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등록증 / 이구철
인왕산과 경복궁이 가슴으로 껴안고 있는 서촌 마을
인왕산 골짜기 물소리 맑게 흘러내리는 수성동 계곡에서
화가 정선이 친구 이병연과 기린교 옆 너럭 바위에서
바둑을 두며 하늘의 이치를 들여다 보고 있다
이중섭이 상류 계곡에서 황소에게 물을 먹이며 빙그레 웃음을 잘라 먹고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바위에 멋지게 각자(刻字)했다는
시인 천수경의 송석원(松石園)에서
시 낭송회를 마치고 사슴을 타고 계곡 쪽으로 올라오는 노천명
윤동주는 사촌형 송몽규와 하숙집 마당에 떨어진 별을 하늘에 다시 걸고 있다
시인 이상은 화가 구본웅과 막다른 골목에서
질주하는 13인의 아해들을 응원하고 있다
세계여행을 다녀온 천경자 비해당에서 담배 한 대 피우며
화려한 색채로 꽃과 여인의 그림을 그린다
옆에서 구경하던 안평대군이 잘 그린다며 박수를 퍼올린다
정철 송강은 필운대에 살고 있는 이항복과
술 좋아하는 염상섭을 불러내
통인 시장에서 막걸리 한 잔 나눠 마신 후
잘 있으라 하직 인사하고 강원도로 떠난다
화가 이상범이 태극기 휘날리며 환송을 한다
이들 모두는 서촌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다
첫댓글 요즘 서울 서촌 일대를 참 많이도 다니고 있다. 갈 때마다 하나씩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서촌은 시, 소설, 그림에 몸담았던 많은 예술가들이 살았던 예술인 마을이다. 그들의 주민등록증을 들여다 보았다
제목을 "서촌 주민등록증"이라하시면 좋을 듯한데,
서촌에서 살았던 분들과
그 분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풍성하네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다닐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송강 정철이 염상섭을 불러내 한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시간은 흘러 갔지만
우리의 상상은 얼마든지 시간을 거꾸러 거스를 수 있습니다.
이 공간에서 먼저 왔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한참 뒤에도 새로운 사람들이 올 것입니다.
뒤에 와서 살아갈 사람들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먼저 와서 살다간 사람들을
어떻게 말할지도 궁금합니다.
서촌 일대 발도장 안 찍은데가 없을 것 같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