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은숙 시 모음 30편
☆★☆★☆★☆★☆★☆★☆★☆★☆★☆★☆★☆★
《1》
5월 수채화
임은숙
흩어지는 라이라크향기 속에
옛 생각이 어지럽다
꽃이 피어 기쁜가
잎이 지어 슬픈가
어차피
오고가는 인생의 섭리
5월의 언덕에서
안타까이 그대를 부를 때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낙엽이 흩날리고 있었음을
귀에 익은 휘파람소리
들리는 것 같아
자꾸만 뒤돌아보는 그 언덕에
때 아닌 찬바람만 서성이고
가녀린 가지 위에 두툼하게 내려앉은 꽃은
말없이 꽃잎만 떨어뜨린다
메마른 가슴에
뚝뚝
떨어져 퍼지는 보랏빛물감
다시 봄이 간다
☆★☆★☆★☆★☆★☆★☆★☆★☆★☆★☆★☆★
《2》
가면
임은숙
내 속에
나를 감추고
세상을 마주한다
어쩌면 모두는
천성적으로 어둠을 즐기는
족속
겉모습 하나로
모든 걸 단정 지을 수 없는
세상 속의 우리
내일 또 다시
한 장 베일로 세상을 현혹하더라도
오늘은
내 시선 끝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너의 옷을
벗기고 싶다
그리고
나도 벗고 싶다
☆★☆★☆★☆★☆★☆★☆★☆★☆★☆★☆★☆★
《3》
갈대 숲
임은숙
떠나간 너의 환영인 듯
갈대 숲 사이로
몽환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낯익은 너의 모습
사랑한다, 속삭이던 너의 고백이
바람 되어 내 귓가를 간질이고
떠나간다, 눈물짓던 너의 모습이
빗물 되어 내 눈가에 매달리고
파도처럼 밀려갔다 밀려오는
너와 나의 사랑얘기
별이 되어 갈대 숲에 내려앉는
너와 나의 지난 얘기
나를 울린다
☆★☆★☆★☆★☆★☆★☆★☆★☆★☆★☆★☆★
《4》
고독의 시
임은숙
별 같은 환상만으로
순간의 희망을 안고 내일로 가기엔
슬픔의 깊이만큼이나 진한 고독을 짊어져야 합니다
하나씩 잃어가며 얻어지는
작디작은 빛들은
가슴 떨리는 아픔의 대가입니다
그대가 나에게
내가 그대에게
사랑한다 속삭이며 뜨겁게 포옹하는 날까지
우리는 식은 차 한 잔과 스산한 바람의 대화를
수없이 엿들어야 합니다
밤기차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올 때
그대의 따스한 음성은 늘 내 귀가에 머무르고
슬픈 듯 흐느끼는 뻐꾸기울음소리
내 그리움이 되어 그대 창을 두드리고
하나씩 밀려왔다 다시 멀어져가는 하얀 밤이
잎새 끝에 매달려
새벽이슬 같은 여운을 남깁니다
☆★☆★☆★☆★☆★☆★☆★☆★☆★☆★☆★☆★
《5》
그대가 아니라도
임은숙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봄바람이 그토록 좋았던 건
그대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름 모를 새소리
음악처럼 들리고
꽃잎 안고 흐르는 강물이
그토록 눈부신 것도
그대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대가 아니라도
봄은 충분히 아름다운 것을
노래하기 위해 태어난 새와
얼음 밑에서도 흘러야만 하는 강
그대로가 운명인 것을
예고 없이 왔다가
몇 방울의 눈물을 기어코 거두어가는
붉은 계절의 쓸쓸함도
그대와는 무관한 자연의 섭리인 것을
굳이 그대가 아니라도
세상은 충분히 아름다운 것을
☆★☆★☆★☆★☆★☆★☆★☆★☆★☆★☆★☆★
《6》
그리움의 강 사이 두고
임은숙
잠자는 시간동안의 헤어짐도 못내 아쉬워
충혈 된 눈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우던
투정 많은 그 여자
그 여자에겐
스치는 바람의 흐느낌도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가을 들녘도
감동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움의 강을 뛰어넘어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기는 것이야말로
그 여자의 가장 절박한 소원이었기에
짧기만 한 통화시간 고무줄처럼 늘이지 못해
가느다란 전화선만 애꿎게 집어 뜯던
심술쟁이 그 남자
그 남자에겐
반짝이는 네온사인사이로 오가는 연인들의 속삭임도
자정 지난 노천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애달픈 사랑노래도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기다림 저편에 쓸쓸히 자리한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는 것이야말로
그 남자의 가장 절박한 바램이었기에
그리움의 강 사이 두고
달 밝은 이 밤도 처절한 몸부림으로 서로를 부르는
그 여자 그리고 그 남자
☆★☆★☆★☆★☆★☆★☆★☆★☆★☆★☆★☆★
《7》
그리움의 반란
임은숙
그대의 차가운 빈자리가
내 가슴에 시커먼 구멍을 뚫습니다
새삼 그대와 나 사이의
허물래야 허물 수 없는 그 벽의 존재로
가슴 한편이 싸하니 시려옵니다
예기치 못한 슬픈 상황마저도
무가내로 견뎌야만 하는 무기력함이
나를 슬픔에로 몰고 갈 때
그대 정녕
너 사랑한다 외칠 수 있는 겁니까!
