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월25일 [연중 제3주일]
마태오 4,12-23
인공지능 시대에 종교가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해답
찬미 예수님!
최근 유튜브에서 화제가 된 영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제목이 섬뜩합니다.
“5년 남았다.” 챗GPT나 제미나이보다 훨씬 강력한 범용 인공지능(AGI)이 등장하면 인류의 직업 대부분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이제 인간이 지능으로 AI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의사, 변호사, 예술가, 심지어 코딩하는 개발자까지, 우리가 ‘선망’하던 직업들이 가장 먼저 대체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처음엔 많은 실업자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일할 필요가 없는 세상, 국가가 기본소득을 주어서 그것으로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돈이 돌아야 인공지능 회사도 운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유토피아일까요?
미국의 인디언 보호구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부가 엄청난 보조금을 주며 일하지 않게 만들자, 그들은 그 돈으로 술과 마약에 빠져들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절체절명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물을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인간인 것 빼고 우리보다 잘하는 게 뭐가 있어?”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은 결코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습니다.
특별히 생명을 탄생시키고 사랑하는 일에서는 인공지능은 인간 앞에서 무력합니다.
인공지능 아이가 인간의 자녀가 되려고 하나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영화 ‘A.I.’나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 아이의 엄마가 되려고 하나 그럴 수 없는 ‘마더’라는 영화는 묻고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살길을 명확히 제시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더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AI가 더 잘합니다.
예수님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AI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인공지능은 정보를 줄 수 있어도 자신을 희생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은 희생의 고통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려는 사명을 주십니다. 사명은 창조자가 주시는 것입니다.
존재의 목적은 만들어진 것만 가질 수 있고 그 만드신 분만 해답을 가지십니다.
‘사람 낚는 어부’란 ‘하느님 자녀를 낳는 존재’란 뜻입니다.
물고기 잡는 존재라는 자기 정체성으로는 AI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제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직업을 찾으면 안 됩니다.
그런 직업은 결국 다 대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AI와 경쟁할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려는 사명 의식을 가지면 AI를 이용하게 됩니다.
일론 머스크를 봅시다.
그는 창조자를 믿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은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구가 인류에 의해 파괴될 것을 생각하여 그는 인류 문명을 화성으로 옮기고자 합니다.
낮에는 타죽고 밤에는 얼어 죽는 물도 공기도 없는 그런 곳에 어떻게 인류를 가게 하고 살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는 물고기 잡아서 돈을 버는 삶 대신, 인류를 구하려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자 인공지능의 경쟁자가 아닌 인공지능을 빨리 만들어서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는데 도움을 받으려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비할 수는 없지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는 인공지능에 대체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저도 인공지능이 빨리 더 발전하기만을 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고 싶은 것은 ‘하.사.시.’를 인공지능으로 영화로 만드는 일입니다.
머지않아 가능할 것 같고 그래서 제대로 번역하려고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홍익인간의 사명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창조자를 믿지 않으면 목적을 묻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로마 시대처럼 흥청망청하다가 자신도 망하고 세상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창조자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여기서 ‘만들겠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원어는 ‘포이에소(Poiēsō)’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쓰신 단어입니다.
즉, “흙먼지 같은 너희를 빚어 나의 신성(Divinity)을 지닌 자녀로 재창조하겠다”는 뜻입니다.
창조와 사명은 함께 갑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나를 만드신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만이 AI와 경쟁하지 않고 오히려 AI를 이용하는 존재가 됩니다.
1429년,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침략으로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군은 최신식 장궁과 압도적인 화력을 갖춘반면 프랑스군은 패배 의식에 젖어
오합지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돔레미 시골 마을의 문맹 소녀 잔 다르크가 나타납니다.
열일곱 살의 양치기 소녀가 덩치 큰 장군들과 거친 병사들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칼 한번 쥐어본 적 없는 계집아이 따위가 전쟁을 한다고?"
물리적인 힘으로만 따지면 잔 다르크는 병사 한 명도 이길 수 없는 약자였습니다.
만약 그녀가 병사들과 칼싸움으로 경쟁하려 했다면 1분도 안 되어 목이 달아났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인간이 계산 능력으로 AI와 경쟁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그들과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을 ‘지휘’했습니다.
그녀에게는 병사들이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프랑스를 구하라! 왕세자를 랭스로 데려가 대관식을 치르게 하라!"
그녀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믿었기에, 그 두려운 군대를 자신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그녀가 "나를 따르라!" 하고 깃발을 높이 들자, 살인 기계 같던 병사들은 거룩한 사명의 도구로
변했습니다.
잔 다르크는 무식한 병사들에게 고해성사를 보게 하고, 욕설을 금지시키며 그들의 야수성을 거룩한 용기로 승화시켰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사명을 가진 소녀가 힘만 센 군대를 도구로 사용하자, 불가능해 보였던
오를레앙 전투에서 승리했고, 결국 프랑스를 잉글랜드의 손아귀에서 구해냈습니다.
역사가들은 만약 그때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넘어갔다면, 훗날 잉글랜드가 성공회로 돌아설 때
프랑스 또한 가톨릭 신앙을 잃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 소녀의 사명이 프랑스의 영혼과 신앙을 지켜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힘은 압도적이고 두렵습니다.
우리가 지능으로 그들과 싸워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잔 다르크가 군대를 경쟁자가 아닌 구원의 도구로 썼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이 주신 ‘사람 낚는 어부’라는 사명의 깃발을 들고 AI를 지휘하면 됩니다.
