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사태의 조속한 해결과 이 땅의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235차 미사(12월10일)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매월 둘째주 월요일 19시,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세상은 더 아름다워져야 되고
더 정의로워져야 되며
더 진실해져야 합니다
한만삼 신부(수원교구 기산성당)
저는
4년 4개월을 남수단 아강그리알 선교사로
살았습니다.
2008년 3월 한국을 떠날 때 이명박 정부의 만행을 보지
못하겠다며 부러워했습니다.
저는 남수단의 전기도 없는 오지에서 사고와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지의 고립을 우려해서
최첨단 장비인 위성 안테나를 설치하고 컴퓨터를 연결해서 56kb
최저화질의
KBS
9시 뉴스를 보는 것을
고된 노동의 하루를 마치는 유일한 낙으로 살았습니다.
광우병파동과
4대강 소식이 전해지고,
용산참사가
전해지고,
그리곤
2009년 8월 쌍용차 노동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공장 지붕을
곤봉을 들고 달려가는 경찰들과 쫒기는 노동자의 모습,
구타장면이
방송되었습니다.
뉴스를 보던 신부들 사이에
깊은 탄식이 흘렀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구반대편의
이야기였고 해외토픽 감이었습니다.
말도
안돼....
국가가 국민을
구타했습니다.
국민의 경찰이 국민을
구타했습니다.
남수단에선 22년간의 내전으로 인해 군부대로부터 총기류들이
민간인들에게 만연되게 퍼져있습니다.
소를 지키는 목동들은
당연하듯 총과 실탄을 들고 다녔고 대검과 칼과 창을 들고 다녔습니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켜야
했기에 무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누가
자신들을 죽이고 소를 훔쳐갈지 모르는 세상이었습니다.
법은 있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법이 있어도 이를 지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사소한 분쟁에도 총기가
너무 쉽게 사용되었고,
총은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복수에
복수를 부르는 폭력의 악순환이었습니다.
치안이 험악해지자 읍장이
군인을 동원에 총기류 강제 수거에 나섰습니다.
어마어마한 총들이
압수되었고,
총을 빼앗기 위해 군인들은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무조건 구타를 했습니다.
구타를 멈추게 하려면 누가
총이 있는지를 말해야 했습니다.
잔인한 방법이었지만
효율적이었습니다.
그렇게 군인들은 총기를
수거해가자 주민들을 총을 빼앗긴 후 심각하게 두려워했습니다.
자신들이 총이 없다는 것을
알면 상대 부족이 총을 들고와 자신들을 죽이고 소를 훔쳐갈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소는 그들의 부동산이었고
부의 절대 가치였습니다.
뺏거나 빼앗을 수
있는,
다리가 달린 재화나 움직일
수 있는 재화는 결국 인간들에게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2010년 재의 수요일을 지낸
토요일,
쉐벳마을 성당에 미사를
하러 내려왔습니다.
그러자 소신학생들이
“신부님 오늘 오후에 군인들의 총격으로 추장 세명이
죽었는데 좀 있으면 목동들이 군인들을 공격 할테니 몸을 피해야 합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군인들의 진지는 성당 바로
앞에 있었는데 군인들이 경계자세로 앉아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설마....
어떻게 목동들이 군인들을
공격하겠니?.”
“아니예요.
저희 전통대로라면 바로
공격이 들어올 것입니다.”
하지만 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내일이
주일이었고,
성당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충돌을
막고 싶었습니다.
곧 어두워질 것이었기
때문에 발전기를 돌려서 성당의 전구를 환하게 켜서라도 충돌을 막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소신학생에게 얼른
시장에 가서 먹을 것을 사오라고 보내곤 장비들을 안전한 곳으로 숨기거나 치운 후 발전기를 꺼낼 생각이었습니다.
외국인이었던 제가 성당을
돌아다니자 저를 지켜보던 목동들도 섣불리 공격을 하지 못하고 대치상태였습니다.
그들 사이에 혼자 한참을
서서 주모경을 바치고 기도를 하며 고민을 하다가 결심을 하고 발전기를 꺼내기 위해 성당을 돌아섰을 때였습니다.
제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기가 무섭게..
“따다당!”
하며 새빨간 예광탄이
군인들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군인들이 일사분란하게
엎드려 일제사격을 시작했고,
제 눈앞에서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먹을 것을 사오라고 보낸 소신학생이었습니다.
그는 멀찍이 총소리를 듣고
성당으로 걸어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어휴...’
