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라 하면 오동도를 연상하리만큼 오동도는 여수의 얼굴과 같은 곳이다. 면적이라야 고작 10정보 내외의 섬이지만 오늘날 이 섬은 조선팔경의 일경을 이루는 한려수도의 깃점이 되어있고 또 국립공원으로 지정 되어 관광명소로 각광 받으면서 그 이름이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섬은 지난날 개인소유였다는 흥미로운 일화와 함께 숱한 애환을 담고 있는 전설의 현장이기도 하다.
구한말 고종때 여수 종포에서 돌산 나룻배를 관리하고 있던 유선달은 학문이 해박하고 특히 민화에 능하여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한다. 이때의 국내정세는 영국해군의 거문도 불법점거 사건으로 어수선한때 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거문도를 비롯한 남해안 도서부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으나, 관내 위치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여서 전라감영으로 하여금 남해안 일대의 해도 작성을 명하고 다시 전라좌수영으로 하여금 이 작업을 완성토록 했을 때 이에 참여한 우선달이 고심 끝에 해도와 관내상황을 소상히 작성하여 바쳤다 한다.
그 후 이 자료는 국정에 큰 참고가 됨에 그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오동도를 주게 되었다. 당시만 하더래도 오동도에는 방파제가 구축되어 있지 아니하고 육지에서 떨어져 있어 사람의 내왕이 없고 잡목만 우거져 있을 뿐이어서 그다지 이용가치가 없었던 것이나 한일합방 이후 일인들의 진출이 두드러져 학교가 생겨나면서 오동도는 학교 조합 재산이라는 강변을 내세워 그 귀속권을 에워싸고 관가와 분쟁이 있었다 한다.
이때 관가에서는 오동도 소유권을 주장하는 유선달에게 증거물 제시를 요구했으나, 분쟁이 있기전 화재를 입어 수상당시 받은 증표를 소실한 후여서 유선달 소유가 분명한데도 증거물을 내놓지 못하여 마침내 오동도는 학교 조합 재산으로 귀속돼 버렸다.
이 섬은 그후 학교조합 재산으로 관리해 오다가 해방후 교육청에서 인수 관리해 온 것을 1967년 여수시가 2천만환에 사들여 시민의 휴식처겸 낚시터로 이용해 왔으나 1968년 12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모든 시설이 공원법의 규제를 받게 되어 등대와 항만표지 기지창 건물을 제외한 39동의 민간 건물이 철기 시비 끝에 마침내 헐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섬은 일제때 신항개발을 위해 자산과 이 섬간에 768미터가 연륙되고 방파제가 생겨났지만 서국민학교가 실습지로 그 일부를 개간했을 정도였고 그 뒤 한때는 수산학교의 실습지가 된적도 있으며 해방후까지도 한낱 보잘 것 없는 섬으로 한적한 곳이었으나, 60년대 후반부터 관광인구의 증가와 함께 외래객의 내왕이 번번해져 입장료 수입만도 상당액에 달하고 있는 관광지로서 여수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섬을 멀리서 바라보면 그 생김새가 마치 오동잎처럼 보이고 또 그 옛날에는 오동나무가 빽빽히 들어서 있었다는데 연유하여 오동도라 명명되었다고는 하나 한때는 이충무공이 이섬에 대나무를 심게 한 후 대나무가 무성하자 이 섬을 대섬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섬에는 오동나무 열매를 따 먹으러 많은 봉황새가 찾아오곤 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이곳에서 오동나무를 찾아 볼수 없다. 까닭인 즉 일개 사비의 아들로 태어나 왕의 사부가 되었고 진평후란 봉작까지 받은 고려 공민왕조의 요승 신돈에 의해 벌채 당했다는 얘기다. 풍수설에 능했던 신돈은 전라도라는 전(全)자가 사람(人) 밑에 임금(王)자를 쓰고 있는데다 그 땅의 남쪽 여수라는 곳에 절경의 오동도가 있어 서조인 봉황새가 드나드는 것을 알고는 불길한 예감을 했다. 필시 기울어가는 고려왕조를 맡을 인물이 전라도에서 나올 징조만 같았다.
그는 공민왕에게 이 같은 사실을 귀뜸하여 사람 자 밑에 쓴 전라도는 들 입(入)자 밑에 임금왕자를 쓰도록 하고 봉황새의 출입을 막기 위해 오동도의 오동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리도록 했다 한다. 그러나 결국 고려는 전라도 전주 이씨인 이성계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
그후 이곳에는 귀양온 한쌍의 부부가 땅을 개간하고 고기잡이로 살아갔다. 어느날 남편이 고기잡이를 나간 틈에 들도둑이 들었다. 혼자 들일을 하던 어부의 아내는 집에 있는 것을 모두 내놓았으나 몸까지 요구하므로 달아나다가 붙잡히게 되자, 남편이 돌아옴직한 동남쪽 낭떠러지에서 투신자살했다.
날이 저물무렵 섬에 돌아오던 어부는 낭떠러지 밑에서 떠오른 아내의 시체를 발견했다. 어부는 사랑하는 여인을 이 섬의 정상에 묻었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만의 세월이 흐르자 그 묘에 여인의 절개를 나타내듯 신이대와 동백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오동도에는 오동나무 대신 동백나무가 많이 번져 눈보라속에서도 그 꽃을 피우기 때문에 여심화라고도 부른다는 것이며 여기에서 자란 신이대는 임진왜란때 군용화살대로도 많이 쓰였다 한다.
