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욥기 38장 1절 – 41절) 38: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8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9 그 때에 내가… 10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11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12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16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17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18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19 어느 것이 광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어느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20 너는 그의 지경으로 그를 데려갈 수 있느냐… 21 네가 아마도 알리라 네가 그 때에 태어났으리니 너의 햇수가 많음이니라 22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23 내가 환난 때와 교전과 전쟁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남겨 두었노라… 31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 32 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33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34 네가 목소리를 구름에까지 높여 넘치는 물이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35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번개가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36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 39 네가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욕을 채우겠느냐 40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숲에 앉아 숨어 기다리느니라 41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을 두고 친구들 간에 벌어진 3차례의 변론(4-31장)과, 그 자리에 참관하여 모든 내용을 듣고 있던 엘리후의 변론(32-37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변론이 다 끝난 상황에서, 침묵하시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내용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1차 말씀(38:1-40:2)과 욥의 답변(40:3-5), 이어서 하나님의 2차 말씀(40:6-41:34)과 욥의 답변(42:1-6), 그리고 결론 부분(42:7-17)으로서 친구들에 대한 욥의 용서와 회복으로 욥기서가 마무리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현현하셔서 행하신 첫 번째 말씀의 시작으로서, 자신이 창조하신 자연세계의 통치 섭리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와 권능을, 욥을 향해 질문하시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보면 과학 상식에 대한 퀴즈처럼 보이는 70여개의 질문을 하나님께서 욥에게 쏟아냅니다. 과학이 인본주의이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세계를 연구하고, 그 안에 작동하는 원리를 찾아내어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과학의 한 부분이기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마치 과학 상식에 대한 퀴즈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고뇌에 찬 욥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답변의 설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설명이 아니라 수많은 질문들을 통해서 욥을 역설적으로 설득합니다. 말을 통한 설명은 아무리 많은 말을 한다 해도 사람을 설득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질문들을 통해서 욥 자신이 스스로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도 진리 자체를 복잡하게 설명하기보다, 역설적인 질문들을 통해서 인간 스스로가 그 답을 발견하는 깨달음이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설득하시기보다 납득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욥에게 질문들을 통해서 모든 피조 세계를 오묘하게 조성하시고 세밀하게 섭리하시며 온전히 주관하시는 자신의 크신 권능과 지혜와 주권을 강조하심으로써, 광대하고 오묘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다 헤아릴 수 없는 인간 지혜의 한계성과 왜소함을 인식하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욥 자신과 친구들과 엘리후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자신들의 논쟁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가치한 일인가를 깨닫게 하심으로써 모든 문제의 매듭을 풀어가시게 됩니다. 1. 주님이 욥에게 어떤 첫 말씀을 하십니까? 엘리후는 “우리 인간이 어찌 이 전능하신 분께 이르겠소? 못할 일 없으시며 공평무사하신 그분이 어찌 억울한 일을 하시겠소?”(37:23,공동번역)라며,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을 무시하십니다.”(37:24,새번역)라고, 욥과 세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변론을 마무리했습니다. 논리적 설명은 언제나 불완전하기에 엘리후의 변론도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권능 앞에 인간이 행해야 할 참된 자세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선언함으로써, 그 자리에 위엄과 영광으로 나타나실 하나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본문은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38:1) 곧 “그 때에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새번역)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폭풍우”와 구름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권능과 위엄으로 나타나시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냅니다. 욥이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13:22,31:35)고 했던, 그의 간절한 염원이 성취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욥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38:2) 곧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공동번역)라는 책망을 통해, 욥에게 닥친 고난에 국한된 단편적인 문제 해결이 아닌 욥으로 자기 한계와 무지함을 깨닫게 하시는 메시지로부터 시작합니다. “생각”은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키며, 욥이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계획의 다양한 면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탄식을 나타내고자 하신 표현입니다. 사실 욥이나 세 친구들 그리고 엘리후는, 욥에게 고난이 발생하게 된 사건으로서의 하나님과 사탄과의 계획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을 간절히 만나기를 원했던 욥의 소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깨달아 알 수 없음을,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38:3) 곧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새번역)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의 변론을 원했던 욥에게, 네가 그렇게 지혜가 있다고 자신한다면 각오를 단단히 하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묻는 질문에 답할 것을 명령합니다. 