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여성이야기]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1897~2003)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1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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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성이야기]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1897~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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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성이야기]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1897~2003)
대만의 영원한 퍼스트레이디
부산여성뉴스 2012-08-28 11:50
미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 귀국한 후 부르주아로 성장한 아버지 송가수와 독실한 기독교집안 출신으로 현대적 교육을받은 어머니 예계진 사이에서 1897년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송미령은 언니 애령, 경령 그리고 오빠 자문 다음으로 딸로는 셋째였다.
동일한 생장환경과 교육속에서 자랐으면서도 세 자매는 각기 다른 인생관을 갖고 서로 다른 인생행로를 걸어갔다. 중국 4대재벌 가운데 하나인 절강재벌 송가수는 세 여걸을 딸로 두었다.
첫째 애령은 돈을 사랑했고, 둘째 경령은 나라를 사랑했고, 셋째 미령은 권력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럼 미령의 인생역정을 살펴보자. 미령은 1908년 11살 되던 해 언니 경령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처음 1년은 뉴저지주 서미트에서 공부한 후 조지아주 더모래스트에서 공부하였으며 1912년 조지아주 메이컨시에 있는 웨슬리안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녀는 나이가 모자랐으므로 특별학생으로 입학했다. 다음해인 1913년 보호자 노릇을 하던 경령이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자 혼자 남게 된 미령은 오빠가 있던 미사추세츠주의 웰슬리대학 1학년으로 전학하였다. 하바드대학에 다니는 오빠 송자문의 보살핌을 받기 위해서였다.
웰슬리대학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하였는데 그외에도 철학, 수사학, 음악, 천문학, 역사학, 교육학, 강연술 등을 배웠다. 특히 졸업때는 가장 영예로운 듀란트학위를 받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하였다. 대학졸업 후 1917년 여름 송미령은 10년 가까운 미국생활을 끝내고 귀국하였다.
방년 20세의 그녀는 상해 YWCA의 지도적 회원이 되었으며 또한 전국영화점열위원회에서 활약하였고 1923년에는 아동노동위원회에 참가하였다. 그녀는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하기 위해 몇 년간 개인지도를 받았는데 아버지를 닮아서 연설에 재능이 있었다.
이같이 학습과 각종사업에 참가하면서 또한 상해 사교계에서 떠오르는 해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예쁘고 세련되고 교양이 있으며 화려하고 멋지게 꾸밀 수 있는 돈도 있었으며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는 영어회화실력은 그녀를 크게 뒷받침해 주었다.
사교모임에서의 그녀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고 뭇남성이 그녀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하였다. 특히 유기문과는 미국 유학시절부터 깊이 사귀는 연애관계였다. 그러나 미령은 “너는 장개석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중국을 통치하는 황제와 결혼하는거야”라는 언니 애령의 설득과 First lady가 되고 싶은 미령 자신의 야망 때문에 여자관계가 복잡한 장개석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때 미령의 나이 30세, 장개석의 나이 40세였다. 처음 모친 예계진은 반대하였으나 기독교로 개종하겠다는 장개석의 말에 끝내 결혼을 승낙하고 만족해했다. 1927년 12월 1일 성대한 결혼식이 남경에서 채원배의 주례로 거행되었으며 미령은 드디어 언니 경령에 이어 중국의 두 번째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이때 송경령은 망명한 모스크바에서 추위와 고통에 떨고 있었다. 경령은 “그들 둘의 결합은 정치의 일부분이지 사랑이 아니다”라고 내뱉었다. 미령이 장개석 총통의 세번째 부인이 되기로 결정한 것은 사랑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을 향한 지향이었다. 결혼 후 미령은 북벌을 거행한 장개석을 따라 남경에서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며 장개석의 결함을 잘 보좌하여 상당한 정치적 작용을 하였다. 1933년 장개석을 따라 공산당토벌작전에 참가하였고 1934년에는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36년 미령은 남편이 감금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서안으로 뛰어들어 장학량과 담판 끝에 남편을 구해냈다. 이 서안사건으로 1937년 미국의 주간지『타임』은 송미령을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여성」으로 선정했다.
지난 40년대 그녀는 미국의회를 상대로 정열적인 로비활동을 펼쳐 미국의 원조를 끌어냈으며, ‘차이나 로비’의 주역으로 대접받았다. 1943년에는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의 초청으로 외국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미국원조를 요청하는 연설을 하여 기립박수를 받았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선교사가 중국에 예수를 전했듯이 송미령은 미국에 중국을 알렸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송미령은 탁월한 언변과 정열적인 외교활동으로 수많은 신화를 남겼다.
공산당에게 패한 뒤 대만으로 건너온 후 남편을 도와 자유중국정부의 강력한 배후가 된 그녀에게 있어 권력이란 의지를 성취하고, 상황을 조절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다.
뛰어난 미모와 능력으로 송미령은 송경령에 못지않을 만큼 중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여성이었다. 장개석 총통을 세계적 인물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으나 자녀를 낳지는 못했다.
그 후 남편이 사망한 1975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근교의 롱아일랜드에서 살고 있다. 그녀는 2003년 10월 23일 106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19세기, 20세기, 21세기 이렇게 3세기에 걸쳐 살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놀라운 여성이다.
1981년 송경령이 사망하기 전 중국 정부는 동생 송미령에게 전보를 쳤으나 그녀는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1949년 대륙이 공산화된 이후헤어진 송경령, 송미령 자매는「세기의 이산자매」가 되어 죽을 때까지 서로 만나지 못했다.
2차대전의 유일한 생존주역으로 불리며 兩岸과 미중 관계의 살아있는 교과서로 인정받는 송미령은 1995년 98세의 노구를 이끌고, 미국 의회에서 종전 50주년 기념 연설에 참가함으로써 다시 한 번 뉴스에 올랐다. 이러한 사실은 국제적으로 고립감을 느끼고 있는 대만인들에게 송미령은「영원한 First lady」로 남게하였다.
[2011년 8월 18일 22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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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속 여성이야기]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1897~2003)|작성자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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