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5월, 자유중국군 최정예 중 하나인 74사단의 어처구니없는 전멸은 국민정부의 패주와 몰락을 알리는 서막과 같았다.
1946년 1월, 정부군과 공산군은 미국대통령의 특사 조지 캐틀렛 마셜의 중재로 정전협정에 조인하였으나 미국의 막대한 지원으로 자신감을 얻은 장제스는 국민들의 경제난 문제, 부패관료와 군 내부의 간첩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채 1946년 6월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공산군 토벌 내전 계획을 결정했다. 미국은 조정실패를 선언, 사실상 이를 방임하였다. 1946년 6월 26일 정부군의 선제공격으로 전면적인 내전이 발발하였다. 이에 공산군은 정부군의 주력부대와 결전을 회피, 중심도시를 버리고 멀리 떨어진 자신들의 해방구를 확고히 하는 한 편, 전선을 길게 만들어 정부군이 분산되기를 노렸고 정부군 내의 간첩들을 활용하여 분산된 정부군을 각개격파 하는 전략으로 대항했다.
1947년 3월, 산동지역에 있던 20만의 공산군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45만의 정부군이 동원되었다. 정부군 장군 중에는 중일전쟁 중 열악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격파한 상승장군 장링푸(張靈甫)도 있었다. 그와 정부군 최정예 중 하나인 74사단은 이번 전투에서 미끼 역할을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장링푸와 74사단이 20만 공산군의 포위망 안으로 들어가면 외곽 지역에 대기하고 있던 40만 이상의 정부군이 이를 역포위하여 20만 공산군을 쌈 싸먹겠다는 작전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장링푸는 전투를 시작하기에 앞서 두가지 중대한 사실을 알지 못했는데, 첫째는 국방부 작전실 차장이었던 리우페이(劉斐) 중장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둘째는 황포군관학교 선배였던 리톈샤(李天霞)장군이 장제스의 총애를 받는 자신을 매우 질투한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1947년 5월 11일, 장링푸는 현재 산동성 임기시(臨沂市) 몽음현(蒙阴縣)에 위치한 맹량고(孟良崮) 라는 바위 산에 진를 쳤고, 20만 공산군은 이를 포위했다.
맹량고(孟良崮)는 물을 구할 수 없는 돌산이었고, 그런데도 돌산에다 진을 친 이유는 외곽지역에 대기하고 있던 구원군이 늦어도 거리상 이틀이면 당도할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3일이 넘었는데도 구원군은 오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그를 질시하던 83사단장 리톈샤(李天霞)가 고의적으로 구원을 막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리톈샤(李天霞)는 장링푸는 구할 생각이 없었고 이번 전투를 교묘히 이용, 장링푸를 죽게 만들 생각이었다.
74사단은 정예부대 답게 식수가 고갈되고 탄약이 바닥을 드러내는 가운데 20만의 공산군을 상대로 끝까지 싸웠다.
무언가 잘 못 되었다고 생각한 탕은보(湯恩伯) 장군은 장제스에게 전멸위기에 놓인 74사단 구원요청을 보고하려 하였으나 리우페이(劉斐)의 방해로 제 때 보고되지 못했다.
1947년 5월 16일, 소수의 부관들을 제외한 74사단 장병들은 끝까지 싸우다 전멸했고, 장링푸는 유서를 쓰고 권총자살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출처: http://bemil.chosun.com/nbrd/gallery/view.html?b_bbs_id=10044&pn=1&num=204422
대만화교출신분이 작성한 글입니다.
첫댓글 이런분들의 죽음을 헛되이 되지 않게 해야 되는데 ...
전쟁 영웅들의 이야기는 흥미롭습니다. 이 분은 특히 드라마틱합니다.
장개석 휘하에도 뛰어난 군인이 여럿 있었으나 모택동에게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