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기 위해서
▲ 미국으로 입양 당시 촬영한 아기적 줄리 사진. 줄리는 내가 미국에서 살던 시절 사귄 친구다. 출생 직후 미국으로 넘어 간 해외 입양인으로, 겉모습은 영락없는 한국인이지만 '한국인 스러움'은 단 한 군데도 찾을 수 없다. 그녀가 내게 친모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 건 서로 알고 지낸 지 5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다. 때마침 한국에 들어온 나는 무턱대고 그녀의 부탁에 응했다. 그녀가 단서로 내민 것은 어린 시절 여권에 쓰인 흑 백 사진 한 장과 자신이 '대구 백백합보육원 출신 이대숙'이라는 정보뿐이었다. 백백합보육원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대구 시에 전화를 걸어 아동 보육 시설 담당자에게 문의하자 백백합보육 원은 현재 어린이집으로 운영 중이며, 그곳에 예전 기록이 보관돼 있으니 찾아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일주일 뒤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대숙 씨 기록 찾았습니다! 보내 주신 사진과 보관돼 있던 사진도 동일하고요. 모친에 대한 정 보도 있었는데요. 갈 곳 없는 이들을 수용하는 한 희망원에서 함께 지내다 정신 질환으로 양육이 불가해 따님을 보육원으로 보냈다고 적혀 있더라고요" 어찌 이런 사연이... 줄리의 친모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희망원에 전화를 걸었지만 친모 연배의 여성은 없다고 했다. 며칠 뒤 시청에 직접 방문했다. 보육 시설 입소 및 퇴소 자료를 보 여 주던 담당자는 이상한 점이 있다며 말했다. "여기 3월 21일, 이대 숙 씨가 보육원으로 넘어간 날 이동한 아이들 명단에 이대숙이라는 이름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여기 이름만 다르고 조건이 같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보육원에서 이름을 새로 지어 주는 게 관습이 었던지라 아마도 이 이름이 본명인 것 같아요."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이름은 '김노미'였고, 그 옆에는 '친모가 정 신 질환으로 더 이상 양육 할 수 없어 보육원에 보내짐.'이라고 적혀 있었다. 즉시 희망원으로 달려가 직원에게 김노미라는 아이의 기록 이 남아 있는 지 물었다. 직원은 입소자 기록이 모여 있는 지하 창 고로 나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1973년도 서류철을 발견했고, 수십 년간 누군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려 온 듯한 한 페이지에는 줄리의 본명인 김노미와 모 친의 이름 그리고 모친의 사망 일자가 적혀 있었다. 모친은 줄리가 보육원으로 옮겨진 지 석 달 만에 사망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 이 와락 쏟아졌다. 희망원을 나오자마자 줄리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그녀에게 소식을 전달하는 내내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이후 나는 친구들과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으로 입양인들을 돕기 시작했고, 햇수로 6년째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그사이 제2, 제3의 줄리를 수없이 만났다. 잠시 길을 잃었다가 아동 보호소에 강 제로 수용된 사람도, 엄마가 찾을 틈도 없이 무작정 해외로 보내진 이도 있었다. 친모를 찾기 위해 수십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이들을 마중하러 나는 오늘도 인천공항으로 향한다. 이들이 부디 자신의 뿌리를 찾기를 간절히 바라며. 김유경 | 배넷 대표
대구 최초의 아동복지시설이자 근대적 사회복지시설의 시작이었던 백백합보육원. 1915년 10월 15일 대구 성 바오로 수녀원 부설 아동복지시설 고아원이 문을 열었 는데 이것이 백백합보육원이다. 당시 30명의 고아로 시작했다.
입양 45년 만에 고향 대구를 찾은 의사 줄리아나 데이먼씨
https://www.youtube.com/watch?v=zXoJympi4Uk&ab_channel=MBC%EB%9D%BC%EB%94%94%EC%98%A4%EC%8B%9C%EC%82%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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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 하세요..망실봉님
뿌리를 찾기 위해서
감사히 담아 갑니다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
다녀가신 고운 흔적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희망
새출발로 뜻깊은 하루
이어지시길 소망합니다~
핑크하트 님 !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다녀가신 고운 걸음
공감주심 감사합니다~
오늘도 기쁨 가득,
좋은 하루보내세요
동트는아침 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