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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한라산 백록담
서귀포.
범섬
범섬은 서귀포 주민들에게는
'웅크리고 앉은 큰호랑이' 수호신.
한라산에서 화산이 폭팔할 경우거나
전란이 일어났을 경우에 긴급한 대피처.
화산이 폭팔한 경우에도
일단 이곳으로 대피한 후
긴급한 상태를 관망하면서
어디로 대피할 것인지.,결정.
백록담에서
화산 대폭팔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한라산을 중심으로
대피할 곳 많은 제주도.
긴급할 경우에는
동굴 속으로도 대피.
선사시대 빌레못동굴은
제주민들에게 화산폭팔 때
대피처이기도 했던 동굴이다.
범섬은
주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
왜구가
그곳에서
숨어있다가
언제 나타나서
야욕을 드러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범섬은
서귀포 주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자
경외(敬畏)의 대상이며
'이상향'이자 성역(聖域).
.
범섬에서 바라본.,
한라산 & 영주산.
조상대대로 제주도 주민들에게 있어서
영주산은 단순히 산의 개념이 아닌 성지.
즉, '영혼의 지주' 같은.,마음의 고향이다.
성읍민속마을
주민들에게는
조상 대대로~
마을 공동묘지.
조선시대 제주목사가
성읍리(당시 진사리)를
정의현 읍치(邑治)로 삼을 때
영주산을 주산으로 삼았다 한다.
..........................영주산...............................
영주산(326.4m)은 봉래산·방장산과 더불어.,삼신산.
신선이 살아 신령스럽다고 하여 ‘영모루’ 또는 ‘영머리’.
이것을 한자로 영지(瀛旨)로 표기한 뒤.,영주산(瀛洲山).
'신증동국여지승람' '탐라지' 등에도 영주산(瀛洲山).
성읍 민속 마을 북쪽 1.8㎞에 위치한 성읍 마을 "뒷산".
오름 분화구는 화산체의 남동쪽으로 터진 말굽형이다.
오름 사면 대부분은 초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선 시대 제주 목사가 성읍리(당시 진사리)를
정의현 읍치(邑治)로 삼을 때 풍수지리적으로
'영주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았다.'고 한다.
총면적 1,338,920㎡
둘레 4,688m,
표고 326.4m,
비고 176m.
옛부터 불로초(영지) 산지로 알려져
진시황이 서불과 5천 동남동녀를 보내
찾았다고 하는 전설 속 삼신산 중 하나.
.....................................................
기원전 서불은 영주산 불로초를 찾기 위해
탐라국에 왔다가 서귀포로 돌아갔다 전한다.
그래서, '서불이 귀환한 포구'라 하여.,'서귀포'
.
"서귀포칠십리(西歸浦七十里)"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된 계기는
1938년 시인 '조명암'의 노랫말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서귀포칠십리'.
당시 일제치하에 억눌려 살았던 국민들에게
향수와 애틋한 그리움을 이끌어내면서 큰 인기.
원래, "서귀포칠십리"란 말의 거리적인 개념은
1423년(세종 5년) 안무사 '정간(鄭幹)'에 의해서
정의현청이 표선 성읍마을로 이전하면서부터였다.
1653년 제주목사 이원진 '탐라지'에 의하면,
'서귀포는 정의현청에서부터 서쪽 70리에 있다'
즉, 서귀포칠십리가 처음에는 정의현청이 있었던
'성읍마을~서귀포' 거리를 알려주던 조선시대 개념
,
오늘날, 서귀포칠십리는 단순 '거리개념'이 아닌
서귀포 아름다움과 신비경을 대변하는.,고유명사.
서귀포칠십리는 유람선에서 바라보면 더욱 아름답다.
서귀포항 해안절벽의 웅장함.
바다위에 두둥실 떠있는 섬들
수려함이 빼어난 미항.,서귀포.
.
서귀포항 어선과 화물선의 부산함,
서귀포칠십리 앞바다 유람선 뱃고동,
해저 신비를 누비는 잠수함과 스쿠버들.
유람선선착장에서 남서쪽 새섬으로 뻗은 방파제.
해안절벽 밑에 너려있는 집채만한 큰 바위덩어리들.
천연기념물 제95호로 지정된 서귀포층 패류화석지대.
중생대말 백악기 바다 해양생물들이
묻힌 퇴적암이 융기하여 단애를 형성.
오랜세월 풍화작용을 거친 패류화석들.
그리고,
산호화석, 어류등뼈,
연체동물, 저서성(底棲性) 및
부유성 유공충(有孔蟲)등 크고 작은
동물화석들이 계속 새로 발견되고 있다.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어 좋고,
아이들에게 자연사 공부방.
.
선착장 바로 앞에는 섬 하나.
.
해송이 울창한 숲이 있는 '새섬'.
한라산이 폭발하면서 봉우리가 깎여
이곳으로 날아와 섬이 되었다는.,전설.
선착장에서 이어진 방파제를 따라
썰물 때에는 걸어서 건널 수도 있다.
선착장을 떠난 유람선은 서귀포항과
새섬 방파제 사이를 빠져나가 뱃머리를
동쪽으로 향하면서 해안절경을 보여준다.
소남머리 절벽을 지나며
제일 먼저 보이는 정방폭포.
(높이 23m, 폭 8m, 깊이 5m)
.
옛부터 정방하폭(正房夏瀑)
'영주십경'의 하나로 삼았다.
해변을 끼고 높이 치솟은 절벽.
바다로 나무가지를 드리운 노송.
'정방하폭'라 함은
여름의 정방폭포가
가장 아름답다는 말.
전설에 의하면 2000년전
중국 진나라 시황제때 사자
서불이 진시황제의 명을 받아,
영주산 불로초를 캐기 위하여
동남동녀 500쌍과 함께 왔다가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 위에
'서불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뜻말.
서불과지(徐市過之) 각자가 있던 곳.
.....................
.....................
용암이 해안까지 흘러 내려와 식은.,거문여해안.
정방폭포가 가까이 있고 소정방폭포와도 연결된
천혜의 해안경승지이며 연인들의 산책코스로 유명.
해안경승지 매력에 빠져 설레는 마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시야에 나타나는 섶섬은
서귀포 해안의 또 다른 풍광을 가지고 있는 섬.
섶섬은 상록수림으로 뒤덮여 있는 자연식물원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천연기념물 파초일엽 자생지.
섶섬은 파초일엽 본종이 자생할 수 있는.,북쪽 한계선.
"옛날 섶섬에는 용이 되려 꿈꾸던 이무기가 살았단다.
매달 정월 초하룻날과 여드렛 날이면., 용왕에게 기도.
어느 날 용왕이 나타나 "섶섬과 지귀섬 사이에
숨겨둔 구슬을 찾아내면 용이 되도록 해주겠다"
.
그날부터 용왕의 말대로 숨겨둔 구슬을 찾으려고
두 섬 사이를 오거며, 무려 100년간이나 헤맸지만
구슬은 찾지도 못하고 원통한 나머지 죽고 말았다.
그후부터 비가 내리려 하면
늘 짙은 안개가 끼곤 하였는데,
죽은 뱀의 혼이 안개가 되어 섶섬
산마루에 서리는 것이라고 전한다."
섶섬을 지나 서쪽으로 향하면
서귀포 주변 5무인도 중 1.,문섬.
서귀포항에서 1.25㎞ 정도 떨어진
이 섬은 천연기념물 제421호로 지정.
.
문섬(해발 73m)은 무인도로,
수중에는 난류가 흐르고 있어
사시사철 아열대성 어류 서식처.
각종 희귀 산호들이 자라고 있어
국내 최고(最古) 수중생태계 보고.
