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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대근무
엄재국
진달래 지천으로 피는 북향의 산비탈
꽃잎이 공중에 매장되고 있다
지하의 한 칸 계단을 내려서고 있는, 친구의 하관식
병반의 광부가 막장의 임무를 교대하고 있다
퇴적된 목숨들이 겹겹이 일어서는, 캄캄한 공중의 광맥들
우수수 쏟아지는 분홍빛 석탄들
누군가,
공중에 꽃을 매장하고 있다
----엄재국, [교대근무]({정비공장 장미꽃}, 애지, 2006년) 전문
힌두교와 불교의 중심사상은 윤회사상이며, 그 윤회사상은 이 세상의 자연의 이치를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니체는 이 윤회사상을 그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모든 것이 가고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회전한다. 모든 것이 죽고 모든 것이 새로 꽃피어난다. 존재의 해(年)는 영원히 계속된다.
모든 것이 부서져버리고 모든 것이 새로이 짜맞춰진다. 동일한 존재의 집이 영원히 세워진다. 모든 것이 헤어지고 모든 것이 다시 만나 인사한다. 존재의 환環은 영원히 자신에게 충실하다
어느 찰나에나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의 공은 굴러간다. 중심은 곳곳에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곡선이다.
라고, 매우 잠언적이고도 경구적인 언어들로 변주시켜 놓은 바가 있다. 모든 것이 가고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는 윤회사상은 매우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데, 왜냐하면 그것이 자연의 이치를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죽으면 새로운 나무가 태어나고, 한 그루의 풀이 죽으면 새로운 풀이 태어난다. 한 마리의 짐승이 죽으면 새로운 짐승이 태어나고, 어느 인간이 죽으면 새로운 인간이 태어난다. 한 그루의 나무가 죽으면 수많은 생명들이 그 나무의 영양분을 먹고 자라나고, 어느 인간이 죽으면 그 시체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자라난다. 일찍이 아인시타인이 역설한 바가 있듯이, 에너지는 질량이고 질량은 에너지이다(E=MC2). 다시 말해서, 수많은 생명들이 자기 자신의 존재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나무와 풀로, 그리고 수많은 짐승들로 새롭게 변모할 수는 있지만, 그 에너지의 총량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텅 빈 무無에서 새로운 존재가 생겨날 수도 없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생명(에너지)이 텅 빈 무로 사라져 갈 수도 없다. 바로 이것이 자연과학 차원에서의 윤회사상인 것이고, 이 자연과학 차원의 윤회사상은 또다른 차원, 즉, 종교적 차원에서, 우리 인간들의 삶을 위로해주고 어루만져주는 기능으로 작용을 하게 된다. 사제계급, 귀족계급, 평민계급, 천민계급 등의 카스트 제도가 인도에는 여전히 현존하고 있듯이, 인간의 사후에는 사제계급이 최하 천민의 계급이 되고, 이 최하 천민의 계급이 사제의 계급이 될 수도 있다는 신앙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최하 천민계급의 계급적 갈등과 그 불만을 잠재워주고,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현실에 순응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종교적 차원에서의 윤회사상은 지배계급(사제계급)의 대사기극이며,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가장 사악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미합중국의 노예제도는 역사 철학적으로 대동소이한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엄재국 시인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고, 200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바가 있다. 그의 [교대근무]는 종교의 차원이 아닌, 자연의 차원에서 윤회사상에 가장 깊숙이 맞닿아 있다. 모든 것이 가고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 모든 것이 죽고 모든 것이 새로 꽃피어난다. 이른바, 하루는 24시간, 한 달은 30일, 일 년은 365일, 그리고 백 년하고도 또, 천 년, 만년 동안, 주야晝夜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교대근무]로 이 세상의 삶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진달래가 지천으로 핀 어느 봄날, 그의 친구가 때 이르게 죽어갔고, 그는 그 친구의 장지를 다녀와서 이 [교대근무]를 쓰게 되었던 모양이다. 진달래꽃은 4월에 잎보다 먼저 피고, 참꽃 또는 두견화라고도 한다. 높이는 2~3미터이고, 줄기는 윗부분에서 많은 가지가 갈라지며, 잎은 어긋나고 긴 타원 모양의 바소꼴로 되어 있다. 진달래는 삼천리 금수강산 곳곳에 분포되어 있으며, 꽃은 이른 봄에 화전을 만들어 먹거나 진달래술(두견주)을 담가 먹기도 한다. 한방에서는 꽃을 영산홍迎山紅이라는 약재로 쓰는데, 해수, 기관지염, 감기로 인한 두통과 이뇨작용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때 이른 봄날, 온산천을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는 매우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그 진달래꽃의 아름다움보다는 더욱 더 서러운 한恨의 정서로 다가오기도 한다. 