아찔했습니다.
저는 성당 옆문에 문을
열고 서서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며 서있었습니다.
그가 성당으로 무사히
돌아오자 문을 닫고 모두 엎드리라고 말했습니다.
성당은 흙벽돌에 양철지붕을
얹은 엉성한 건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저희들을
지키는 요새요 방패였습니다.
전투는
치열했고,
요란했으며
끔찍했습니다.
아마 울지마 톤즈 영화에서 일부 장면이 편집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날 밤새도록 치러진 전투로
17명의 목동이 죽었고,
8명의 군인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집이란 집은 모두
불타버렸고 가게란 가게는 모두 도둑맞았습니다.
전쟁의 결말은 죽은 시체와
불타버린 집,
가족과 자녀를 잃은
피해자와 살인자만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 목동들의
공격신호인 호각소리만 들어도 식은땀이 나는 전쟁 트라우마를 겪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평화란 무엇일까?
단지 전쟁이나 전투나 폭력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인간은 왜 폭력을 휘두르는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지키고
싶어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전쟁을 하는 인간은
야만스럽습니다.
아니 그 야만 자체가
됩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은 그 야만에 지배당하고
있으면서 그 야만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2012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만
2년 4개월이 되어갑니다.
이젠 한국의 추위도 적응도
되고 한국말도 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돌아온 한국은
전에 제가 살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야만의 나라가
되어있었습니다.
거짓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뻔뻔함.
모두가 거짓과 부정을
저지르는 나라,
권력과
폭력,
힘 있는 자들에게
의지하려는 욕망,
가난한 이들이 땅을
빼앗기는 슬픔에 대한 무관심.
그래서 저는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내가 살았던 한국의
민주주의는 착각이었을까?
‘착각’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실제와 다르게 잘못 느끼거나 지각하는
것,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잘못 느끼거나 지각하는 것’입니다.
한국사회가 민주적인
정부아래 민주적인 사회라는 것은 ‘착각’입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저에게
물었습니다.
한국인들이 문명인일까?
한국사회가 정말 우수한
사회인가?
100년 전 조선의 망국을 기록한 중국인 량치차오는
“조선 사람은 화를 잘 내고 일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한번 모욕을 당하면 곧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난다.
그러나 그 성냄은 얼마
안가서 그치고 만다.
한번 그치면 이미 죽은
뱀처럼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평합니다.
그리고
“조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관념이 매우
박약하다.
서민들은 한번 배부르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차를 다리며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한담으로 날을 보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조선사회를 이렇게
평합니다.
“대체로 조선사회에서는
음험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가 늘 강한 자로 번성하는 처지에 놓였고,
정결하고 자애하는 자는
약한 자로 쇠멸하는 처지에 놓였다.
서양학자들이
말하길,
정치라는 것은 국민 심리의
반향이다.”라는 뼈아픈 말을
남겨주었습니다.
한국의 정치는 한국
사람들의 심리의 반향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이 한국 사회는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세월호
사태도,
쌍용차의 이 대법원 판결에
우리가 어떻게 힘을 내야 될까?
힘을 내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힘
내라’는 그 말도 너무 잔혹하고 잔인한 사회가
되어버렸는데,
우리의 힘은 어디에서
올까?
그 힘은 세상 속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볼 때
도저히 힘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하루하루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가치,
정의,
진리,
진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랑함속에서 우리의 힘이 샘솟고 있었습니다.
오늘 무염시태 대축일에 우리는 창세기
1독서를 통해서 원죄에 대해 듣게
됩니다.
여인의 아픔을 통해서
부모님의 아픔을 통해서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어두운 이
세상에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보내 주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정의의 고통에 현실에 함께 하시며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힘과 용기와 위로를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고 힘을 낼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더 아름다워져야 되고 세상은 더
정의로워져야 되며 세상은 더 진실해져야 합니다.
진리가 더 거대한 평화와
자유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합니다.
노동자들이 고통을
받고,
가난한 이들이
버림받으며,
울부짖는 자들을 외면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저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마음 그대로
세상의 가난과 아픔을 사랑합니다.
여러분들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고,
우리 모두가 있기 때문에
세상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이요 위로요 기쁨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아멘.
싸움을 포기 하지 않기 때문에 저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김득중 쌍용차
해고노동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걸림돌과 디딤돌 10건씩 해서 선정했는데요.