섬에는 거목 담팔수나무
등 상록난대림이 울창하다
문섬을 지나면 무인도 범섬
천연기념물 제421호로 지정.
.
거문도와 제주도에서만 자생하는
물푸레나무과의 박달목서가 자생.
이 섬은 수직으로 된 주상절리가 발달.
무인도 섬 주위에는 해식동굴들이 있다.
해발 87m 범섬은 몽고지배 1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섬과 범섬은 제주도의 기반 암석인 현무암이 아닌
조면암으로 구성되어 있어 주상절리 해식동굴이 발달.
또한, 큰보리장나무 군락과 흑비둘기의 서식지로도 유명.
옛날 어느 사냥꾼이 한라산에서 사냥을 하는데
그만 실수해 활집으로 옥황상제의 배를 건드렸다.
노한 상제가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집어 던졌는데,
그것이 흩어져 서귀포 앞바다 문섬과 범섬이 되었고,
두 섬이 뽑힌 자리가 백록담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다섯 섬을 둘러 본 유람선은
육지를 향해 뱃머리를 돌린다.
본섬 육지를 바라 보면 멀리 보기에도
커다란 오름인 고근산이 눈에 들어온다.
.
봉우리에 원형분화구를 갖고 있는 오름으로,
정상에 서면 멀리 마라도에서부터 지귀도까지
제주바다와 서귀포의 풍광을 한눈에 바라 보인다
.
밤바다와 함께 어우러진
서귀포칠십리 야경 전망대.
설문대할망이 한라산 정상부를 베개 삼고,
고근산 굼부리(분화구)에는 궁둥이를 얹어
서귀포 앞바다 범섬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
물장구를 쳤다.'는 전설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이 부쩍 찾으면서
새로운 산책 휴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떼배 물질 해녀들이 반기는 서귀포 해변.
연중무휴 사계절 내내.,' 바다낚시의 천국'
.
바다낚시터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해안 전역이 낚시터이며 어종도 다양.
갯바위 낚시와 배낚시를 즐길 수 있다.
돌돔, 참돔, 자바리,
벵어돔(흑돔), 감성돔 등.
낚시 적기는 5월부터 11월 사이.
삼매봉은 시민공원이자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
서귀포를 지키는 수문장이다.
정상 팔각정인 남성정은 서귀포시 전망대
범섬, 문섬, 새섬, 섶섬 그리고 서쪽으로는
마라도와 가파도까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밤에 손을 뻗으면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에
닿는다는 전설이 있어 사람의 수명과 관련된
별을 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불로장생 상징명소.
삼매봉과 외돌개 사이에
40m 깎아지른 수직절벽.
.
이 곳은 걸어서 갈 수 없는 급경사의
수직단애로 곳곳에 해식동굴이 많다.
다시 눈을 돌리면 오랜 세월을 바람과
파도에 씻기면서도 버티고 서있는 외돌개.
둘레 약 10m,
높이 20m 기암.
'장군석' 외돌개.
바닷가에서 해파의 차별침식에 의해
여러개의 해식동굴이 주변에 형성되어
홀로 고립되어 남아있는 갯바위 기둥이다.
고려 말 최영장군이 서귀포 앞바다 범섬에서
원나라의 잔류 저항세력을 토벌할 때 외돌개를
장대한 장수로 변장시킴으로써 범섬에 숨어 있던
적군이 이를 보고 겁에 질려 모두 자결했다는 전설.
그리하여, 외돌개를
장군석이라고도 한다.
주위에는 선녀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고
바다에는 범섬, 새섬 등의 아름다운 섬들.
장군석에는 노부부에 대한 전설도 전한다.
옛날 서귀포에 어느 노부부가 살았다는데
어누날, 할아버지가 멀리 고기를 잡으러 떠나자
걱정된 할머니는 외돌개에서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숨을 거뒀고,
할머니는 오래도록 기다리다가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단다.
훗날 외돌개가 된 할머니 곁으로
할아버지의 시신이 돌아왔다는데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는듯이 뒤엉켜
큰바위가 되었다고 하여, 훗날 사람들은
노부부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을
가슴에 묻고 오랜 세월 기려왔다고 전해져온다.
.
외돌개 동쪽으로 이어진 해안절벽에는
'황우지해안 열두굴'이라는 굴이 보인다.
이 굴은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미군의 공격을 대비해 어뢰정을
숨기기 위한 군사방어용 인공굴이며 모두 12개.
서귀포항을 떠난 배는
서귀포칠십리 앞바다를
한바퀴 돌고 제자리로 간다.
짧은 시간 안에 해안절벽과 섬속의 섬,
바다와 한라산, 오름과 동굴 해안경관을
둘러볼 수 있는.,서귀포칠십리 앞바다 경승.
.
범섬에서 바라본 제주도 무인도들.
서귀포시 정방폭포
"제주도가 한라산이고,
한라산이 곧 제주도이다."
"제주도는 한라산 외에도
여러 섬속섬들을 거느렸다."
"제주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 영역일까?"
비양도(飛揚島)·우도(牛島)·
상추자도(上楸子島)·하추자도·
횡간도(橫干島)·가파도(加波島)·
마라도(馬羅島) 등 8개의 유인도와
54개 무인도로 이뤄진.,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포시는 제주도 한라산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라산 중심으로 동서 사면은 3°~5°의 매우 완만한 경사.
남북 사면은 5° 정도로 약간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지형.
한국 최남단에 위치해 남쪽으로 해양을 끼고,
북쪽 한라산은 겨울철 북서 계절풍을 막아준다.
전국에서 가장 온화한 해양성기후 국내 최다우지.
한라산과 더불어 기생 오름· 계곡· 절벽 등의 산악 자원과
해안 단애와 폭포, 중산간 초지 등이 특이한 자원 기반으로
관광과 농업·수산업·축산업으로 특화 기능이 중요한 경제기반.
.
서귀포시 총면적은 870.87㎢
제주도 전체의 47.1%를 차지,
서귀포시 주요 토지 지목 별 현황을 보면,
임야 50.1%, 밭 18%, 과수원 12%, 목장 6.7%.
유인도 3개(추자도, 가파도 마라도), 무인도10개.
...................................................................
서귀포 여행에서 보다 더
특별한 체험을 즐기기 위해
5 섬을 찾는 '붐'이 일고 있다.
'카누'
'바다낚시'
'스쿠버 다이빙'
'서귀포칠십리'가 아름다운 까닭은
서귀포칠십리 앞바다에 5개 무인도가
몰려있기 때문이라해도 과언이 아닐듯.
범섬.
새섬
문섬.
섶섬.
지귀도.
저마다 전설과 스토리텔링이 멋진 5개 무인도.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해역이라 어족이 풍부.
형형색색 산호초와 물고기떼 등 신비한 수중경관.
제주특별자치도에 63개 섬들.
그중 8개 섬은 사람이 사는 섬,
나머지 55개의 섬들은 무인도다.
55개 무인도는
천혜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으나
접근이 쉽지 않다.
한국판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가 갈라지고 바닷길이
생기는 3개의 무인도가 있다.
토끼섬
썩은섬
새섬
걸어서도
갈 수 있는
무인도..3개.
토끼섬은 제주시 구좌읍에 위치.
문주란 자생지로 유명한 무인도.
진도의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띠섬처럼 3월에만 바닷길이 열린다.
그래서, 걸어서 갈수 있는 시기가 짧다.
썩은섬은 서귀포시 강정동에 위치.
썩은섬은 하루에 두번 바닷길이 열린다.
그래서, 많은 여행객들이 이 섬을 찾는다.
썩은섬 안에는 산책로를
나무 데크로 조성해 놓아
탐방객들 관람이 용이하다.
새섬은 서귀포항에서 바로 코 앞에 위치.
