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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한국현대여성시의 전개
1930년대 여성문학 논의는 전적으로 남성 비평가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제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여성문인들에 대한 경계와 지침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성문학론의 존립 타당성에 대한 이론이나
그 지향점에 대한 상이한 견해들의 현재의 우리가 고민하는
여성문학론의 향반과도 맞물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제반 모순과 억압 상황 중에서
어떤 것을 최우선 순위에 둘 것인가 하는 현실 인식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며,
식민지 시대 이 땅의 참혹한 현실 속에서 여성문제의 비중과
그 해결의 과제가 어느 정도로 중차대하게 인식되었는가에 대한 검토이기도 하다.
1930년대 여성작가들이 전적으로 남성 의존적이었으며 이들의 영향력 하에서 창작활동을 해야 했던
시대적 한계를 안고 있었으며, 여성문학론도 이 같은 한계 내에서 주창되었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성문학에 대한 논의가 여성작가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여성문학의 향방에 대한 이론들이 보다 설득력 있게 제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성문학에 대한 논쟁적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여성작가가 담당해야 할 몫의 작업에 대한 최초의 자극인 동시에, 남성 작가들이 여성인물 형상화에 대한 숙고의 촉구로 작용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삶의 반영인 까닭에 그것이 씌어진 시대나 사회에 무관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한 시대 문학의 변모를 그 시대의 역사성에 비추어 해명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된다. 동시에 문학은 시대상의 번영과 더불어 그 자체의 자율적 규범을 지닌 까닭으로 그 규범의 체계 속에 또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견해도 옳다.
1930년대가 갖는 문학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의 일반적 상황이 어떠한가를 아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첫째, 이 시기는 세계적으로 보면,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반동적 움직임이 도처에서 활개를 치던 시기였다. 특히 식민지의 대국인 일본을 포함하여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팽배해진 국제적 파시즘의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1930년의 선거에서 승리하고 1933년 수상으로 집권한 나찌 히틀러의 독일, 1919년 전투자 동맹을 결성한 뒤 1922년에 수상이 되고 통치권(1926). 입법권(1928)을 탈취하여 독재자가 된 뭇솔리니의 이탈리아,
1936년 육군의 총사령관이 되고 193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프랑코의 스페인 경우가 그렇고,
그외 유고의 정변, 1934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대폭동
또한 서구의 파시즘의 물결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일본 역시 정당내각은 1930년을 고비로 막을 내리고
군부가 실질적으로 정권을 조정하는 군국주의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1931년의 만주사변은 군부의 독자적 행동에 의해서 저질러진 일본 군국주의의 단면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후 일본의 역대 수상은 예외 없이 일본군 출신의 장군들이었지만 군부의 괴뢰 이상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였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1929년 미국으로부터 파급된 세계경제의 대공황, 국민당에 의해 통일된 중국의 투쟁적 민족주의에 대한 제국주의 일본 경제의 대응, 서구 파시즘에 의해 자극, 전체주의 성향을 지닌 일본 민족성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일본의 경제공황은 한국에 까지 파급되어 일제에 의한 한국산 곡물의 대량수탈과 식민지 시장을 통한 경제적 착취는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한국경제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게 된다.
유럽과 달리 일본의 파시즘은 민중에 기반을 두지 못하였고 국가의 기본구조에 혁명적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파시즘이라기보다는 군국주의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지식인과 문인에게 불안사조를 고조시키고 허위의식을 강요하며 신념의 붕괴를 가져오게 함으로써
그들의 현실과 유리된 자폐적 개인주의 환상에 빠지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역시 파시즘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파시즘은 적극적으로 무단폭력과 획일화된
이념을 통해 지식인의 사상. 사고 및 언론을 통제하였다.
지식인이 신념의 붕괴에 따른 불안을 감당하지 못해 그 스스로 파시즘에 뛰어들게 되는 심리적 과정은 프롬이 지적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파시즘 하의 불안사조는 문인들로 하여금 현실과 거리가 먼 예술지사의 심미적 문학세계에 빠져들게 만들었으며, 그것은 당대 식민지 지배국인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식민지인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렵 유진오, 김기진은 그들의 평론을 통해 이를 지적한 바 있다. 말하자면 1930년대 한국의 순수문학은 이렇게 파시즘의 대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파시즘의 자연스런 귀결로 일체의 사상운동이 금지되면서 특히 한국의 경우엔 어느 시대보다도 철저하게 민족운동이 탄압되고 공산주의 활동이 불법화되었다는 점이다. 만주사변을 음모하던 1929년 전후부터 이미 사상검속과 민족탄압이 심화되더니, 만주사변을 고비로 일본의 식민지 통치 방식은 급기야 1920년대의 소위 문화주의를 버리고, 특히 1936년 악명 높은 남차랑이 총독으로 부임하면서부터 1910년대 무단정치를 훨씬 능가하는 폭력. 공포 정치로 전환한다.
