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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에 나온 기사 내용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충청도 사람들의 기질에 대해 재미있게 설명되어 있어서 이렇게 올려봅니다.
우리나라는 땅은 비록 좁지만 워낙 지구의 혈자리인 터라 각 지역의
땅과 그 땅에 사는 사람의 기질을 알아보는 것으로도 천하사 공부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삼아 보시기 바랍니다.
▶지리적 환경이 인격 형성에 큰 영향
그렇다면 충청도 표는 과연 누구에게 얼마나 갈 것인가. 이것을 예측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유는 역대 大選과 總選에서도 보여 주듯,
아무도 충청도 표의 方向을 쉽게 점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것은 여론조사가 가장 잘 맞지 않는 지역이라는 특징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쉽게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忠淸人 특유의 독특한 氣質(기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표의 방향을 짐작이라도 해보려면 먼저 忠淸人의 독특한 氣質이 어떤
것인가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란 태어난 지리적 환경과 부모, 친척, 친구를 포함해 성장기 주변의 인문적 영향에 따라 하나의 인격을 형성해 간다. 이같은 여건이 國家를 단위로 할 때는 민족성 또는
국민성으로 나타나며, 지역으로 좁혀 보면 지방의 특성 있는 氣質로
發顯(발현)하는 것이다.
지역색을 말할 때의 대전제는 민족성이나 국민성에 비하면 副次的(부차적)인 것이란 점이다. 「대개 그렇다」는 차원이지, 칼로 무자르듯
명백한 선을 긋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민족성이나 국민성도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것인데, 항차 지역색이겠는가. 하지만 나라나 민족마다 국민성이나 민족성이 분명히 존재하듯, 지역색도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충청도」는 본래 「충주」와 「청주」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명칭이다. 三韓(삼한)시대에는 馬韓(마한)의 영토였고, 삼국시대에는
百濟(백제)의 판도에 속했다가 신라 진흥왕이 漢江 유역으로 진출한
후에는 지금의 충북지역이 신라 세력권에 들었다. 三國統一의 원훈
金庾信(김유신) 장군이 충북 진천 출생이다.
공주·부여가 百濟의 수도가 되면서 충청도는 百濟의 중심지가 되었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통일신라 한가운데에 위치한 충주에 中原(중원) 小京(소경)이 설치돼, 中原이라는 이름의 시발이 됐다. 고려 성종(995년)때, 전국을 10도로 구분하면서 中原道(중원도)라 했고, 예종 1년(1106년)에 처음으로 충청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후에 楊廣(양광)으로 바뀌었다가 공민왕 5년(1356년) 다시 충청도로 이름을 되찾았으며, 역적이 나왔을 때 公洪道(공홍도), 公忠道(공충도)로 잠시 바뀐 적도 있으나 충청도라는 이름이 계속 이어졌다. 1896년 갑오경장 이후,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로 나뉘었다. 조선조
태종 때 여흥(여주), 안성, 음죽, 양성, 양지가 경기도에 移屬(이속)되고 경상도에서 옥천, 황간, 영동, 청산, 보은 등을 넘겨받았다.
전국이 8도로 나뉜 조선조 이후 만들어져, 민중 사이에 口傳(구전)돼
내려온 四字成語(사자성어)는 한 번쯤 음미해 볼 만하다. 이 成語는 각
지역 사람들의 성향을 네 글자로 비유해 놓고 있다. 함경도인을 泥田鬪牛(이전투우), 평안도인을 猛虎出林(맹호출림), 황해도인을 石田耕牛(석전경우), 경기도인을 鏡中美人(경중미인), 강원도인을 岩下老佛(암하노불), 경상도인을 雲天高鶴(운천고학), 전라도인을 風前細柳(풍전세류), 충청도인을 淸風明月(청풍명월)이라고 했다.
충청인 가리킨 淸風明月이 상징하는 것
조선조 숙종 때 사람 李重煥은 「擇里志(택리지)」의 「人心條(인심조)」에서 충청도 인심을 『권세와 이익에 쏠리는 경향이 짙다(專趨勢利ㆍ전추세리)』고 했다. 또 『산과 강이 평탄하고 아름다우며 서울의 남쪽 가까이 있어서 士大夫(사대부)가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는 지리적 여건과 함께 『서울의 世家(세가)들이 이곳에다 전답과 집을 두는 등 생활의 근거지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 풍습이 서울과
가까워서 별로 큰 차이가 없으므로 살 곳을 택하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인문적 여건을 덧붙이고 있다.