새섬은 무인도 느낌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새섬은 서귀포항에서 불과 20m 떨어진 위치.
세연교가 이어놓은.,새섬 산책로
서귀포항(西歸浦港)은 본래, 한산한 어항이었다.
1925년 바로 앞의 새섬[茅島, 鳥島] 쪽으로 향하는
216m의 방파제 축조를 시작으로 각종 항만시설을 갖춰
1968년 2종 항만으로, 1971년 1종 지정항으로 승격되었고
현재는 항만법상 서귀포항은 무역항으로 지정되어 있다.
.....................서귀포항.......................
동·서·남·새섬 방파제가 1,624m 축조되었다.
접안시설로 물량장 817m, 안벽 630m가 설치.
1,000t급 선박 5척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부두.
1981년 여객터미널 준공. 서귀포항 안벽 630m,
물양장 751m로 최대접안능력(D/W)이 5,000t
동시 접안 1000t급 12척(연간 916천t 하역 가능).
제주도와 육지 간 연륙교통은
제주시에 전적으로 의존했으나,
1960년대에 서귀포-성산-부산의
연륙항로가 개설되어 격일제 취항.
서귀포항 앞바다
숲섬·문섬·범섬·새섬
섬과 주변 해안절벽이
어우러진 경관이 좋아
관광항의 구실도 한다.
서귀포항을 중심으로 한 연근해어업도 활발하여
삼치·고등어·도미·옥돔·갈치·멸치 등이 많이 잡히고,
해조류·전복·소라 등 양식. 감귤 전용부두의 대형화,
남제주지역 관광위락을 위한 항만건설, 대피항 역할.
수역확보 등을 목적으로 외항을 단계적으로 개발 중.
......................................................................
.......
범섬
.......
서귀포시청 제2청사에서 자동차로 10분
남짓 달리면 제주도 육지의 끝에 닿는다.
그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작은 섬 하나.
범섬은 멀리서 바라보면,
'큰 호랑이가 웅크린 형상'
하여, ‘호도(虎島)’라 불렸다.
섬 남쪽 가장자리에 용천수가 솟는다.
섬 가운데는 평평하며 50∼60년 전에는
가축을 방목하고 고구마 등을 재배했으나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다.2000년 7월 18일
인근 문섬과 함께.,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설문대 할망이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울 때 두 발로
뚫어 놓았다는 해식쌍굴 전설도 전한다.
'신비한 섬' 범섬이
곁에 새끼섬과 함께 있는
모습은 독도를 연상케 한다.
서울 시민에게는
한강 가운데 밤섬.
제주도 주민들에겐
서귀포 앞바다.,밤섬.
특히, 서귀포시 주민들에게 있어서
범섬 존재는 성지(聖地)와도 같은 곳.
고려를 지배했던 원나라의 마지막 세력인
목호들이 난을 일으키자 최영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제주에 온 후, 그들의 마지막 본거지로
삼았던 이 섬을 완전 포위해 섬멸시킴으로써
몽고지배 1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곳이다.
'목호의 난' 범섬전투 격전지.
법환포구에 진을 친.,최영장군.
범섬까지 들어가 목호들을 섬멸.
탐라국의 역사 상에서
가장 참혹했다는.,목호의 난.
한달동안 밤낮 없이 이어진 전쟁.
그 최후의 막을 내리게 한.,범섬전투.
..................... 범섬...........................
서귀포시 법환동 (법환동 남쪽 1.3㎞ 해상)
'외돌개' 오른쪽으로 건너다 보이는.,무인도.
서귀포항에서 뱃길로 약 30분 거리에 있다.
큰섬과 새끼섬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멀리서 보면, 호랑이가 웅크려 앉은 형상.
남북 길이 0.58㎞,
동서가 0.48㎞이며,
해발고도는 87m,
면적은 93,579㎡.
범섬은 주상절리가 수직으로 발달되어 있고,
섬 주위에는.,크고 작은 해식동굴들이 있다.
섬 위쪽은 평평하며 남쪽에 용천수가 솟는다.
동북쪽 절벽에는 콧구멍처럼 생긴 바위도 있다.
50~60년전만 하더라도 이 섬에서는 사람이 살면서
가축을 방목하고 고구마 농사를 지었는데, 지금도
사람들 거주흔적과 "애기물"이 있어 억새가 무성하다.
섬 주변에는 기복이 심한 암초가 깔려 있어
참돔, 돌돔, 감성돔, 벵에돔, 자바리 등이 많다.
6월부터 7월까지는 감성돔, 벵에돔, 참돔이 많고
겨울철에는 자바리, 참돔, 돌돔 등이 많이 잡힌다.
범섬을 가려면 서귀포항에서 유어선을 이용
법환포구와 강정포구에서 낚싯배를 타면 된다.
..............................................................
범섬 일출
서귀포시.,황우지해안
서귀포시., 쇠소깍로
'이어도로'에서 바라본., 범섬
..............서귀포시 '이어도로'................
'서귀포칠십리 해안도로' 지명이.,'이어도로'.
'이어도 사나' 민요와 전설 속 이상향 이어도.
이상향(理想鄕) 이어도에 관한 전설이 전한다.
그러한 연유(緣由)로 명명된
서귀포 해안도로.,'이어도로.'
.................
.................
먼 옛날부터 제주도 남쪽 바다 그 어딘가에
선녀 같은 여인들이 뱃사공을 유혹한다는 섬.
여인들만 모여산다는.,'여인국' 여인도(女人島).
제주도 해녀들에게는 힘든 물질을 하지 않아도
농사를 짓지 않아도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이상향.
옛부터 제주 해녀의 이상향이자 어부에게는 환상의 섬.
조선 중종 때 한 난봉꾼이 그 소문을 듣고서
그 '환상의 섬' 이어도를 찾아 뱃길을 떠났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그곳을 찾아 한동안 머물며
여인국 여인들의 남자가 되어
세월가는줄 모르고 살았다 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 남자는 고향이 그리워
뭍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한백년 세월이 흘러
가족은 이미 죽고 아는 사람조차 아무도 없었다.
그 이야기가 온 나라에 퍼지자
소문을 들은 숱한 풍류 남아들이
서로 다투어 그 섬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날씨가 흐리고 바다가 성난 날에만
그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진다는 섬.
이어도는 제주 뱃사람들에게
이상향이자 동시에 죽음의 섬.
그 섬을 보았다면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남편을 영영 바다로 보낸 해녀들 애환이 담긴 노동요.
‘이어도 사나’ 타령에서나 이어져왔던 전설 속 환상의 섬.
중국과 탐라 사이 그 어디엔가 있다는 섬.,이어도
고려 때부터 소문만 있을 뿐 아무도 본 적 없는 섬.
그리하여, 옛부터 '이상향' 환상의 섬이었던 이어도
거센 풍랑 속에서 이어도를 보았다면
결코 살아서 돌아올 수 없었던.,뱃사람.
그래서, 이어도는 전설 속 섬으로만 존재.
.....................................................................
서귀포 이어도로 해변가에는
'이어도 전설'을 떠오르게 하는
해안 갯바위 비경 등이 연이어진다.
서귀포 해안
이어도로
황우지해안
요즘 몸살을 앓고있는 서귀포 '이어도로'.
서귀포 칠십리 해안풍광이 멋진 이어도로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 논란의 한가운데에 있다.
한쪽에서는 "국가 안보에 꼭 필요한 시설이다."
한쪽에서는 "조상 대대 마을공동체 파괴 반대."
강정마을을 관통하는 이어도로에서는
매일 해군기지 찬성, 반대 실랑이 데모.
경찰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요란하게 달리고
해군기지 건설 반대 천주교 신부들이 뙤약볕 아래
도로에서 미사를 지내는 낯선 풍경이 일상이 된지 오래.
