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 유키나가(일본어: 小西行長こにし ゆきなが,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1555년 ~ 1600년 음력 10월 1일) 는
일본상인(商人) 출신의 무장(武將) 겸 정치가(政治家)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끼던 장수였다.
당시 대조선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장인이자 가토 기요마사와 앙숙 관계였다.
그의 종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이며, 그의 부장이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를 비롯한 그의 휘하 책사를 포함하여
병사들의 다수 역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였다.
생애 군에서의 출세
본래 사카이(堺)출신의 약재 무역상(藥材 貿易商)인 고니시 류사(小西隆佐)의 아들로 그 자신도 상인이었다.
본명은 고니시 야구로(彌九郎)였으며 1559년생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우키타 나오이에의 가신이 되어, 주로 외교 사자로 일했다고 한다.
우키타 나오이에가 하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통해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할 때에도 히데요시와 교섭했다고 한다. 우키타 나오이에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다.
도요토미 정권의 후나부교로 임명되어 수군을 통솔했다
규슈 정벌과 히고 고쿠진 잇키에서 전공을 세워, 히고 태수 삿사 나리마사 할복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히고 남부우토, 야시로, 마시키 3군 20만석을 받았고, 우토(宇土) 성을 새로 쌓아 본거지로 삼았다.
히고국 우토(宇土)성
성을 쌓을 때 동원한 아마쿠사 제도의 다섯 고쿠진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가토 기요마사의 도움을 받아 토벌해 아마쿠사 4만 석도 고니시의 영지가 되었다.
한편 삿사 나리마사 할복 후 같은 시기에 히고 북부 25만 석을 받아 다이묘가 된 가토 기요마사와는
이후 사이가 갈수록 나빠졌다.
로마 가톨릭 교회 신앙
독실한 기독교인인 고니시는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
그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로마 가톨릭 교회신도였다.
그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의 진중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했었고,
밤마다 미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후에 시마바라 봉기의 진원지가 된다.
한편 고니시의 영지와 인접한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에서는
열렬한 니치렌 종 신자인 가토 기요마사가 로마 가톨릭 교회 신도를 탄압하였는데,
이를 피해 고니시의 영지로 달아난 로마 가톨릭 교회 신도들을 고니시가 보호해주면서,
종교로 인해 서로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야욕을 감지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을 막고자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宗 義智), 나가사키 반도의 작은 다이묘들인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鎮信),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 고토 스미하루(五島純玄)와 승려 겐소(玄蘇)를 이끌고,
가토 기요마사에게 보란 듯이 18,700명으로 구성된 조선 침공 선봉대 제1군의 지휘관으로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하였다.
견원지간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진격하여 국경인 등의 반란 덕분에 임해군등을 생포하며, 커다란 야전을 치루지 않은 것에 비해,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진성과 다대포진성, 동래성을 함락하고, 서울을 가장 먼저 점령하여 참전 무장 가운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특히 기요마사는 보급을 무시한채 함경도로 계속 진격하여 정문부에게 각개격파 당하였고,
여진족에게 완패 당한 것에 비해,
유키나가는 평양성을 함락한 이후,
보급 문제와 명나라 원군에 대한 부담을 걱정하는등 가토 기요마사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유키나가의 걱정대로 명나라의 개입과 이순신의 남해 제해권 장악,
그리고 각지에서의 의병의 활약으로 인한 보급문제로 인해 더 이상 진격을 못하고 지체하던 중 조명연합군에 패해 쫓겨났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토 기요마사와는 달리 이시다 미쓰나리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에 힘썼는데,
가토 기요마사가 이를 두고 '고니시가 조선에서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불만을 터트렸다고도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애용하던 무기는 거대한 검이었는데,
그것을 들고 있으면 적병들이 공포에 질려 감히 나서질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