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슬포 고산항
.....................차귀도...................
차귀도천연보호구역(遮歸島天然保護區域)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산34번지
면적 6.72㎢ , 천연기념물 제422호 .천연보호구역.
.
2000년 7월 18일 천연기념물 제422호 지정.
차귀도는 고산 해안으로부터 1㎞ 떨어져 있는
무인도로 제주도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하는 섬.
차귀도 주변에는 지실이섬, 누운섬 등 무인도가 분포.
동서 길이 920m,
남북 길이 430m
동서로 길게 형성.
면적은 155,861㎡.
2개 봉우리로 이루어졌다.
최고봉의 표고는 61m이다.
차귀도는 주로 응회암으로 구성
고산 해안에 위치하는 수월봉과 같이
수성화산활동으로 형성된 하이드로볼케이노.
hydrovolcano는 분화 시 마그마가 외부 물과 접촉.
강력한 폭발을 일으킴으로써 만들어지는 화산체이다.
분화 중심은 섬 남쪽에 위치하는
장군바위 근처일 것으로 추정한다.
응회암이 분포하는 섬 동쪽에는 해식애
단애면 해식동굴과 벌집구조 타포니 출현.
섬 서쪽에 스코리아(scoria)
스패터(spatter)와 용암류가 분포
지질 구성 물질에는 차이를 보인다.
섬 만입부에 자갈해안
사빈은 나타나지 않는다.
차귀도는 본래 대나무가 많아 죽도(竹島).
호종단(胡宗旦) 전설로 섬 이름이 바뀌었다.
전설에 따르면 제주도의 산천이 뛰어나므로
인재가 많이 태어나 중국에 반기들 것을 우려.
송나라 장수 호종단이 제주도로 건너와서
섬의 지맥과 수맥을 모조리 끊고 다녔다.
이후 송나라 호종단이
배 타고 서쪽으로 돌아갈 때
매로 변신한 한라산 수호신이
돛대 위에 앉아 돌풍을 일으켜
배를 침몰시킴으로써 호종단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
하여, 차귀(遮歸)라 부르게 되었다.
차귀도에는 125종 식물이 자생하나
섬 대부분 띠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수심 5∼10m의 차귀도 해역에는
홍조류가 많이 서식하고 있는데,
기는비단잘룩이· 어깃꼴거미줄·
나도참빛살잎 등 미기록종 발견.
아열대성 홍조류의
분포역(分布域)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고산 자구네 포구에서 배로 10분 걸리는
차귀도에는 1977년까지 2가구가 있었고
섬 동쪽에 차귀포의 흔적도 남아 있으나
1978년부터 무인도로 분류되고 있다.
석양이 아름다운 곳으로서,
수월봉에서 차귀도 쪽으로
바라보는 일몰을 예로부터
월봉낙조(月峰落照)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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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장수 호종단이 제주도
지맥과 수맥을 끊고 다녔다는
전설은 탐라가 원 직속령으로
100년간 있었을때 일로 추정된다.
본디, 탐라는
예나 지금이나
식량 자급자족이
안되는.,자연환경.
가뭄때 부족한 식량은
송나라로부터 구했을듯.
.
5 ~10세기 백제·중국·일본 등과 국제교역.
탐라국을 기반으로 했던 제주의 정치체제.
탐라국은 ‘섬나라’라는 의미로서,
섬에 위치하여 오랫동안 독자적인
국가 형태로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
원나라 직속령 탐라국은
송나라에게 위협적인 존재.
송나라 장수 호종단 전설로 보아
탐라 군사력이 강했던듯 여겨진다.
...................송나라........................
송(宋, 960 ~ 1279)은 중국의 옛 왕조이다.
황실 성씨를 따라 조송(趙宋)이라고도 부른다.
1127년 금나라 확장에 밀려 장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 임안(항저우)에 도읍을 옮긴 이후를 남송
원나라에게
멸망 당한다
북송·남송 모두 합쳐 송 왕조라고도 한다.
수도는 개봉, 실질적인 수도는 임안(臨安)이다.
세계 최초 지폐발행, 상비 해군을 설치한 최초 왕조.
문치주의 국가로 사대부 사명 의식이 있었다.
또한 철권폭정을 하지 않고 문화 정치를 폈다.
발전된 괭이 농기구로., 쌀과 보리 이모작 확대.