2. 주님은 욥의 한계성을 어떻게 일깨웁니까? 욥과 친구들 앞에 현현하신 하나님께서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38:3)고 말씀하시자마자,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되는 질문 세례가 시작됩니다. 아니,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질문하신 것에 대해서 욥이 아는 것이 없었기에 감히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다고 해도 그것은 부분적일뿐, 한계가 많고 무능하여 무지한 인간임을 스스로 깨닫고 인정하기 위해서 던지는 도전적인 질문들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사는 이 땅을 창조하신 사건과 관련된 질문들로서,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38:4-6)고 욥에게 묻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도 만물과 땅이 창조된 때를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창2장). 따라서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38:4)고 물으신 이유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깨달아 알”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38:4)고 말씀하실 때, 욥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도량법”과 “줄”은 만물의 창조를 위한 설계와 진행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주추”는 과거 사람들은 땅을 밑에서 받치는 기둥이 있다고 보았던 개념으로, 창조 사역의 기초로서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모퉁잇돌”은 창조 사역의 완성으로서의 마지막을 의미합니다. 결국 창조 사역의 시작뿐만 아니라 진척 과정과 마지막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군인 천사들만이 이러한 것을 보고 기뻐 찬양했음을,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38:7)고 하나님은 선언합니다. “새벽 별들”이나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늘의 천사를 상징하며, 천사들조차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 사역에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는 증언입니다. 두 번째는, 땅을 조성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땅 위에 바다의 형성 근원과 경계를 정하신 사건과 관련된 질문과 내용들로서,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38:8-11)라며,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38:8-11)고 선언합니다. 바다의 형성을 아이 출산에 비유하여, 땅속 깊은 곳으로부터 분출한 물줄기를 온 땅을 뒤덮지 못하도록 가둔 것이 “바다”라는 증언입니다. 물 위를 뒤덮는 “구름”을 “그 옷을 만들고”, 폭풍우로 “흑암”이 뒤덮이는 상황을 아기를 감싸는 “그 강보를 만들고”라고 의인화하여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이것을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9-10)고 밝힙니다. 세 번째는, 빛과 어둠이 순환하여 밤낮을 이루도록 지구가 회전하는 자전과 공전으로 인한 계절의 변화에 관련된 질문들로서,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 땅이 변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 되었고, 그들은 옷 같이 나타나되, 악인에게는 그 빛이 차단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38:12-15) 곧 “네가 언제고 동이 틀 것을 명령해 본 일이 있느냐? 새벽의 여신에게 ‘이것이 네 자리다.’ 하고 일러준 일이 있느냐? 땅의 옷깃을 휘어잡고 불의한 사람들을 그 속에서 털어내라고 명령을 내려 본 일이 있느냐? 네가 땅을 도장 찍힌 흙벽돌처럼 붉게 만들고, 옷처럼 울긋불긋하게 만들겠느냐? 불량배들이 대낮처럼 활보하던 어둠을 벗기고, 높이 쳐들었던 그 팔을 꺾기라도 하겠느냐?”(공동번역)라며, 이처럼 만물이 운행하는 자연 법칙을 과연 욥이 명령하고 행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욥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인 태초에 하나님이 자연의 순환 법칙을 정하셨고, “악한 자들”로 만물을 선명하게 드러나게 비추는 빛을 싫어하게 하셔서, 그 빛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어둠이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과 바다의 광대함에 대한 질문들로서,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38:16-18)고 묻습니다. 과거 사람들은 죽은 자가 거하는 세계가 땅 속에 있다고 믿었기에, “사망의 문”과 “사망의 그늘진 문”이 있는 깊은 곳에 가서 본 적이 있느냐고 욥에게 묻습니다. 바다 속의 저 깊은 심연인 “바다의 샘”과 “깊은 물 밑”을 가보기나 한 것이냐고 묻습니다. 이 말씀을 한 이유는 욥에게 “세상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느냐?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어디 네 말 한 번 들어 보자.”(38:18,새번역)고 하신 것으로서,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눈으로 보거나 경험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조차 다 가보지 못하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한계성을 일깨우기 위해서 하신 질문들이었습니다. 다섯 번째는, 빛과 어둠의 근원에 대한 질문들로서, “어느 것이 광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어느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너는 그의 지경으로 그를 데려갈 수 있느냐?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38:19-20)라고 묻습니다. 공간적 시간적 제약을 받는 인간으로서는, 그 시작점을 알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한계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시는 하나님께서는 “네가 아마도 알리라. 네가 그 때에 태어났으리니 너의 햇수가 많음이니라.”(38:21) 곧 “암, 알고말고. 너는 알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을 만들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살아왔고, 내가 세상 만드는 것을 네가 보았다면, 네가 오죽이나 잘 알겠느냐!”(새번역)라고 반문법적으로 말씀합니다. 여섯 번째는, 땅 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기상 현상의 변화에 대한 질문들로서,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환난 때와 교전과 전쟁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남겨 두었노라. 광명이 어느 길로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땅에 흩어지느냐? 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으며, 우레와 번개 길을 내어 주었느냐?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은 돌 같이 굳어지고, 깊은 바다의 수면은 얼어붙느니라.”(38:22-30)며, 변화무쌍한 자연 현상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주관자와 섭리자이신 하나님 외에 누가 할 수 있겠느냐고 하는 것과, 이를 통해서 욥의 한계성을 철저하게 일깨우는 물음이었습니다. 