헌종 때 실학자 李圭景(이규경)은 「五洲衍文長箋散稿(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충청도 사람의 특징을 『湖西(호서ㆍ충청)는 이익과 권세를 노린다(勢利♥♥ㆍ세리장학)』고 평했다. 李重煥과 비슷한 견해다.
이같은 평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문제가 없지 않으나, 우리 조상들이 수천년을 두고 겪어 온 경험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무시할 수 없고,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충청인을 「專趨勢利」나 「勢利♥♥」이라 한 것은 이 지역이
조선조 후기 사회를 專橫(전횡)하다시피 할 정도로 많은 벼슬아치를
배출한 데 대한 부정적인 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충청인의 특징은 「淸風明月」이라는 成語 속에 비슷하게 녹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淸風明月이 상징하는 이미지는 「여유로움」과 「한가로움」이다. 충청도 사람들은 언행이 점잖다. 공손하다.
급하지 않다. 서두르지 않는다. 날카로운 면이 없다. 모나지 않다. 두루뭉술하게 아무하고나 잘 어울린다. 무덤덤하고 싱겁다. 미온적이고
소극적이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다. 그래서 온건 보수주의적 성향을 띠게 된다.
혹자는 이 지역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에서 中立, 無色 성향의 논거를
대기도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三國 鼎立(정립)시기에는 이 지역이 삼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친 곳이었다. 예컨대 충북 청주 上黨山城(상당산성)의 북쪽은 고구려였고 서쪽은 백제, 동쪽은 신라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충남 북부를 포함한 한강 일대의 경우, 백제 초기에는 백제 땅이었고, 고구려 전성기에는 고구려 땅, 신라 전성기에는 신라 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누구의 편임을 쉽게 드러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가졌든, 겉으로는 어느 쪽에도 고개를 숙이고 順應(순응)하는 척이라도 해야 생존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順應 잘 하는 기질 때문에 조선조 이후 최근까지 정부에서 어떤 정책을 시행하려면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전에 시범적으로 실시해 보는 곳이 충청도였다.
계산은 돼 있으면서 속을 보이지 않는다
충청인의 기질을 논할 때, 인용되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있다. 충청도
어느 시골의 5일장 장터에서 시금치, 고구마순 몇 다발, 고추 몇 무더기, 옥수수 몇 개를 길가에 늘어놓고 팔고 있는 사람과 사는 사람 간에
오간다는 대화다.
〈『이거 팔 거유?』
『그럼 구경시킬라고 갖고 나왔겄슈?』(예, 하면 될 것을 반드시 이렇게 표현한다)
『월매래유』
『알아서 주세유』(절대로 얼마라고 먼저 말하지 않는다)
『1000원 드리쥬』(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만일 값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훽 돌아앉으며)
『갖다 돼지나 멕일래유』〉
이 대화를 보면 팔려고 애쓸 것 없다는 느긋한 태도와 함께 속내를 쉽게 드러내 보이지 않는 충청도 사람의 기질을 잘 나타내고 있다. 마음속에는 계산이 다 돼 있고, 이 계산에 맞지 않으면 거래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미리부터 1000원 받으면 될 것을 1200원이나 1300원으로 에누리해서 값을 부르지 않는다는 점을 이 대화는 간접으로 말하고 있다. 에누리를 하면 깎아서 산 사람은 처음엔 싸게 샀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시간이 지나면 속아서 사지 않았나 의심할 수도 있다. 충청도 사람들은 그런 후유증을 남기는 거래를 하지 않는다.
