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written by kim sang bong (gaegu)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
며칠 째 흥얼거리며 부르고 다니는 노래로 작사 : 이제하, 작곡/노래: 조영남인 ‘모란동백’이다.
사실 이 ‘모란동백’이라는 노래는 시인이며, 가수이며, 조각가인 이제하 선생이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읽고 그 소감을 쓴 가사에 곡을 붙여 직접 노래도 불렀다고 하는데,
그 때가 예순이 넘어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가수 조영남이 가수 백설희(전영록의 모, 황해의 부인)의 장례식에 갔을 때
그녀의 가수 후배들이 그녀의 히트곡인 ‘알뜰한 당신’을 부르는 것을 보고,
조영남 자신이 죽었을 때, 후배들이 조영남의 히트곡인 ‘화개장터’를 부를 것 같아서,
엄숙한 장례식에 불러야 할 노래로서 ‘이거는 아니다’라는 생각에
이제하 님의 ‘모란동백’을 리메이크하여 조영남이 부른 것이다.
이제하님의 곡과 대동소이하나 미성(美聲)인 조영남이 부름으로 인해 조금 다른 느낌이 들며,
찐한 여운을 남긴다.
사실 내가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대해 평론을 해 보려는 생각도
친구 자제분의 결혼이 있어서 동창생들끼리 갔는데 거기에서 한 친구가 ‘모란동백’을 부르는 것을 듣고
코끝이 찡해지면서 묘한 기분이 들더라는 것이다.
바깥에 바람은 불어 벚꽃은 분분히 날리고,
많은 사람들이 행길로 오가는 가운데 하필이면 청승맞게 그 노래를 차안에서 불러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으니,
순전히 이 평론의 탄생은 그 친구가 동인을 제공해 준 것이 확실히 맞다.
학창시절에 국어교과서에 실려 우리들이 즐겨 애송했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흥을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궁상맞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을 쓰고 애잔한 감상에 젖어보는 것도 삭막한 세정에서 떠올려보는 한 잔의 샘물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 ‘모란이 피기까지는’ 을 쓴 김영랑 시인이나 ‘모란동백’을 작시한 이 제하님은
두 분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다.
김영랑 시인은 본명이 ‘김윤식’으로서 1903년에 태어나서 1950년에 돌아가신 분이다.
이제하님은 1937년 생으로 현재 만 75세이다. 홍익대 조소과를 중퇴했으며,
직업란에는 소설가로 나와 있으나 글도 쓰고, 노래도 부르고,
작곡도 하며 다방면에 다재다능한 분으로 전해지고 있다.
인터넷 검색창에 ‘이제하’라고 쓰면 그가 벙거지 모자를 쓰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동영상을 많이 볼 수 있다.
사실 시적 정서나 감흥은 시대나 세월을 뛰어넘어 동감하는 부분이 참으로 많다.
아마도 그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서 그런지 모른다.
여하튼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이제부터 나름대로 사견(私見)과 소견(所見)을 붙여
분해 작업을 해 보려고 한다.
그것은 재미있는 일련의 작업인 동시에 또 인지상정에 동참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 시는 연과 행의 구분(區分)없이 그냥 통으로 된 12행의 시이다.
서두(序頭) 1,2행과 말미(末尾) 11,12행이 반복 중첩이 됨으로 시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으며,
시인이 바라고 추구하는 이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려주고 있다.
먼저 행을 분해하면서 행에 담긴 뜻과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쳐 보려고 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은 이 글을 쓴 작가의 전부인 동시에 일부이기도 하다.
모란을 평소 좋아하고 또 모란의 그 고아(高雅)한 품격을 그리워한
고고한 시인의 자태와 모습이 은연중에 나타난다고나 할까?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린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 시인에게 있어 봄은 어떤 의미와 상징을 나타내는 것일까?
봄은 계절의 여왕이라고도 한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할 준비를 하며,
춘정을 내며 설레게 하는 계절이 바로 봄이지 않는가?
봄은 영어로 spring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솟아오르다’,‘뛰다’,‘도약하다’,‘ 솟아나다’ 등의 의미로 쓰인다.
곧 봄은 모든 것이 힘차게 태동되어 생의 기쁨과 활력을 힘차게 솟아나게 하는 그런 의미인 것이다.
곧 봄이란 ‘인생의 살아가는 온갖 재미를 더하는 원천적인 소스(=source)’인 셈이다.