새로운 농업으로 인해 북송시대 인구는 약 1억명.
송나라는 예술, 사상 및 각종 실용기술 발달.
문화적으로 풍요롭던 시기였으며 제지, 인쇄술,
시민경제의 발흥으로 인해 이때까지 일부 관료,
귀족에게 독점되던 문학, 미술, 음악, 사상 등이
시민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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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종단 전설'
'단지, 전설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호종단.........................
호종조(胡宗朝),고종달,광양왕(廣壤王)
고려 전기 귀화한 송나라 복주인(福州人)이고,
고려에서 15년 동안 관리 생활을 했던.,풍수사.
태학(太學)에 입학하여 상사생(上舍生)이 되고,
저장성(浙江省)에 있다가 상선을 타고 고려에 귀화.
예종의 후한 대접으로 1111년(예종 6) 좌우위녹사
권지직한림원(左右衛錄事 權知直翰林院)·
우습유지제고(右拾遺知制誥)에 발탁되었다.
1126년(인종 4)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궁궐에 난입한 척준경(拓俊京)의 군사를
설득하여 무기를 버리게 하였다.
예종 때에 탐라에 들어와
지기(地氣)를 눌렀다 전하는
신비스러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탐라의 지기를 누른 다음 해로로 돌아가는데,
한라산 산신 동생이 죽어서된 신이 매로 변해
돛대머리에 날아오른 잠시 후 북풍이 크게 불어
호종단 배를 부수고 비양도 바위 사이로 사라졌다.
조정에서 그 신령스러움을 포상해
식읍을 주고 광양왕(廣壤王)으로 봉하고
해마다 향과 예물을 내려주어 제사지냈는데,
조선시대에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광양왕 설화는
여러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호종단이 지기를 눌렀다는
이야기는 다양한 형태를 띠지만,
하나의 유형으로 간주될 만큼 옛부터
제주의 많은 마을에서 들을 수 있는 설화.
그러나 『탐라지(耽羅志)』를 지은
조선 효종 때의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은
“호종단은 고려에 벼슬하여 기거사인에 이르러
죽은 사람” 그에 대한 전설은 근거없는 말이라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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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은 고려 제17대 왕.
1109(예종 4)∼1146(인종 24).
1122년 4월 15세로 왕위에 올랐다.
1126년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최사전, 척준경을 시켜 난을 진압.
이자겸을 잡아 영광으로 유배시켰다.
호종단은 실존인물이지만
전설은 인종 재위.,이전의 일.
차귀도는 제주도에 속한
무인도 중 가장 큰.,규모.
베일 속에 휩쌓인 수수께끼
역사를 가장 많이 품고 있다.
언제 생성되었는지도.,불확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가늠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신비함이 가득한 섬.
해적섬이었을까?
왜구 본거지였을까?
'차귀도 ~ 비양도'
해역을 활동무대로
육지와 제주를 오가는
조운선을 털었던 무리가
기습 목적으로 잠복했던 섬.
해적들은
고대 한중일
국제 무역선들도
약탈을 자행했으리라.
.
차귀도.
...............비양도..............
차귀도에서 멀지 않은.,비양도.
2002년 7월에 생성연도.,1002년.
섬 탄생 1000년 기념비’를 세웠다.
이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
“1002년(고려 목종 5) 6월에 산이
바다 한가운데서 솟았다. 산에 4구멍이
터지고 붉은 물을 5일 동안 내뿜고 그쳤다”.
일본인 지질학자가 이때 탄생한 섬을
비양도라고 확인한 것을 바탕으로 하나
그 섬이 차귀도 부속섬이란 논란도 있다.
현재, 비양도 해녀는 20여 명 남짓.
과거에는 여수, 거제도, 고군산군도,
흑산도 바다 등지에 출가하기도 했다.
비양도 해녀만 전복, 소라, 미역 채취 가능.
그런데 이곳을 제외한 비양도 바다는 인근
9개리 해녀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어장이다.
이것은 설촌(設村) 이전부터
인근 마을해녀들이 비양도 바다
어장에서 작업해온.,전통에 기인.
비양도에도
주민들의 믿음 터로
술일당과 포제단이 있다.
‘펄랑’(염습지)이 시작되는 곳에 포제단.
포제는 유교식 의례로 정월 보름날에 지낸다.
술일당에서는 해마다 영등굿을 한다.
