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천둥과 물폭탄을 터뜨리며 무서운 위세를 자랑하던 비가 잠시 쉬는 거친 날, 젖은 행상길
을 돌다 자리하며 유통기한 지난 봉다리 커피를 끌어당기는데..
뉴스에,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제 청춘의 동의어로 각인된 이름의 마지막 가는 길이 눈에
들어옵니다.. 종소리에 침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어쩔 수없이 그의 이름에 묻어 이 지공노인
의 기억에 떠오르는 자욱한 최루가스와 함성소리, 그리고 저의 철없던 어린 날..
49년전, 어느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청춘의 빛이 찬란했던 스무살 언저리 젊은 날의 저는 번지
를 잘못 짚은 철없는 자유를 꿈꾸다 제대로 추락했습니다
당시, 청춘의 황금빛 날개는 한번쯤은 나를 위해 빛날 것 같았고 사랑은 젊음의 특권처럼 아름
다웠지만 푸르던 교정의 가로수 아래서 읽던 책속에는 시대의 아픈 최루냄새가 묻어나왔고
어깨를 걸고 광화문으로, 종로로 구호를 외치며 쫓겨다니던 일은 어설픈 자유를 꿈꾸는 자에게
는 거부할 수없는 통과의례였습니다
산골오지 출신 장남으로 가문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어쩌다 서울 유학생이 되어 스물에 처음
상경한 이 무지렁이는 서울내기 잘난 동무들 옆에 얼쩡대다 도매금으로 팔려 검은 지프에 실려
간 어느 도시의 높다란 담벼락 속에서 돌틈 사이에 핀 이름모를 꽃들을 보며 그의 노래와 김지하
의 시와 김남주의 흔적들을 경전처럼 읊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저는 사람에게도 비겁하였고 말로는 귀뚜라미처럼 낮은 곳을 지향하나 늘 양지
쪽에서 서성이던 이중성으로 삶의 투쟁에도 치열하지 못하였음.. 으로 당연히 회색의 뒷자리로
밀려났습니다
결과로, 저의 꽃다운 청춘은 불의 길과 얼음의 길 사이에서 답없는 자기연민에 방황하던 애틋한
시절이었고 문신처럼 제 젊은 영혼에 새겨진 구절들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
학교를 나와 맞이한 바깥세상도 꿈을 꿀 자유조차 허락하지 않으며 바삐 돌아갔고 한 시대의 획
을 긋는 사건들이 일어날 때마다 세상은 몸살로 앓았습니다
다시는 봄이 오지않을 것 같던 여러해 동안 저의 젊은 영혼도 세상과 이가 맞지않아 자주 삐걱
거렸고 저는 바람 앞의 풀잎처럼 스러지는 제 영혼을 추스리는데도 힘이 겨웠습니다
현실적인 꿈은 자꾸 뒷걸음 쳐갔고 올라가는 계단을 거꾸로 내려가는 아둔한 저는 양력을 잃어
자유낙하하는 새처럼 초라하였습니다
신열같은 청춘의 열정은 가슴속을 일렁였지만 사랑과는 인연이 없었고 삶의 비밀을 모두 알아
버린 에덴동산의 교활한 뱀처럼 세월은 저를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니 짦아서 아쉬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환장할 제 청춘의 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가버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눈을 떠보니..... 아뿔싸, 이제 망칠십의 지공노인이 되었습니다
인간이란 동물의 희노애락 생노병사의 애닯은 사연일랑 아랑곳없이 시간과 숫자는 냉정히 흐릅
니다, 그 흐름에 실려 저도 지난날 존경으로 쳐다보던 이들과도 이별을 합니다, 저도 저무는 것
이지요
얼마전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를 빌어, 영문도 모르고 반란군에 끌려나갔다가 비록 용맹스런 그
부대의 제복을 입었으나 실은 엄마도 못보고 죽는 두려움에 떨던 이 착한 쫄병이 운명적으로
반대편에 선 존경하는 참군인 정장군과 정중한 경례로 이별을 했는데, 오늘은 김민기라는 이름
과 이별을 합니다
정작 본인의 진의와는 아무 상관없이 한쪽에서는 시대의 투쟁가로, 다른 한쪽에서는 반체제 폭도
의 노래로 극명히 갈린 노래를 쓴 그 사람..
이제 우중의 그를 보내며 신열을 앓았던 저의 20대와도 작별을 고합니다, 저에게 그는 형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는 청춘의 모습으로 남아있지만 이제 그도 칠십을 훌쩍 넘겼기로 선생으로 부르
겠습니다
김민기 선생, 부디 그곳에서 행복하십시요.. 그리고 죄없이 눈망울만 맑던 나의 스무살, 그 애잔한
연민의 푸르름도 안녕히..
첫댓글 글 잘읽고 갑니다.
일흔셋이라 하데요.
시인 브레히트 처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노래하는 사람들도 많겠지요.
그런데 지금의 이 혼란스러움은 누구 때문인지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러나저러나 신은 중립이라 하데요.