곧 봄은 생의 ‘잔잔한 희열인 동시에 기쁨의 절정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동인’이 되는 셈이다.
이 연이 풍기는 이미지는 이미 지나간 봄,
여읜 봄을 그리워하며 다시 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소원을 노래하고 있다.
그렇게 할 때 모란이 피며 모든 것이 다시 환희(歡喜)로 시작될 수가 있을 테니까?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왜 모란은 뚝뚝 떨어져 버릴까? 나의 전부요,
고아한 이상의 표상인 모란은 허무하게 덧없이,
그냥 떨어져버리니 인생의 무상 이라할까?
그때에야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긴다고 하니,
사실 모란만큼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과 인생의 전부를 상징하는 꽃은 별로 없다.
그 꽃이 떨어진 날 나는 인생의 정점(頂點)인 봄마저 이별하는 설움에 잠길 수가 있으니
사실 모란은 내 생의 찬란한 정점인 동시에,
그것이 질 때 인생의 보람도 함께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닐까?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다들 말을 한다.
그만큼 풍기는 뉘앙스가 강렬하다.
그 계절의 여왕 날들 중에서도 최고의 날인 무덥던 날,
여기서 ‘무덥다’라는 의미는 무얼 말하려고 한 것일까?
글자대로 해석을 하면 하루 중 기온이 최고로 높은 날,
곧 빨래를 널면 잘 마를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날을 말하지만,
인생 방정식에 대입하면 곧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인생의 날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모란’이 ‘고아한 인생의 품격을 갖춘 이상인’이라고
가정을 하면 '무덥던 날’과 ‘모란’ 둘의 조화는 절묘하게 맞게 된다.
무덥던 날에 세상의 수많은 꽃들의 이파리도 강렬한 햇볕아래 시들어버릴 수밖에 없다.
거친 세상의 풍파, 곧 세파에 시달리고 나부끼는 모든 인생들의 공통된 속성과 조합이
여기서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천지에 모란이 자취가 없어졌다’는 말은 참으로 절망의 끝에서
한탄할 수밖에 없는 화자(話者)의 비감을 떠올려 볼 수가 있고,
뒤이어 나타나는 ‘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다’는 말은
이 비감을 더욱 더 고조시켜 인생의 모든 희망을 꺾어버리고
오로지 절망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다는 처절함을 노래하고 있다.
사실 모란이 없는 이 세상, 나의 모든 보람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지고 말면,
그 잃어버린 상실감에 애잔한 나의 마음은 일 년 내내 울고, 또 웁니다.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떠올리기만 하면 억장이 무너지는 듯 하여 울지 않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슬픈 일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슬픔의 날들은 길고 지루하여 그 일 년 동안은 정말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한해는 다가고 말았다’는 처절한 절망의 배후에는 어떤 감정이 도사리고 있을까?
그것은 낙담과 한숨이다. 좌절의 끝에서 뭉그적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화자의 비장감이다.
그 어떤 필설로도 형언할 수 없는 인생지사 최고의 슬픈 광경이요,
그 표정이며 애달픈 하소연인 것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화자의 시선은 다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절망의 끝에서 뭉그적거리기 보다는 희망의 두레박으로 모란이 필 때
필요한 샘물을 준비하며 다시 한 번 그 날을 학수고대하고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비록 찬란한 슬픔을 간직한 채 오늘 모란이 다 지고 말았지만,
그러나 모란은 다시 내년이 되면 필 것이요,
그것은 다시 찬란한 날들로 이어지겠기에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피고 지는 인생의 이법을 깨달아 알 수가 있고,
순환하는 자연의 원리도 느낄 수가 있다. 세상만사는 돌고 돌아간다.
거기에 생명의 위대한 릴레이 현상도 이어지고,
우리는 결코 절망하거나 낙담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비록 잠시 잠깐 낙심하여 슬픔에 빠질 수는 있으나,
결코 좌절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털고 일어설 수 있으며, 그것은 찬란한 인생의 날들,
소망으로 우리에게 새 날을 살아갈 힘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가 이 평론 아닌 평론을 쓰게 되었지만,
이 글을 쓸 수 있는 동인을 제공해 준 ‘모란동백’의 가사를 그대로 이기해 참고로 삼고자 한다.
모란동백 이제하 작시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데
들녘에 눈이 내리면
상냥한 얼굴 동백 아가씨
꿈속에 웃고 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덧없어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랫벌에 외로이 외로이 잠든다 해도
또 한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