사철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삼고 있으며,
지전(紙錢)·물색(物色)·
명사(命絲) 등을 걸어놓고 있다.
당신(堂神)으로 ‘종남머리 술일한집’을 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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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귀도
차귀도
차귀도 고등어 낚시.
차귀도 해역은 아열대성이 가장 강한 지역으로
5~10m 수심에는 아조대 미세홍조식물이 자라며,
섬과 인근 바다에 한국 미기록 종들이 다수 발견된다.
........차귀도 수중생태 학술가치 No1..........
차귀도 천연보호구역 수중생태 모니터링 결과
우리나라 미 기록종과 신종 생물이 새롭게 발견될
특성을 지닌 학술가치가 가장 높은 지역으로 조사된 곳.
쿠로시오 난류 영향을 가장 먼저 받는 곳으로
서식 동식물이 다양하고 아열대성이 강한 지역.
.
차귀도 천연보호구역에 출현한 어류는 73종으로
쏨뱅이, 놀래기 등 정착성 어종과 아열대 어종인
쏠배감펭, 줄도화돔,청줄돔, 범돔, 거북복 등이다.
해조류는
녹조류 14종(15.6%),
갈조류 29종(32.2%),
홍조류 47종(52.2%)
총 90종이 관찰됐다.
특히 유용 해전 자원인 감태,
넓미역, 갈래곰보, 미역 등도
양호하게 자생하는 것으로 조사.
저서동물은 해면동물 19종, 자포동물 52종,
유형동물 1종, 태형동물 13, 연체동물 53종,
환형동물 11종, 절지동물 16종, 극피동물 17종,
척삭 동물 7종 등 189종 서식지역으로 나타났다.
해양생물자원으로 가치가 높은
큰수지맨드라미, 분홍바다맨드라미 등
연산호류가 점차 확산되고 있는 곳으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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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러 무인도 중 자태가 빼어난 차귀도.
손에 잡힐 듯 바다에 잠긴 모습이 주는 당당함.
송나라 호종단이 중국에 대항할 형상이라던 섬.
그래서, 이 섬의 지맥과 수맥을 끊어 놓고 돌아가려
하는데 갑자기 한라산신이 날신 매가 되어 날아와서
이들이 탄 배를 침몰시켰다 하여 명명된 지명 차귀도.
본섬이 죽도와 오돌 지실섬으로 이뤄진 차귀도.
특히, 해질 무렵에 석양이 연출하는 풍경이 장관.
또한 바다 낚시터로 널리 알려진 바다낚시의 천국.
현재 소관탈도와 마당바위 하선이 금지되었지만
대관탈도 무수한 돌돔자원은 낚시꾼들의 천국이며
차귀도. 형제섬, 가파도, 지귀도, 마라도는 벵에돔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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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관내 유선은 도두항과 고산항에서 운항
도두항 배는 제주크루즈호 414톤에 350명이 승선.
고산항 유람선은 비너스 1호와 파라다이스 1호가 있다.
비너스 1호는 잠수유선으로 잠수함 형태이다.
파라다이스 1호는 잠수유선에 승객수송 유선.
잠수유선 무게 13톤이며, 48명이 승선할 수 있다.
파라다이스 1호는 29톤이며 48명이 승선할 수 있다.
도선은 비양도와 우도를 왕래하는 배들이다.
'한림~비양도' 비양호 19톤이며 44명이 승선.
우도 가는 도선은 성산에서 가는 배.
종달리에서 가는 배 두 종류가 있다.
우도에서 성산을 왕래하는 배는 도항선이라고 한다.
'우도~ 성산' 배의 경우 주민은 무임 탑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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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사랑 1호와 우도사랑 2호는
2004년 2월에 건조되어 상태 양호.
우도사랑 1호와 우도사랑 2호 모두
무게는 325톤, 447명 승선할 수 있다.
또한 우일호는 57톤에 95명이 승선,
우일 카페리호는 120톤 135명 승선.
덕일 페리호는 87톤이며 81명 승선.
우일 페리호는 153톤에 293명 승선.
무인도 차귀도
제주도., '섬속의 섬' 차귀도
차귀도 일몰.
고산항
.....................고산항(高山港)........................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1리' 지방어항.
역사적으로 고려 때 중국인 풍수사 호종단(胡宗旦)의
귀로를 막았다는 전설이 전하며 여몽 항쟁기 고려 관군과
몽고 연합군이 상륙하여 삼별초군과 해전을 벌였던 포구이다.