무덤덤하고 속내를 잘 드러내 보이지 않는 충청인의 例話(예화)는 수없이 많다. 서울 관악구에서만 4選을 올린 민주당의 李海瓚(이해찬ㆍ충남 청양 출신) 의원이 趙淳씨 밑에서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할 때 그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관악구에는 전라도와 충청도 사람들만 찍어 주면 당선은 떼어논 당상이다. 두 지역 출신 유권자가 과반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전라도
사람들이 밀집해서 사는 곳에 가서는 『선생님(金大中 대통령을 지칭)을 따라다니는 이해찬입니다』하면 『와』하는 함성과 함께 『당신 찍어 줄 테니 걱정 말라』는 격려의 말이 쏟아진다. 자연히 마음이
느긋해진다. 다음 충청도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서는 『충남 청양 출신, 이해찬입니다』 그래봐야 반응이 없이 조용하다. 지지한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불안해진다. 그런데 개표한 후에 분석해 보면
시끌시끌하게 지지한다고 한 지역에서는 과반수의 지지표가 나왔고,
반응이 조용해서 불안하게 생각했던 지역에서는 70% 내외의 지지표가 쏟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충청도 기질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멍청」한 것 같지만 절대로 손해 안 봐
충청도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어리숙하게 보이는 점이다. 옛날부터
「서울 깍쟁이」가 충청도 사람들을 가장 좋아한다는 말이 있었다.
잘 속아 주는 어리숙한 기질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충청도 사람들이 항상 계산하지 않고 밑지는 장사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사귈 때도, 처음부터 이익을 보려하기보다
몇 번은 손해인 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한다. 인간이란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보다 손해를 보는 사람을 좋아하게 마련이다. 미안한 마음도 갖는다.
상대방이 미안한 마음을 가질 때쯤 해서 기회를 보아 가며 이쪽의 실속도 차린다. 그것도 큰 이익을 본다. 작은 손해를 여러 번 보고 결정적인 순간에 큰 이익을 봄으로써 前의 손해를 만회하고도 남는 지혜를 발휘한다. 「속도 창자도 없다」고 얕보다가 뒤통수를 맞는 셈이다. 충청도 사람을 겪어 보고는 「속에 구렁이가 열 마리는 들었다」고 할 정도로 혀를 내두르는 외지인도 많다. 하지만 대체로 상대방은
손해 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종전에 속아 준 것을
감안해서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잘 속아 주는 기질 때문인지 충청도를 가리켜 흔히 「멍청도」라고
한다. 他稱(타칭)일 뿐 아니라 自稱(자칭)도 「멍청도」라 한다. 하지만 「멍청도」 소리를 하면서, 그리고 들으면서 결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멍청한 사람에게 「멍청이」라고 하면 기분이 나쁜
법이지만, 멍청하지 않은 사람에게 「멍청이」라고 해서 기분 나쁠
일이 없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양쪽 다 진짜 멍청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大義名分(대의명분)을 잘 따지는 것도 이 지역의 뚜렷한 특징이다. 이익을 전혀 도외시하지는 않지만 명분과 이익이 부딪칠 때는 주저 없이 명분을 택한다. 명분을 따지다 보면 대체로 실속을 차리기 힘들다.
당장의 불이익도 감수해야 할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실속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것도 「멍청한」 기질에서 기인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 됨됨이가 돼먹지 않았다는 의미의 「못된 놈」이라는 욕을
가장 듣기 싫어한다. 자존심과 자부심을 훼손하는 내용이기 때문일
것이다.
충청도는 백제 때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를 품에 안고 있고, 조선조 후반기엔 권력을 독점했던 畿湖(기호)세력의 축을 이룬 선비들을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지금도 노인들은 젊은이를 야단칠 때, 「주리(주뢰)틀 놈」, 「우라(오라)질 놈」이라는 욕을 자주 쓴다. 周牢(주뢰)는 두
다리를 한데 묶고 다리 사이에 두 개의 막대기를 끼워넣고 비트는 형벌이다. 오라는 죄인을 묶는 붉고 굵은 줄을 말한다.
栗谷(율곡) 李珥(이이)로부터 시작된 조선조 중기 주자학의 學脈(학맥)은 栗谷의 제자이자 조선 禮學(예학)의 鼻祖(비조)로 꼽히는 沙溪(사계) 金長生(김장생·충남 논산)과 그의 아들 愼獨齋(신독재) 金集(김집·충남 논산)으로 이어졌다. 沙溪와 愼獨齋의 제자가 조선 후반기를
지배한 노론의 영수 尤庵(우암) 宋時烈(송시열·충남 연기)이었다. 尤庵의 추종자와 그의 제자들이 대원군이 집권할 때까지 수백년 간 代를 이어 권력을 독점했다.