이어도로는 중문관광단지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시작으로
대포, 월평, 강정, 법환, 서호동 등 6개의 마을을 아우른다.
길이는 10.793㎞. 제주 전설에 전해지는 피안의 섬, 환상의 섬
이어도(파랑도)와 가장 가까운 도로라 해서 이어도로라고 명명.
이어도로가 시작되는 ICC JEJU는 정상회의 등
굵직한 국제회의가 단골로 열리는 제주의 명소.
남국의 섬답게 야자수 가로수가 멋들어진 이어도로.
지삿개 해안으로 유명한 대포마을로 이어진다.
지삿개 해안은 4~6각형 주상절리가 한폭의 그림.
이어도로가 품고 있는 화산섬 제주의 명소.,지삿개.
대포마을은 대략 동경 126도, 북위 33도 지점에 있다.
대포마을에서는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천제연폭포에서 물을 끌어다 너베기 논농사.
1978년 중문관광단지 개발후 관광지로 변했다.
대포포구에는 한치, 멸치를 잡으러 다니는
20여 척의 고기잡이 어선이 아직 남아 있다.
대포마을 약천사는 웅장한 건축물로 유명하다.
약천사 대적광전은 단일법당으로는 동양 최대규모.
주불로 모셔진 비로자나부처님 높이가 4.5m로 목불.
큰 법당 높이가 29m, 법당 마루에서 천장까지가 25m.
.
월평을 지나 만나는 강정마을은 활기를 잃은 지 오래.
강정(江汀)이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 물이 풍부한 곳.
서귀포 시민 80%가 강정 물을 급수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강정천 수원을 이루고 있는 냇길이소,
악근천의 수원인 소왕물, 수도 설치 전에
주민이 가장 많이 쓴 큰강정물 등 3대 용천수.
제주섬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강정 용천수 쌀은 왕에게 진상되기도 했다.
강정천에는 지금도 은어가 뛰놀만큼 청정수.
1990년대 강정마을 황금알.,바나나 재배.
요즘은 백합 등 화훼농사가 주를 이룬다.
2007년 5월 해군기지 건설 입지로.,선정.
강정마을은 조선시대 설촌 이래
오늘날 가장 큰 혼란을 겪고 있다.
해군기지 찬반 논란으로 이웃 간에 등을 돌리고
형제, 친·인척 간 명절 제사를 함께 지내지 않는다.
강정마을 중심을 지나는 도로 좌우편으로
해군기지를 찬반 주민들이 이용하는 상점이
따로 생겨나는 등 마을공동체는 파괴된 것이다.
“옛부터 제주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마을"
이어도로 끝자락에 있는 법환동은
자리돔으로 유명한 포구 마을이다.
법환마을은 범섬과 태평양으로 펼쳐지는
황금 어장을 보유하고 있는 축복받은 마을.
이곳의 자리돔은 제주에서도 최고로 쳐준다.
특히 불그스름해서 생기 넘치는
범섬 주변 자리돔은 맛이 뛰어나다.
무인도 범섬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고려를 지배했던 원나라 마지막 세력
목호들이 난을 일으키자 최영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제주에 와서 목호들이
마지막 본거지로 삼았던 범섬을 포위.
섬멸해 몽고 지배 1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유서 깊은 곳이다.
자리돔 유명세로
여름이면 법환포구에는
식도락 관광객 발길이 넘친다.
서귀포 선상 투어
범섬
한치회 맛있는., 법환포구
법환포구 막숙포
법환포구
최영장군.,법환동 막숙 터.
.....................법환포구(막숙 터).......................
법환동막숙(法還洞幕宿) 터는 서귀포시 법환동에 위치한
최영 장군이 목호세력과의 전투를 위해 머물렀던.,주둔지.
최영 장군과 제주 몽골족의 목호세력(牧胡勢力)이
제주관할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인 최후의 결전지로,
1374년 범섬 전투의 전적지 가운데 하나이다.
1374년(공민왕 23) 최영 장군이 대규모 출정군을 거느리고
100년 간 제주 장악 몽골족 목호세력(牧胡勢力)을 정벌코자
제주로 왔는데 이들은 한림읍 명월포에서 첫 전투를 벌인 후,
목호군이 명월촌에서 서남부 쪽으로 밀리면서 한달간 전개된다.
목호군 수뇌부는 전투에서 밀리자
법환포구 앞바다 범섬으로 대피했다.
이에 최영 장군도 쫓아와 법환포구의
법환동 286번지에 해당하는 곳에 주둔.
그래서, 여기 일대가 ‘막숙’이라
일컫는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최영 장군은 법환포구 ‘막숙’을 거쳐
속칭 ‘배연[배염]줄이’라는 곳을 통해
범섬으로 들어가 목호군 수뇌부를 궤멸.
법환동 286번지
법환포구 일대에
막숙 터가 남아있다.
막숙터는 '막숙개' '법환포구'로 불리는데
2002. 7. 3 서귀포문화원과 법환동마을회에서
‘막숙터’ 표석을 세웠는데, 고려가 100여 년 간
몽골족에게 빼앗겼던 제주를 되찾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범섬전투의 첫 무대라는 역사가 깃든 곳.
....................................................................
올레길이 생기면서 이들을 겨냥한 카페나
게스트하우스가 마을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여름철 태풍 방송중계 차량이 늘 찾는 법환포구.
“이어도로 주변의 올레 7, 8코스가 가장 아름답듯
'이어도로'는 서귀포 해안 드라이브 안성맞춤인 곳”.
범섬
새별오름.,말목장.
새별오름 왕따나무
새별오름
새별오름 들불축제
새별오름은
오름 5봉우리가
별 같아 붙여진 이름.
고려 공민왕 때 격전지.
'칼, 방패가 바다를 덮고
간과 뇌가 땅을 가렸다'던
'목호의 난'의 격전지였다.
'목호의 난'의 주역들이었던 목호.
고려가 몽고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제주에는 탐라총관부가 설치되면서
원나라의 직속령으로 편입된 탐라국.
원나라는 제주를 거대한 목마장을 만들어
관리하는 과정에서 목마를 담당하기 위해
제주도에 유입된 원나라 사람들을 '목호'라
불렀는데 그렇게 1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주 여인들과 결혼하여 후손들도 태어났다.
명나라 세력이 강해지는 한편
원나라가 쇠망의 길로 접어들며
공민왕은 반원자주정책의 일환으로
원 직속령에 군사를 보내 탈환하려 한 것.
제주에서 100년간 뿌리내린 목호들은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에 필사적인 저항.
새별오름 전투는 이런 배경 속에서 발생했다.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의일환으로 전개되었던
'목호의 난'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
3일 만에 진압되었던 삼별초와 달리 '목호의 난'은
대규모 병력 투입에도 한달을 끌 만큼 저항이 강했다.
당시 고려군은 최영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전함 314척,
정예병 2만 5605인의 탐라출정군단으로 이 군단 수는
당시 탐라국의 인구수와도 맞먹을 정도의 대군이었다.
...............범섬 전투......................
1374년 서귀포시 법환동 범섬 일대에서
최영 장군과 목호 세력(牧胡勢力)이 제주
관할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어진.,범섬 전투.
1374년 법환포구 앞바다 범섬 일대에서
최영 장군과 제주 몽골족의 목호 세력이
제주 관할 주도권을 두고 벌인 최후의 결전.
1374년(공민왕 23) 양자가 벌인 최후의 결전.
실질적 종착지가 법환 포구 앞바다 범섬이었다.
1273년(원종 14) 제주 삼별초 몰락후 몽골 직할령.
