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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評論]성불(成佛) - 박홍서
written by kim sang bong (gaegu)
지렁이는 내일을 보지 않았다
쏟아지는 비가 오기 전 날 습한 날씨에
수면 위를 스치는 돌 수제비처럼,
비가 오는 아침처럼
스물 거리며 한껏 정진하였다
내일을 보지 않았던 지렁이들이
성불하였다
전신 사리가 되어
딱딱하게 후광을 비치고
나는 쏟아지는 빛의 자비 속에서
전신 사리를 밟았다
우드득, 하고
부처님을 밟고 말았다
내일은 내가
내일을 보지 않은 죄로
성불할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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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poemcafe의 '독자 참여 문단'에 실린 글 중에 하나를 골라서
맛을 음미하면서 좀 꼭꼭 씹어 먹어 보려고 한다.
사실 시를 해석하고 평론하고 감상하는 작업은 난해하고 어렵다.
그것은 같은 사물이나 내용을 보더라도 그것을 느끼고, 깨닫고,
지각하는 사색의 폭이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解釋하고 註釋달고 評論하고 感想하는 것은 순전히 자기 안경을 쓰고
보고, 벗기고, 색칠하고, 도색하고, 꾸미고 짓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물론 개중에는 作者나 著者의 의도하고도 일치하는 내용이 있을 수도 있고,
전혀 작자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어찌했던 간에 새로 꾸미는 것이고 일치해도 좋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맛을 보는 그 사람과 저자나 작자의 상호작용으로서
서로 영향을 끼치고 주고받고 느끼는 공감대만 형성이 되어도
그것은 꽤 괜찮은 수지맞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却說하고 평론할 글의 소재부터 골라보자.
박홍서님의 '성불(成佛)'이라는 시를 테마로 삼았다.
오늘 요리할 시재(詩材)는 바로 '지렁이에 대한 관찰과 소묘'를 '성불(成佛)'이라는 것으로
절묘하게 그려낸 이 시를 택하기로 한 것이다.
이 시는 그렇게 길지 않은 4연 16행으로 된 시이지만
짧은 글귀 속에 말하고자 하는 온갖 의도가 다 들어있어 함축미를 보이고 있고,
시상(詩想)도 참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1연부터 분해 작업에 들어가 보도록 하자.
지렁이는 내일을 보지 않았다
쏟아지는 비가 오기 전 날 습한 날씨에
수면 위를 스치는 돌 수제비처럼
비가 오는 아침처럼
스물 거리며 한껏 정진하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동물이 있으니 지렁이이다.
그리고 특이한 용어로 '돌 수제비'가 등장하는 데
이는 '물수제비'라고도 하며 돌을 물위에 기술적으로 던지면 몇 번 물위를 튕기다가 빠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배경이 되는 시간과 날씨로는 '내일','쏟아지는 비가 오기 전날', '습한 날씨','비가 오는 아침' 등이고
특이한 동작표현으로는 '스치다','스물 거리다','정진하다'등이다.
그러면 전체적인 개괄을 쉽게 풀이해 보기로 하자.
지렁이는 내일을 보지 않았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도 오늘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모르고
내일 일을 자랑하고 사는데 하물며 미물(微物)인 지렁이야 내일을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것을 새삼스러운 걸로 묘사하는 평범(平凡)을 비범(非凡)으로 연출하는
저자의 묘사가 탁월한 부분이다.
'쏟아지는 비가 오기 전 날 습한 날씨'는
바로 억수같이 비가 오기 전날 새카맣다 못해 시커먼 먹장구름이
금세라도 쏟아질 것 같은 위기절박감의 표시이다.
습도는 한껏 높아 불쾌지수를 뛰어넘어 축축하다.
벌써 이 말이 풍기는 뉘앙스는 완전히 그로기상태를 의미한다.
심신이 풀어질 대로 풀어져 도저히 저항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완전히 해방(解放)되고
이완(弛緩)된 의식의 몽롱한 상태를 느끼게 하는 탁월한 이미지의 연출이다.
다음으로 '수면 위를 스치는 돌 수제비처럼' 여기서 작자의 시야는 지렁이가 땅 바닥을 기어가는 것이
마치 돌 수제비가 물 수면을 튀기며 미끄러지듯이 스쳐 지나가는 것과 맞물리며 클로즈업되어 나타나고 있다.