충청인들이 大義名分을 잘 따지는 것은 정권을 담당했던 兩班, 즉 선비로서 勤王(근왕·임금을 받드는 행위) 정신이 강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왕이 곧 국가였으니까, 지금 말로 하면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이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對日帝 독립운동사는 忠淸人의 항쟁사
그래서 평소엔 조용한 것 같지만 국가가 위태롭거나 國權(국권)이 유린당하는 상황을 맞으면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허다한 忠信, 烈士, 義人들이 배출된 것도 私利보다 名分을 더 앞세우는 이 지역 사람들의 성향 때문이다.
백제 말기의 成忠(성충), 興首(흥수), 階伯(계백) 등을 필두로, 艱難辛苦(간난신고) 끝에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金庾信 장군(충북 진천),
충주성 抗蒙(항몽)전쟁을 승리로 이끈 金允侯(김윤후) 장군, 쓰러져 가는 고려를 지탱해 보려다 李成桂(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한 「붉은 무덤」의 崔瑩(최영) 장군(충남 홍성), 不事二君(불사이군)을 실천한 고려 말의 大학자 李穡(이색) 선생(충남 서천), 사육신 成三問(성삼문) 선생(충남 홍성), 朴彭年 선생(대전)과 사육신에 버금가는 金文起(김문기) 선생(충북 영동),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성웅 李舜臣(이순신) 장군(충남 아산), 진주대첩의 주인공 진주목사 金時敏(김시민) 장군(충북
괴산), 병자호란 때 유일하게 청에 대항한 林慶業(임경업) 장군(충북
충주) 등이 충청인이다.
특히 일본의 침략이 시작된 19세기 후반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다른
어떤 지역보다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일어난 의병운동 초기, 일본군과 싸우다 홍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閔宗植(민종식) 선생(충남 청양),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해 73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대마도로 끌려갔으나, 敵國(적국)의 식량을 먹지 않겠다며 斷食(단식)
끝에 순국한 崔益鉉(최익현) 선생(충남 청양), 일본의 침탈에 항의하다
父子가 나란히 일본군에게 참살당한 李南珪(이남규) 선생(충남 서천),
헤이그 밀사사건의 李相卨(이상설) 선생(충북 진천), 평생을 항일운동으로 일관한 유학자 의병장 柳麟錫(유인석) 선생(충북 제천) 등은 비교적 勤王의식이 강했던 애국지사였다.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1개 사단을 무찌른 武裝(무장) 독립운동사의
금자탑 金佐鎭(김좌진) 장군(충남 홍성), 金佐鎭 장군을 도와 청산리
대첩을 이룩한 초대 국무총리 李範奭(이범석) 장군(충남 천안), 3·1
만세운동의 꽃 柳寬順(유관순) 열사(충남 천안), 3·1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孫秉熙(손병희) 선생(충북 청주), 끝까지 日帝(일제)에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韓龍雲(한용운) 선생(충남
홍성),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시라가와 대장 등을 폭살함으로써 蔣介石(장개석) 총통으로부터 『중국군 몇 개 사단이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는 칭송을 들은 尹奉吉(윤봉길) 의사(충남 예산), 항일 독립단체인 신간회 초대 회장과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한 李商在(이상재) 선생(충남 서천),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李東寧(이동녕) 선생(충남 천안), 꼿꼿한 선비정신의 표상이자, 민족주의 史學을 정립한 申采浩(신채호) 선생(충북 청주),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를 지내다 임시정부內에 內紛이 생기자 단식 끝에 순국한 申圭植(신규식) 선생(충북 청주) 등 꼽자면 한이 없다. 비록 공산주의자이긴 하지만 광복 전까지 일제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인 朴憲永(박헌영)과 洪命熹(홍명희)도 충남 예산, 충북 괴산 출신이다. 20세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는 충청인의 투쟁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同鄕人이라고 봐주는 것 없이
大義名分은 先公後私(선공후사)와 통한다. 先公後私의 경향이 어느
지역 사람들보다 강한 충청인들은 同鄕(동향)이라고 해서 뚜렷한 명분이 없는 한 무조건 봐주지 않는다. 예컨대 어느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잘 나가는 후배들을 돌봐 주고, 어느 사람들은 은근히 동향인끼리
뭉치지만, 충청도 사람들은 가까이에 있는 후배들을 돌봐주기는커녕
閑職(한직)으로 쫓아내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에게 오해를 살 우려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제3공화국 시절, 충남 출신 金鍾泌씨가 오랫동안 제2인자 자리에 있었지만, 『JP의 덕을 봤다』는 사람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오히려
『JP 때문에 피를 봤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가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던 중앙정보부장을 지냈고, 국무총리 두 번, 집권당의
대표 등을 역임했지만 「자기 사람」을 심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바
없다. 現 정부에 들어와 공동정부를 구성한 JP가 국무총리가 되어 총리실에 入城(입성)하며 달랑 혼자서 취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바지 사장」도 아니고 막강한 힘을 지닌 實勢(실세) 총리로서 쉽게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물론 과거에 「JP부대」라고 칭할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3공화국 시절, 그가 다음 大權(대권)에 가장 근접해 있을 때, 육사 8기 동기생, 서울사대 동창 등 JP 편에 섰던 3選 개헌 반대그룹이 있었다. 그러나, DJ나 YS같이 끈끈한 동지애로 뭉친 조직은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다는 그런 얘기다.