새벽녘 풀잎에 맺힌 한 방울 이슬처럼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내 사랑을 그려보며 그 두려움에
사뭇 떨리는 몸짓으로
이 밤 차거운 달빛과 마주앉았습니다
☆★☆★☆★☆★☆★☆★☆★☆★☆★☆★☆★☆★
《8》
그림자
임은숙
차가운 별 하나 창을 기웃거리는 시간
당신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뜨거운 기도의 눈물이 됩니다
아주 옛날 당신과 알지 못할 때의
나의 슬픈 방황을 떠올리며
어둠의 터널 속에서 손잡고 허덕이는
우리를 봅니다
당신과의 작은 사랑이 큰 행복 되어
그제날의 아픔이 빛바래어져가는 지금
나는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밤이면 모습을 감춰야만 하는
참으로 슬픈 그림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오늘이 행복이라는
숙명의 만남이기에 우리는 언제까지고 하나라는
당신의 그 한 마디에 내 전부를 걸고
오직 한 사람의 슬픈 그림자가 되어
이 밤도 찬별로 밤하늘에 자리합니다
☆★☆★☆★☆★☆★☆★☆★☆★☆★☆★☆★☆★
《9》
기억의 숲에 바람이 일면
임은숙
세상은 우리를
만나게 하고 아프게도 하지만
그 안에서 너와 나는
지울 수 없는 기억의 끈을 잡고
서로에게 미소를 짓기도 한다
익숙한 산책길에
어느 날 문득 깔렸던 낯선 느낌은
아쉬움이라는 이름으로
가슴 깊이에 심어졌다
그 씁쓸한 허허로움은
너의 부재가 가져다준 어둠 때문이었을까?
다시
하나의 작은 그림자 되어
투명한 몸짓으로
형체 없이 흔들릴 나를 향해
저만치 바람이 차겁게 미소를 짓는다
☆★☆★☆★☆★☆★☆★☆★☆★☆★☆★☆★☆★
《10》
기억의 저편
임은숙
홀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행복이
외줄기슬픔이 되기까지
다시
그 슬픔이 지독한 미움으로
내 안에 자리하고
그 미움마저 빛이 바래어
무심한 눈길로 세상을 마주하게 되기까지의
수많은 낮과 밤
어둠을 적시던
별의 눈물과
깡그리 비워내지 못한 미련의 공허
주저앉고 싶었던
먼 길과
눈을 감지 않아도 이어지는
긴 어둠 속에서
얼마큼의 방황을 거듭했던가
꽃이
피고 지는 사이
얼마큼의 밤을 하얗게 지새웠던가
먼 곳에 바람이 분다
내 안에 꽃이 핀다
☆★☆★☆★☆★☆★☆★☆★☆★☆★☆★☆★☆★
《11》
꼭두각시인생
임은숙
곧게 가라기에
에돌며 헤매지 않았고
욕심을 버리라기에
손에 쥐어진 것조차도 망설임 없이 놓아버렸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
지금에 와서 뒤돌아보니
희미한 발자국마저 남아있지 않다
나무그늘에 앉아
나는 새들의 날갯짓이라도 흉내내볼 걸
봄 한철
여러 꽃의 향기라도 알아둘 걸
텅 빈 손에
텅 빈 속에
텅 빈 머리
내 것이 없다
곧게 가란다고
욕심을 버리란다고