사명이 없는 힘은 폭력이지만, 사명이 이끄는 힘은 구원이 됩니다.
잔 다르크가 깃발 하나로 군대를 움직였듯, 우리는 복음이라는 깃발로 AI 시대를 지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Poiēsō)”고 하신 것은, 우리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임을 믿고 걸음마를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AI와 경쟁하는 수준의 자존감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곧 하느님의 자녀를 낳는 존재로 만들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훈련하십시오.
이것만이 다가올 AGI 시대에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하고도 영원한 희망입니다.
하느님을 낳는 하느님이 되십시오.
사람을, 세상을 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복음 말씀은 로마 시대의 자기 정체성 혼란의 시대에 쓰였습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그 해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창조되었음을 받아들이십시오.
이런 사람만이 AI 때문에 죽지 않고, AI를 이용하며 살아남습니다.
아멘!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25일 [연중 제3주일]
복음: 마태 4,12-23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한 며칠 육지로부터 꽤 떨어진 섬에서 전문직 어부들과 지낸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조업을 나가기 위해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짙은 안개가 잔뜩 껴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날 출항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조금만 지나면 안개가 걷히겠지, 했었는데, 웬걸, 하루 온 종일 그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선장님은 “오늘은 종 쳤네!”하시면서 저보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배 한 쪽 구석 작은 공간에는 싱싱한 생선이 퍼덕이고 있었습니다.
큰 녀석으로 몇 마리 골라서 회를 떴습니다.
불도 피워서 소금을 뿌려가며 생선을 구웠습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화기애애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있지요.
됫병들이 소주를 배 밑에서 꺼내오셨습니다.
그날 저는 하루 온 종일 취해서 정신이 오락가락했었습니다.
거기 계셨던 어부들의 주량은 상상을 초월했었는데, 그래서인지 다들 코끝이 빨갰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첫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 야고보의 그의 동생 요한. 이 넷은 갈릴래아 호숫가 한 동네에서 고기를 잡으며 먹고 살아가던 어부들이었습니다.
당대 이스라엘에서 낙후되고 소외된 지역의 대명사였던 갈릴래아 지방, 그곳 출신이면서, 당시 지식인층이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도 아닌 어부 출신의 네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의 최측근 제자들, 당신 왕국의 가장 중요한 내각 구성 인물로 갈릴래아 출신 어부들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가난한 사람들, 약자들, 소외된 사람들을 가장 우선적으로 선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 눈여겨 볼 일이 있습니다.
그저 고기 잡은 일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던 네 사람이었습니다.
그들 삶의 폭은 너무나 좁았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실개천에 놀던 이런 어부들을 상상을 초월할 수 없이 큰 바다로 안내하십니다.
더 큰 가치관, 더 의미 있는 삶의 양식에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나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죄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보잘것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떵떵거리며 살 이유가 없습니다.
어깨 힘들어 갈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보잘것없는 사람임을 솔직히 인정하게 될 때 신기하게도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진실하게 고백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십니다.
우리가 별볼일 없는 사람임을 자각할 때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재미있는 일은 하느님께서 완벽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전지전능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련하기에, 우리가 안쓰럽기에, 우리가 죽어가기에, 우리의 결핍으로 인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끌어 안아 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 어떤 질문도 없이 그저 무상으로 우리를 당신 가까이 초대하십니다.
우리 역시 아무런 조건 없이, 그 어떤 질문도 없이 그저 감사하면서, 그저 행복해하면서 하느님의 초대에 성실히 응답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주일 강론>
(2026. 1. 25.)(마태 4,12-23)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4,12-23).”
1) 우리 교회는 ‘위령 기도’를 할 때 시편 130편을 바칩니다.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으니.
바로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시편 130).”
시편 130편을, 연옥 영혼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기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많은 경우에
기도하는 사람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는 기도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을 위한 기도’가 됩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또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또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슬픔 때문에, 또 ‘인생의 덧없음’ 때문에 영혼이 어둠 속으로 빠져들 때가 많습니다.
어떤 큰 사고나 큰 병이나 불행한 일이 갑자기 닥치면 눈앞이 캄캄해지기도 하고,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를 괴롭히는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답답함과 울적함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인생에 어둠은 전혀 없고, 온통 환하기만 하고,
완벽하게 행복하고 편안하기만 한 사람이 있을까?>
사실 인간은 누구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존재입니다.
그런 인간들을 향해서 마태오 사도는 “참 빛이시고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다.” 라고 선포하고 증언합니다.
신앙인은 그 증언을 믿는 사람이고, 빛이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참 생명의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2)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가 어둠 속에 있음을 부정하는, 또는 자기 안에 어둠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어둠 속에서 살다가 끝날 것입니다(요한 9,41).
또 빛이 아닌데도 빛이라고 착각하고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 세속의 권력이나 재물을 하느님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또 자기가 빛이라고 주장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선동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독재자들도 그런 경우에 속합니다.
3) 원래 1월 25일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둠 속에서 살다가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어둠에서 해방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박해자 사울’로 살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직접 그를 부르셨는데, 그는 예수님을
만난 뒤에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사도 9,9).
앞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그를 가두고 있었던
영혼의 어둠을 상징하고, 사흘은 자신이 얼마나 짙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는지를 성찰하고 깨닫고 회개한 시간을 상징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보내신 하나니아스에게서 안수와 세례를 받은 다음에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은 눈을 뜬 다음이었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눈을 뜬 사람이, 또 빛을 받아들이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하게 됩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서, 뜨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하고, 어둠 속에 있겠다고 고집 부리는 사람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