필자가 금융단 출입기자로 있을 때, 은행감독원 부원장으로 있던 朴鍾奭씨(현 한화그룹 부회장)에게서 들은 얘기다. 충남 보령 토박이인
朴씨는 충청인의 기질을 『동향인이라고 절대 봐주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다. 홍성고, 고려대 법과를 나온 그가 1960년 재무부에 들어가
1974년 막 서기관으로 승진, 이재3과장을 맡고 있을 때, 보령 출신 金龍煥씨가 재무부 장관으로 부임했다.
최근 한나라당에 입당한 金龍煥 의원은 정치인답지 않게 차갑기로 이름난 사람. 행동도 그렇고 말투도 무뚝뚝하다. 기자와의 약속도 바쁜
일이 있으면 사전 양해를 구하지 않고 파기해 버리는 그런 인물이다.
金龍煥씨는 취임한 지 얼마 안 돼 朴씨를 부르더니 『한국은행으로
나가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朴씨가 『고향 후배라고 봐주지는 못할
망정, 왜 쫓아내는 거냐』고 항의하자, 『남들에게 오해를 받기 쉽다』는 것이 그의 대꾸였다고 한다.
▶『동창회란 너무 잘 되면 안 됩니다』
충북 청원 출신으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閔耭植(민기식) 장군은 逸話(일화)를 많이 남긴 사람이다. 그가 30여년 전 초대 在京청주고동창회장으로 선출되어 메디컬센터 옆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클럽에서 첫
모임을 가졌을 때의 일이다. 閔장군은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창회란 너무 잘 되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만주, 일본 등지를 돌아다녀 봐서 아는데, 우리나라는 좁은 땅덩이예요. 손바닥만한 나라에서 이 고등학교, 저 고등학교로 갈라져서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동창회란 명부나 만들고 누가 어디에 있겠거니 하는 정도나 알면 되는 겁니다』
동창회장 취임사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너무 썰렁하기까지
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너무 멋진 말이 아닐 수 없다.
10ㆍ26 직후, 3金씨가 차기 대권을 노리고 열심히 뛰고 있을 무렵이다. 金鍾泌 공화당 총재가 충북 출신 노조지도자 200여명을 모아 놓고 모임을 가졌다. 참석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단상에 올라가 『앞으로
충청도 사람끼리 똘똘 뭉쳐 金鍾泌 총재를 대통령으로 밀어 주자』고
연설했다.
이때 동석했던 南載熙(남재희) 의원이 마이크를 빼앗더니 『金鍾泌
총재가 노조를 잘 이해하고 노선이 같으니까 지지하자고 하면 몰라도
충청도니까 밀어 주자는 것은 잘못이다』고 소리쳐 주위를 어색하게
하더라는 것이다. 南載熙씨는 충북 청주 사람이다. 그는 당시 공화당
공천으로 서울 강서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돼 노동청을 관할하는 국회 보사위 소속이었다.
현재 충청남도에서 고위직에 있는 某 간부는 같은 郡(군) 출신 선배가
충남 부지사로 부임해서 찾아가 인사하니까, 『앞으로 자신이 재직하는 동안, 아는 척하지 말라』고 경고하더라는 것이다. 남들에게 오해를 살 일은 하지 말자는 취지에서였겠지만 듣는 사람은 무척 섭섭했다는 것이다. 최근 충청북도 한 고위직을 놓고 두 사람이 경쟁을 했는데, 능력이 대등한데도 도지사와 동향이라는 이유로 한 사람이 탈락했다고 한다.
