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이류(異類)
남전이 시중(市衆)하여 말하였다
“여여라고 불러도 벌써 변했다. 그러니 요새 사람들은 모름지기 이류(異類)속에서 행해야 하느니라”
조주가 승당(僧堂)밖에서 선사를 만나 대뜸 물었다.
“이(異)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거니와 어떤 것이 유(類)입니까?”
이에 선사가 두 손으로 땅을 짚거늘 조주가 발로 한 번 밟으니 선사가 땅에 쓰러졌다. 조주가 연수당(延壽堂)으로 뛰어들어가면서 외쳤다.
“후회한다. 후회한다.”
선사가 시자를 보내 물었다.
“무엇을 후회하는가?”
조주가 대답하였다.
“다시 한 번 밟아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보녕용(保寧勇)이 송했다.
장공(張公)이 깊은 마을로 이사를 가는데
도둑이 몸을 숨겨 뒷문으로 들어갔네.
하루 아침 냄비까지 도적 맞은 뒤에도
여전히 베개를 높이 베고 아들손가를 어르네.
덕산원명(德山圓明)이 이 이야기에서 “……이류속에서 행해야 하느니라” 한 곳까지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이 일을 귀종(歸宗)에게 이야기했더니 귀종이 말하기를 “비록 이류에서 행한다 하더라도 축생의 과보는 받지 않으리라” 했는데 남전이 이 말을 듣고는 이르기를 “맹팔랑(孟八郞) 같은 놈이 아직도 저렇게 하는구나” 한 일을 들어 말하였다.
“남전이 독에 맞았구나”
※ 맹팔랑 : 맹씨네 여덟째 아들이란 말로서 매우 괄괄하여 앞뒤 안 보고 행동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제 3권 제 95칙 참조.
낭야각(瑯琊覺)이 이 이야기에서 “……이류 속에서 행해야 하느니라” 한 곳까지는 들고, 연이어 귀종이 말한 “……아직도 저렇게 하는구나”한데까지는 들어 말하였다.
“산승은 그렇지 않으리라. 물을 만나면 물을 마시고 풀을 만나면 풀을 먹는다. 그 어찌 축생의 행임을 알겠는가?”
법화거(法華擧)가 상당(上堂)하여 이 이야기에서 “……이류 속에서 행해야 하느니라”한 곳까지를 들어 말하였다.
“말해보라, 어떤 것이 이류 속에서 행하는 것인가?”
그리고는 말하였다.
“돌 소는 긴긴 봄 내내 안개 속에 오래도록 누워 있고, 나무 말은 늦은 가을 내내 강가에서 소리를 치느니라”
불일재(佛日才)가 염하였다.
“아버지는 인자하지 않고 자식은 효도하지 않아서 행동을 먼저 하고 나중에 뉘우치는구나. 눈 밝은 납자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구나.”
說話
“여여라고 불러도[喚作如]……”라 함은 앞의 화두는 열반적멸의 이치를 밝혔기 때문에 벌써 변했다 했고, 이 화두는 이류 속의 행을 지적해 낸 것이다. 이류(異類)라 함은 바탕이 다른 것이 이(異)요, 하나가 아님이 유(類)인가?
왕래이류(往來異類)로는 성품이 항상 윤회하는 것을 유(類)라 하고, 성품이 원래 잃어지지 않는 것을 이(異)라 하며, 보살동이류(菩薩同異類)로는 형상이 6도 중생과 비슷한 것을 유라 하고, 자기는 생사윤회(生死輪廻)를 같이 하지 않는 것을 이라 한다. 사문이류(沙門異類)로는 털을 입고 이마에 뿔이 날 것을 유라 하고, 번역하지 않는 도리를 밝혀 내는 것을 이라 하며, 종문이류(宗門異類)로는 일체 언어를 유라 하고 지혜가 이르지 못하는 곳을 이라 하니, 이(異)는 차별이 없는 것이요, 유(類)는 차별이 되는 것이다.
