염분 탓이다
비린 해초가 더듬더듬 코끝에 매달리는 시간이다 높고 낮음이 없는 저 수평선,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건 흰 구름, 그의 몫이다
- 시집 『먼곳부터 그리워지는 안부처럼』 (시인동네, 2020)
* 서하 시인
경북 영천 출생
1999년 <시안> 등단
시집 『아주 작은 아침』 『저 환한 어둠』 『먼곳부터 그리워지는 안부처럼』
1998년 한국한의문학상, 2015년 대구문학상, 2020년 이윤수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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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 상 ]
10년, 20년......실개천이 바다에 닿을 동안 세월 또한 낱낱이 스며들어
작은 공간도 온갖 책들로 출렁인다
장르와 출판사별로 정리를 하고나니
품 열어 다 받아줄 것 같은 바다가 펼쳐지며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빛바랜 추억을 꺼내 소금기를 털어내며
혼자 밝아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하는 나는, 벽에 걸린 바다 만평을 가진 마음 부자다.
- 김조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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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의 끝을 보았다는 듯 “내가 활활 죽고 나면”이라고 가슴을 긁는 구절이 묘한 생동감을 불러낸다.
활활이라는 음성 상징어를 물고 생의 욕망이 꿈틀거린다.
지느러미가 꽁꽁 묶여 “횟집 저울추처럼 파들거”릴 수 있다는 미학은 “성대가 없는” 낮은 휘파람소리 같다.
시에 적힌 파도소리, 해변, 염분, 수평선, 해초 등의 단어들은 시인의 어제와 오늘을 짭쪼롬하게 펼쳐놓는 데
복무한다.
유효기간이 없는 그 기억은 축축하다.
“당신을 읽는데 내가 젖”고, 도무지 “난독의 해안선 한 권을 온전히 읽지” 못하겠다는 씁쓸한 입맛을 얻는다.
소금기 때문에 글을 못 읽겠다는 진술은 시인이 물미역 같은 기억을,
“비린 해초가 더듬더듬 코끝에 매달”렸던 시간을 여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갈매기 소리에 감긴 기억의 토막들은 허공에 튀어오르는 활어처럼 시인의 마음을 한번 더 휘어지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시의 상상력은 난독의 해안선을 독공으로 독파해내려는 속내를 감추고 있다.
비린내 묻은 시상을 펼쳐놓고 “높고 낮음이 없는 저 수평선”으로 시의 눈길을 돌리듯
마지막 페이지를 그의 몫으로 돌리는 정결함이라니.
당신에 기대어 시의 순정에 닿고 싶은 치열성은 시인에게
2020년 <제1회, 이윤수 문학상> 수상자의 영예를 안겼다.
- 이병초 시인(웅지세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