同鄕이라고 무조건 지지하지 않는 경향은 이번 10·25 補選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서울 구로을에 출마한 자민련 후보는 겨우 700여 표를 얻어 민주노동당 후보에게조차 뒤졌다. 이곳이 호남 출신 다음으로 충청도 출신이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지역임을 감안할 때, 他지역
출신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독특한 부분이다.
도리에 어긋나면 형제도 소용없다
同鄕 안 봐주기는 과거 大選, 總選에서도 웬만큼 나타난 바 있다. 16代 總選의 결과를 보자. 6개 선거구인 대전에서 JP의 자유민주연합은
절반인 3석밖에 얻지 못했다. 민주당이 2석, 한나라당이 1석이었다.
한나라당이 17석과 11석을 싹쓸이한 부산·대구, 민주당이 6석을 싹쓸이한 광주와 확연히 다른 점이다.
JP의 영향력이 비교적 크다는 충남에서도 11석 가운데 과반수인 6석을 건지는 데 그쳤고, 민주당이 4석이나 차지했다. 충북에서는 더욱
비참했다. 7석 중 한나라당이 3석으로 1위를 차지했고, 自民聯(자민련)은 2석으로 민주당과 공동 2위에 그쳤을 뿐이다.
이런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도리에 어긋날 때는 형제간이라도 소용없다. 대번에 비판의 칼날을 바짝 세운다. 그러니 학연, 지연에 얽매여 무조건 지지할 리가 없다. 沈大平 충남지사, 洪善基 대전시장, 李元鐘 충북지사 등 충청도 지역의 민선 道伯(도백)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중앙정부의 도움이 절실한 중요 사업을 시행하려 할 때, 중앙
정치권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同鄕의 유력한 실력자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주위에서 힘을 쓸 만한 사람도 『나 몰라라』하며
외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역사업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똘똘
뭉쳐서 나서는 他지역과 구별되는 점이다.
사귀기기는 어렵지만 사귀면 오래간다
과거 3~6공화국, 문민정부 등 영남 정권 시절, 영남 사람들은 선후배
간에 끌어 주고 당겨 주는 모습을 흔히 보여 왔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래서 「○○마피아」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였다. 「국민의 정부」라고 자칭한 現정권에서도 호남인들끼리 요직을 주고받는 人事獨占(인사독점) 현상이 전보다 심하면
심했지 못하지 않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충청도 정권이 들어설 경우, 종전같이 지나친 人事獨占으로 인한 폐해는 적을 것이라는 것이 충청인의 기질을 잘 아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동향인끼리 배척하는 相避(상피ㆍ특수관계인끼리 서로 피하는 것) 전통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학연, 지연에 비교적 얽매이지 않는 충청인의 특성은 지역발전을 저해하고 큰 인물을
키우지 못한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합리적 국정 운영과 지역감정
해소 차원에서 국민성으로 권장, 발전시켜야 할 장점이라 볼 수도 있다.
충청인들은 쉽게 속을 보이지는 않지만, 일단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면 許交(허교)를 하고 그 親交(친교) 관계가 오래간다. 許交를 하면서
출신 지역이나 성분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선지 충청도 출신은 어느
지역에 가서도 잘 어울리고 잘 뿌리를 내린다.
필자가 10월호 月刊朝鮮에도 쓴 바 있지만, 5共 말기인 1987년 6월부터 6共 초기인 1988년 7월까지 13개월 동안 光州에서 주재기자로 있을 때, 전남-광주의 주요 기관장 가운데 충청도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음을 확인했다. 전남 도지사, 광주직할시장, 광주지방검찰청장과 안기부(국정원 前身) 전남도지부장만 빼고, 전남 부지사, 광주부시장, 전남도경국장, 전남체신청장, 전남보훈청장, 보안부대장 등 공무원과
토지공사 전남지사장, 한전 전남지사장, 주택공사 전남지사장 등 정부 투자기관의 長들이 충청도 사람이었다.
그들은 「忠友會(충우회)」라는 모임을 결성,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을 정도였다. 충청도 사람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호남 출신의 공직자
숫자가 적다 보니까 어디서고 잘 어울리는 충청도 출신을 뽑아 보낸
결과였다.