고산항 해안에는 당시
전사한 유골 1,000여구가
묻혀 있다는 ‘천개동산’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왜적을 물리쳤던 격전장이었으며
일제때 제주민들이 일본 여객선을 타던 항구이다.
고산항 절벽 굴속에는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 해군이
사용했던 쾌속정의 격납고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광복 이후 고산항은 다른 항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설이 낙후.
1950년 세워진 고산항 건설 계획은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좌절되었으나 이후
고산항 방파제는 차귀도 해상에 몰려드는 각종
어선대피, 지선 어업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건립 계획.
고산항 방파제 시설 규모는
차귀도 장개돌목에서 생이섬까지
총 103m 규모였으며, 1967년 4월 28일
103m 중 1차로 65m에 대한 기공식이 개최.
기공식은 부지사 고산리 출신 강성준을 비롯
여러 기관장, 한경면 민어촌계원, 남녀 학생
등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1968년 5월 2차로
38m의 방파제 축조에 착공
1973년에도 방파제를 축조하였다.
고산항은 당초 북제주군에서 관리하였으나
1999년 12월 30일 제주도 고시 제1999-51호에 의거하여
제2종 어항으로 지정됨에 따라 제주도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2000년 10월 고산항에 대한 시설 계획을 수립하여
어촌의 복합 기능을 갖춘 다목적 기능의 어항으로
개발하기 위해 고산항 개발 사업에 착수하였다.
고산항에 대한 전체 시설 계획은
방파제 406m, 물양장 130m, 선착장 261m
총 51억 1200만 원이 투입될 계획이었다.
2005년 12월 1일 「어항법」이 폐지되고
「어촌·어항법」이 제정됨에 따라 고산항은
제2종 어항에서 지방어항으로 변경되었다.
고산항은 항내 남측 100m 지점에서
서쪽 방향으로 30m, 북쪽 방향으로 440m,
동쪽 방향으로 180m 이동하여 육지와
접한 선내 수역을 어항 구역으로 한다.
고산항은 제주도 서부 해상 차귀도 ‘앞개’에 위치한 항구로
우리나라 연안에 적을 두고 있는 각종 저인망 어선 및 건착선,
기타 계절에 따라 각 도에서 어로 차 먼 바다에서 작업을 하다
돌풍이 휘몰아칠 때 잠시 대피하는 기항 및 대피항이기도 하다.
연간 최고 기온은 33.1℃,
최저 기온은 -3.5℃,
연평균 강수량은 1,200㎜,
연평균 강우일은 131일이다.
조위는 최고 만조위 2.712m,
평균 해수면 1.356m,
소조 평균 간조위는 0.754m,
대조 평균 간조위는 0.434m.
고산항은 차귀도 앞을 중심으로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썩은섬·생이섬·화단섬·지 실이섬.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눈섬 등을 육지와 연결한 수역의 자연 항구이다.
2005년 현재 항내수 면적 75㎢,
방파제 228m, 물양장 70m, 선착장 261m
총 24억 5300만원 투자되어 개발계획 48%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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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차귀도(遮歸島) 공도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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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飛揚島)·우도(牛島)·
상추자도(上楸子島)·하추자도·
횡간도(橫干島)·가파도(加波島)·
마라도(馬羅島) 등 8개의 유인도와
54개 무인도로 이뤄진.,제주특별자치도.
54개 무인도 중 하나.,차귀도(遮歸島).
제주특별자치도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 1리에 속하는 섬
한경면 용수리와 용당리에서 보이는 차귀도는 상여 모양이다.
차귀도를 앞마당처럼 둔 2마을은 대가 끊길까봐 혼인하지 않는다.
교통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을때
도서지역의 혼인은 섬 안에서 마을 간
이뤄졌으며 멀리 간다고 해야 이웃 섬마을.
용수리 포구 좌우 방사탑을 사이에 두고
여인이 아이를 배에 올려놓고 누운듯한 섬.
차귀도 앞에 있는 섬은 '누운섬' 와도(臥島).
'와도'는 섬 이름 중 가장 흔한 이름이다.
화산도 이건 대륙도 이건 대부분 누운 형상.
예를 들면, 전라도 영광에도 '누운섬'이 있다.
차귀도 곁에 여인이 누워있는듯한.,섬.