이로부터 제주와 몽골 교류가 이뤄졌고,
제주의 말 사육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후 제주마는 고려와 새로 국교를 맺은,
중국 대륙의 새주인 명나라에도 바쳐졌다.
1374년(공민왕 23) 명나라는
제주에서 좋은 말 2천 필을 뽑아
보낼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
이에 고려관리가 제주에 가서 말을 취하려 하자,
몽골의 탐라 국립 목장을 관할하던 몽골족 목호는
자신들의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가 풀어놓아 기른 말을
명나라 군사들에게 줄 수 없다며, 단지 3백 필만 내주었다.
그러나, 명이 2천 필을 채울 줄 것을 강력히 요구.
공민왕도 어쩔 수 없이 제주도 정벌을 결정한 다음,
제주 출정군을 편성해, 출정군 총사령관은 최영이고,
제주 출정군은 정예군 2만 5605명, 전함 314척으로 구성.
이는 국경 지대까지 더해 동원했던
요동정벌군 3만 8830명과 견줄 전력.
당시 제주 인구와 맞먹을 병력이었다.
제주도 출정군 외에도 예비부대가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따로 주둔.
그럼에도, 출정군은
제주 서쪽 명월포에 도착해
목호군과의 첫 전투에서는 졌다.
한편, 목호도
출정군에 맞설
태세를 갖추었다.
목호 세력의 수뇌부는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관음보(觀音普) 등이었다.
이들은 동·서아막(東·西阿幕)의
탐라 목장 중 서아막 관할.,목호
이들 목호 수뇌부는 기병 3천명과
수많은 보병을 거느리고 명월포에 포진.
목호군에는 당시 ‘部落(부락)’을 이루어 살았던 몽골족,
이들과 제주 여성 사이에 태어난 반(半) 몽골족화 제주민,
고려 관리의 잦은 수탈에 반감을 품었을 제주 사람들도 가세.
목호군은 명월포에 처음 상륙한
출정군을 모두 죽여 기세를 올렸으나,
재차 명월포 전투에서는 고려군에 패했다.
이후 양자의 전투는 제주의 서쪽 명월촌으로부터
계속 목호군이 서남부 쪽으로 밀리면서 한 달여간
주야로 전개되었고 전투에서 밀린 목호군 수뇌부는
서귀포시 법환동 소재 법환 포구 앞바다 범섬으로 대피.
최영도 목호 세력을 쫓아와
법환 포구 ‘막숙’에 주둔하고,
배 40척을 동원해 속칭 ‘배연줄이’
라는 곳을 통해 직접 범섬을 압박.
이에 석질리필사는 처자식 등과 함께 항복하고,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벼랑에서 몸을 던져 자살.
범섬전투 후에도 동아막 목호 등 수백명이 계속 저항.
이에 최영이 장수들을 거느려 성을 쳐부수고,
도망가는 무리를 샅샅이 찾아내 전부 죽였다.
.
최영이 제주에 와 한달간 전투를 치뤘던
목호 정벌은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년(1374)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메인다” 할 만큼 고려와 목호 세력의 총력전.
이로써 제주 몽골족 목호세력은
영향력과 힘을 상실하게 되었다.
,
원의 직할령이 된후
고려에 환속 되더라도
실질적으로 양국에 이중으로
귀속된 상태였던 제주도 제주민.
.
목호전투는 제주민에게
커다란 희생을 안긴채 고려에
재 귀속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또한 최영 장군이
탐라 목호 세력을
정벌하러 가는 동안
최영이 개경에 없을 때,
개혁 정치를 단행해 나라를 바로
잡아보려는 공민왕이 시해(弑害)되었다.
그리고,
우왕은 자신이 10세가 되는
1374년(공민왕 23)에 최영이
제주 정벌에 나아가 개경에 없어
선대 부왕 공민왕이 해되었다고 확신.
이는 우왕이 24세 성년에 이르러서도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에 요동(만주)정벌을
재촉하기 위해 최영 장군이 서경(西京: 평양)으로
나아가자 줄곧 따라 다녔고, 개경으로 돌아가라는
최영의 간곡한 건의도 거절한 채 같이 서경에 남았다.
즉, 우왕은 부왕에게 일어났던 일이
자기에게도 되풀이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 곁에 최영을 두어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려는 의도가 있어 요동정벌을 위해
전장 터로 가려는 최영의 발길을 막았던 것.
이로써
이성계가 조선 왕조 건국의
길로 나아가는 위화도 회군의
기회를 잡는 일이 가능해졌던 것.
최영이 제주에 와
몽골족 목호 세력과
전투를 벌였던 범섬 전투.
고려가 자주성을 회복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몽골족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서
이뤄졌으나, 제주민들은 커다란 희생을 치르게
되었음과 아울러, 그 동안 몽골족과 더불어 살았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하겠다.
또한, 결과적으로는
이성계가 조선 건국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는 기회를
잡을 상황도 만들어 준 셈이다.
현재 범섬 일대에는
최영장군 전적 터가
남아 있다.
.............
1374년(공민왕 23) 몽골의 탐라 100년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던 최영 장군의 "목호의 난" 진압.
그 과정에서 탐라인들의 처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100년을 지배해온 몽골 잔재세력과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고려군,
당시 제주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여몽연합군에 의해 최후를 맞았던
삼별초 항몽과는 어떻게 달랐을까?
매년 음력 대보름 억새에 불지르는.,'새별오름'
정상에 올라서면, 눈앞이 확트이는.,어름비평원.
목호들과 고려대군이 격전을 벌렸던.,역사의 현장.
몽골은 고려와 연합하여
제주 삼별초 세력을 평정.
탐라를 직할령으로 삼았다.
원종 14년(1273년)의 일이다.
몽골에게 탐라는 남송과 일본을 잇는 바닷길의 요충지.
이웃 나라 정벌의 전초기지이자 병참기지로 적격이었다.
탐라에 목마장을 마련한 것도 이런 목적에 맞는 일이었다.
이후 원나라의 2차례 일본 정벌이 실패로 돌아간뒤
원나라의 세조가 죽자 탐라는 고려에 환속되었지만
관할권만 달라졌을 뿐 실제로는 몽골의 지배가 지속.
탐라는 고려와 몽골에게 이중으로 수탈을 당하는 운명.
공민왕 대에 이르러서는
목호들이 탐라 주도권을 장악.
이들은 원이 설치한 탐라목장에 배속
말과 소의 사육을 관할하던 몽골인들이다.
공민왕 5년 국가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반원정책을 펴면서 탐라 관할 주도권을 놓고
목호세력과 고려 사이에 수차례 충돌이 벌어졌다.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4차례나
목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공민왕은
100척의 군선을 파견하기도 했으나
목호에 밀려 퇴각하고 말았다.
고려와 목호의 대결은
원나라가 망하고 난 후에
명나라가 들어선뒤 본격화.
공민왕 23년(1374) 명은 탐라에 있는
원나라의 말 2천필을 고려에 요구했다.
고려는 이를 집행하려 관리를 제주 파견,
목호는 "원의 원수 명에게는
말을 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공민왕은 군선 314척, 정예병
2만5천605명을 최영 장군에게
주어 목호 토벌을 지시했던 것.
요동정벌군이 3만8천830명.
그에 비해 뒤지지 않는 규모였고
당시 탐라 전체 인구보다 많은 병력.
고려의 조정이 목호세력에 얼마나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는지 알만한 일.
거기다 탐라민이 처음에는 몽골인들에게
거부감을 느꼈겠지만 100년 세월을 거치면서
몽골인들은 탐라민들과 친숙한 관계가 되었다.