무심히 흘려보낸 세월
그렇다할 아픔 한 조각마저 내게는 없다
☆★☆★☆★☆★☆★☆★☆★☆★☆★☆★☆★☆★
《12》
꽃이고 싶다
임은숙
한 송이
꽃이고 싶다
향기로 너에게 닿아
바람의 입으로 그리움을 속삭이는
너를 위한 꽃이고 싶다
내 생각 속에
둥지를 틀고 있는 너의
찰랑이는 기쁨이 된다는 건
지친 일상에 작은 위로가 된다는 건
벅찬 행복이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리움으로
너의 마음에 잔잔한 평화가 찾아든다면
내일도 오늘 같은 향기로 너를 부를 것이다
맑은 날
어디선가 들려오는 사랑노래에
조용히 귀 기울이는
한 송이 꽃이고 싶다
☆★☆★☆★☆★☆★☆★☆★☆★☆★☆★☆★☆★
《13》
꽃잎이 지고 있습니다
임은숙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오렌지빛 노을이
슬프도록 아름답습니다
긴 그림자 하나 품은
오월의 숲길이
텅 빈 듯 가득 차있습니다
사랑도
꽃처럼 피었다 지는 것임을
미움도
때가 되면 꽃잎처럼 흩날리는 것임을
그대
다시 꽃처럼 피었는데
길 잃은 내 마음은
향기조차 느낄 수 없습니다
어깨 위에
수없이 내려앉는 꽃잎이
간절한 그대 부름인 줄 알면서
이토록 쉬이 외면하는 지독한 무심함이
낯설지만 퍽이나 자연스럽습니다
가장 찬란했던 내 생의 순간순간이
시간이 파놓은 세월구덩이에
꽃잎처럼 쌓이고 있습니다
☆★☆★☆★☆★☆★☆★☆★☆★☆★☆★☆★☆★
《14》
나를 찾아서
임은숙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었다
이토록 모진 어둠 속에
나를 가두는 건 나 자신이었다
바람 같은 자유를 원했지만
바람처럼 소탈하지 못했고
마른 꽃잎처럼 부서지는 환상에
수많은 불면의 밤을 건너야 했다
세월의 그릇 안에
수북이 담긴 기억은
시도 때도 없이
낯선 그리움 속을 헤매게 했다
한없이 달리고 싶은
어설픈 충동
새벽이 오면 나는 떠나야 하리
밤을 지새운
별 하나 친구하여
잔디의 깊은 잠을 깨우며
이제 떠나야 하리
☆★☆★☆★☆★☆★☆★☆★☆★☆★☆★☆★☆★
《15》
낙화의 계절
임은숙
더 깊게
사랑하게 하소서
바람 따라
어디론가 한없이 밀려가는 사유
그대가 있어
고독이 짙은 계절
처음이라는 말보다
마지막이라는 낱말에 뭉클해지는
가을에는
더 큰사랑을 하게 하소서
뜨거운 날
미처 하지 못한 얘기
단풍잎에 붉게 새기며
먼 기억 속을 서성이게 하소서
落花도 꽃이런가
떨어지는 것과 이별하는 것들을
사랑이라 이름하여
눈물 같은 어제를 떠올리게 하소서
☆★☆★☆★☆★☆★☆★☆★☆★☆★☆★☆★☆★
《16》
내 아픈 사랑
임은숙
모든 것을 예감하고 시작하지 않았던가요?
함께 하는 시간보다
떨어져 그리워하는 시간이 많을 줄 알고
시작한 우리 만남 아니던가요?
손잡은 기쁨과 행복보다
외로움과 서글픔의 量이 더 많을 줄 알고
시작한 우리 사랑 아니던가요?
기다림으로 가슴이 가맣게 타서 재가 될 줄 알고
시작하지 않았던가요?