인간사 혼란스러움은 그 존재의 본능이라 어쩔 수
는 없고 이놈저놈 싸우다보면 우열이 나지요
그놈도 얼마지않아 또 다른 놈에게 먹히고.. 성경
에 분노하는 신이라 했는데 중립이라시니 신도 실상
저처럼 비겁한가 합니다
김민기님의 노래와 삶을 아주 좋아합니다
요절한 제큰형도 김민기님의 친구를 좋아했었죠
가시밭길만 골라서 걸어가신 그분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https://youtu.be/blOJ_jiiexI?si=OFddjVArOY_Cr-a5
PLAY
큰 형님이 좋아하셨다는, 중저음의 그가 직접 부른
친구라는 노래는 까까머리 제게는 충격이었지요
어느 시인이 '살아있다는 건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
을 만나는 일' 이라 했는데 친구를 보낸 슬픔을 이리
표현하다니.. 당시 열일곱 제게는 신천지였습지요
한 시대를 같이 살아온 갑장 친구야ㆍ 이제 모든거 내려놓고 저 세상에 서 편히 쉬시게 ~~~
같은 시대를 살아내신 추소리 선배님께도 존경을
보냅니다.. 폭압적 권력하에서도 아직 우리 시회는
진실과 우직함이 통한다는 예방주사를 우리에게
맞혀준 그의 노래들이었습니다
그가 노래로 남겨준 정신의 고귀함은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시켜줄 것이지요
저항의 가수 김민기,
'나 이제 가노라...' 73세의 나이로 떠나갔습니다.
<아침이슬>
민주화를 염원하며 대학생들과
젊은이를 대변하는 노래였지요.
75년, 다른 노래와 함께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본인의사와 무관하게 저항의 상징이 된 그였다
생각하는데요.. 제가 고둥학교때 처음 아침이슬
로 기타를 배울 때는 이 노래는 영랑의 시처럼
맑게 느껴졌습니다, 75년 긴급조치와 함께 금지
가 되었고 나라의 많은 것이 바뀌었고 보잘 것
없는 어린 제 삶도 영향을 받았었지요
1970년
20세에 처음 알게된 김민기님의 노래를 반백년 이상 들으면서 70대가 되었네요.
이분과 같은시대를 살았음에 제삶도 의미있었다 싶습니다
https://youtu.be/W0LpbShfjrA?si=qfBhvsh3jLqsKgIY
PLAY
지금 젊은이들이 보면 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
지만 우리 가슴속에는 그의 노래와 함께한 청춘
의 푸른 날들이 있기에 김민기 선생에게나 들꽃
마루님에게나 서로는 청년으로 남아있을 것이지요
그는 자기가 좋아하고 하고픈 걸 한 사람이었을
걸로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김민기의 노래를 가장 많이 부른 양희은씨 말에 의하면 '아침이슬'이 처음엔 건전가요 였다네요.사실, 가사부터가 너무 맑고 순수하잖아요..ㅎ
대학생들 사이에 많이 퍼지면서 유신정권에서 김민기의 모든곡들이 모조리 금지곡이 되었다지요..김민기는 아무런 활동도 못하고 숨어 공장다니고 먼 시골로 내려가 농사나 짓고 살고...ㅠ.
극단 '학전' 연출 활동은 그 모든게 풀린 90년대초 부터 다시 재개된거구요..
이제 그는 세상의 질곡을 묻고 영면에 들었습니다
비와 바람 아침이슬과 친구가 그러하듯 그가 떠나
왔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연과 삶의 작은 것들
을 사랑하던 그의 노래도 멈추었고 낮은 곳에서 약자
를 향한 그의 파란만장한 삶도 여기서 그칩니다..
구봉님의 고백이
제가 하려던
고해성사입니다.
감사합니다.
가수 김민기
그렇지요
김 민기선생
그는 저항 가수,
싱어송 라이터를 넘어
암울했던 70년대
많은 젊은이들에게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CPBC평화방송
황우창 음악정원
정원사도
그의 스토리와 노래를 들려
주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ㅡ
제가 그를 기억하는 건 75년 긴급조치 9호이후 제
주변에도 닥친 포악한 권력의 무제한적 폭력이었습
니다, 며칠밤이면 선배동무들이 하나둘 사라지던
공포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고 그 두려움을 그의 노래
를 통해 겨우 희망의 끈으로 이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시대의 맑은 아침이슬이 떨어진 거지요
구봉 님의 젊은 날의 이야기를 읽으며
젊은 날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황금기였음을 새삼 느낍니다.
그 젊은 날에 함께 했던
김지하, 김남주 시인.
그리고 김민기 님.
저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구봉 님이 서울에서 공부하실때
저는 직장생활을 하며
남동생 공부를 시켰답니다.
동생은 부산의 모대학에
교수로 있고 저는 이렇게
손자 뒤따라 다니는 할미가
되어 있네요.
동생 공부시키느라 놓친 대학공부를
오십대에 했답니다.
젊은 날에 그리도 가고 싶었던 대학.