일제시대 '누운섬'을 '눈섬'으로 부르면서
그 '눈섬'은 다시 '설도(雪島)'가 되어 버렸다.
차귀도는 인근 바다가 사나워 조난사고가 많아
시신들이 곧잘 마을 포구로 들어와 이곳 주민들이
'이곳에 액을 막기 위해 방사탑을 쌓았다.' 전해온다.
...........방사탑(防邪塔).................
용수마을에는 포구 밖 ‘새원’이라는 곳.
‘화성물’이라고 불리는 곳에 각 1기씩
2기의 방사탑이 세워져 있다.
남쪽과 북쪽 탑 모두 바닷물이 닿은 암반 위에 위치.
탑 위에는 긴 돌을 세워 놓았다. 돌은 새부리 모양과
흡사한 것들인데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탑을 ‘답’ 혹은 ‘고장섬’이라 부르는데 이로 인하여
마을에 재앙이 없다고 믿고 있다.
바다쪽인 서쪽이 풍수지리상 허하여
신원을 알 수 없는 송장이 밀려들어와
남쪽과 북쪽에 각 1기씩 쌓게 되었던 것.
용수마을 북쪽에 위치한 탑은 ‘새원’이라는
원이 있는 곳에 있어 ‘새원답’이라고도 한다.
바닷가 암반 위에 원통형으로 쌓아 놓았다.
(높이 370㎝, 밑지름 500㎝, 윗지름 260㎝).
쌓음돌은 현무암 잡석인데, 대략 다듬이 되어 있다.
쌓음 방법은 허튼층쌓기, 속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다.
탑위에 높이 100㎝, 너비 60㎝ 길쭉한 새머리 모양의 돌.
긴돌을 세워 놓았으며 방향은 서쪽인 바다를 향하고 있다.
남쪽에 위치한 또 다른 탑은 속칭 ‘화성물답’.
탑의 남쪽에 화성물이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
탑은 바닷가 암반 위에 원통형으로 세워져있다.
현무암 자연석을 대충 다듬질하여 쌓음돌로 이용.
허튼층쌓기를 하였으며 속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다.
높이 340㎝, 윗지름 220㎝, 밑지름 490㎝이다.
탑 위에는 높이 105㎝, 너비 80㎝ 정도의 긴 돌.
새 부리 형상이 서쪽 차귀도와 바다를 향해 있다.
북쪽 새원탑과 500m떨어져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
1995년 8월 26일 제주도민속자료
제8-8호와 제8-9호로 지정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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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탑은 마을 어느 방위에 불길한 징조가 보이거나
어느 한 지형의 기(氣)가 허한 곳에 쌓아두는 돌탑으로,
부정과 액을 막아 마을을 평안하게 하려는 신앙의 대상물.
이는 제주가 원나라 지배 하에 있었던.,몽골의 풍습.
이곳에 방사탑을 쌓을 만큼, 선박의 왕래가 잦았던듯..
올레길 7코스
차귀도.
차귀도와 관련된 설화 중에도 이곳 바다가 워낙 사나워
'중국으로 돌아가던 배가 간혹 침몰하였다.'고 전해온다.
썩은섬(서건도)
아무래도 설화 내용이 모두 허구만은 아닌 것 같다.
고산리 자구내 포구에서 보아 가장 큰 섬.,대섬(竹島).
그 외에도 북쪽에 와도, 남동쪽에 썩은섬 및 지실이도 등
이들 모두를 일컬어 차귀도라고 부른다.
차귀도를 포함해 고산리 일대는 1970년대
김기영 감독이 만든 영화 '이어도'의 주무대.
영화 이어도- 촬영지.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선사유적..........
한반도 최고 선사시대 유적지로 추정되는.,제주 고산리.
2만3098㎡에 대한 중간 조사 결과, 시굴, 수혈 유구, 야외 노지,
석기 제작장, 80기 유구, 고산리식 토기와 다양한 타제석기가 확인.
2012년 문화유산연구원 관계자 “고산리 유적.,'시굴 ~ 발굴' 결과.
신석기시대 초기 유구와 함께 같은 시기 유물 조합을 확인하는 계기."
“특히 고산리식 토기와 함께 타제석기가 동반 출토되는 주거지는 처음.
한반도 최고 신석기시대의 주민 집단취락을 논할 수 있는 학술적인 자료.”