즉, 저자의 눈에는 지렁이나 돌 수제비가 땅바닥이나 물위 수면을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듯이
나아가고 있는 것이 일체감을 이룬다는 말이다.
그리고 '비가 오는 아침'은 어떤 아침인가?
후드득 장대비가 아침부터 쏟아질 수도 있고, 아니면 가랑비나 이슬비처럼 추적거리며 내릴 수도 있다.
여기서 풍기는 뉘앙스는 아마도 후자(後者)쪽이 더 가까운 것 같다.
한편으론 비가 오는 아침에 빗방울이 땅바닥에 튀어 오르며 물방울이 퍼져 나가는 것이
돌 수제비의 형상과 어찌 그리 흡사한가?
그러나 얌전한 지렁이(?)의 영상하고는 좀 동떨어진 느낌도 나는 게 사실이다.
또한 이 말은 빗방울이 쏟아지는 중에도 기어가는 지렁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스물 거리며 한껏 정진(精進)하였다'는 수도(修道)와 득도(得道)를 하는 것의
어려움을 지렁이의 기어가는 동작에 빗대어서 표현한 말이다.
정진이라는 말은 수행하다. 도통하다. 도를 닦다. 용맹(勇猛)정진(精進)하다. 등인데
보통 종교를 단련하는 방법을 말하는 데 불가(佛家)에서는 특히 정진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1연에서는 전반적으로 지렁이의 동작과 정진(精進)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수행과 득도의 어려움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내일을 보지 않았던 지렁이들이
성불하였다
전신 사리가 되어
딱딱하게 후광을 비치고
일연(一聯) 일행(一行)에서와 마찬가지로 내일과 지렁이가 등장하고
그것은 보지 않았다로 귀결(歸結)되다가 결국 성불(成佛)하였다는 것이다.
내일은 무엇인가? 미래다. 곧 희망이다. 막연한 추상이다.
무엇인가 모르지만 다가오는 것이다. 내일이 풍기는 뉘앙스는 참으로 천차만별이요, 다양하다.
즉, 골치 아프게 내일을 생각하며 힘쓰고,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을 하지 아니 해도의 뜻이다.
당연히 지렁이로서의 해야 할 일, 꿈틀거리며 스물 거리며 기어가다 보니 때가 되니 성불했다는 말이다.
지렁이는 胎生的으로 스물 거리며 기어갈 수밖에 없는 신체적 구조를 지니고 태어났다.
흙 속에서 흙을 파먹고 산다. 한마디로 땅의 소산(所産)이 주식(主食)인 셈이다.
그러니까 '땅에서 나서 땅엣 것을 파먹고 살다 보니 壽限이 다 되어서
때가 되니 결국 죽었다'라는 말이 곧 성불하였다는 것이다.
성불이란 무엇인가? 부처를 이룬다. 곧 부처가 된다는 말인데 부처란
'붓다''부처'불타' 등 여러 말로 쓰이는 바 '覺者'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깨달은 사람'을 말하는 데 ' 생로병사의 일체의 비밀을 깨닫고
번뇌의 강을 지나 해탈의 경지에 이르면 곧 성불'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 없이 나고 죽는 일체의 것을 벗으면 열반적정(涅槃寂靜)에 들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불가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는 것이 4가지가 있으니 곧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열반적정을 말하는 데
마지막 단계가 바로 이것, 곧 성불하는 것을 말한다.
'전신 사리가 되어 딱딱하게 후광을 비치고'라는 말에서 전신사리라는 말은
범어로는 체(體). 신골(身骨). 유신(遺身). 영골(寧骨)등의 여러 가지 말로 번역을 하고
또한 생신사리, 법신사리, 전신사리, 쇄신사리로 구분하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말할 때는 부처(석가모니)의 몸 전체가 사리로 화한 것을 말한다.
지렁이의 몸 전체가 마치 부처의 몸 전체가 사리로 딱딱하게 변하여 後光(=光彩)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햇볕에 바싹 말라 비틀어져서 햇빛을 받아 반사하는 지렁이의 死體를 묘사한 내용이다.
사실 지렁이의 바짝 마른 死體는 햇빛을 받으면 빤짝 빤짝 빛이 난다.
나는 쏟아지는 빛의 자비 속에서
전신 사리를 밟았다
우드득, 하고
부처님을 밟고 말았다
'쏟아지는 빛의 자비 속에서' 구름 한 점 없는
그야말로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모래알이 반짝이는 너무나도 눈부신 날을 말한다.