올해 가장 큰 문제로
쌍용차 대법 판결을 최악의 판결로 뽑았더라구요.
그 만큼 많은 분들이 마음
아파하시고 또 그것에 대한 염려와 격려를 함께 많은 분들이 해주셨습니다.
저희도 이번 한달을
의미있게 보냈습니다.
크고 작은 의미 있는
일들이 있으면서 보내왔습니다.
돌이켜보면 저희가 2009년 파업 끝나고 나서 97명이 구속되었어요.
그리고
300명 검찰과 경찰 조사를 통해서 전과자가 되었고
425억 손해배상 청구가 당시 자본과 정권 그리고
사법구가 저희한테 청구했습니다.
저희 문제를 푸는데 이것이
사법적으로 해결되기에는 쉽지 않겠다는 판단을 당시에도 했고 지난 6년을 저희 투쟁 방식으로 해 왔기 때문에 이번
판결이 다소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번 판결 후에 조합원들이
밤늦게 술 드시고 전화를 많이 하시더라구요.
많이 좌절도 하시고 분노도
하시고 또 비통한 얘기가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훌훌 털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까?
어두워
보입니까?
아니죠?
그렇게
11월 13일 후에 그렇게 지냈습니다.
11월 15일 2000일 집회를 하고 저희 1박2일로 수련회도 갔다 왔어요.
강원도 강릉에 가서
바닷바람도 쐐고 못 다한 얘기도 나누었습니다.
또 수차례 넓게 멀리
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또 다시 할까도 마음 모아 결의 하고 지난 6년간 함께 해온 동료들을 서로 토닥이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오늘 오는데 한 분이 쉰 일곱된
선배님이,
우리 한상균 동지가
민주노총 위원장 후보로 출마했는데요,
민주노총 투표하러 저희
노동조합을 방문했더라구요.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
세분의 선배님이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해고자라는 이름으로
정년퇴임식을 토요일 했습니다.
마음이
짠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고마웠고요.
형님들 계시기 때문에
저희가 어려울 때 뒤에서 묵묵하게 지켜봐주시고 든든한 형님으로 저희들에게 심적으로 위로를 많이 주셨죠.
그날 많은 분들이 오시기는
했는데 선배님들이 그러더라구요.
정년퇴임하고
뭐하냐고,
이젠 본격적으로 투쟁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제는 떳떳하게 해고자들과
정문 앞에 설수 있겠구나 말씀들을 해주셔서 감동이었습니다.
어제 평택에서도 전국에
흩어져 있는 해고자과 모여 간담회와 송년회를 했어요.
60여분이
오셨어요.
평택에 계신 선배님 한분이
토요일 신정동 성당에 오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평택에서 선배님
모시고 작은 은퇴식을 어제 했습니다.
그렇게 세분의 선배님의
정년 퇴임식을 마무리 했습니다.
이래저래 많은 것들을 치유하고 힘을
모았어요.
그것이 여기 계신 우리
동지들도 그렇지만 생계 나가 있는 많은 우리 조합원들도 마음 추스르고 있습니다.
법에 기대는 했지만 그렇
것이 아니라 우리 식으로 해결하자고 어제 결의를 가졌고,
그런 결의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저희는 어느 해보다 혹독한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저희 싸움을 포기 하지
않기 때문에 저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승리를 동지한테 보여
준다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신정동성당에서 연대 오신
한 분이 쌍차는 그래도 돌아갈 공장이라도 있잖아,
콜트콜텍은
뭐야?
기륭은
뭐야?
스타케이칼은
뭐야?
이러면서 우리가 제대로
투쟁만 하면 승리한다는 것에 대해서 힘을 주시더라구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코오롱
최일배 동지 한달 넘게 단식하고 있고 스타케미칼 차광호 동지 196일 넘게 고공에 있습니다.
참 많은 분들이 이
엄동설한에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분들 기억해주시고
기도해주시고 저희들 힘내서 당당하게 앞으로 달려가겠습니다.
10년
투쟁 접고 현장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김혜란 코오롱
해고노동자
구미에서 투쟁을 하다가
과천 본사 앞에 천막을 친지가 3년이 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자리 와서
보니 쌍차 동지들이 너무 부럽구요.
구미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인데요.
구미에서는 고립되다
시피해서 한 7년을 싸웠습니다.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안
보여서 3년 전에 본사가 있는 과천으로 올라
왔습니다.
50명으로
출발했는데요.