협재해수욕장 해안선 따라 조금 남쪽.,수월봉.
2010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제주도는 바다와 산, 사람과 말 소 동식물 등.
어디에서나 '돌'을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리고 수많은 신화와 전설에 '돌'은 꼭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영실의 오백장군
그리고 차귀도 장군석 이야기일 것이다.
<제주도전설>(서문당)에는 이렇게 소개.
"옛날에 설문대 할망이 아들 오백형제를 거느리고 살았다.
어느 해 몹시 흉년이 들었다. 하루는 먹을 것이 없어서
오백형제가 모두 양식을 구하러 나갔다.
어머니는 아들들이 돌아와 먹을 죽을 끓이다가
그만 발을 잘못 디디어 죽 솥에 빠져 죽어 버렸다.
아들들은 그런줄 모르고 돌아오자마자 죽을 퍼먹기 시작.
여느 때보다 정말 죽 맛이 좋았다.
그런데 나중에 집에 돌아온 막내 동생이
죽을 먹으려고 솥을 젓다가 큰 뼈다귀를 발견
직감적으로 어머니가 빠져 죽은 것을 알았다.
막내는 어머니가 죽은 줄도 모르고 그 죽을 먹어치운
형제들과는 함께 못살겠다면서 차귀섬 바위가 되어버렸다.
차귀도 장군석.
막내가 장군바위가 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형들
이것을 본 형들도 여기저기 늘어서서 날이면 날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다가 바위로 굳어진 것이.,오백장군.
한라산 영실 500장군 산수도.
설문대 할망이 삽으로 일곱번 흙을 파서 던진 것이 한라산이요,
'한라산의 기생화산' 300여 오름이 그녀의 나막신에서 떨어진 흙.
서해 어민들의 안전한 고기잡이와 풍어를 관장하는 개양할미
서해 그 어딜 들어가도 발목을 넘지 못하고 깊어야.,무릎 아래.
제주도의 전설과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지니는 특징들이다.
차귀도 쌍둥이바위.
차귀도 병풍바위
차귀도의 형성과 관련된 전설은 따로 있다.
비양도도 그렇지만 제주도도 섬의 형성만 아니라
다양한 신화와 전설에 중국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등장.
'인근 모슬포가 그당시 국제무역항이었던.,증거.'
"기원전 진나라에서 제주도는 장수가 날 지세라 하여
지맥을 자르기 위해 지관 '고종달'을 진시황이 보냈다.
그는 제주 지리서를 갖고 서쪽으로 가며 지맥을 끊었다.
남제주군 안덕면의 산방산의 부근까지 다다랐다.
용의 형상으로 지리서에 왕과 장수가 날 곳이라 하여
용의 잔등을 끊자 잔등에서 피가 나와 주변을 물들였다.
그렇게 제주도 맥을 끊은 '고종달'을 태운 배가
다시 진나라로 돌아 가려고 차귀도 앞을 지날 때
어디선가 날쌘 매 한마리 다가와 배를 침몰시켰다.
차귀도 매바위
한라산 산신의 노여움으로
태풍을 만나 죽게 된 것이다.
조정에서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그의 신령을 모신 곳이 차귀도였다.
그리고 '고종달'이 제주도 지맥을 끊고
진나라로 돌아가는(遮) 길을 차단(歸)했다
하여, 그 섬을 차귀도(遮歸島)라 했다고 한다."
차귀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다.
처음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고산리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1980년대 중반까지는
일곱 가구가 보리, 감자, 콩, 수박, 참외 농사를 지으며 거주.
1960년대 후반부터
국가에서 차귀도 사람들을
제주 본섬으로 이주시키려 했었다.
1968년 김신조 등 무장간첩 침투 이후
섬 주민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었기 때문
그렇지만 삶의 터전을 쉽게 버릴 수 없었던 주민들.
1980년대까지 차귀도에 사람들이 드나들며 살았다.
결국 국가에서 제주 본섬에 거처를 마련한 후.,이주.
고려 조정은 그 대비책으로 두 가지 대안을 내놓았던 것.
섬을 방비하도록 하여 섬을 개발하자는 제안.
서남해 치소를 모두 내륙으로 이동.
섬 주민들도 강제로 육지로 내보냈다.
섬을 비우는 정책.,공도정책(空島政策).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 이후라고 한다.
하여, 도서지역 족보를 보면 오래된 성씨라야.,양란 전후.
