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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 기획] 회의실에는 [하늘에 별을 심다]에 출연하는 배우들과 스태프로 북적였다. 준 주연급인 정만의 죽음 이후 처음 만나는 자리여서 그런지 무거운 분위기가 사람들을 압도했다. 구석자리에 앉은 지훈은 자기 잘못은 아니지만 왠지 미안해 책상 밑 만 쳐다보았다. 고요한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주감독이었다.
“자. 모두들 마음이 무거운 건 알지만 또 우리는 우리대로 할 일이 있잖아요. 정만이도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더 멋진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이 하늘에 있는 정만이를 위한 거라 생각합니다. 자 힘들 냅시다.”
사실 사람들은 정만의 죽음에 그렇게 마음이 슬프지 않았다. 아니 처음엔 슬펐지만 시간이 지나자 먼 나라의 어떤 한 기억으로만 남았다. 오히려 작품을 다시 시작한 일이 더 반가웠다. 주감독이 멍석을 깔아주자 사람들은 프로처럼 자신이 할 일을 챙겼다. 지훈과 수아는 서로 마주 보며 대사를 맞추었다.
“씬 42. 액션,”
“어이. 거기. 기분 나쁜 일 있어? 왜 그렇게 빽빽 질러대?”
“·········네? 전 그냥 노래를 부른 건데요.”
“그게 노래야? 너 노래 몰라? 부른다고 다 노래냐?”
“·········”
“노래도 모르는데 여긴 왜 왔어? 집에 가. 집에 가서 문 닫고 혼자 불러. 괜히 노래 좀 한다고 나대는 사람 보면 역겨워.······보니까 얼굴은 네가 말한 노래보다 낫네. 그냥 짧은 치마 입고 엉덩이 열심히 흔드는 게 낫겠다.”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 왜 반말인데! 예의 없는 행동이란 거 알아? 그리고 머리 생긴 게 그게 뭐니. 닭도 아니고. 머리에 벼슬은 왜 달고 있는데. 그리고 너! 우리 집에 있는 금붕어 닮았거든.”
두 손바닥을 볼에 대고 얼굴을 찡그러뜨리는 수아였다. 수아의 찡그러진 얼굴을 본 지훈은 눈빛을 흐리며 짧은 시간 입 꼬리를 파르르 떨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오케이. 오케이.”
주하성 감독은 흡족한 듯 대본으로 박수를 쳤다. 주위에서도 의외의 연기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거 둘이 처음 맞춰 본 거 맞아. 서로 호흡이 척척 맞네.”
수아도 만족스러운 듯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소속사에서 아무리 연습을 시켜도 엉망이던 대사가 지훈과의 첫 호흡에서 깔끔하게 떨어졌다. 자기가 맡은 배역과 빙의한 느낌은 처음이어서 수아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훈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실전에 들어가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계속해서 씬 48로 넘어 갑니다. 액션”
“정말이에요? 정말 그 사람이 왔어요?”
“그래. 여기 소속사 가수라고 했잖아. 좀 전에 와있는 거 봤는데. 어 저기 있네. 정혁아!”
“········”
“안녕. 또 보네.”
“설마·······아니죠?”
“맞아. 내가 그 설마야.”
“컷. 좋습니다. 씬 49로 넘어 갑니다. 액션.”
“좀 전에 했던 말 취소할게.”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엔 지훈이라는 사람대신 오정혁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도 금붕어 닮았다고 한 말 취소할게요.”
“왜? 난 금붕어 좋던데.”
“그래요? 그럼 계속 금붕어라 불러 드릴게요.”
“··········노래는 어디서 배웠어? 제법 하던데.”
수아는 입을 삐쭉 내밀며 지훈을 가리켰다.
“나?”
“오빠 노래 엄청 많이 들었어요. 학교 갈 때도 집에 올 때도 버스 안에서도 오빠 노래만 엄청 들었어요. 나중에 아이들이 반드시 오빠랑········특히 [레이어]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예요.”
“그래? 이렇게 멋진 팬이 있는 줄 몰랐는데.”
“예쁜 팬이 있으니까 좋죠.”
“나쁘진 않네. 그럼 팬에게 한 마디만 해도 돼?”
“네. 하세요.”
“노래하고 싶다면 이 소속사와 계약하지 마. 여긴 아니야.”
“컷 좋았어. 아 정말 좋았어. 예감이 정말 좋네. 지훈씨하고 수아씨 정말 호흡이 괜찮아. 내일 촬영 들어갈 때도 이렇게. 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지.”