몽골 이름을 쓰는 탐라인들이 나타나기도 했고,
탐라의 정씨 여인은 목호의 난 와중에 몽골인 남편이
전사한 뒤 그의 미모를 탐낸 고려 진압군 장교의 결혼
강요를 뿌리쳐, 열녀로 공식 기록되기도 한 점 등이 그것.
탐라에 주둔한 몽골군사는 1400~1700명에 불과.
그러나, 여러 차례 고려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점은
탐라민이 목호세력의 강력한 지지기반 임을 대변한다.
고려관리의 가렴주구가 탐라-몽골 혼혈인들은 물론,
탐라인까지 자연스럽게 목호 편에 가담하게 만든 요인.
결국, 고려군의 진압 대상은 목호 뿐 아니라 탐라민 전체.
출정 한달만에 최영의 군대는 명월포에 도착.
목호군은 기병 3천명과 보병이 명월포에 포진.
최영은 먼저 전함 11척 군사를
상륙시켰으나 모두 살해 당했다.
최영 군사들은 최정예 대규모 병력.
상륙하는 군사들이 공격하지 못하자
최영은 하급장교 목을 베며 전투를 독려,
본진이 상륙하면서
전세가 바뀌기 시작.
명월포에서 밀리기 시작한 목호군은
밤낮도 없이 치열한 전투를 벌리었다.
밝은오름(한림읍 상명리),
검은데기오름(애월읍 유수암리),
어름비(애월읍 어음리),
새별오름(애월읍 봉성리),
연래(서귀포시 예래동),
홍로(서귀포시 서홍동)에
이르기까지 계속 밀려났다.
마침내 목호군 우두머리 '석질리필사'는
가족과 측근 수십명과 함께 범섬으로 도주.
그가 범섬을 최후의 근거지로 삼았기 보다는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할 피신처.
온통 절벽으로 둘러쌓여
외부 접근이 어려운 요새.
하지만 식량 보급도 불가능.
장기 근거지가 될 수 없는 곳.
범섬 앞 법환포구에 군막을 친 최영 군대는
이곳에서 숙영을 하면서 공격 방법을 찾는다.
비록 작은 섬이기는 하지만
해안에서 1.3km 떨어져 있고,
배를 댈곳 없이 깎아지른 절벽.
섬을 공략하기 만만치는 않았다.
고려군은 전함 40척을 이어 묶어 섬으로 건너갔다.
그래서 법환포구 일대는 "막숙"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범섬과 최단 거리로 배를 연이어 묶은 지점은 "배염줄이"
또는 "배연줄이"라고 부른다.출정군이 범섬으로 건너가자
수뇌부의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벼랑으로 몸을 던져 자살.
석필리질사는 처자식과 함께 항복했다.
최영은 항복한 석필리질사와 아들 3명을
목베어 죽이고 자살한 수뇌부의 시신을 찾아
개경에 보내 몽골의 탐라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
.................
최영의 목호 토벌은 탐라인들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이를 바라보는 탐라인 시각이 역사기록으로 남아있다.
조선시대 들어 태종 때 제주판관 하담이 40년 전 사건인
목호의 난에 대한 얘기를 목격자로부터 듣고 기록한 것이다.
목격자의 증언은 이렇다.
"우리 동족 아닌 것이 섞여
갑인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가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메인다."
고려와 목호 사이에서 탐라민들은
"생각하기만 해도 목이 메일" 만한
피해를 입은 "변"을 겪은 것이다.
목호의 난 때 탐라민에게 고려군은
구원군이 아니라 또 다른 침략자요,
무자비한 학살자였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 100년 동안 고려와 원의 이중 수탈구조 속에
놓였던 탐라가 몽골의 영향력 아래서 벗어나 고려에
다시 귀속된 뒤 탐라인들은 해방과 평화를 누렸을까?
최영의 정벌 이후 탐라인들은
더 많은 수탈을 당해야 했었다.
명은 대놓고 고려에
탐라산 말의 조공을 요구했고
고려는 그 요구에 충실하게 응했다.
탐라는 고려 우왕 5년(1379년)부터
공양왕 4년(1392년)까지 13년 동안
무려 2만필 이상의 말을 바쳐야 했다.
범섬 위쪽은 평평하고 남쪽 가장자리에서는
용천수가 솟아 50~60년전만 해도 사람이 살면서
가축을 기르고 고구마 농사를 짓기도 했다는 곳이다.
지금도 범섬 정상부에는
사람이 살던 흔적이 있다.
범섬 남쪽에는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 때문에
나무가 없어 바위 투성이지만
북쪽에는 돈나무 구실잣밤나무
해송 등이 울창. 특히 난대성식물인
"박달목서" 희귀종 10여 그루가 자생.
상록활엽수림과 함께
천연기념물 제215호인
흑비둘기가 서식하고 있어
섬전체가 문화재기념물 제46호.
지름이 5백m쯤 되는 크기의 범섬은
주상절리가 수직으로 섬을 둘러싸고 있고,
주상절리섬 주위에는 크고 작은 해식동굴이 있다.
같은 크기로 나란히 생긴 두개의 해식동굴은
"호랑이 콧구멍"으로 불리고 그 반대쪽의 커다란
해식동굴에는 "호랑이 똥구멍"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범섬 주변은 물이 맑은 데다
기복이 심한 암초로 뒤덮여 있어
다이버들과 낚시꾼들의 천국이다.
6월부터 7월까지는 감성돔, 벵에돔, 참돔이 잘 잡히고
겨울철에는 자바리, 참돔, 돌돔 등이 많이 잡힌다고 한다.
법환포구와 강정포구에는 범섬을 오가는 낚싯배들이 있다.
역사는 최영 장군이 "목호의 난"을 평정함으로써
몽골지배의 100년 역사를 마무리한 현장으로 기록.
그러나 당시 제주인들에게는 차마 눈뜨고 불수 없는
살육과 목이 메일 희생을 거쳐 지배세력이 교체된 것.
그외에 달라진 것이 없는
비극의 마지막 현장이었다.
그 역사의 현장을 뒤로 하고
밤섬의 아름다움만 기억 속에
담은채 낚시배로 그곳을 떠난다.
'그당시, 목호 잔여 세력은
어느 나라로 망명했던걸까?'
범섬 새끼섬
범섬 새끼섬
서귀포칠십리에 숨겨진.,강정마을 쇠소깍
서귀포 앞바다.,'새섬 & 범섬'
서귀포 새섬에서 바라본 범섬.
새섬에서 바라본 범섬.
.....
새섬
......
...............새섬(조도 :草島)................
서귀포항 바로 앞바다 무인도(104,137㎡)
이 섬 덕택에 천혜의 양항이자 미항인 서귀포.
초가지붕을 덮는 새(草)가 많아.,일명 "조도(草島)"
한라산이 화산폭발을 할때
봉우리가 이곳으로 날아와
섬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섬 내에 해송숲이 울창하고,
방파제로 육지와 이어져 있어,
썰물 때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
이 섬의 서쪽 맞은편 해안에는
서귀포층 패류화석지대가 있고
섬 남쪽해안은 바다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즐겨찾는 아름다운 무인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포항 앞 바다)
서귀포항의 바로 앞 바다에 있는 104,137㎡ 무인도.
이 섬 덕택에 서귀포항은 천혜의 양항이자 미항(美港)
한라산이 화산 폭발하면서 봉우리가 깎여
이곳으로 날아와 섬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
.
새섬은 한달에 보름
한낮에 '모세의 기적'
바닷길이 3시간쯤 열려
무인도 탐험을 할 수 있다.
새섬의 '새'는
양지바른 산이나
풀밭에서 잘 자라는
벼과 여러해살이 풀.,'띠'
옛날 초가집이 있을 때는
짚이 귀하여, 이 풀을 베어
지붕을 이었다는데 아직 덜핀
솜털 같은 속대를 씹으면 달착지근.