셋째는 일텔리겐챠의 양적 팽창 및 그 성숙이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1930년대 순수문학의 출현과 관련을 맺고 있는데, 하나는 작가의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작가의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작가의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먼저 독자의 측면에서 성숙을 뜻한다. 박용철의 지적처럼, 이제 독자는『저비한 예술』의 대중성과『정치주의』의 도식성에 대하여 더 이상 만족할 수 없는 지적 수준에 다다랐던 것이다.
그들은 종래의 내용적, 도식적, 선동적 문학을 타기하고 보다 차원 높은, 전문화되고 세련된 문화를 요구하였다. 1920년대 민족주의 문학이나 계급문학이 이를 만족시켜 줄 수 없음은 물론이다. 작자의 입장에서, 인텔리젠챠의 성숙은 문학의 전문화를 뜻한다. 그들은 문학을 보다 객관화하여 기술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학적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한국 현대문학사를 살펴보면, 특히 평론의 경우,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문예학적 문인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이후의 일이다. (해외문학파를 1930년대 문인으로 친다면, 예외적으로 양주동 정도가
있을 뿐이다.) 박용철, 이하윤, 이헌영, 김환태, 백철, 김기림, 최재서, 정지영 등이 모두 그렇다.
한편 1930년대의 주류를 이어오던 이들 순수문학인들은
그 출신 성분상 당대 한국사회에서는 일종의 쁘띠 부르조아 내지 부르조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중간계급의 지식인들은 대개『편협한 전통적 보수주의에도 만족하지 않고, 공식적 계급주의에도
전적으로 찬동하지 못함으로써 국제적 세계주의를 자향』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민족주의 문학이나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거부하고 보다 전문화되고 세련된 문학,
즉 순수문학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당연하다 할 것이다.
넷째는 문학매체에서 오는 변화이다. 그 하나는 모국어에 대한 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고조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조선어학회가 주동이 되어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구성하고 이를 계기로 하여 1930년『한글맞춤법통일안』의 작성, 1933년 10월 19일 이의 공포가 있게 되자, 우리 언어는 반만년의 역사 이래 처음으로 그 질서를 찾게 되었고, 1930년대 문인들이 이에 크게 자극받은 데서 오는 것이다. 한 민족의 문학이 모국어의 질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새삼스레 설명할 필요가 없다. 1930년대 시의 언어에 대한 깊은 천착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시기의 모국어 의식에 깊이 관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저널리즘의 양적 팽창이다.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에 이러는 시간에는 많은 잡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신문도 4종 이상이 간행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저널리즘의 팽창은 1920년대 중반 이전에는 상상치 못했던 것인 바, 이에 따라서 문학도 자연 대중의 통속적 취향에 맞는 작풍과 고답적 순수문학 작품의 구별이 생기게 된다. 예컨대 김동인, 이광수 등의 역사소설, 방인근, 윤백남의 통속소설은 더 이상 순문학적 개념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요컨대 1930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자층이나, 작가나, 인쇄매체에 대중문화적인 것과 순수문학적인 것 사이에는 뚜렷한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다음은 식민통치에 대응하는 우리 민족의 삶의 방식 측면에서 이 시기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이 시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40여 년 식민 통치 기간 중에서
그 통치술이 고도로 지능화되어 탄압이 가중되기 시작하는 그런 시기다.
나라의 강제 합병 직후의 무단 통치에서 3.1운동후 문화정치로 선회했다가 대륙침략의 마수를 뻗치기
시작하면서부터 조선인에 대한 갖가지의 통제와 탄압을 더욱 노골화하여
특히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였으며, 후기에 이르러서는
우리말과 글의 박탈은 물로 이름과 성조차 빼앗아가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 민족은 어떤 사람의 방식을 몇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상 인류의 삶을 되돌아 볼 때 어느 정도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인류의 삶이란 시공을 초월하여 반복되는 속성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니,
이런 점을 고려하여 그 시대의 삶의 방식을 추정해 보는 일은 가능하다고 본다.
첫째 유형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개인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가장 바람직하며, 긍정적인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의 숫자가 많지 못한 것이
유감스러우며, 타민족에 비해 상대적인 부끄러움이 클 수밖에 없다.