전란을 피해 섬으로 피신한 양란이 남긴 흔적들.
관리들이 빠져 나간 섬이야말로 민초들에게는 지상낙원.
그래서, 몰래 섬으로 들어가 고기도 잡고 농사도 지었다.
'왜선들이 은박함'이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 몽골도 똑 같은 외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조선왕조 실록으로 제주도 실정을 이해하긴 어렵다.
바다의 눈으로 섬을 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한 가정은 제주도민을 더욱 화나게 하는 말이다.
제주 해풍에 말린 오징어가 울릉도 그것보다 못지않다.
고산리에서 배를 타면 배 주인이 낚시까지 제공해준다.
새우 미끼를 바늘에 끼우고 바다에 넣기만 하면 바로 손맛.
한 두어 시간에 10여 수는 금방 올릴 수 있다.
그쯤이면 배주인은 뱃머리를 돌려 포구로 향한다.
'차귀도 배낚시'에서의 백미(百味).
선상에서 갓 잡아 회를 떠서 먹는 맛.
죽도에는 1957년 12월부터 빛을 발한 무인등대가 있다.
차귀도 등대는 어둠을 감지하고 자동적으로 불을 밝힌다.
사람의 손을 덜 타서인지 귀한 식물이 많이 자라는 차귀도.
학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곳곳에 집터자리와 말방아 흔적들이 남아 있다.
강태공들이 많이 찾는.,차귀도.
현재 있는 것을 잘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
제주도에는 머리에 피도 안마른듯 앳된 땅들이 있다.
비양도 1000년, 송악산 3500년, 성산 일출봉 5000년 나이.
1400만년전에 출현한 바다코끼리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섬.
46억년 지구 역사 상에서 생명체는 35억년 전쯤 출현.
4000만년 전에는 개구리 등 양서류가 지구를 주름 잡았다.
거북이와 악어는 공룡이 멸종했던 6500만년 전부터 생존.
차귀도는 언제 태어났을까? 자구내 포구에서 2㎞. 배로 7분.
제주도는 2010년 유네스코 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차귀도는 수월봉과 함께 대표적인 지질 명소로 꼽힌다.
차귀도 선착장이 있는 포구의 모래는 검은색을 띠고 있다.
단단한 게 있고, 가스가 많아 구멍이 숭숭 뚫린 돌도 있다.
차귀도는 화산섬이라 돌들도 바위도 기기묘묘하다.
단단하게 보이는 붉은색 현무암, 검은 색 현무암도 있다.
마그마 속에 가스가 차 있고 없고에 따라.,다른 모양.
선착장에서 우물터 지나 벽만 남아있는 집터가 나온다.
제주도에서 구로시오 난류의 영향을 맨 처음 받는 지역이다.
1970년대 말 정부가 간첩 사건 등을 이유로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집들이 사라진 자리에 연자방아 돌판 만.
그리고, 그후 섬은 억새 천지로 바뀌었다.
해녀콩은 못 먹는데도 크고 신기해서 탐방객들이 많이 따가요. ”
섬모퉁이 탐방로에서 해안절벽 송이동산이 보이는데,
유독 붉은색을 띠는 것은 현무암이 산화했기 때문이다.
검은 해변과 붉은 절벽이 대조적인 송이동산 앞.,장군바위.
차귀도 장군바위.
세계유산한라산연구원 전용문 박사의 이야기.
화산 분화구가 가장 많은 곳이 차귀도.
분화구가 4~5개 있는 걸로 추정됩니다.
장군바위가 있는 지역이 바로 분화구이죠”.
차귀도 생성 연대는 2만년 전 이상으로 본다.
최근 조사에서는 1만 4000년 전 쯤으로 추정된다.
한반도나 제주도 전체에서 보면 ‘갓난 섬’이라고 할 수 있다.
지형이 특이하여 차귀도(遮歸島) 이름도 전설에서 붙혀졌다.
진시황이 보낸 호종단이 지맥과 수맥을 끊으려 했다.
중국으로 귀환하는 뱃길을 막은 섬이라 하여 차귀도(遮歸島).
장군바위는 설문대할망의 500 아들 중 막내.
바위 절벽에 있는 등대 앞은 바람이 세다.
저멀리 바다 건너에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제주가 아름다운 이유는 땅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뼛속까지 다르다.'에 비유하면 땅속까지 다른.,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