3. 왜 만물을 이끌 능력이 있는가 묻습니까? 욥을 향해서 쏟아놓으신 광활한 대지 위에서 벌어지는 온갖 다양한 자연 법칙에 대한 질문들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이 모든 것을 관할하시는 자신의 주권과 지혜와 권능을 하나님은 증언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자연 세계를 운행하시고 변화시켜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것을 부탁하심으로써, 곧 만물을 이끌 능력이 있는가를 물으심으로써,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경이감을 불러일으키시는 한편,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는 인간의 지혜와 무능력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십니다. 첫 번째는, 욥에게 천체를 질서 있게 운행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처럼 과연 할 수 있는가를,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 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38:31-33)라고 묻는 질문을 던집니다. “묘성”은 봄에 볼 수 있는 황소 별자리를 가리키며, “삼성”은 초겨울에 볼 수 있는 오리온 별자리를 가리키며, “북두성”은 큰곰자리의 북두칠성을 가리킵니다.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르게 드러나는 별자리의 운행과 법칙을 통해, 하늘의 무수한 별들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을 인간이 이해할 수도 따라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일깨웁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그러한 하늘의 천체 곧 별자리들을 욥에게 “매어 묶을 수 있으며,…띠를 풀 수 있겠느냐?…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고 물으심으로써, 인간은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하늘의 법도를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전 우주를 완벽하게 운행하시는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네가 천상의 운행 법칙을 결정하고, 지상의 자연 법칙을 만들었느냐?”(38:33,공동번역)라며, 하늘의 천체가 운행하는 법도뿐만 아니라 지상의 자연 법칙조차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으로서 욥에게 하나님처럼 할 수 있는가를 물으심으로써, 미약한 인간에 불과한 욥이나 친구들 모두가 서로 자신의 변론을 위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아는 것처럼 주장했던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욥에게 자연현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처럼 과연 할 수 있는가를, “네가 목소리를 구름에까지 높여 넘치는 물이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번개가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 누가 지혜로 구름의 수를 세겠느냐? 누가 하늘의 물주머니를 기울이겠느냐?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38:34-38)라고 묻는 질문을 던집니다.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38:36)는, “강물이 범람할 것이라고 알리는 따오기에게 나일 강이 넘칠 것이라고 말해 주는 이가 누구냐? 비가 오기 전에 우는 수탉에게 비가 온다고 말해 주는 이가 누구냐?”(새번역)라는 의미로서,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자연현상을 예측하는 “지혜”와 “슬기”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욥도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는 “누가 지혜로워서, 티끌을 진흙덩이로 만들고, 그 진흙덩이들을 서로 달라붙게 할 수 있느냐?”(새번역)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비가 내린 후 땅이 굳게 되는 현상으로서, 일상적으로 쉽게 목격하는 자연 현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임을 일깨웁니다. 세 번째는, 생태적으로 동물들을 생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신비한 지혜의 권능과 세밀한 관심에 대한 질문으로서, “네가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욕을 채우겠느냐?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숲에 앉아 숨어 기다리느니라.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38:39-41)라고 묻습니다. “사자”는 동물의 왕을 상징하며, “까마귀 새끼”는 하잘것없는 미물을 상징합니다. 힘이 연약한 동물 하나하나까지도 살리시는 하나님이 자비하심과 세밀하심을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고 말씀하신 것처럼, 천체와 기상 현상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동물 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도 세밀한 관심과 사랑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욥과 세 친구들과 엘리후가 서로 자신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서로를 정죄하는 변론의 논쟁이 끝나자, 하나님께서 욥에게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38:3)고 말씀하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욥의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나 엘리후의 변론 또한 잘못되었다고 책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욥과만 상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학, 대양학, 측량학, 천문학, 동물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다양한 질문들을 욥에게 계속하여 퍼부으심으로써, 모든 피조 세계를 오묘하게 조성하시고 세밀하게 섭리하시며 온전히 주관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크신 권능과 지혜와 주권을 강조하는 증언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서 하나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불완전한 능력과 지혜의 한계성과 왜소함을 가진 인간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욥과 친구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욥의 고난 중에 친구들이 행한 변론은, 고통 받는 욥을 더욱 고통스럽게만 했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당하는 욥에게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그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말에 위로보다 끊임없는 상처를 받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인간은 희망과 회개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이, 우리 인간이 겪는 모든 문제의 바른 이해와 해결에 대한 진실이 있음을 욥기서는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91:14-15)는 말씀을 붙잡고, 서로 자기주장만이 옳다고 내세우는 사람들과의 변론을 멈추고, 만물의 통치자가 되시는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갈 때,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덧입는 복된 신앙인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