이들은 다시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국내에서의 활동과 국외에서의 활동이 그것이다. 특히 국외에서의 활동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과, 중국과 극동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이념 중심으로 이들을 다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중국에서의 ‘국공합작’과 유사한 양상이 애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지역적으로 한반도와 가장 가까이에서 활동하던 일반의 투사들이 갖는 효율성은 여타 지역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에 청산리 전투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의 투쟁이 커다란 의미를 갖는 것처럼, 북한에서는 아예 그 활동 자체를 정권 창출과 수십 년간 독재라는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존립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민족의 정기라는 차원의 시각에서 보면 (광복의 직후 친일파 처리에 미온적이었던 우리의 경우 최근까지도 이 문제는 반복 거론되고 있다.) 일단 명분은 얻고 있는 셈이다. (그들의 정권수립 이후 비민주적인 통치제도나 인권 유린 등의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거론하지 않는다.) 여하튼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 시기에 우리 민족이 가졌던 삶의 한 방식으로서 이 유형은 정당성과 역사성을 가장 크게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이와는 정반대의 삶을 산 유형으로 식민 통치를 돕거나, 더 적극적으로 그들의 위세를 빌어 동족을 탄압하는 데 앞장을 섰던 사람들이 있다. 생존을 위해 마지못해 협력한 사람도 있고 무지로 인해 죄악인 줄도 모르고 행동한 사람도 있으며,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전향한 사람, 개인적 동기에서 그렇게 된 사람,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자진해서 나선 사람, 가문을 지키기 위해 행동한 사람, 재산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나선 사람, 출세와 지위에 혈안이 되어 뛰어든 사람 등등 무수한 형태가 있겠으나,
이들은 한결같이 반역사적이며, 반민족인 행위를 한 사람들이다. 이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동족이 목숨을 잃고, 재산을 잃고, 가족을 잃고 피눈물을 흘렸던가.
이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광복 후 그 죄질에 따라 처단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민족 대 반민족의 대응양상이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 대결 양상으로 슬그머니 바뀌면서
유야무야 되도 말았다. 이 영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우리 주변 곳곳에서 그 문제점이 노정되고 있다.
우리 현대 사회사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할 것이며,
그런 통치자를 선거로 뽑아준 민주의식에도 문제가 있다 할 것이다.
셋째, 위의 두 유형과는 달리 하루 종일 어렵게 살아간 대다수의 민중들의 삶의 방식이 있다 정치지도자, 민족지도자들이 극단의 방법으로 양분된 후 눈 앞에 보이는 지도자들이 친일파로 나선 사람들뿐이요, 민중에 따르고 추종해야 할 지도자들은 숨어서 활동하거나 국외로 나가 있는 실정이니, 대다수의 민중들은 그저 목숨만을 부지하며, 겉으로 순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소규모의 소작쟁의나,
조세저항, 파업 등의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들은 극히 미미한 활동일 뿐이요,
거개의 민중은 점점 더 열악해지는 삶의 조건 속에서 ‘좋은’ 때를 기다리며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식량을 공출하여 군량미를 댔다거나 쇠붙이와 송진을 따 바쳐 군수물자를 조달했다하여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 책임은 호의호식하며 친일 행위를 한 자들이 져야 마땅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상황을 자초해낸 한말의 관리와 지도자, 그 이후의 민족 지도자들이 마땅히
책임져야 할 문제인 것이다.
지금까지 이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현실 대응 방식을 세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았거니와, 이와 같은 상식적인 분류가 이 시대 삶을 모두 포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반적인 큰 줄기로서는 이 세 유형으로 집약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시기 우리 민족의 삶의 질이 얼마나 황폐하고 열악했던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일상생활에서의 감시와 통제는 최소한의 인간적 생활마저 방해했을 것이니 삶의 조건이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다. 더구나 말기에 강제징용, 징병, 강제공출, 세금과 공과금의 증가 등으로 자산과 기아가 속출했고, 따라서 삶 자체를 포기 할 가정도 많았으리라고 보인다. 이상 아주 개략적인 입장에서 이 시대적 일반적 상황을 삶의 방식이라는 기준에서 살펴보았다.
1930년대의 두드러진 문학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여성작가들의 본격적인 등장과 함께 비로소 여성시인의 활약상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노천명, 모윤숙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여성시인은 초창기 여성시인들이 가졌던 수식어의 남발과 감상주의적 특성을 극복하고 남성 문인들의 전적인 후원 없이 시를 써갔다.