주감독은 생각보다 그림이 잘 나올 것 같아 만족한 듯 미소가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옥상 가로등불 사이로 미쳐 친구들을 따라가지 못해 홀로 남은 눈발이 하나 둘 흩날리며 떨어졌다. 그러다 양떼 무리를 덮치는 이리처럼 매서운 겨울바람은 눈들을 어지럽게 흩어 놓았다. 그런 칼바람을 오히려 지훈은 기분 좋게 생각했다. 오정혁으로 인해 잊어 버렸던 자신의 영혼을 다시 되찾게 해주었고 다시 치밀하게 생각할 기회를 줬기 때문이었다. 지훈은 카페 손님을 위해 커피를 만들지 않고 이 낯선 옥상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회의실 안에서는 느끼지 못한 어색함이 홀로 남은 지금에서야 온 살들을 비집고 삐져나왔다. 갑자기 지훈은 벨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벨의 목소리와 손끝 발끝 하나가 이렇게 간절한 적은 없었다. 그냥 지금 벨을 한 번 보기만 한다면 모든 어색함과 두려움과 헐렁한 기분들을 다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년동안 스파게티만 먹은 사람이 김치찌개가 간절하듯 지훈은 벨의 모든 것이 그리웠다. 지훈은 핸드폰을 꺼내 사진함을 열어 벨의 사진을 찾았다. 하지만 벨의 사진은 어디에도 없었다.
‘바보같이. 그동안 뭐했어. 사진도 안 찍어 놓고.’
“아저씨, 아직 하루도 안 지났는데 내가 보고 싶음 어떡해. 그렇게 나 보고 싶어 하면 나도 이제 몰라.”
이 목소리였다. 너무 듣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던 목소리. 팝콘처럼 톡톡 튀는 달콤한 그 목소리. 지훈은 자석처럼 그 목소리에 끌려 몸을 돌렸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달려가 벨을 꼭 껴안았다. 벨도 살며시 지훈의 품속에 몸을 맡겼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치장한 도시에는 젊은 연인들로 활기가 넘쳤다. 얼어붙은 도시를 녹이는 것은 연인들이 뿜어대는 하얀 입김과 경쾌한 웃음소리였다. 지훈과 벨도 그 틈 사이를 메우며 도시의 이곳저곳에 흔적을 남기는 중이었다.
“아저씨, 이런 시끄러운데 싫어하지.”
“아니. 난 괜찮은데.”
“그게 싫어한다는 거잖아. 괜찮다는 말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하고 똑 같은 거야.”
“그래?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정신없는 곳은 싫어. 하지만 벨하고 있는 것 좀 좋아.”
“조금만 좋아?”
“그래. 지금은 조금 좋아.”
“칫! 아까는 보고 싶어서 안달 났으면서. 그 말 후회 안하지.”
“어······좀 많이 좋아해.”
지훈은 얼굴을 붉히며 딴 곳을 보며 말했다. 벨은 씨익 미소 지으며 지훈에게 팔짱을 끼며 스티커 사진 찍는 기계로 밀었다. 벨은 지훈에게 펑크머리 가발을 씌우고 자신은 무지개색 뽀글이 가발을 썼다.
“아저씨, 얼굴 좀 낮추봐요.”
지훈은 아무 말도 못하고 벨이 하라는 대로 했다. 둘은 서로 볼을 맞대고 귀엽고 앙증맞은 표정의 사진을 찍었다. 지훈은 처음엔 쑥스러웠지만 금방 편하게 포즈를 취했다. 지훈과 벨은 아주 신나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벨은 스티커를 찾았다.
“아저씨. 손 내밀어 봐요.”
“손은 왜?”
벨은 지훈의 손을 붙잡아서 시계를 벗겼다. 지훈은 벨이 무엇을 할까 궁금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벨은 시계 뒤에다 따끈따끈한 스티커 사진을 붙였다.
“이제, 나 보고 싶으면 이걸 봐.”
벨의 행동하나하나가 지금까지 외롭고 쓸쓸했던 지훈의 마음들을 녹였다.
“아저씨. 우리 클럽가자!”
“클럽?”
지훈은 평생 가기 싫은 곳 중의 하나가 클럽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친구들과 함께 클럽에 갔다가 시끄러운 소음과 현란한 조명에 메스꺼움과 어지러움을 느낀 후로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하지만 벨의 간절한 눈망울을 외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 하지만 나 쓰러지면 벨 나 엎고 와야 돼.”
“걱정하지 마. 아저씨 버리지 않을 께.”
첫댓글 벨이랑 지훈의 이야기 궁금했었어요^^ 이렇게 지훈이 잘 되어 가는 군요^^
타르마님 보고 싶었어요. =^^= 글이 안 올라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