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적이고 경쟁적인 도시에서 지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도시를 탈출하는 것, 바로 여행이며 또 다른 하나는 도시를 탐험하는 것, 즉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호텔에서 신세계로 가는 소공동 길에 새로 생긴 <밥상>에 어느 날 불쑥 들어가 샐러드 우동이라는 메뉴를 발견했을 때, 교보빌딩 로비에서 지각하지 않으려고 초조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아침 9시에, 네이비 블루 코트에 청회색 눈을 가진 시니컬해 보이는 핀란드 남자를 발견했을 때와 같다고나 할까.
10여 년 이상을 패션지에서 일해온 나에게 쇼핑도 그와 같다. 특별히 정해진 한 가지 스타일보다는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옷을 선택하는 것. TPO별로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는 것도 좋고 다양과 가격과 브랜드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과 브랜드를 개척하는 것도 신나는 일이다. 하지만 쁘렝땅 백화점에서 부산 파라다이스 면세점까지, 괌의 아웃렛 로스와 샌프란시스코 외곽에 있는 노드스트롬 백화점의 오프 아웃렛 노드스트롬 라크까지, H&M에서 ZARA, 제일평화에서 이태원시장까지 두루 섭렵한 나에게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쇼핑장소가 없다는 사실은 늘 딜레마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재미있는 곳이 나타났다.
미국식 정장의 메카
동평화(신관) 2·3층90학번인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는 캠퍼스에서 정장을 입는 게 유행이었다. 그 시절에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디자이너 이신우 씨의 브랜드 영우, 쏘시에 등을 즐겨 입었다. 그러다가 나이도 들고 공식적인 자리에 서야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미국 스타일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주로 제일평화시장과 이태원시장, 광희시장 3층을 통해서였고 타하리, 엘리 타하리, 앤 테일러 등 미국의 테일러드 슈트나 커리어 우먼을 타깃으로 하는 브랜드를 알게 되고 입기 시작했다. 최근에 광희시장의 이 보세 정장가게들이 단체로 동평화 신관 2층과 3층으로 이전했다. 예전에 군데군데 떨어져 있을 때보다 한곳에 모여 있으니 쇼핑 시간도 절약되고, 정장 안에 입을 수 있는 블라우스부터 단품으로 정장 팬츠와 스커트를 1~3만원에 한곳에서 구입할 수 있어 예전보다 더 편리해진 셈이다.
최근에 나는 동평화 신관 3층에서 가게 바깥에 행어를 놓고 죽 걸어두고 파는 재고 중에서 핸드메이드 울 소재로 된 엘리 타하리 스커트를 1만원에 샀다. 사이즈가 없어서 6을 그냥 구매했고 이대앞 수선집에서 2만원을 주고 고쳤다. 그래도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3만원에 이런 소재, 이런 컬러의 스커트를,그것도 꼭 마음에 드는 것으로 구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가격이며 품질 면에서 대만족이다. 이 스커트는 손정완의 플랫칼라의 체크무늬 더블 재킷과 매치해서 입을 예정이다. 단추, 마무리 바느질, 안감 처리 등 디테일은 완제품에 비해 떨어지지만 여전히 소재와 디자인은 우수하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견해다.
원스톱 마트형 편집 매장
올레오 6층 예스 오렌지이곳을 가르쳐준 건 평소에 언니 동생처럼 친하게 지내는 후배. 그녀가 지나가는 말처럼 “다음에 동대문 올레오에 한번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쇼핑전문가라고 자처하는 나에게 조차 생소한 이름이라 그저 청바지나 티셔츠 파는 곳이겠지 생각했다. 동대문운동장 앞에서 내려 제일평화와 광희시장을 지나 뒤편으로 가면 해양 엘리시움 상가가 있다.
바로 옆에 ‘올레오’ 상가가 보이는데 바깥에서 6층에 ‘예스 오렌지’라고 쓴 네온사인 간판이 보인다.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 내리면 층 전체가 하나의 매장이다. 언뜻 봐서는 별로 눈에 띄는 옷도 없고, 워낙 종류가 많아서 들어서자마자 지치는 것 같았다. 티셔츠 코너만 해도 소재와 디자인에 따라 30가지가 넘는다. 도착한 시간이 9시 반쯤이었는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역시 별로인가 보군’ 생각하면서 건성으로 보던 중 오른쪽 코너를 돌자 눈에 확 들어오는 옷들. 클로에 스타일 실크 블라우스와 스텔라 매카트니 재킷. 이태원이나 제일평화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이너 브랜드 스타일의 옷들인데 가장 놀라운 건 가격이었다. 블라우스 5000원, 재킷 7000원. 이태원과 제일평화시장의 10분의 1 가격이다.
예스 오렌지는 주로 도매상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매장으로 나처럼 한두 장 사는 소매 구매자에게는 옷 하나당 1000원을 더 받고 있다. 단, 10개 이상 많이 사면 도매가격으로 그냥 준다. 블라우스와 재킷으로 발동이 걸려 찬찬히 살펴보자, 행어 사이사이에서 숨은 보물찾기 하듯 정말 마음에 드는 옷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명품브랜드 클로에의 세컨드 브랜드인 ‘씨 바이 클로에’, 지난 몇 년 새 전세계 특히 한국 패션 리더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이탈리아 디자이너 ‘마르니’, 일본 잡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다소 아방가르드한‘ZUCCA’, 폴 매카트니의 딸이자 미국의 차세대 패션 디자이너로 주목받고 있는 스텔라 매카트니 등의 해외 디자이너 또는 브랜드를 카피한 스타일이 그날 내가 발견한 1급 보물들이다.
커다란 쇼핑 카트를 끌고 다니며 마음에 드는 옷은 일단 모두 카트에 담은 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거울도 없고 입어볼 수도 없는 것이 예스 오렌지의 원칙이지만, 다소 무모하게 눈총을 감내하며 엘리베이터 문을 거울삼아 옷을 대보거나 걸쳐보았다. 얼굴과 몸에 대보기 전에는 아무리 1000원짜리 옷이라도 절대 사지 않는 게 나의 원칙이다.
이곳에서의 가장 좋은 쇼핑 방법은 행어에 걸린 옷들 사이를 여행하듯 천천히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1차 고른 옷들은 반드시 카트에 담아두는 편이 좋다. 다품종 소량의 옷들이 진열되어 있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
다음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에게 어울리는지 점검하고 살 것과 포기할 것을 걸러낸다. 단, 사지 않을 옷들은 스스로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한다. 예스 오렌지의 벽면 뒤는 카운터를 빼놓고는 모두 창고다. 이 창고에서 시간대별로 옷이 조금씩 조금씩 나오기 때문에 사실 오래 머무를수록 더 다양한 보물을 찾을 수 있다. 1시간 반 동안 열심히 쇼핑을 하고 카운터 앞에 오니 겁이 났다. 고른 옷이 자그마치 20개. 그런데 총금액은 겨우 9만4000원! 예스 오렌지의 옷 하나당 평균 가격은 4000~5000원인 셈이다. 아쉬운 점은 정장류가 별로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