세월이
10년이 넘다 보니 생계 때문에 지금은
12명이 남아 있습니다.
정리해고가 되면 빨간
딱지가 붙어서 어딜 가더라도 취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리운전을 많이
합니다.
한분은 대리를 하다가
교통사고 나서 돌아가시구요.
지금은
9명은 생계를 나가 계시구요,
3명이 투쟁팀에 남아
있습니다.
한분은 총연맹에 가
계시구요.
과천에는 저하고 현재 단식
34일차인 최일배 위원장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저는
6학년짜리 아들이 있어서 1박이나 2박정도 구미에 잠깐 내려 갔다가 천막에 와서
일정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막상 여기에 오니 기쁘기고 하고 앞에 잘 서보지
않아서 떨리기도 합니다.
반갑구요.
저도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엄마가 처녀 때부터 성당을
다녀서요.
세레명은
데레사입니다.
코오롱 들어와서
3교대를 365일 하다 보니...
학교도 거기서
다녔습니다.
핑계지만,
시간이 안 맞아서 지금은
냉담중이구요.
엄마랑 언니들은 지금도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2월 21일 노란봉투인 해고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내년
2월 21일이면 10년을 넘어 11년을 향해 달려갑니다.
도저히
10년을 넘겨서는 안 되겠다고 싶어서 구미든 과천이든
안 해본 투쟁이 없습니다.
단식에 크레인 농성에 소위
말하는 이웅열 회장 집 앞까지 찾아 갔었구요.
단식은 위원장이
2번째 하고 있고,
3보1배는 수도 없이 했고요.
코오롱
불매라든지...
천막농성도 고향 떠나서
3년째 하고 있습니다.
이 투쟁을 끝 마쳐야
되는데 저희들이 할 수 있는 게 단식 아니면 고공농성을 다시 한 번 더 하는 건데요.
고공농성을 하려면 밑에서
동지들이 받쳐주어야 하는데 저희들 같은 경우 인원도 없고 과천이다 보니 연대동지들이 오기 힘들어 해서 못했구요.
위원장님이 단식을 11월 5일부터 시작해 34일차를 지나고 있습니다.
위원장님이 단식을 하시는
게 이 10년을 넘기지 않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생계팀도 많이 힘들어
합니다.
9명이 제대로 된 직장을
갖지 못하고 최저 수준에서 생계를 하다 보니 위원장님도 그렇고 생계팀 힘들어 해서 10년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2월 13일 정말 어렵게 날
잡았습니다.
과천시민대책위가
3년간 같이 했는데요.
시민대책위에서도
10년을 넘겨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12월 13일 시민들분 3650인 선언을 하면서 연대마당을
3시부터 합니다.
서울에 계시지만 주위
분들에게 널리 알려주시고 고맙겠구요.
아침에 기자회견을
했구요.
제가 눈물이 없었는데 10년을 넘어 11년으로 간다고 하니 눈물이
많아졌습니다.
내일 우리 얘 생일인데
생일을 제대로 챙겨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더 이
자리에 있으니 더 그렇구요.
쌍차도 해고 문제고 저희도 해고 문제로 하고
있는데요.
이 해고 문제는 우리가
제대로 못하면 우리 자식도 그렇고 대부분 비정규직이 될 수밖에 없구요.
우리 선에서 되도록
정리해고를 없앴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이 투쟁을
하게 된 것은,
솔직히 혼자가 아닌 옆에
누군가가 함께 한다는 것이,
옆에 누군가가 손잡아
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를 서울에 와서 과천에 와서 절실히 피부로 느꼈습니다.
또 이렇게 투쟁하는 연대
단위들이 투쟁에 지지를 보내주고 있어서 너무나 고맙습니다.
12월 13일 좀 더 많은 힘들 보태주셔서 최일배 위원장님이
단식을 멈췄으면 좋겠구요.
회사에서
8년 가까이를 투명인간처럼 외면하고 무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면담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 희망을
가져봅니다.
투쟁하며 정의구현사제단을 알게
되었는데요.
제가 지금 좀 후회
됩니다.
좀 열심히
다닐걸...
지금 후회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코오롱도
해결 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시고 기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고맙구요.
쌍차 동지들도 빨리
현장으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들도
10년 투쟁 접고 현장으로 돌아갔으면
좋겠구요.
모든 투쟁하는 동지들이
함께 웃을 수 있고,
이 한해는 마음 편히
가정으로 돌아 갈 수 있도록 많은 도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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