“이류 속에서 행해야 하느니라[異類中行]”함은 이(異)와 유(類)가 둘이 아닌 가운데 행하는 것인가? 아니면 차별은 차별이 없는 자성(自性) 위에서 일어난 것이니 이(異)라 하은 차별이 달라지게 된 곳에서 저쪽[那邊]을 가리킨 것이요, 지금 행리(行李) 하는 곳을 유(類)라 함인가? 모두 아니다.
합해서 말하면 차별된 그 자리에서 차별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異)와 유(類)를 따로 나누면 이(異)는 차별이 없는 것이요, 유(類)는 차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異)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거니와 어떤 것이 유입니까?[異則不問如何是類]”라고 한 것이다.
이 화두에서 이른바 “이류(異類)”라 하은 사문이류인가. 종문이류인가? 시중(示衆)한 것은 종문이류요, 그 뒤에 활용된 것은 사문이류일 것이다. 만일 행리(行李)하는 사람 쪽에 의해서 본다면 먼저와 뒤의 깊고 얕음이 역연(歷然)하지만 남전과 조주의 분상(分上)에서는 잡히는 대로 활용하기에 가(可)함도 불가(不可)함도 없거니, 어찌 사문이류나 종문이류를 가리겠는가?
“이(異)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거니와 어떤 것이 유(類)입니까?[異則不問如何是類]”라고 한 것은 이 말을 빌어 남전을 시험하려 한 것이요, “이에 선사가 두 손으로 땅을 짚거늘[師以兩手托地]”이라 함은 소도 되고 말도 된다는 뜻이다.
“조주가 발로 한 번 밟는다.[州以脚一踏]”하은 유(類)를 밟아 뭉갠다는 뜻이요, “선사가 땅에 쓰러졌다.[師倒地]”함은 이류의 행을 완전히 갖추었다는 뜻이며, “조주가 연수당으로 뛰어들어갔다.[州走入延壽堂]”고 한 곳에서 연수당은 열반당(涅槃堂)이니, 발로 한 번 밟은 것이 열반이기 때문이다.
“다시……못한 것을 후회한다.[悔不更]”고 한 것은 남전이 땅에 쓰러진 곳에 다시 두 번 밟아 주었어야 솟구쳐 나올 길이 있었을 것이란 뜻이니 무슨 까닭인가? 이(異)와 유(類)를 모두 밟아 쓰러뜨리기 때문이다.
보녕(保寧 )의 송에서 첫 구절은 남전의 이류중행(異類中行)을 송한 것이요, 둘째 구절은 조주를 송한 것이며, 뒤의 두 구절은 역시 조주와 남전을 밝힌 것이다.
덕산(德山)의 거화(擧話)에서 “비록 이류에서 행한다. 하더라도[雖行)……”라 함은 이류 속에서 행하는 것이란 일찍이 이런 것이 아니라는 뜻이요 “맹팔랑(孟八郞)……”이라 함은 이야기를 두 토막 내었고, “남전이 독에 맞았구나[南泉中毒]”라고 한 것은 귀종(歸宗)을 붙들어 일으킨 것이다.
낭야(瑯琊)의 거화에서 “물을 만나면 물을 마시고[遇水 水]……”라 한 것은 이류 속에서 행을 하면서도 이류 속에서 행을 하는 줄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법화(法華)의 거화에서 “돌 소는[石牛]……”이라 함은 유(類)요 “나무 말은[木馬]……”이라 함은 이(異)이니, 이이면서 유이고 유이면서 이이다.
불일(佛日)의 염에서 “아버지는 인자하지 않고[父不慈]……”라 함은 제각기 능한 바가 있다는 뜻이요, “행동을[作之]……”이라 함은 조주가 “후회한다. 후회한다.[悔悔]‘고 한 대목을 이른 것이요, ”눈 밝은[明眼]……“이라 함은 역시 한 구절을 일러야 되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