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대학의 희망 만들기는 파격으로 출발했다. 지난 6일 오후 경남 함양군 백전면 대안리 녹색대학에서는 신입생들의 ‘해오름제’(오리엔테이션) 마지막 시간이 진행되고 있었다. 폐교한 백전중학교 교실을 개조해 만든 대강당에 둘러앉은 대학 새내기들의 면면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부터 아이를 안고 있는 40대 후반의 주부, 20년 경력의 농부, 학부생활에 재도전하는 대학원 졸업생 등 각색이었다. 이곳에선 권위가 싫어 선생님을 ‘샘’으로 부르기로 해, 학생은 ‘물’, 교직원은 ‘여울’이 됐다.
모임 제목은 ‘물들의 논의’. 토론 주제는 학생회 활동에 관한 것이었지만, 내용은 여느 대학 오리엔테이션과 사뭇 달랐다. 자급자족을 위한 농사짓기, 당장 기숙사 지붕을 해 얹어야 하는 학교건축 문제, 스스로 만들어가는 수업 기획, 웹관리 등 녹색대학 공동체 운영방안이 논의됐다. 열띤 토론 끝에 학생회는 별도로 두지 말고, 선생님과 교직원, 학생이 모두 참여하는 학교운영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학교쪽에 제안하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일반 대학이라면 새내기들의 ‘급진 의식’으로도 비칠 이런 결의 과정은 녹색대학에서는 입학 나흘 만에 이미 일상이 됐다.
녹색대학의 기존 틀 깨기는 태생부터 시작됐다. 녹색대학은 지역과 괴리된 ‘섬’으로 전락한 대학을 지양하고 생명체로서의 대학을 만들자는 90년대 중반의 대안대학 운동 속에 잉태됐다. 지난해 3월 장회익 총장(전 서울대 교수), 홍순명 전 풀무농업고 교장 등이 모여 창립위원회를 구성한 녹색대학은 10월 신입생 모집을 했다. 40명 정원에 150여명이 몰린 학부생 선발과정은 그러나, 학생이 ‘학교’를 면접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1박2일의 합숙생활을 하면서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졸업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설도 대수롭지 않은 녹색대학의 어려움에 대해 설명했고, 37명이 ‘도전’ 의사를 표시했다.
학생들은 녹색문화학, 녹색살림학, 생명농업학, 생태건축학, 풍수풍류학 등 독특한 분야를 전공하게 된다. 그러나 녹색대학은 무엇보다 생태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학생들은 4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 공동체 생활을 배운다. 녹색대학은 이를 위해 학교에서 3㎞ 떨어진 곳에 23만여평의 터에 생태마을 ‘청미래마을’을 조성해 생태주의를 실천하는 생생한 실습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곳에는 귀농을 신청한 26가구가 올해부터 입주를 시작한다.
△ 녹색대학에서 사용하는 대안화폐인 '녹색화폐'. 단위가 '사랑'이다.
녹색대학의 또다른 시도는 대안화폐운동이다. 녹색대학은 야생화사업단, 천연염색염료사업단, 생태마을사업단, 건강식품사업단 등으로 구성된 그린네트워크의 배후 지원을 받는다. 이 그린네트워크에서는 노동의 등가 가치가 존중되고 공동체 의식이 적용된 ‘녹색화폐’가 통용된다. 녹색화폐의 액면가는 일반화폐와 1대1로 교환되며, 단위는 ‘사랑’이다. 그러나 은행도, 이자도 없다. 녹색대학은 조폐공사에 의뢰해 액면가 30억원어치의 녹색화폐 20만장을 인쇄했다. 교수와 교직원은 급여의 25%를 녹색화폐로 받으며, 학생들은 등록금의 25%를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녹색화폐로 낼 수 있다. 녹색화폐는 학교 주변에서 이미 음식값으로 치러질 정도로 지역화폐로 싹을 틔우고 있다.
녹색대학의 새 틀 짜기 가운데 학생들의 관심을 가장 갖는 것은 수업의 일부를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졸업 이수학점의 3분의 1은 이들 수업으로 따게 된다. 이것은 말 그대로 ‘물들이 만드는 수업’이다. 학생들이 기획과 강의를 맡아 선생님까지 수강하는 수업에서부터 학생들이 강사를 초빙해 지역주민들과 함께 듣는 ‘화요특강’, 지역이나 외국의 풍물을 경험하는 ‘세상보기 프로그램’, 자신이 필요한 배움을 익히기 위해 장인을 찾아가 배우는 ‘도제수업’ 등등.
학생들은 이날 저녁 열린 교수-학생-교직원 총회인 ‘작은 야단법석’ 시간에 도제수업 때 다른 대학 교수 등을 찾아가 전공분야를 공부할 경우 전공필수 학점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또하나의 파격적 제안을 했다. 한광용 교수는 “도제수업은 한 주일 정도 자신이 원하는 분야의 장인을 찾아가 기술을 배우는 정도로 기획된 것이었는데, 학생들은 지도교수를 따라 전공이 정해지는 기존 대학의 폐쇄성을 깨뜨리는 혁신적 방안으로 발전시켰다”며 놀라워했다.
총회에서는 전 시간에 학생들이 제기한 학교운영위원회 위상을 놓고 학생과 교수 또 교수들 상호간에 열띤 공방이 벌어졌다. 토론중에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자연의 섭리에서부터 사립학교법의 반민주적 독소조항에 대한 지적에 이르기까지 즉석 강의도 진행됐다. 한때 언성이 높아지는 과열 국면을 맞기도 했지만 그것은 ‘분란’이 아니라 ‘열정’으로 풀이됐다. 신입생 백선희(20·강원 강릉)씨는 “학생과 선생님들이 둘러앉아 토론하고 감정을 다 드러내도 용서가 되는 분위기가 너무 좋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