이런 날은 빨래가 참 잘 마른다.
잘 마르는 빨래처럼 죽어서 건조된 지렁이의 사체는 얼마나 빤짝빤짝 빛이 나겠는가?
'전신 사리를 밟았다'라는 말은 바로 그 잘 말라서 바싹 비틀어진
휘황찬란(輝煌燦爛)(?)하게 光彩가 나는 물건인 지렁이를 指稱하고 있다.
그 지렁이를 무심결에 아무 생각 없이 밟았다는 것이다.
밟은 결과가 다음에 나타나는바'우드득, 하고' 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이 擬聲語는 바싹 말라죽은 지렁이가 발에 밟혀서 '바싹 깨어져 으깨지며 내는 소리'인 것이다.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 앉는 소리이니, 곧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리는 소리"인 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내려앉는 소리인 것이다.
一體가 사라지고, 諸行이 무상하게 되는 것, 곧 허무의 절정을 나타낸 소리가 바로 이 '우드득'인 것이다.
'부처님을 밟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汎神論적 物神論을 엿볼 수가 있는바
불가에서는 만물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한갓 미물인 지렁이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처=전신사리=죽어 말라 비틀어져 光彩나는 지렁이'의 等式이 성립되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人生解法方程式이 아닐 수가 없다.
絶妙하고 奇妙한 解釋이요, 풀이이다. 전신사리로 化身한 지렁이 부처가
발밑에 밟혀서 으깨어지고 바싹 가루가 되었으니 세상에 이런 기가 막히는 일이 어디 있는가?
그래도 그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냥 無心으로 건너뛰고 넘어가는
저자의 平床心은 참으로 높이 살만한 득도의 풍모가 보이는 것 같다.
내일은 내가
내일을 보지 않은 죄로
성불할 순서
1연과 2연에서 반복된 어귀가 여기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보통 시나 글에서 반복하고 되풀이하는 말은 그것이 중요하여 강조할 때 하는 문장서술의 한 표현방법이다.
즉, '내일은' 이라는 말이다. 내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가오는 것이다.
모든 것을 疑問나게 하는 물음표(?)이다. 그 물음표(?)를 보지 않은 죄로 어쩔 수 없이,
빼도 박도 못하고 자기에게도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 죽음은 모든 인생들에게 공통된 문제다.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온갖 짓(?)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체질에 맞는 종교를 가지려고 하고 또 갖는다.
종교도 마치 옷 입는 것과 같아서 그 사람의 몸에 잘 맞아야 한다.
천편일률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옷을 입히려고 하면
그게 기성복(ready made)인바 개성도 없고 보기에도 좋지 않다.
그리고 각자의 안경을 쓰고 자기에게 맞을 것 같은 종교의 탈을 쓰고 생활한다.
아마 이 글을 쓴 저자도 불가에는 상당한 식견과 경륜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와 닿고 공감하는 부분을 멋지게 그려내고 있지 않은가?
종교가 다르더라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서 유대감을 느낀다는 것은 괜찮은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불가와 기독은 구원론에서 확연하게 다르고,
모든 만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든지 인생을 관조하는 것이라든지 하는 면에서 유사한 것도 많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도 참 많은 것 같다.
사실 나는 佛家는 基督만큼 잘 모른다. 불경을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이요,
불교 교리에 대해서도 공부를 안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슷한 것도 있으니 예를 들면 성경의 전도서 같은 경우는 마치
불경을 읽는 듯 한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전도서 서두부터 갈파하는'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도 헛되도다.'하는 말은
마치 불가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는 '제행무상(諸行無常)'과 그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독과 불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는
쌍두마차인지도 모르고, 평행선을 긋는 철로인지도 모른다.
*<蛇足>사실 나는 佛家에 대해서는 그 아는 바와 지식이 참으로 一賤하다.
오늘 불교적인 관점에서 글을 기술하다 보니 本意 아니게 誤解하고
잘못 평을 한 부분이 더러 있지 않나 싶다.
성불(成佛)이라는 글을 써서 본인으로 하여금 맛을 음미하게 하고
재미와 신명을 나게 한 박홍서 임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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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열려 있는 게 인터넷 사이트이고 그래서 다양한 글을 볼 수 있는 공간이지만 그래도 이름이 예향인데 성불을 논하는 평론은 좀 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사람마다 관점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저는 열린 마음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님이 거북하셨다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세상은 넓고 다양한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저의 글에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