충청도에서는 "삐비"
아이들에게 맛좋은
'간식거리'기도 했다.
1975년 전까지는
새섬에 사람이 거주.
그러나, 지금은 무인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도 없다.
1975년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무들이 자라서 숲을 이룬 것이다.
해송이 많은 제주도답게 70%가 소나무.
해안가에 흔한 '보리수'도 자생하고 있다.
새섬에 지천으로 널려 있던 띠도
숲이 우거지며 요즘 많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떠난 새섬에 유독 스킨스쿠버
다이버들이 찾는 이유는 새섬, 문섬 주변
해안의 연산호 군락지가 유명하기 때문이다.
산호는 전 세계 2,500여 종으로,
스펀지처럼 부드러운 연산호와
딱딱한 경산호로 크게 구분한다.
경산호는 평균 수온 20도 이상의
열대 해역에서 주로 서식하는데
난류의 영향을 받는 제주도나
남해안에서도 발견된다.
특히 서귀포 새섬 일대에는
78종의 연산호가 서식하며,
그중 65종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토종 산호들이다.
수중세계, 우리나라에서
산호를 관찰할 수 있는
포인트인 셈이다.
제주의 겨울바다는 깊고 짙다.
새섬 바닷빛은 가히 위압적이다.
검은 바위처럼 무겁고 음습한 바람.
숲은 조용하고,
햇볕을 듬뿍 쪼인
검은 바위는 따뜻하다.
제주도,
그곳은 섬에서
쉽게 또 다른 섬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서귀포칠십리" 앞바다.
그곳이 더욱 더.,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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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섬(蚊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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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섬은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는 섬.
겉으로 드러난 섬의 모습보다는
수중 산호초의 세계가 환상적인 섬.
스쿠버 다이버들이 즐겨 많이 찾는다.
태고의 신비가
가득한.,무인도.
제주 서귀포 낚시꾼들도
간혹 찾는.,갯바위 낚시터.
..................문섬..........................
서귀포시 서귀동 (서귀포항 남쪽 1.3㎞)
서귀포시 삼매봉 아래의 외돌개에서 보면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떠 있는 섬이 문섬이다.
해발 73m, 면적 96.833㎡ 무인도.
문섬 수중에는 난류가 흐르고 있어
사시사철 아열대성 어류들이 서식하며
63종의 각종 희귀 산호들이 자라고 있어
국내 최고의 수중생태계의 보고(寶庫)이다.
섬안에는 담팔수나무 거목 등 난대상록수가 울창.
제주도 지정 문화재기념물 제 45호로 보호되고 있다.
문섬 이름이 붙여진 사연도 어느 섬 못지 않게 흥미롭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어느 사냥꾼이 한라산에서 사냥하다가
그만 활집으로 옥황상제의 배를 건드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에 크게 노한 옥황상제가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던졌는데
그 조각이 흩어져서 서귀포 앞바다의 문섬과 범섬이 되었고
뽑힌 자리는 백록담(白鹿潭)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문섬은 참돔, 돌돔, 벵에돔(흑돔), 벤자리
등 5월~7월, 9월~11월 낚시하기에 좋다.
범섬 동북쪽에는 '새끼섬'인 의탈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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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문섬
'문섬'의 수중세계
문섬.,수중세계.
문섬 바다 속
문섬 밤낚시
외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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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섬(숲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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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섬..........................
서귀포시 보목동 (보목동 남쪽 450m 해상)
서귀포시에서 남서쪽으로 3㎞쯤 떨어진 무인도.
180종의 희귀식물, 450종의 난대식물이 기암 괴석.
울창한 숲을 이룬 섬의 면적은 142.612㎡
가장 높은 곳의 해발고도는 155m에 이른다.
깎아지른 벼랑 위에 짙푸른 난대림으로 울창.
서귀포시의 해안풍치를 돋구어준다.
하여, 해상유람선 관광객들이 많은 곳.
국내 유일의 파초일엽(넙고사리) 자생지.
돌돔, 벵에돔(혹돔), 참돔, 다금바리, 감성돔
등이 풍부한 천혜의 낚시터이며 이중 감성돔은
6월 초순경부터 7월까지 많이 잡히며, 가을철에는
참돔이 잘 잡히는 밤낚시터로 유명하며 일명 "숲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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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섬..............................
서귀포시 보목동 (보목동 남쪽 450m 해상)
서귀포시에서 남서쪽으로 3㎞쯤 떨어진 무인도.
각종 상록수와 180종 희귀식물, 450종의 난대식물이
기암 괴석과 어우러져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섬 면적은 142.612㎡
가장 높은 곳 해발155m
깎아지른 듯한 바위 벼랑으로 둘러싸인 섶섬은
짙푸른 난대림으로 서귀포 해안풍치를 돋구어준다.
그래서 해상유람선을 타고 관광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국내 유일의 파초일엽(일명 넙고사리) 자생지
천연기념물 제18호인 섶섬은 식물의 보고이며
돌돔, 벵에돔(혹돔), 참돔, 다금바리, 감성돔 등.
천혜의 낚시터이며 감성돔은 6월 초순경~ 7월까지
가을철에는 참돔이 잘 잡히는 밤낚시터로 유명하다.
※ 파초일엽 - 주로 일본과 타이완에 분포하는 아열대식물.
꼬리고사리과에 속하며, 상록다년생 초본으로 단엽 형태의
잎이 방사형으로 뻗쳐 나가는데 다 자라면 길이 1m에 이른다.
섶섬은 파초일엽이 자생하는 가장 북쪽지역
1962년부터 천연기념물 제18호로 지정·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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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에는 저마다의 전설과
이야기가 있는 무인도들이 있다.
서귀포항 남서쪽 해역의 섬들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바다에
떠 있어 어족이 풍부하다. 그래서
바다낚시 매니아들이 많이 찾으며,
형형색색의 산호초와 물고기떼,
갖가지 해초 등이 한데 어우러져
신비한 수중경관을 보여준다.
.......................섶섬(142,621㎡).....................
서귀포시 보목동 해안에서 400m떨어진 곳에 위치
제주도의 부속 무인도로는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과거에는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었다.
지금은 난대림으로 우거져 있고
섬의 모습이 풍수지리상 문필봉.
옛부터 섬 앞마을 보목동에서는
교육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한다.
숲이 우거져 ‘숲섬’이라 불리었는데,
변음되어 ‘섶섬’이라 불리며 한자로는
문헌과 지도에서 ‘삼도(森島)’라고 표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삼도(森島)’라 표기
“높고 험하여 사람의 발자국이 통하지 않는다.”
이원진의 『탐라지』에도 ‘삼도(森島)’라 했다.
『고지도첩』「탐라전도」에 ‘삼도(森島)’라 표기.
“높고 험해서 인적이 통하지 않는다.”는 주기가 있다.
『조선지형도』에도 ‘삼도(森島)’라 했다.
섶섬 정상의 높이는 해발 155m 정도이다.
'동서 630m, 남북 380m' 긴 타원형을 이루며
60~100%의 급경사를 지닌 단사면 구조를 이룬다.
섶섬에는 각종 상록수와 180여 종의 희귀식물,
450종의 난대 식물이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울창.
섬 안에 용천수가 두 군데 있다.
섬 전체가 국유지로 되어 있다.
관광객들이 유람선을 타고 관광
낚시터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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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섬
섶섬이 보이는 풍경 - 이중섭
섶섬
쇠소깍 할망바위
섶섬을 돌아
서귀포에서
'할망바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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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귀도(地歸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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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9.16 - 제18호 태풍 ‘탈림(TALIM)’
제주도 육·해상에 태풍특보가 발효된 가운데
다행히 아직까지 큰 피해는 발생하지 않고 있다.
