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종인가? 아니면 왕인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0:35-45)
이 말씀에서 '집권자'는 왕들을, '고관들'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첫 사도들부터 그들처럼 되고자 하는 욕심과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착각하여 있지도 않은 가상의 자리를 놓고 서로 주가 크냐고 다퉜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런 말씀들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열두 제자에게 한 말입니다. 즉 사도들에게 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사명이 세상의 고관들처럼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사도로, 선지자로, 복음 전하는 자로, 목사와 교사로 부름 받은 목회자들이 어떤 자의식을 가져야 하며, 그들의 부르심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밝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종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종보다는 지도자, 리더, 목회자, 담임목사, 당회장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주의 종'이라는 말이 있긴 하나 그것조차 계급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이 아니라 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 왕외 되고 고관이 되어 있는 목회자들이 심히 많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초대형교회에서 잠실 주경기장을 얻어 성대한 교회행사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참석자의 말에 의하면, 경기장 곳곳에 담임목사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감사드린다는 플래카드로 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도배가 되어있고, 단 한 곳에만 그것도 아주 작은 플래카드에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담임목사를 높이는 환경 속에서 목사님이 나와서 말씀을 전하는데, 그런 분위가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 설교할 수가 있느냐? 며 보고 온 사람이 분노하며 탄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이 된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음녀에 비유할 수 있는 WCC 부산총회의 성공을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는 통합의 한 초대형교회 목사님은 '머슴 목회론'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 목사님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실때 장로님들은 마치 식당 종업원처럼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 곁에 도열해서 서 있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머슴이고 종입니까? 교회를 자기 왕국으로 삼고 왕이 된 가증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국민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강남의 또 다른 초대형교회에서는 스승의 날에 사용할 담임목사찬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노래를 스승의 날에 부르려고 성경공부모임을 이끄는 '순장'들 모임에 악보가 배포돼 실제로 연습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명예권사를 비롯한 성도들이 교회에 찾아가 항의하는 바람에 교회 공식순서에서 불려지진 않았다고 합니다. 그 노래의 내용이 궁금하시죠? 노래의 제목은 "주님께서 세우신 목사님"인데 가사가 아주 가관입니다.
1절 : 찬양 충만 우리 목사님, High Praise 깊은 기도로
모든 성도 하나 되어 주께 영광 찬양 드리네.
Vision Maker 우리 목사님, 창조 은사 아이디어 맨
예배 속에 생기 불어 이천칠 년 부흥 기대해.
2절 : Happy Boy 우리 목사님, 우리에게 기쁨 주도다.
곤한 마음 지친 영혼 참 회복과 자유함 얻네.
세계 품은 우리 목사님, 우리 지경 넓히셨도다.
열방 향해 가슴 열어 쓰임 받길 소원 갈망해.
3절 : 주님께서 세운 목사님, 날로 더욱 친근합니다.
순장들과 참 친구로 성령 안에 동행하시니
존경하는 우리 목사님, 날로 더욱 사랑합니다.
영원토록 마음 다해 목사님을 축복합니다.
후렴 : 목사님 뜨거운 찬양 (뜨거운 찬양)
목사님 거대한 비전 (거대한 비전)
목사님 순수한 열정 (순수한 열정)
목사님 따뜻한 사랑 (따뜻한 사랑)
주님께 감사해 주님께 감사해 주님께 감사드리세.
여러분, 교회에서 이게 가당키나 한 노래입니까? 한 논객은 인터넷에 "김일성 찬가 뺨치는 오00 찬가가 있네요."라고 이 노래를 올렸습니다. 이게 왕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자들이 잘 걸리는 공주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남자들이 잘 걸리는 왕자병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목회자들이 그보다 더한 왕병에 걸려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중증입니다.
그러면 왕병을 고침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만이 이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왕병에서 고침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황제'가 아니라 '형제'라는 것을 깨닫고 높아진 마음이 낮아져야 합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주의해서 잘 들으시고 꼭 왕병을 치유받으시기 바랍니다.