그러나
지금에 와서 아픕니다
바람처럼 스치는 연인들 그림자만 봐도 슬픕니다
따스한 찻잔 마주하고도
차가운 빗줄기 속에 서있는 듯 쓸쓸함에
눈물이 흐릅니다
내 사랑은 모든 걸 이겨나갈 거란 각오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지금은
아픕니다
슬픕니다
못 견디게 그대가 보고 싶습니다
☆★☆★☆★☆★☆★☆★☆★☆★☆★☆★☆★☆★
《17》
눈사람의 하얀 꿈이
임은숙
매서운 바람이 스치고 지난 거리에
조용히 어둠이 깔리고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짙은 어둠 속을 두리번거리지만
종일 생각 속에 머문 그대는 이 시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움의 무게만을 더해주는 차거운 계절을 탓하며
어딘지 모를 곳으로 정처 없이 달리는
열차의 뒤꽁무니에 바람처럼 매달려봅니다
그렇게라도 그대에게 닿고 싶은 마음입니다
긴 밤이 시작되는 길목
종이부스러기처럼 흩날리는 눈꽃을 기다립니다
머리 위에, 어깨 위에 하얗게 눈이 쌓여 작은 눈사람이 된 나를 봅니다
변함없이 한자리에서
새벽을 기다리고 아침을 맞이하고 또 하루를 보내며
먼지바람 속에서도 오직 하나의 하얀 순정으로
그대와의 봄을 꿈꾸며 추위에 주저앉지 않는 눈사람이 된 나를 봅니다
긴 추위를 인내한 한 송이 매화꽃이 화사하게 미소를 지을 때
싱그러운 초록의 입맞춤에 한 줄금 환희를 숨 가쁘게 토해내며
간지러운 햇살 앞에 기지개를 켜는 작은 풀잎처럼
나, 그대 가슴에 투명하게 녹아버릴 것입니다
뜨거운 그대의 혈관 속으로 봄이 되어 흐를 것입니다
☆★☆★☆★☆★☆★☆★☆★☆★☆★☆★☆★☆★
《18》
둥지
임은숙
안아주는 것보다
안기는 것에 길들여지고
내어주기보다
받는 것에 익숙했었다
네 안에
내 집을 짓고서
나는 왜
너의 집이 되지 못했을까
하늘에 살고 있는
별처럼
반짝이기라도 할 것을
바람을 이고 사는
나뭇잎처럼
미소라도 보내줄 것을
서로에게 닿는
마음의 길을 버려 두고
기대려고만 하는 나에게
언제면 너의 둥지가 만들어질까
☆★☆★☆★☆★☆★☆★☆★☆★☆★☆★☆★☆★
《19》
마음과 마음 사이
임은숙
구름과 구름사이
나무와 나무사이를
멋대로 나드는 바람조차도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는
마음과 마음사이 거리는
믿음과 진실에 있다
멀리 있어도 지척인 듯
믿음과 진실만으로
수많은 계절을 묵묵히 견디는
그 드팀없는 인내
새벽녘 홀로 듣는 빗소리에도
투명한 하오의 햇살 속에도
따뜻한 그대 안부가 있다
☆★☆★☆★☆★☆★☆★☆★☆★☆★☆★☆★☆★
《20》
멈춘 것이 아니야
임은숙
네가 떠난 뒤로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것만 같았지
그리움도
기다림도
그때 그 자리에
굳어버린 것만 같았지
홀연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음성 하나
멈춘 것이 아니야
이렇게 쌓여가잖니
사랑이
펑펑 퍼붓는
저기 저 흰 눈이 하는 말
☆★☆★☆★☆★☆★☆★☆★☆★☆★☆★☆★☆★
《21》
바보들의 사랑이야기
임은숙
내 작은 마음하늘에
눈부신 햇살이 가득한 날이나
구질구질 비 내리는 어두운 날이나
그대는 늘 함께였습니다
싱그러운 미소로, 뜨거운 포옹으로
가끔은 가을나무의 쓸쓸함으로
그대는 늘 함께였습니다
가슴 가득 느껴지는 행복사이로
살포시 고개를 내미는 아픔
그대의 미소로 지워버립니다
그대의 포옹으로 녹여버립니다
어느 날엔 큰 산 같은 그대에게 기대여
작은 새처럼 그대를 의지하기도 하고
어느 날엔 많이 힘들어 보이는 그대한테
내 작은 어깨 내어주기도 합니다
세상 끝까지 함께 가야 할 그대
힘든 사랑 앞에 안쓰러움으로 서로를 바라보기도 하지만
우리에겐 무엇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미래가 있다고 믿으며
숙명의 오늘을 사는 바보, 그대와 나입니다
☆★☆★☆★☆★☆★☆★☆★☆★☆★☆★☆★☆★
《22》
사랑이 상처가 되지 않도록
임은숙
밀려오는 그리움에 잠시 모든 걸 잊고
하염없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변 모든 것이 좀 전과 다를 바 없는데
내 마음은 왜 순간적으로 떨리는 걸까요?
소리내어 그대를 부르고 있습니다
별일 없는 거지요?