때 이른 봄날은 3월 1일의 대한독립만세운동과 4.19혁명과 5.16의 군사쿠테타와도 관련이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절대빈곤의 현상인 보리고개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인들은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고, 수많은 내외우환의 정변들을 겪으면서 진달래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해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문화는 굳건하고 튼튼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 자라나고, 그리고, 또한, 그것을 향유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여유와 한가함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교대근무]의 주인공은 때 이르게 죽어간 광부이며, 그가 가는 곳은 북망산천의 막장이다. “진달래 지천으로 피는 북향의 산비탈/ 꽃잎이 공중에 매장되고 있다// 지하의 한 칸 계단을 내려서고 있는, 친구의 하관식// 병반의 광부가 막장의 임무를 교대하고 있다”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뜻하게 햇볕이 잘 드는 남향을 선호하지, 늘 음습하고 추운 북향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진달래꽃잎과 함께 “북향의 산비탈”에 매장된 친구는 비명횡사의 주인공이지, 천수를 다하고 죽어간 노인의 그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시인의 친구의 직업은 무엇이었으며, 그 친구는 왜, 그처럼 슬픈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병반의 광부*가 막장의 임무를 교대하고 있다”라는 시구에서 유추할 수가 있듯이, 그 친구의 직업은 광부이었던 것이며, 그리고 그는 광부로서 그처럼 슬픈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 갔던 것이다. 그는 갱도가 무너져 내린 막장의 사고로 죽어간 것일까? 석탄이나 광석을 채굴하기 위한 채굴막장에서 죽어간 것일까? 갱도를 만들기 위해 굴진하고 있는 굴진막장에서 죽어간 것일까? 인간의 몸에 유해한 분진가루를 장기간 들이마시고 만성적인 진폐증 환자로 죽어간 것일까? 아니, 이 모든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광부로서, 그 생활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간 것일까? [교대근무]의 문맥으로 보면, 그 친구의 죽음의 원인을 잘 알 수가 없지만,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더욱 더 다양하고 자유롭게 유추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친구는 막장의 사고로 죽어갔을 수도 있고, 만성적인 진폐증의 환자로 죽어갔을 수도 있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막장에서 죽어갔을 수도 있다. 그 막장에서의 죽음은 또다른 막장으로의 이동일 뿐이지만,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너무 슬퍼하거나 통곡해야 될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막장은 슬픈 것이지만, 저 세상에서의 막장은 슬픈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은 삶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가 없지만, 죽음은 삶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죽음은 윤회사상의 차원에서, 그 친구를 살아가고 살아 움직이게 했던 에너지(석탄)에 대한 부채를 상환하는 [교대근무]에 지나지 않는다. 석탄이란 모든 동식물들이 퇴적하여, 가열과 가압작용을 받아 생성된 흑갈색의 가연성 화석연료를 말한다. 석탄은 탄화도炭化度에 따라 탄소분이 60%인 이탄泥炭, 70%인 아탄亞炭, 80∼90%인 역청탄, 그리고 95%인 무연탄으로 나뉜다. 발열량은 좋은 탄질인 경우 6,500∼7,000kcal/kg이고 저질탄은 보통 4,500kcal/kg이다. 그 친구를 살아가게 했고 살아 움직이게 했던 것이 석탄이었다면, 이제는 그 친구가 북향의 산비탈에서, 그 석탄이 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퇴적된 목숨들이 겹겹이 일어서는, 캄캄한 공중의 광맥들// 우수수 쏟아지는 분홍빛 석탄들”이라는 시구 중에서, “퇴적된 목숨들이 겹겹이 일어서는, 캄캄한 공중의 광맥들”은 동식물들의 부식토가 겹겹이 나무와 숲으로 일어서는 것을 뜻하고, 또한 “우수수 쏟아지는 분홍빛 석탄들”은 진달래꽃잎이 공중에서 우수수 떨어지며 휘날리는 것을 뜻한다. “누군가가/ 공중에 꽃을 매장하고 있다”라는 것은 때 이르게 비명횡사해간 친구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가 없는 자연의 법칙일 뿐인 것이다. 모든 죽음은, 그것이 ‘생명의 꽃’이 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낙화와도 같은 것이며, 그것은 “누군가가/ 공중에 꽃을 매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자연의 법칙 앞에서는 어느 누군가가 조금 더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갖고 살았다는 것도 문제가 될 리가 없고, 그 어느 누군가가 좀더 오래 살았다거나 비명횡사해갔다는 것도 문제가 될 리가 없다. 자연은 전체적인 측면에서 종의 균형에만 관심이 있지, 어느 개인의 행복과 불행 따위에는 관심조차도 없다. 에너지는 질량이고 질랑은 에너지이다. ‘모든 것이 가고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 모든 것이 죽고 모든 것이 새로 꽃피어난다’라는 이 윤회사상의 순환구조 속에서, 친구는 인간이라는 육체의 탈만을 벗어던졌을 뿐, 그는 결코 죽어간 것이 아니다. 요컨대, 그는 언젠가, 어느 때, 그 시기가 무르익고 때 이른 봄날이 되면, 무연탄으로, 삼천리 금수강산의 진달래꽃으로 또다시 붉게 타오르고, 또 타오르게 될 것이다.