앞에서 말한 朴鍾奭씨의 경우도 충청인 특유의 친화력으로 새로운 풍토에서 성공적으로 着根(착근)한 예로 꼽힌다. 한국은행 직원들은 엘리트 의식이 강하고 남에게 곁을 잘 주지 않는 배타적 집단으로 유명하다. 朴씨는 재무부에서 쫓겨나 텃세 심한 한국은행에서 잘 버텨, 이사, 은행감독원부원장, 국민은행장, 상업은행장을 거쳐 은행감독원장, 증권감독원장을 역임했고, 1995년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한화그룹에 영입돼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頂上에 오르면 내려와야 하지만…
JP가 출중한 역량이나 경륜, 풍부한 경험을 갖춘 인문적 교양인임에도 불구하고 3金 중 유일하게 大權을 차지하지 못한 것을 본인은 표가
적은 충청도 출신의 한계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JP는 『너도 옳고 너도 옳다』는 黃喜(황희)정승式의 전형적인 충청인 기질 때문에 길고 긴 40여 년의 정치생명을 이어오고 있다고 본다.
頂上에 오르면 언젠가는 내려와야 한다. 내려오지 않으려고 하면 非정상적인 「내려끌림」을 당한다. 李承晩 前 대통령과 朴正熙 前 대통령의 예가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목숨을 걸고」 12·12를 단행한 全斗煥 前 대통령 이래, 그의 후계자 盧泰愚 前 대통령, 수십년 동안 목숨을 건 민주화투쟁 끝에 정상에 오른 金泳三 前 대통령이 單任(단임) 끝에 하는 수 없이 頂上에서 내려와야 했다. 또 한 명의 민주투사 金大中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1년여 후면 그 좋다는 권좌에서 자퇴해야 한다.
하지만 8부 능선쯤 있으면 누구도 내려오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전쟁터에서도 8부 능선은 가장 안전한 지점으로 꼽힌다. 적에게 관측되지
않고 총알 맞을 위험도 없다. 그래서 戰時(전시) 행군요령 가운데 「8부능선을 택하라」는 지침이 있을 정도다.
JP는 1961년 5월16일 이후 지금까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꼭대기에는 올라가 보지 못했지만 권력의 8부 능선쯤에 서서 권력을 향유해
온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朴正熙 시대에는 중앙정보부장·당의장·국무총리 등을 역임했고, 現職(현직)에 있지 않을 때도 그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사실상 제2인자 노릇을 했다. 朴대통령
사망 후, 이론의 여지가 없이 즉각 공화당 총재로 선출된 것이 그런 정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5공화국 때는 일시적으로 핍박을 받았지만, 결국은 정치적으로 복권되어 공화당을 창당했고, 대통령 후보로 나왔으며, 盧泰愚 시절, 여소야대의 한 축을 이뤘다. 그러더니 3당 합당에 앞장 서서 민자당 최고위원·대표 최고위원으로 2인자 역할을 계속했으며, 金泳三 시대에는
신민주공화당을 창당, 충청지역 맹주로서 위치를 확고히 했다. 金大中 시대에도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공동정부의 실질적 제2인자로서 지난 3년여를 군림했다. 골프를 좋아하는 JP는 자신의 처지를 『항상
세컨드 샷만 쳤다』고 自嘲(자조)하지만, 그보다 더 해피한 사람이 어디 있었나 가만히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은 본인의 표현대로 「날개가 떨어진」 외로운 지경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그의 정치적 수명이 얼마나 더 지속할지 아무도
속단할 수 없다. 그가 어떻게 運身(운신)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5~6년
간 권력의 단맛을 더 볼 수도 있고, 1~2년으로 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李會昌 총재나 李仁濟 의원이 집권하면 동향인을 봐주지 않는 충청도 기질 때문에 종전과 다른 처지에 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JP는 金大中 대통령보다는 정치생명이 길 것으로 생각된다.