이 여인의 묘는 현 등대가 들어선 자리에 있었고 그 부근에는 수절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낙하암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또, 이섬 남쪽 암석동굴에는 오맥년 묵은 지네가 살고 있었다 한다. 이 지네는 날씨가 흐리면 기다란 촉각만을 밖에 내놓고 있어 이 섬에 해조를 채취하러 가는 아낙네들은 이 동굴을 지네굴이라 하여 접근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처음으로 이 섬에 해조를 채취하러 왔던 여인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그 동굴 가까이 접근했다가 머리가 쌀겨만한 지네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실신 졸도했다. 이 소식을 듣고 남자들은 배를 타고 몰려가 여인을 구하고 밤낮 사흘동안 불을 피워 연기를 그 동굴속으로 흘려보내 지네를 잡았다.
그후부터는 다시 지네를 볼 수 없었다 한다. 이같이 숱한 전설을 안고 있는 오동도는 절개의 여심화처럼 언제나 여수의 자랑이 될 것이고 우리의 마음과 몸을 살찌우는 보배섬으로 길이 남게 될 것이다.
토끼와 거북이
오동도는 억새풀에 얽힌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도 있다.
옛날에 자산에 살던 토끼가 오동도를 구경하고 싶었다. 바닷가에 나가 거북을 만난 토끼는
"나를 오동도 구경 시켜주면 좋은 보물을 주겠다"
라고 꾀었다.
우직한 거북은 토끼의 말을 믿고 오동도 구경을 시켜주었으나 토끼의 약속은 이행 되지 않았다. 거북은 화가 치밀어 토끼를 오동도에 실어다 놓고 가죽을 홀랑 벗겨 버렸다.
이때 이곳을 지나던 토신(土神)이 토끼 꼴을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어 오동도 억새풀 에 가서 뒹굴라고 일러주었다. 토끼는 토신이 일러준대로 억새풀밭에서 뒹굴었다.
껍질이 벗겨졌던 몸에 억새풀이 달라붙어 토끼는 옛날보다 더 고운 옷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토끼는 이때부터 거짓말은 꺼녕 참말도 할 수 없도록 벙어리가 되고 말아 오늘날도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왕비의 한
백여년전만 해도 날씨가 흐리고 파도가 치는 밤이면 성산 어느곳에서 가냘프게 흐느끼는 여인네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흔적이 사라진채 비바람에 허물어진 성돌만 이끼에 쌓여 있다.
여수시 경호동 내동마을 사람들은 오랜 옛부터 전해오는 동네 앞산 성터에 얽힌 전설을 이렇게 요약한다.
때는 6백여년전 점차 국운이 기울던 고려말 어느해 였다. 이곳 내동 마을앞 해발 1백여미터 성산에는 어디선가 광대의 미모를 지닌 여인 하나가 수많은 시종을 거느라고 와 외롭게 살았다. 시종들은 무리를 나누어 한무리는 성산뒤쪽 평지에 커다란 대궐을 짓고 토 다른 한 무리는 부근 해변과 산지 주변에서 커다란 돌을 구해와 21미터 높이의 성을 쌓아 올렸다.
바람결에 들려온 소문에는 이곳 섬에 정착한 미모의 여인은 왕비(후궁?)이고 그밖의 시종들은 조정의 신하들이라 했다.
그들이 이곳으로 쫓겨온 사연은 어느날 왕비가 지존한 어전에서 부지중 실수로 방귀를 뀌는 무례를 범하는 바람에 청천벽력같은 귀양을 받고 유배된 것이라고도 했다. 이후부터 왕비는 축성된 성내 4천 5백여평의 탕을 갈아 춘하추동 갖가지 씨를 뿌리고 거두어 차차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왕비의 억울함과 슬픔은 뼈를 아프게하는 찬서리로 굳어만 갔다. 고독과 회한으로 얼룩진 가슴을 겉잡을 수 없었던 왕비는 당시 조정에 나아가 관용의 은혜를 간곡히 진언했으나 번번히 묵사로 돌아갔다.
어쩔 수 없는 슬픈 운명을 안고 되돌아온 왕비는 유배당시 뱃속에 담고왔던 태아를 분만했다. 옥동자 였다. 갓 태어난 달덩이 같은 왕자를 본 왕비는 슬픔과 기쁨이 엇갈리는 야릇한 심사를 꾹 눌러야 하는 숙명위에 내동댕이 쳐야만 했다.
이제 세상에 나온 왕자에게는 '법충 여'자를 쓰는 자신의 서인 함양 여씨를 성으로 주었다. 여 왕자는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자라나 이웃 규수와 혼인하여 종족을 번창케 함으로써 이곳 여씨의 시조설을 낳게 했다.
이와같은 이야기가 왕비성이 숨기고 있는 전설이다. 일명 여정 당산성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성터는 여수 구항에서 뱃길로 서남 5킬로미터, 육로로는 경호동 외동마을 도선장에서 남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내동마을 앞에 놓인 성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옛날 성안에 있던 대궐은 간데없고 대궐터와 대지는 모두 밭으로 변해 있다. 다만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2킬로미터에 이르는 허무러진 석성의 잔해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 왕비의 억울한 사연을 안타깝게 여겨 성터에 그의 추모비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50여년전 일제에 의해 비다져 없어졌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곳에서 번성한 여씨 일족은 현재 40여 세대가 본토에 남아 있을 뿐 그밖의 30여 세대는 여수와 여천을 비롯한 기타 등지로 흩어져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