그리고 잠시
세차게 뛰는 마음 진정합니다
노랗게 타들어 가는 나의 그리움이
그대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목마른 나의 기다림이
그대 어깨에 무게를 더하지 않도록
커져만 가는 나의 사랑이
우리의 내일에 상처가 되지 않도록
너무 그리워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처럼 내 마음에 자유를 주어야겠습니다
☆★☆★☆★☆★☆★☆★☆★☆★☆★☆★☆★☆★
《23》
아름답게 빛날 모든 것에
임은숙
슬픔이라 부르지 않겠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이 뜨거운 것을
눈물이라 이름하지 않겠습니다
외로움이라 부르지 않겠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 쌓이는 어둡고 무거운 것을
고독이라 이름하지 않겠습니다
그대 사랑하며 가는 길에 나에게 주어진
하나의 과제라 믿겠습니다
기쁨이라 하겠습니다
설렘이라 하겠습니다
행복이라 하겠습니다
그대와 사랑하며 가는 길에 만나는 모든 것에
아름다운 이름 붙여주기로 하겠습니다
그대로 하여 못난 내가 빛나듯
어둡고 무거운 모든 것에
밝은 이름 붙여주기로 하겠습니다
우리 사랑으로 빛날
세상 모든 것에
☆★☆★☆★☆★☆★☆★☆★☆★☆★☆★☆★☆★
《24》
외로움의 미학
임은숙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이 감정을
외로움이라 불러봅니다
이젠 나에게서 이 외로움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장미의 가시처럼 아름다운 우리 사랑에 틈틈이 박혀있는 아픔을 통해서
성숙으로 치닫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또 그대를 떠올립니다
그 누군가가 나에게 아픔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것
나 또한 그 누군가에게 하나의 안쓰러움으로 되어버린다는 것
한숨과 함께 어설픈 미소를 지어봅니다, 참으로 외로울 것 같은 내 표정 위에
이른 아침 눈이 떠짐과 동시에 시작되는 내 그리움처럼
깊은 밤 벙어리 별들과의 하염없는 내 속삭임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뚜렷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우리의 사연 하나하나가
이 시간도 외로움이라는 실체 안에 안개꽃같이 무수한 꽃들을 피웁니다
한바탕 웃음 뒤에 눈가에 맺히는 눈물처럼
격렬한 운동 뒤에 따르는 한동안의 숨고르기처럼
짜릿한 환희의 순간에서 이어지는 가슴 아픈 현실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힘듦조차도 우리의 숙명이라는
이미 그대와 나의 사랑일기 중에 자주 등장하는
글귀로 되어버린 한마디 말이
때론 그대의 음성으로, 때론 나지막한 나의 중얼거림으로 되어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부단히 속삭여주고 있습니다
늘 나와 똑같은 생각으로 똑같은 시간 위를 걷고 있을 그대를 떠올리며
이 외로움이 결코 우리에게서 멀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이 외로움이 있기에 긴 꿈속 같은 우리 사랑이
현실이라는 종착역에 들어서게 될
하나 또 하나의 찬란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
《25》
우리 외롭지 않을 때까지
임은숙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치유 못할 아쉬움이 커져만 갑니다.
해질 녘 노을 속에 곱게 누워
잠재우고픈 그리움입니다.
수많은 약속들에 매달려 흐느끼는 하나
또 하나의 무기력함은
노랗게 타들어 가는 기다림의 하루에
촉촉한 그리움을 그려줍니다.
지나가는 모든 것이 아쉬운 시간
다가오는 모든 것이 두려운 시간
그 시간 앞의 나는 후줄근한 모습으로
창 밖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뭘 하고 있는지 뭘 해야 할지를
모르는 어설픈 움직임이
가끔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불안으로 다가옵니다.
바람의 한숨이 귓가를 스칩니다.
사랑을 하고 있다고, 깊은 사랑을
아픈 사랑을 하고 있다고 속삭입니다.
너만이 힘든 것이 아니라고,
너보다 힘든 이들이 많다고
그렇게 속삭입니다.
적어도 그리움이 있지 않냐,
그것마저도 없는 이는
얼마나 슬퍼해야 하느냐고 울먹입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른 시간에 떠오른 별 몇몇이
새삼 반가운 척을 합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오래잖아 저들도
아름답게 빛날 수 있다고 눈을 깜박입니다.
언젠가는 지금의 슬픔보다 곱절 큰 행복 안에서
숨 쉴 수 있을 거라며 살짝 윙크를 보내옵니다.
나에게만 속하는 고요한 새벽, 바람이 차갑습니다.