엄재국 시인의 [교대근무]는 때 이르게 죽어간 친구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깊이 있게 각인되어 있는 시이며, 그 ‘애도의 마음’을 윤회의 사상으로 너무나도 의연하고 꿋꿋하게 진정시켜 나가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그 슬픔의 강도는 수천 년의 시간의 힘과도 견줄만 하며, 그 시간의 가열과 가압작용으로 탄소분이 95% 이상인 무연탄이 되어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연과학적인 측면과 종교적인 측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사 철학적인 측면에서 그의 마음과 가슴이 찢어질 것같은 슬픔은 정화되고, 그리고 그 정화의 힘으로 그의 시는 절제를 얻게 된다. 언어의 절제는 슬픔의 절제이고, 슬픔의 절제는 언어의 절제이다. 그 절제된 언어와 슬픔만이 최고급의 무연탄이 되고 제일급의 명시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엄재국 시인은 모든 사물들과 생명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주는 제일급의 이미지스트이자 상징주의자라고 할 수가 있다. 엄재국 시인의 [교대근무]는 세 가지 차원의 윤회구조를 갖고 있다. 첫 번째는 친구가 석탄이 되고 석탄이 친구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달래가 석탄이 되고 석탄이 진달래가 되는 것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친구와 진달래가 부식토가 되고, 그 부식토가 모든 생명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윤회사상은 이 세상의 삶을 찬양하고 옹호하는 사상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이 윤회사상을 넘어서서, 나의 낙천주의 사상을 가르쳐 주고자 한다. 우리 인간들의 삶은 회의되거나 질문되기 이전에 향유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들은 우리 인간들의 삶을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왔단 말인가? 수많은 장애물들은 우리 인간들을 더욱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심지어는 자살과 비명횡사마저도 연출해내지만, 그러나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그 장애물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삶의 기쁨과보람을 성취할 수가 있었단 말인가? 수많은 장애물들을 다 극복해낸 인간은 전지전능한 인간이 되어서 하늘을 찌를듯한 환희에의 기쁨을 맛볼 수가 있지만, 그러나 그 장애물들 앞에서 쓰러져간 인간들마저도 ‘그 장애물들이 있어서 나의 삶은 즐겁고 행복했던 것이고, 그리고, 또다시 태어나서, 그 장애물들에게 도전해보고 싶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낙천주의자는 늘, 항상, 최선을 다하는 자이고, 그는 어떠한 일의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그의 삶을 즐겁고 기쁘게 향유하고 있는 자이다.
*나는 ‘병반의 광부’를 ‘병반病斑의 광부’로 이해하고, 그 광부의 죽음을 병에 의한 죽음으로만 이해했었다. 그러나 지극히도 다행스럽게 엄재국 시인이 그 병반을 질병에 의한 반점이 아니라, 갑반甲班, 을반乙班, 병반病斑이라는 광산의 용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애초부터 한자로 표기하거나 주를 달아 주었더라면 그러한 오류는 피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갑반의 작업시간은 오전 8시이고, 을반은 오후 4시이고, 병반은 밤 12시라고 한다. 엄재국 시인의 친구는 한밤 중의 심야 작업반으로 그토록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다가 그만 안타깝게도 그 생명의 끈을 놓아버렸던 모양이다. 부디 명계冥界에서나마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해본다.
----반경환 명시감상 1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