노천명(1912- 1957)은 1935년『시원』 창간호에 시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한
이래 20여 년간 시『산호림』(1938), 『창변』(1945),『별을 쳐다보며(1953),
유고시집으로『사슴의 노래』(1958)가 있고 수필집으로 『산딸기』(1948),
『나의 생활백서』(1954), 유고수필집으로『사슴과 고독의 대화』가 있고
단편소설로는 『사월이』(1939),『하숙』,『외로운 사람들』, 『오산이 있다』가 있다. 따라서
노천명이 남긴 시는 모두 172편이며 노천명의 시작품에 대한 논의는 전기적인
고찰이나 시의 경향, 개인의 기질 연구에 대한 것 등이 대부분이었고 최근에
오면서 시의 형식에 대한 문제와 바슐라르의 4원소론에 의한 내면적 사상세계의 분석 등이 연구되고 있다.
한국시의 전통맥락이 정한의 세계에 있음은 주지의 일이다. 정한은 우리 민족 정서의 바탕이 되어 왔다. 따라서 대부분의 시인들이 민족적인 정한의 세계를 노래함으로써 개인은 물론 민족의 정서와 한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노천명 시인 자신도 이러한 민족정서에 바탕되고 있으며 출생 및 성장과정에서 황해도 정연군 순택면 비석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냄으로써 가지는 환경적 요인과 독신녀로서 고독하게 살다 간 생애사적 편력 등이 정한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한국시의 전통성은 님과 한이라는 서정성으로 집약된다. 특히 여성시의 의식 공간은 이러한 님과 한의 문제를 근저로 현대 여성시의 한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모윤숙은 시원 동인으로『신원』제4호에『수난자』외 한 편, 제5호(소지 10년 12월)에 <두육체> 외 한 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고 1934년에 처녀시집『빛나는 지혹』을 낸 이후『렌의 애가』(1943),『옥비녀』(1947),『풍랑』(1961),『정경』(1962),『풍토』(1970),『논개』(1975) 등 7권의 시집과 시와 수필을 함께 쓴『밀물 썰물』(1967),『호반의 목소리』(1971)가 있고 그외 많은 수필집과 『모윤숙 시전집 1,2』(1974)를 발간하였다.
특히 민족과 사랑이라는 이원성을 적절하게 조화시키고 있는 가운데 <시몬>이라는 그의 이상적 남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수없는 생리성을 가진 남성은 우리 사회에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사고와 정신을 옳게 지니고 생을 살아가려는 인간 남성은 왜 이리 찾아보기가 드물었던가?” “가정인도 사회인도 못 되는 하나의 국적
없는 보헤미안, 그것이 시몬”이다. “이중의 선과 악! 이것은 현대를 끌고 가는
이정표다. 시몬은 아내를 핑계 삼아야 하고 렌을 모독하여야 하고 자기를 또한 속이며 끌고 가야 한다.
시몬은 허용된 이역사의 광장에서 은근한 지식과 점잖음과 기계적인 애국심의 발로와 틀 잡히지 않은 채 올라 앉은 그 지위와 작은 터 위에 자기를 세우고 이 시대가 주는 욕망과 골목의 무지개 길들을 거부할 수는 없다.” 는 비판적 자세와 민족주의적 이상 속에 자신이 추구하는 사회, 그리고 한국 남성상을 <렌>의 넋두리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표면적 주제로는 사랑의 애절함과 그 뜨거움을 노래하면서도 이면적 주제로는 민족의 나아갈 길과 민족웅비의 큰 뜻을 노래하고 있다.
모윤숙은 1930년대의 문예사조적인 유행에 초연한 가운데 뜨거운 열정으로 민족과
사랑의 이원적인 기원으로 줄기차게 노래한 한국 생존 여성시인 가운데 최대의 저력을 보여 준 여성시인이다.
그의 시는 “민족”에서 출발하여 “님”의 낭만성에 머물다가 다시 “민족”으로 돌아간 한국 민족주의 여성시인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저항적 자세보다 기원적인 뜨거운 호소력으로 민족과 사회현실을 직시하고 국가적 위기 앞에 뜨거운 시의 정신이 줄기차게 샘솟았다.
산문적이고 설명적인 그의 직서법인 시의 형식에 대화체를 즐겨 쓰고 장시를 즐김으로써
그의 많은 수필집에서 볼 수 있듯이 항상 기본으로 하고 거침없이
흐르는 조국찬가, 민족여성의 자각 등에 보여 준 그의 국가관이
그대로 시화되었다. 『렌의 애가』도 겉으로는 한 기혼 남성에게 보내는 애절한 순애보의 일기체 글줄이었지만 속으로는 민족의 앞날을 염려한 민족시인의 기원이 넘치고 있다.
따라서 시의 형식적인 아름다움보다 시의 뜻에 더 관심을 가지고,
애국적인 낭만으로 민족을 노래한 여성시인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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