☆★☆★☆★☆★☆★☆★☆★☆★☆★☆★☆★☆★
《26》
우리가 가장 가까이 있을 때
임은숙
우리가 가장 가까이 있을 때가
언제라고 생각해
이름 모를 꽃향기 그윽한 숲길 따라
두 손 맞잡고 거닐 때
타는 노을이 아름다워
서로의 눈가에 맺히는 이슬 닦아주던
감격의 시간
두텁게 쌓인 흰 눈 위에
선명한 흔적 남기며
까르르 웃을 때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함께임을 설명하기엔
지극히 충분하지만
진실로 우리가 가장 가까이 있을 때는
너와 나,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잊고 있을 때야
네 속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네가 있는 안정된 시간 속에서
지평선 저 멀리
너와 내가 닿게 될 우리만의 낙원을 꿈꿀 때
그때가 바로
너와 나 가장 가까이 있을 때야
☆★☆★☆★☆★☆★☆★☆★☆★☆★☆★☆★☆★
《27》
이별에는 완성이 없다
임은숙
새벽이 오기 전까지의
따분하고 무의미한 시간들에
커다란 날개를 달아 등을 떠밀고 싶은 충동
여명전의 고요
수십, 수백, 수천 번 반복되는 무기력한 몸짓
희미한 새벽빛 속으로
아침이슬이 살포시 눈을 뜨면
비로소
툭툭 털고 일어나 어둠을 뒤에 남기고 나는 떠나겠지요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낯선 시작의 길에
스치는 바람에게 어수룩한 미소 보이며
다시 언젠가처럼 눈망울에 두려움을 담겠지요
움츠릴수록 더더욱 파고드는 가슴 시린 바람의 사연은
안 그래도 울고 싶은 나에겐 통곡의 이유가 되겠지요
시간이 흘러 어둠 걷힌 아침공기에
심한 갈증을 느끼며 두리번거리는 내 모습이
위태롭게 찬거리를 서성일 때
다가와 잡아주는 손길이 있겠지요
햇살처럼 눈부신 나의 여름이겠지요
찰랑찰랑 물소리가 들리는 사랑이겠지요
슬프도록 아름다운 오렌지빛 노을을 향해 걸어가겠지요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는……
☆★☆★☆★☆★☆★☆★☆★☆★☆★☆★☆★☆★
《28》
조각달
임은숙
화려한 어제를 잊지 못해
고운 눈망울에 슬픔을 매달았나
꽃이 피고 지고
계절이 가고 오듯이
돌고 도는 세상사
영원은 존재하지 않는 법
기쁨 뒤엔 슬픔이요
슬픔 뒤엔 평화
문득문득 찾아드는 아픔에
뒤따르는 선택은
끝없는 인내와 무기력한 주저앉음
이제
슬픔은 치워요
어차피 지나갈 어둠인데
이왕이면 웃으며 가요
☆★☆★☆★☆★☆★☆★☆★☆★☆★☆★☆★☆★
《29》
중년의 그대에게
임은숙
잠 못 이루던 그대의 어느 새벽에 대하여
멀어져간 그대의 어느 가을에 대하여
나는 아는 것이 없네
푸릇하던 그대의 젊은 날에 대하여
뜨겁게 타오르던 그대의 사랑에 대하여
나 또한 아는 것이 없네
하지만
새소리 맑은 숲길에 그대가 흘린 긴 한숨과
반백의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체념의 눈빛은
분명 듣고 보았네
그대 눈빛이 말하네
물처럼 흐르는 거라고, 돌아오지 않는 거라고
우리네 인생 그런 거라고
그대 눈빛이 말하네
곧게 가라고 뒤돌아보지 말라고
그렇게 사는 거라고
☆★☆★☆★☆★☆★☆★☆★☆★☆★☆★☆★☆★
《30》
집착은 괴로움
임은숙
나에 속한 그 어떤 물건에 한해서
지나친 욕심을 부리다보면 즐거움이란 있을 수 없다
항상 그것을 지키느라 팽이처럼 바삐 돌아쳐야하니
그보다 큰 괴로움이 또 있을까
지어는 물건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사람에게까지
내 것이기에, 나의 소유인데 하는 쓸데없는
집착에 빠질 때가 있다
나 모르게 엉뚱한 일을 벌이고 다니는 건 아닌지,
연락 올 시간도 지났는데... 하다보면
따스한 차 한 잔 마주하고 여유 있게 책 읽을 시간마저도 없다
삶의 여유를 즐겨보자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이에게
좀 더 자유의 시간을, 자유의 공간을 주어
마음껏 나래 펼칠 수 있게,
그리고 자신에게도 마음의 여유를 주어
보다 폭넓은 세상과 마주하도록 하자
☆★☆★☆★☆★☆★☆★☆★☆★☆★☆★☆★☆★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