(1) 성경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의 위험성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과 야고보의 어머니의 청탁을 받은 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우리는 수없이 읽었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네' 하고 이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짜 이 말씀의 의미입니까? 아닙니다. 제가 지금까지 자세하게 설명해드린 것이 이 말씀의 참된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섬기기 위해 오셨다. 우리도 섬기는 자가 되어야 된다.' 이것만 알아서 얼마나 변화가 되겠습니까? 그런 말을 계속 하면서도 정치목사가 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되고, 권사는 권삽네, 장로는 장롭네 하면서 거들먹거리고 고개 들고 대접받으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은 가능하고 교회 안에서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피상적으로 알지 말고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빛을 통해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잠23:7)
생각이 바뀌어야 사람이 바뀝니다. 자기를 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떻게 섬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형제요 종이라고 생각해야 진짜로 겸손해지고 섬기는 자로 바뀔 수 있습니다. 말씀이 하는 이런 역할은 영성이 대신해주지 못합니다. 기도가 대신해주지 못하고, 은사나 인격이 대신해주지 못하고, 사랑 많다는 것이 대신해주지 못합니다. 오직 진리의 빛만이 이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알고, 깊이 아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성경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제가 성경에 무지했음을 많이 느낍니다. '성경을 지금 아는 것 가지고 안 된다. 성경을 제대로 알아야 된다. 더 깊이 알아야 된다.' 이런 깊은 자각과 갈망이 제 속에서 뜨겁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여러분, 이것은 실제입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바뀌지만 근본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즉 뿌리가 뽑히지 않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거나 인격이 훌륭하다고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왕으로 생각하고 있고,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는 마음을 진리로 깨뜨려야 합니다. 그런 생각의 견고한 진을 진리로 부숴야 합니다. 그래야 교만이 죽고 권위주의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무례하거나 반말을 쓰는 것도 사라지고 마냥 대접받고 누리려고 하는 것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씀이 심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더 깊이 알아감으로 말씀의 빛 속에서 철저히 변화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의 빛
왕병에 대한 신약의 처방은 다음 두 가지 성경구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23:8)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계1:9)
우리는 랍비나 왕이 아니라 다른 성도들과 동등한 형제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권위에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사랑이 중요해집니다. 왜냐하면 형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음 성구들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행7:26)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롬14:15)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고전6:8)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고전8:11)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살전4:6)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면하라."(살후3:15)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딤전5:1)
이 모든 말씀의 저변에 무엇이 깔려 있습니까? 형제는 당연히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당위성은 다음 구절에 더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4-18)
형제 사랑은 주님이 주신 새 계명입니다(요일3:23). 우리가 형제라는 것을 깨달을 때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집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 동등한 형제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왕병이 치유됩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초기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예수전도단을 아주 나쁘게 생각했답니다. 예수전도단 활동을 금했답니다. 그때 이유가 뭐였냐면, 어떤 청년이 예수전도단에서 하던 것처럼 조용기 목사님께 형제님 하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기도 하고 일면 교회의 결정이 이해도 가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예수전도단의 홍성건 목사님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목사님이나 사모님, 장로님이나 집사님으로 불리지 않는다고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십시오. 그 이름과 직분에서 만족을 찾지 마십시오. 만약, 함께 일하고 있는 사역자들이나 형제들에게 제가 리더나 목사로만 비추어진다고 합시다. 그것은 사랑하는 형제들과 저의 관계가 일로써만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형제라고 불리어질 때는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세워 주는 가족 관계인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런 분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누구에게나 '나는 여러분의 형제요, 자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성경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여러분의 형제요, 자매라고 이야기하시지 않았습니까? 거기에는 사랑이 있고, 거기에는 위탁이 있고, 거기에는 돌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목사이고 당신은 평신도', 또는 '나는 교사이고 너는 학생'이라고 하면서 선을 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가족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인 가족 안에 사랑이 있습니다. 세상은 그런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세상은 형제로서 그들을 돌보아줄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참으로 선구자적인 놀라운 지적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자신이 형제 중 하나인 것을 알고 형제로서 다른 형제인 성도들을 돌보아줄 지도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글에 의거하여 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