『40년 정치사의 진정한 勝者는 JP』
아무튼 그는 경상도 정권 시절, 전라도 정권 시대, 어느 정권과도 사이좋게 지내왔다. 어느 지역, 어디 출신과도 잘 어울리는 충청도 사람의
기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朴正熙 시대 이후, 지난 40년 간의 정치사에서 「진정한 勝者(승자)」는 JP』라고 하는 말이 수긍이 가기도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를 핍박하고 쫓아낸 사람치고 끝이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朴正熙 前 대통령이 시해당했고, 全斗煥 前 대통령은
감옥에 갔다 왔다. 金泳三 前 대통령은 IMF 사태를 맞아 정치적으로
식물인간이 되다시피했다. 그와 헤어진 金大中 대통령의 끝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JP와 결별 후, 10ㆍ25 補選 참패, 민주당 內紛, 민주당 총재직 사퇴 등 일련의 사태 등으로 벌써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를 괴롭히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 盧泰愚 전 대통령인데, 그도 감옥에 갔다오긴 했다. 특히 돈 문제 때문에 지나치게 폄하당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그는 후세에 再평가받을 인물이라고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는 재임 기간 CDMA 무선전화 상용화 기술을 개발했고,
경부고속전철, 인천국제공항, 서해안고속도로, 수도권 외곽순환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계획을 입안했다.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그의 후임자들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그의 시절은 좀 혼란스럽긴 했지만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충청도 말에 「용한 사람이 성내면 무섭다」는 속언이 있다. 평소에는 평범한 것 같지만, 한 번 화가 났다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누가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고 생각하면 「불뚝 성질」이 폭발한다.
1995년 6ㆍ27 지방선거 때, 「핫바지」 소리를 들은 충청도 사람들이
평소와 다르게 똘똘 뭉쳐 金鍾泌씨의 신민주공화당 돌풍을 일으킨 것은 그 때문이다. 자존심을 건드려 「몽니」를 부리게 한 결과다. 오래
갈 것 같던 DJP 연합이 林東源씨 해임을 둘러싸고 와해된 것도 JP의
자존심을 DJ가 살피지 않았던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JP에 대한 충청도의 지지도는 하향 추세
역사에 假定(가정)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만일 DJ가 JP의
말에 따라 林東源씨를 사임케 하고 똘똘 뭉쳐 補選을 치렀다면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본다. 최소한 한 석 정도는 건지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지금처럼 민주당이 內紛사태를 겪지
않았을 수도 있고, DJ의 총재직 사퇴 같은 최악의 수순을 밟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내년 지방선거와 16代 大選 결과를 예측하기란 어렵긴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현재의 충청도 民心(민심)을 읽어 보면 웬만큼
짐작할 수 있다. 충청도에서는 예전에 비해 JP의 인기가 많이 떨어졌다. 1995년 지방선거를 정점으로 매년 조금씩 자민련에 대한 기대치가 下向(하향)한 추세다. 충청도에서도 충남과 대전, 충북 순으로 자민련의 힘이 약해지는 양상을 띠고 있다.
선거란 규모가 작을수록 黨보다는 후보자의 인물 됨됨이가 우선한다.
예컨대 국회의원 선거보다는 지방선거, 대통령 선거보다는 국회의원
선거가 黨보다는 인물 위주로 치러진다는 얘기다. 자민련의 힘은 많이 약화됐지만, 개인을 보고 뽑는 경향이 농후한 지방선거의 경우, 사람만 잘 고른다면 자민련이 아직은 충남에서는 그런대로 善戰(선전)할 가능성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가능성이 대전이 충남보다 약하고, 충북이 대전보다는 약하다.
지역 자체의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자민련에 대한 지지도가 충남, 대전, 충북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충북의 경우는 한 자리수에 그치고
있을 정도다. 자민련이 한나라당의 5분의 1 수준이다. 이번에 자민련
소속 충북 지역 道의원들이 전원 탈당했다는 것도 앞으로 이 지역에서 지방선거가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점을 예고해 준다. 대전에서 일부 지역의 자민련 소속 市의원, 區의원, 기초단체장이 자민련을 탈당,
한나라당에 입당한다는 說이 나도는 것도 마찬가지다.
大選은 좀 다르다. 자민련에서 당선 가능성이 큰 인물이 입후보하지
않는 한, 대개 지금의 정치판세 비율대로 충청도 표가 갈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많은 충청인들은 JP가 출마할 경우, 대전-충남에서는 한나라당-자민련-민주당의 순서로, 출마하지 않을 경우, 한나라당-민주당의 순서대로 표가 나올 것으로 예측한다. 충북에서는 JP가 나오든 나오지 않든, 한나라당 지지도가 가장 높다.
모른다. 또 누군가가 충청인의 자존심을 건드려 충청도를 단결시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월간조선 200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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