제주지방기상청에 따르면 16일 오전 11시
제주도 남쪽 먼바다와 동·서·남부 앞바다에
태풍경보, 제주도 육상 전역에는 태풍주의보.
태풍 영향으로 매우 강한 바람
서귀포시 남원읍 지귀도(남부)에
최대순간풍속이 초속 25.2m 기록.
한라산 사제비는 최대순간풍속 초속 23.5m,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도(서부)는 초속 23.4m,
대정읍 가파도(서부)는 초속 21.8m를 기록했다.
해상에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부속섬이나
육지를 오가는 여객선은 전날부터 운항 통제.
“대형여객선 경우 내일(17일) 오전 운항 재개.
그러나, 기상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뉴스.
2016.06.29 - 남원읍(읍장 김민하)은
18과 26일 관내 무인도인 지귀도를 방문
위미1리 주민 등 2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대대적인 해양쓰레기 환경정비 활동을 벌여
해양쓰레기 3여톤을 수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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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귀도는 위미 해안으로부터 남쪽으로 4km 지점
낮고 평평한 무인도이며, 각종 해산물이 풍부하여
지역해녀 및 낚시꾼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반면 풍랑 및 조류에 의해 폐스티로폼, 어구,
각종 생활쓰레기들이 떠밀려 오는데, 사실상
수거 및 운반처리가 어려워 방치되고 있었다.
이에 위미1리(이장 양창인) 지역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해녀 및 낚시꾼들에게 깨끗하고 쾌적한 해안환경을
제공하고자 대대적인 해안쓰레기 수거에 나서게 되었다.
위미리 마을.,동백군락지
쇠소깍 위미리
게스트 하우스
지귀도 환경정비에 지역주민들과 같이 참여한
양창인 위미1리장은 “지역 해녀들의 삶의 터전인
지귀도를 깨끗하게 정비하게 되어 기쁘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환경정비를 해나가겠다.”
“이곳을 방문하는 낚시꾼들이
쓰레기 되가져오기 운동에 적극
동참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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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귀도(地歸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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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해안에서
남쪽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해 있다.
섬 모양은 동서의 길이가 긴 타원형으로,
낮고 평평하여 섬 정상 높이도 14m 정도.
섬 중앙부는 평평한 용암대지상을 하고 있고,
주위에는 5-10m 높이의 현무암질 암반 해안.
섬 평탄부 8만여 평은 억새풀 군락으로 황무지.
...................지귀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해안.,무인도.
‘직구섬’ 또는 ‘지꾸섬’ 등으로도 불린다.
‘땅이 바다로 들어가는 형태’.,지귀도(地歸島)
이는 섬의 지형이 평평해서 이처럼 해석한 것.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해안 남쪽으로 4㎞ 지점.
동서가 긴 타원형으로, 낮고 평평한 무인도(해발14m)
섬 중앙부는 평평한 용암대지상을 하고 있고,
주위에는 5-10m 높이 현무암질 암반 해안이다.
섬의 평탄부 8만여 평은 억새풀 군락으로 황무지.
지귀도는 서귀포시 일대의 다른 섬과는 달리
완만한 침강 해안으로 이루어져 수심이 얕고,
섬을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갯바위 낚시 명소.
암초대로 형성된 지귀도 해안은 해조류 밀생
패류와 갑각류를 비롯한 각종 해산물이 풍부.
관광 유어장으로 지정되어 체험 다이빙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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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도 지귀도.....
원래 유인도였던 지귀도.
10여 가구가 농사도 짓고
어업활동을 했었지만., 4·3
여파와 농지 소유주가 바뀌는
일련의 과정으로 무인도가 된 것.
예전에는 무너진 초가 흔적,
즉 ‘터무니’를 볼 수 있었던 섬.
1937년 초여름, 청년 시인 서정주가
지귀도를 찾았을 때는 주민들이 거주.
보리누름철, 거기에 고씨 딸도 있었다.
한기팔 시인 “대학시절
미당 선생의 제자였기에
지귀도 얘기를 직접 들었다”
“미당 선생은 지귀도에서
6개월 동안 머물며 ‘고을나의 딸’,
‘웅계’, ‘제주도의 한여름’ 등 10여 편.
시를 남겼는데, 그의 첫시집 '화사집(花蛇集)'
두번째 시집 '귀촉도' 등에 분산, 수록되어 초기
시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학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고을나의 딸은
눈이 항아리만 해지는
제주여성의 순박성과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청년의 이성적인 충동감을
실감 있게 그려낸 것
이라고 덧붙였다.
80년전 미당의 시선으로
시낭송 최옥주., ‘고을나의 딸’,
김옥자 ‘제주도의 한여름’을
파도 소리 배경음악 삼아
낭송하는 동안.,
고씨 딸에 반한
청년 미당의 수작이
천진난만하게
펼쳐졌다.
...........................
고을나(高乙那)의 딸.
............................
문득 면전(面前)에
우슴소리 있기에
취안(醉眼)을 들어보니,
거긔 오색 산호채(珊瑚彩)에
묻혀있는 낭자(娘子)
물에서 나옵니까.
머리카락이라든지
콧구멍이라든지
콧구멍이라든지
바다에 떠 보이면
아름다우렸다.
석벽(石壁)
야성(野性)의
석류꽃 열매 알알
입설이…… 잇발이 저……
낭자의 이름을
무에라고 부릅니까.
그늘이기에 손목을 잡었드니
몰라요. 몰라요. 몰라요. 몰라요.
눈이 항만하야 언덕으로 뛰어가며
혼자면 보리누름 노래 불러 사라진다.
- 서정주의 ‘고을나(高乙那)의 딸’ 전문-
‘오돌또기’ 한곡조 부르겠다며
마이크를 잡은 고성옥 명창은
섬이 좋고 물빛이 좋고 사람들이
너무 좋아 ‘느영나영’을 비롯한
여러 곡을 불렀고, 나중에는
자연스레 합창으로 이어졌다.
........위미1리 어촌체험마을.........
마을이 감귤밭에 둘러싸인 농촌마을
1종 어항 위미항 어촌마을이기도 하다.
앞 바다에는 '지귀도' 무인도가 떠 있다.
이 섬은 마을해녀들이 연중 해산물을 채취.
'바다밭'일 뿐만 아니라, 제주도전역에 몇 곳
안되는 관광유어장으로 지정되어 외지인들도
스쿠버다이빙, 작살 다이빙을 체험할 수 있다.
또한, 이 마을에는 농구, 족구 등을
즐길 수 있는 해양소공원이 조성돼
있으며, 마을 가까이에는 제주도
제일의 해안경승지로 꼽히는
남원큰엉이 자리잡고 있다.
서귀포와 성산포 사이를 잇는
일주도로가 마을 한복판을 관통
그러므로 이곳은 찾아가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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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귀도는 한라산을 예쁘게 볼 수 있는 곳.
관광객들은 없고 낚시 매니나들 만 찾는다.
일반 관광지처럼 다니기 쉬운 길은 아니지만
한바퀴 도는데 한시간 쯤 걸릴 만큼 볼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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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귀도 - 詩
..................
세상 사람살이가
뜬눈으로 외로울 때
바둑판 첫 돌을 놓듯 쓸쓸한 것만 모으리
사랑도
따지고 보면
놓쳐서 익는 거라지
건너갈
다리도 없이
건너가고 싶은 곳 있지
파도에 밀려오는 것이
그토록 고독이라면
잠결에 젖은 속옷을
뱃길에
흘려놓으리
- 고 명호 -
한라산 전망대.,지귀도
지귀도 등대
지귀도.,높은여.
지귀도., 작은 홍합여
홍합여
"지귀도 가봤니?"
위미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