이른 아침에 구봉 님의
젊은 날과는 또 다른 옛생각이
떠올라서 주절주절 댓글 써봅니다.ㅎ
지나고 나야 깨닫고 있을 때는 모르는 게 인간이란
동물의 한계이기에 있을 때 잘해라는 유행가는 그냥
흘러간 노래가 아니고 삶의 진리인 거지요
공부는 남들과 우루루 할 때 하는 건데 나이들어
하셨다니 사람의 의지는 바위를 뚫고 이베리아님은
고드름 같은 의지를 지닌 분으로 보입니다
김민기님의 노래로 암울한 시대에도 푸르른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불의가 만연한 이 세상,
푸른 솔처럼 살았던 김민기님의 명복을 빕니다.
틀림없이 그곳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리라 믿습니다.
청년의 감성을 노래한 건전가요가 본인의사와 상관
없이 이름도 거창한 저항의 노래가 된 것은 오로지,
목표는 수단이 뭐든 정당화할 수 있다는 당시 국가
권력자 논리덕분이지요.. 그건 인류가 지구에 나타난
이래로 지속되어온 정치권력의 어둠이기도 하고요..
각자의 젊은 날, 각자가 삶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때, 감로수처럼
목 축여주고 잠시 숨 쉴틈을 주던 그 노래들.
그 분은 가셨어도 그 노래들은 오래 남을 겁니다.
원숭이는 바나나 쥔 손을 놓지않다가 사냥꾼
에게 붙잡힌다지요, 다만 원숭이의 집착은 제
명만 단축하지만 권력자의 집착은 나라를 불행
으로 이끌고 종당에는 총맞는 참극으로 끝나는
걸 저도 보았지요.. 감로수 같은 그의 노래가 더
이상 감로수가 아니길 바래봅니다ㅎ
김민기님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 여자들 끼리는 고인처럼 모습을 가진 분들을
참 착하게 생겼다고 말합니다.
정말 심성좋고 때 묻지 않았다는 얘기를 여러 매체에서 전해 들었습니다.
추모 글에서 고귀했던 분의 삶을 다시 떠 올려 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모습을 순하게, 착하게 생겼다고 하지만 시대
는 그런 순둥이형을 실은 바보라는 뜻으로 조롱하는
쪽에 가깝지요.. 그러나 김민기 선생은 제 눈에도 말
그대로 착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제가 뉴스로 본, 영정속의 그는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
이렇게 갑작스레 달려오게 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어제 오늘 고 김민기 님의 노래를 듣게 되네요.
아픈 역사의 페이지에 기록될 고인의
삶은 숭고 했습니다 .
우리 인간이란 동물이 싸우고 웃고 비비고 사는
이 세상을 지탱하는 공동선이라는 말은 불안한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설도 있지만 그양반
이 살아온 이력을 보면 그는 그 공동선을 향한
노력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
을까 생각합니다, 그 행위가 그에게는 좋은 노래
였을 것일 거고요..
제목만 보고도
김민기님 이야기를 하시겠다는
생각을 했드랬습니다.
최루가스냄새를 맡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구요.
구봉님 애쓰셨어요.^^
개그맨의 생명은 듣는 이가 예상하는 다음 말의
기대를 깨어 폭소를 내는 것, 작가는 제목을 보고
서는 짐작불가한 글을 써야 생명이 긴 것인데 제목
만으로도 제라님께 바로 들키니 저는 늘 잡글신세
입니다ㅎ 제가 애쓴 건 없고요, 저렴하게 행복해지
는 능력은 있으니까요..
참 구봉님보면 어느출판사로부터 러브 콜을 받을것같은데 줄판사들이 모르고 지나치네요
저는 1학년때 한일회담반대라는
뜻도 모르고 따라했지요
크게 잘못된 시류와 판단착오였지요
3공화국때 군경은
그래도 정이있었는데 5공때는 무자비했지요
외람되오나 어린 저도 세상사가 당시에는 적절한
판단이라 생각했는데 지나고보면 아뿔싸 싶은 게
어디 한두개였겠습니까.. 파도가 움직이는 것만
보고 그 파도를 움직이는 바람을 미처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사후공과는 있겠으나 당시의
포악한 국가권력은 저는 지금도 싫습니다
개인적 인연은 없으나 김민기님을 조문하고, 그 분과 마지막을 인사를 나누며, 저의 20대와도 작별했습니다. 그 분의 노래가 없는 제 청춘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인가 봅니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인간의 따뜻함과 천재의 열정, 수도자 같은 겸허함은 어떤 고뇌와 유혹을 견뎌야 했을까요.
올리신 글 속에 20대와 작별하신다는 귀절에 공감되어 덕분에 제 맘을 길게 적어 봤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돌아보면 무모했다 싶지만 당시 젊은이들이 상대
한 국가권력의 타도방법은 '코끼리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바늘로 찌른다'는 식의 막막함
이었는데 김민기 선생의 노래로 바늘로 찌르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생각합니다
진작 이별했어야할 20대를 여즉 붙들고 있었음은
제가 철이 덜든 탓이지요.. 정갈한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